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00화 (400/653)

척사충의군 운동(2)

‘어머니, 불초 소자는 올해 한가위엔 뵈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려 대사의 그와 같은 강경한 말은 졸지에 다른 예맥한계 대사들의 출구조차 봉쇄해 버렸다.

물론 아직도 제안은 유효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고려와 같이 뜻을 합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자신의 안위 따위보다는 훨씬 더 큰 손해였다.

명나라 관리도 고려의 태도에 당황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여전히 오만불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대충 살 구멍을 열어주면 이들이 모두 경사에서 빠져나가리라고 기대했을 터.

하지만 명 조정은 고려의 입장을 완벽히 간과하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더욱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자고로 국제법이라 하면, 고려가 세계의 각 나라들에게 권하는 일종의 약속과 같았다.

세계 외교사를 바꾼 몇 대 조약을 꼽아보자면, 오르베텔로 조약과 취리히 조약, 카디스 조약과 셀림브리아 조약은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려는 이 모든 조약에서 중요한 일원, 혹은 중재자의 역할을 맡았다.

이런 외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공관외교니, 국제외교니 하는 것들을 구축한 것도, 해상에서의 구조와 구난에 대한 세부 사항을 만든 것도 고려였다.

포로에 대한 대우와 부상자에 대한 인도적 처사 등의 개념을 지금 정립시키려 하는 것도 고려였다.

국제법의 수호자.

고려의 우방국들은 이러한 질서를 구축하려는 고려의 노력을 몹시 기꺼운 얼굴로 바라보았으며, 설령 고려를 싫어하여 규칙에 집착하는 고지식한 놈들이니 뭐니 뒤에서 욕을 하는 나라들이라 해도 이 점만큼은 상당히 존중하고 있었다.

고려도 국가적 신의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그들의 찬란한 경제구조부터 먼저 흔들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이름으로 한번 내뱉은 약속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고려가 이같이 무도한 행위를 그냥 넘어갈 수 있는가?

만약 고려가 지금 당장 경사를 떠난다 하면, 비록 외교관들과 경사에 있는 일부 고려인들의 목숨은 구원받을 수 있을지언정 국가적 위신은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고려 대사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도, 그는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하나 되어 맞섭시다. 조금만 버티면 될 겁니다.”

하지만 주재무관과 함께 대사관의 병력들을 지휘하는 고려 대사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이 사령관이 제때 도착하기를….’

합비를 넘어 남왕이 도망친 형주의 잔당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향하고 있었던 이윤진이 빠르게 도착한다면 엿새 내에 경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약 명의 다른 군대에 발목이 잡힌다 하더라도, 경사의 변고를 들은 탐라나 개성, 마긴다나오에 있는 고려의 태평양함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함대가 군함이 통행하기에 충분히 넓은 장강을 장악한다면, 고려는 말 그대로 강 위에서 함포를 이곳저곳에 쏘아댈 수 있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명 조정에도 일말의 이성이 남아있기를.

* * *

척화파가 장악한 명 조정도 상당히 시끄러웠다.

신나게 명의 땅을 침탈한 오랑캐에게 선전포고를 때린 것은 좋은데, 그 뒷감당은 대체 누가 할 것인가.

“동이까지 도발한 것은 너무 성급했소.”

누구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지금 외세를 두둔하는 게요?”

“무창도 불탔습니다, 합비와 장사도 멀쩡하지가 않아요. 백성들은 시름에 빠져 있습니다. 당장 그곳에 돌림병이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상황인데 정녕 동이들과의 전면전을 할 생각이시오? 양이들부터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외다!”

척화파도 신중론과 강경론으로 갈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우물 안에 처박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강경론자들은 대명과 한족의 위대한 힘으로 모든 외세를 벌레 쫓아내듯 단번에 내칠 수 있다 믿었지만, 신중론은 적어도 양이들을 제외한 동이들에 대해선 유연한 외교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북군이 큰 타격을 입은 지금, 조선이 이 일을 빌미로 봉명관을 넘는다면 명은 아편이나 무창대학살 같은 정도가 아니라 하북 자체를 외세에 빼앗기고 말 것이었다.

공세의 입장이긴 했지만 명은 불과 백여 년 전에 조선에게 이미 패배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고려?

말해 무엇 하랴.

고려를 건드리면 대명의 경사는 강화의 옛 조정, 북왜의 에도가 불탄 것마냥 잿더미가 될 것이었다.

제아무리 해안 포대가 장강에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황금함대가 장착한 최신식 함포의 맞상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조정이 대사관에 대한 위협을 거두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명의 체면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동황비가 제아무리 태평천국과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이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정도 경사에 이렇게 많은 태평천국의 무리들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다른 태평천국 교도들이 죽어갈 땐 침묵했었던 이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세상이 열린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이후부턴 앞장서서 그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척화파 사이에서도 지금 이 도적 무리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지 회의감을 느끼는 자들이 많았다.

조정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패배했더라도 여전히 명 제일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서기효조차도 동황비의 그러한 결단에 심히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고 있더랬다.

명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폭도들을 지켜봤다.

“…저들이 조금 더 절박해질 때까지 명군은 대기한다.”

목숨이 아깝다면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아들이겠지.

조정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래도 책임을 면하기 위해 명군을 투입하지는 않는 정도에 불과했다.

* * *

외국인 거리는 스산했다.

이미 먼저 빠르게 대피하여 대사관 거리로 간 인원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서둘러 대피하느라 자국민 보호엔 소홀했던 3개국의 일부 사람들이 남아있긴 했으니, 이곳엔 제일 먼저 불길이 번져 나갔다.

“너희들이 저지른 죄, 너희들의 목숨으로 갚아라!”

무창대학살에 눈이 돌아간 폭도들은 오랑캐들에게 똑같이 그 업보를 갚아주겠다며 살육을 시작했다.

남아있던 그 누구도 ‘쉽게’ 죽지는 못했다.

이곳에는 차마 대피하지 못한 고려인 한 명이 있기도 했다.

개성신보의 기자인 그는, 3개국군이 자행한 무창대학살에 대한 사진을 인화하는, 길고 지루하지만 중요한 작업을 하느라 대사관의 강제 대피 요청, 아니 명령에도 몰래 불응하여 이곳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용기 있는 기자라 하더라도, 죽음은 살아있는 자로서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험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기자는 사진기로 바깥에 돌아가는 이 참상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 쿵쿵쿵

그가 있는 곳은 좁은 부지에 맞게 설계된 3층 주택.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곳까지 적들이 들이친 것일까.

기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박 아저씨! 접니다!”

다행이었다.

박 기자는 그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와준 젊은 명나라 청년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살육과 복수에 미쳐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 거리에 밀접하게 살고 있는 명인들은 외국인과 교류하며 살아갔고, 이들 중에는 외국인들과 친분을 나눈 사이도 있었다.

이 청년과 기자처럼.

“이… 이것들만 챙기고.”

“그럴 시간이 없어요! 사교 놈들이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단 말이에요!”

박 기자는 청년의 안내를 받아 내지인들만 아는 통로로 외국인 거리를 빠져나가는 와중에 유럽인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어느 한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장을 위해 명인들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기자와는 달리, 이들은 너무나 이질적인 외모 덕에 그러한 위장조차 통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힌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길을 재촉하려던 기자의 눈에 저 무리들이 향하는 목적지로 보이는 곳에 있는 큰 무쇠솥이 들어왔다.

“저… 저들이 저자들에게 뭘 하려는 거지?”

“물에 넣고 삶아 죽이겠죠.”

청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기자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깐만 멈추자. 사진은 찍지 못하더라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겠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요!”

그러나 기자의 고집은 완강했다.

“나는 이 사실을 고려의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이야!”

하지만 기다림 끝에 본 마지막 광경은 정말로 좋지 못했다.

폭도들이 마침내 유럽인들을 무참히 유린하고, 그 최후를 솥에 넣어 삶거나 혹은 불에 구워버리는 것을 확인한 박 기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풀썩 주저앉아 먹지도 못했던 위장 속 내용물들을 게워내야만 했다.

― 우욱

“도대체 어찌 이런 일들이….”

무창의 참사를 찍어 고려에 고발할 생각이었던 그는, 이제는 태평천국의 만행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저들이 지금 저 시신들을 가지고 하는 일을 본 뒤에는 더더욱.

“저들이 정녕 아즈텍이란 말인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원한에 사무쳐 있다면 정말 어찌어찌 납득이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고금에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금 나 열강이오, 유세를 떠는 나라들도 한때는 극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이 폭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식인 행위는 너무나, 너무나….

“으음?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청년이 가까스로 헛구역질을 하는 박 기자의 입을 틀어막는 데 성공했고, 갸웃거리며 좁은 골목을 살펴보던 사내는 이윽고 다시 그들 무리로 돌아갔다.

이후 둘은 폭도들의 손길이 그들에 미치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한동안 그 충격은 기자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지고야 말았다.

“우리 집으로 모실게요.”

“아니다, 아니야. 자칫하면 너희들도 피해 볼 수 있다. 폭도 무리가 다른 무고한 경사의 사람들을 해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오랑캐와 어울렸다는 누명을 쓴다면, 이 청년은 물론이고 청년의 가족까지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대사관까지만 가면 안전할 것이다. 그럴 거야.”

그들이 도착한 대사관 거리는 이미 여러 장애물들로 방벽이 높게 쳐져 있었다.

건물의 옥상엔 다혈포와 제사총이, 창문은 총안구마냥 총구가 튀어나와 있었다.

전운이 감도는 거리의 입구에서 기자와 청년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때마침 외국인 거리로 향했던 폭도들이 아직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해소하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대사관 거리에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냐!”

“개성신보 기자입니다!”

“빨리 들어오십시오! 그곳에 계속 서 계시면 위험합니다!”

* * *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조정만이 독식하게 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엔 필히 팽당할 것입니다.”

동왕 진사당의 건의로 경사와 그 근처에 있는 교도들을 책동시켜 일을 저지른 태평천국은 명 조정이 거듭하여 외세와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선택을 내리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래야 그들이 사니까.

일단은 장사에서 살아남긴 했는데, 그들은 아직까지 약속된 것들을 받지는 못했다.

관수경은 아직도 태사니 하는 직함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고, 다른 교도들도 명이 직접 그들을 공인하여 더 이상의 핍박을 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저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죽여라!”

마침내 이들이 대사관 거리에 공격을 시작했다.

더 시간을 끌면 좋을 거 하나 없기에, 그 전에 각국 대사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대사를 제외한 나머지 놈들은 마음대로 하거라!”

무창에서 당한 것들에 아직도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는 폭도들이 물밀듯이 거리로 진입했다.

이들의 울분을 해소하기엔 외국인 거리의 학살은 너무나도 불충분했다.

― 타타타타

그러나 요란하게 진입한 폭도들은, 이미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다혈포와 제사총 세례를 맞고 픽픽 쓰러졌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고려 덕에 하나로 똘똘 뭉친 상태였다.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탈출하려는 사람이 없어지자, 모두가 불의에 맞서기로 결의를 다졌다.

전 세계와 전쟁을 하려는 태평천국의 의지조차 이곳을 쉽게 넘을 수 있진 못했다.

심지어 각국 열강들은 대사관 거리를 방어하는 와중에도 은연중에 경쟁 비스무리한 것들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잘 싸우는 나라는 의외로 고려가 아니었다.

“이치들은 이렇게는 정말 잘 싸우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혁명을 통해 풍부한 시가전 경험을 확보한 프랑스군들은 온갖 가구들과 잡동사니들로 대사관 거리 이곳저곳에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당사자였으며, 이들은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적은 수로 많은 수의 적병들을 도살했다.

그 전술은 고려군조차도 능히 배울 만한 것들이었다.

반면 이런 시가전 경험보다는 총기병으로 넓은 대지를 휘젓는 데 능통한 옥저군 같은 자들은 꽤 고생을 해야 했다.

그들이 맡은 방면은 약간 한적했음에도 몇 번 뚫릴 뻔한 아찔한 상황도 펼쳐졌다.

― 끄아악!

옥저군 병사 한 명이 적이 던진 죽창에 맞고 쓰러졌다. 나라동훈이 재빨리 팔을 뻗어 쓰러진 자가 장애물 너머로 고꾸라지는 것을 막았지만, 그가 눈을 부릅뜨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단지 눈을 감겨줄 수밖에 없었다.

‘가까웠다, 자칫하면 이번엔 나도 죽을 뻔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곳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시신을 잡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이 화살은 자신의 흉부에 정확히 박혔을 것이다.

물론 옥저의 주재무관은 이런 와중에도 동훈이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을 원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동훈은 무려 대계를 위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서황비고 자신이고 다 같이 이곳에서 죽게 된 처지에서 멍하니 손가락만 빨다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마침내 이곳에 나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네가 정신이 아예 나가버린 모양이구나.’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장신구에 입을 맞춘 동훈은 다시금 기병총을 장전하고는 적에게 쏴 대었다.

“버텨라! 버텨야 한다!”

[작가의 말]

400화는 세부 사항 수정 문제로 토요일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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