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16화 (416/653)

지중해에 감도는 전운(3)

이후 블라디미르 2세는 다시금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오스만과 접한 남쪽은 물론이고 서쪽의 국경선에 군대를 결집했다.

이미 한 번 크게 당해 러시아라면 치를 떠는 폴란드와 도이치, 스웨덴은 물론이고 대북방전쟁이 끝난 뒤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 핀란드도 이 행보를 분노 혹은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동맹이었던 덴마크는 뒤통수를 한 번 맞은 이후 러시아와 손을 잡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정복전쟁 이후 한차례 숨을 돌린 지금의 러시아는 이전보다 강력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러시아의 남하는 분명히 예전보다는 시간상 적절했다.

장작은 러시아만 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열강들의 다툼은 마침내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문제는 전통적 경쟁 관계였던 프랑스―오스트리아의 세력 구도가 ‘동맹의 역전’으로 바뀌며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으로 나아간 것에서 유래했다.

두 나라의 공통적인 걸림돌은 도이치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였다.

도이치와 프랑스, 도이치와 오스트리아 간의 관계는 말해서 무엇하랴.

길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으르렁거리는 성질 나쁜 개들도 이거보단 사이가 더 좋을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관계도 여러 이유로 썩 좋지 못했다.

다만 이전까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그들대로 원수지간이었기에 이탈리아는 이리저리 외교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자국에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며 줄타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상황은 부르봉 이후 외젠이 공화국 통령이 된 이후에는 그 상황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악연과는 달리, 외젠은 합스부르크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혁명군 우두머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혁명의 불씨도 현실을 디디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게다가 외젠은 사보이아 가문.

귀족과 왕정을 없애자 하고 들고 일어난 것치고는 외젠은 줄곧 자신의 가문을 다시금 부흥시키길 바라 왔다.

그것이 개인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정계에 친위세력이 필요해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사보이아 가문은 다시금 일어섰다.

하지만 외젠이 일으켜 세운 사보이아 가문은 적당한 욕심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가주가 외젠인데, 그 정도 욕심은 부려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기존까지 프―이 국경선을 확약했던 로테르담 체제를 뒤엎고 과거 사보이아 가문의 영토였지만 현재는 명백하게 이탈리아의 영토이기도 한 피에몬테 지방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로테르담 체제는 앙시엥 레짐 때 만들어진 체제. 프랑스의 국익과 합치되지 않으니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

당연히 이탈리아의 보르자 가문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왕과 귀족들의 목을 실컷 잘라낸 이후엔 그 혈통적 권한에 근거하여 아국의 적법한 영토를 요구하는가? 뻔뻔하구나.”

프랑스는 막강했다.

제아무리 빚더미에 앉아 있다고 해도, 비옥한 대지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산출과 많은 인구는 프랑스의 대육군만큼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 또한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마와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팔레르모 등의 도시가 하나의 깃발에 모인 지도 벌써 이백 년.

이탈리아는 이미 예전부터 진작 산업적, 상업적 역량이 손꼽히는 나라였다.

동로마 멸망 이후, 진주에 가지 않았던 유민들과 그들 내의 지성 덕에 르네상스는 부흥했다.

이들은 초대 왕의 동생인 루크레치아를 시중에게 보냈을 정도로 고려와의 관계에 신경을 썼으며 그 이후로도 카나리를 통해 줄곧 무역을 해온 나라였다.

기술의 발달 속도도 빨랐고, 실제로도 자체적으로 적당한 크기의 군함을 설계하여 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제철 기법도 발전해 있었으며, 후장식 강철 대포도 유럽에서 두 번째로 빨리 도입한 나라였고 주요 도시 간에는 철도도 이미 깔려 있었다.

이들도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보르네오섬, 스리랑카, 그리고 강화에게 빼앗기기 전까진 해남도 등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명의 몰락 전까지 지나에서 상당한 수준의 무역흑자를 보기도 했다.

사해신용평가사의 평가 결과도 이를 반영했다.

이탈리아의 국가신뢰도는 매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보다 위에 있었다.

군대의 역량은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비해 약간 밀릴지도 몰랐다.

외젠의 명성은 허투루 쓰여진 것이 절대 아니었으니.

그러나, 죽자고 버티면 프랑스는 그들 머리 위에 있는 날카로운 칼날부터 신경을 써야 할 터다.

― 빚부터 갚아야 하지 않을까?

보르자의 왕이 빈정거리며 보낸 서신이 프랑스인들의 난처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외젠의 프랑스마저도 기존의 아라곤과 카스티야와 했던 전쟁만큼 이탈리아를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는지 사보이아의 구성원들을 한바탕 질책하는 선으로 이 클레임을 접어두기로 했다.

역량이 있었으면, 클로드와 그 잔당들이 도피한 나바르부터 쳤을 것이다.

이탈리아 현지 민심도 별로 좋지가 않았다.

피에몬테의 사람들도 뜬금없는 프랑스의 야욕에 학을 떼었다.

빚더미에 오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

있는 애국심은 증폭되고 없던 애국심도 생겨야 할 판이다.

프랑스로서도 가뜩이나 네덜란드와 도이치가 신경 쓰이는데 괜히 이탈리아를 건드렸다가 이들이 사르데냐―코르시카 전쟁의 앙금을 풀고 아라곤과 동맹을 맺어 좌우로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골치가 아팠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쨌든 온갖 일이 일어나는 것이 유럽의 외교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그러했듯 이탈리아도 양면으로 위태로웠다.

그들도 서쪽뿐만 아니라 동쪽의 근심도 가지고 있었다.

동쪽의 갈등은 서쪽 프랑스와의 마찰보다도 훨씬 심했다.

설립 이후부터 쭉 내려온 신성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간섭은 이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저 오스트리아 제국에 불과해진 나라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물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피한 적절한 시기에 통일을 완수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상전처럼 행세하는 오스트리아의 행동은 이탈리아로서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도 이제는 옛날 말인데, 그저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겉멋만 들어서 과거의 영광에 심취해 있구나.”

이들의 갈등은 북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발생했다.

북이탈리아의 동쪽 방면은 보르자 가문이 주도한 이탈리아의 초기 통일 과정에서 다소 등한시되었다.

이쪽 방면은 이탈리아반도에 속하긴 했지만 이탈리아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쪽까지 가기도 전에, 베로나와 파도바 일대는 이미 베네치아의 영토였으며 이탈리아는 페라라나 만토바 근처까지만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 더 나아가진 못했다.

하지만 생각을 자꾸 해봐도, 이곳이 자신들의 영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영토분쟁지역이 만약 산 하나 없는 평지였다면 그 영유권을 나누는 것이 실로 혼미하겠지만, 포르테노네와 우디네, 고리치아와 트리에스테 일대는 알프스라는 천연 방벽이 지역을 나누어준 덕택에 이탈리아로서는 부인할 수 없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멀쩡할 때는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할 만했지만, 엄연히 이탈리아인들의 적법한 왕국이 탄생한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는가?

보르자 가문의 후손이 거듭하여 내려올수록, 이곳은 이탈리아 왕가는 물론이고 한창 이탈리아 통일주의에 박수를 치고 있는 신민들에겐 미수복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언젠가는 마땅히 탈환해야 하는 곳.

그리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왔다.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이라는 희대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 신성 로마 제국은 전례 없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탈리아는 이들에게 닥친 거대한 혼란을 이용하여 북동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예전에 이곳을 통치했지만 합스부르크의 비열한 모략에 의해 영지도 빼앗겨 나돌게 된 고리치아 백작, 마인하딘 가문의 방계는 진작부터 보르자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이들은 드디어 이 적법한 권리를 이용했다.

게다가 이 미수복지역엔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기에 이탈리아는 지역 내부의 반란을 조장했으며, 느슨한 영주의 집합체에 불과한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을 꼬드겨 지위를 보장하는 조건을 전제로 이탈리아의 품에 안기도록 획책했다.

크라인 공국은 서쪽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이스트리아 변경백국은 이탈리아로 귀순했으며 다시금 제 지위를 찾은 마인하딘의 고리치아―그라디스카 제후백국은 이탈리아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다.

실로 눈 뜨고 코 베일 만큼 빠른 일 처리.

하지만 합스부르크는 이 같은 행동에 화조차 내지 못했다.

이탈리아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적지 않은 땅들이 순식간에 깃발을 갈아 끼웠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명칭 자체도 버려야 할 만큼 크게 국력과 자존심이 박살 난 상태. 이탈리아와의 전면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귀족 배신자는 나중에 처단하면 그만이지만, 바이에른 빨갱이들은 처단해도 또 나오는 놈들이다.

― 어? 이게 되네?

아마 보르자 가문은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통일 이탈리아의 열망이 손에 잡힐 듯하고, 국민들의 지지도 열화와 같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이 과업을 계속 이어나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 *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의 최종적인 고토 수복의 대상은 바로 베네치아, 정확히 말하자면 베네치아가 점유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해안가였다.

베네치아와 이탈리아는 상당히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언뜻 보면 민족적으로도 동질성이 꽤 있다고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는 오직 외부인의 시선.

베네토인들은 자신들이 현재의 내륙인들, 이탈리아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서로마 멸망 이후 이탈리아는 더 이상 라틴인들의 나라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베네치아가 건국할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사실상 6세기부터 게르만의 분파인 랑고바르드(롬바르드)족의 나라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건국하고 시간이 조금 뒤의 이야기라지만 이탈리아 남부도 11세기 말부터 노르만족의 침입 덕에 잉글랜드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물론 이런 외지인들은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천천히 동화되었지만, 베네토인들이 보기엔 그저 노란 머리 야만인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꼴이 분명했다.

베네토인들은 자신들을 이런 랑고바르드인들로부터 피해 달아난 ‘진정한 로마 라틴인’들로 여겼다.

이들은 처음에는 토르첼로섬 등지로 피신해 살았다.

그러나 시대의 혼란 속에 이곳으로 피난해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이들은 곧 땅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들은 한동안 누가 먼저 왔냐며 갈등하다가, 마침내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잘한 섬들 주변 석호의 늪지대를 간척하여 이곳에 도시를 세운다는 실로 정신 나간 계획을.

사실 간척 사업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이걸 간척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보다 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땅이 말랑한 습지대니 아래의 단단한 지반까지 닿을 수 있는 긴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아 넣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거대한 수상 도시를 만들자는 생각은 실로 미치광이나 할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을 보란 듯이 성공해냈고, 거의 아무것도 없었던 석호에 오랫동안 위대하게 빛날 도시를 세웠다.

그것까지는 모두가 박수를 쳐줄 일이 분명했다.

이탈리아에 들어선 이민족 왕국들이 흥했다 쇠하고, 마침내 도시국가 체제가 들어설 때까지 베네치아는 흥성했으니 이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순수성 집착은 이후에 더 커졌다.

이들은 도시가 만들어진 후부터 단 한 번도 외지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으며, 오로지 동로마의 봉신국을 자청하고 있었다.

동로마가 몰락하여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부터는 그 공백을 이용해 아드리아해를 주름잡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회자될 희대의 배신, 즉 4차 십자군을 통해 예전 자신들의 주군이자 종주국이었던 동로마에게 비수를 꽂아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피를 마신 베네치아는 그 뒤부터 놀랄 정도로 융성했다.

반짝 빛나고 말았던 오스만도,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제노바나 아라곤인들도 베네치아의 역량에는 한 수를 접어주어야 했다.

특히나, 이들이 해상십자군이라는 희대의 멍청한 짓을 하며 아직 남려에 박혀 있던 고려의 성질을 돋우고 있을 때, 베네치아는 다시금 역사에 기록될 기행을 다시 한번 행했다.

이베리아인들을 도와주는 대신, 튀니스를 쳐서 그곳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당대의 해상패권국으로 슬슬 떠오르는 고려와의 관계도 해치지 않는 업적을 이루어낸 이들은 이제는 좁아터진 베네치아 도시뿐만 아니라 튀니스라는 거대항구를 손에 넣음으로써 과거와는 완벽히 달라질 준비를 마쳤다.

[작가의 말]

내일 정상영업 합니다.

오늘 자는 과거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베네치아 갈등을 보시기 위해선 최근 이탈리아의 일이 반영된 유럽 지도 말고 체사레가 막 통일한 1500년도 유럽의 지도(아마도 198화 그라나다)를 보시는 것이 더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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