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명멸양
나라의 차이란 이런 사소한 것부터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지도층이란,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없었다.
고려는 이런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축음기뿐만 아니라 사진기도, 그리고 전기와 전구라는 것들도.
당장의 대신들은 고려의 총이니, 대포니, 함선이니 이런 것들을 경계하고 부러워할 뿐이지만 서황비는 이런 사소한 기물들조차 나라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 느꼈다.
‘그 생각은 그만하자. 내가 뭘 할 수도 없잖아.’
서황비는 축음기를 들었다.
지금같은 상황속에선 이런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고려의 악공들이 둘도 없이 빼어나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았다.
대우도 천지차이라, 명조 악공들이 천하게 취급당하는 것에 비해 고려의 악공들은 떡 벌어지는 대접을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통적 가치관에 묶여 있던 서황비로서는 그런 대접이 이전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음악을 들으니 어쩌면 그런 신분제의 동요가 도리어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근원이 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채선도의 3번 교향곡인가요?”
막연히 축음기의 나팔에서 나오는 선율에 귀를 기울이던 서황비가 그렇게 입을 뗐을 때, 고려의 대사는 나름대로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고려 음악에까지 조예가 있으신줄은 몰랐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요. 단순히 우리 악공들이 익숙하지도 않은 악기를 들고 흉내만 내던 것을 들었을 뿐. 지금에 와서야 제대로 듣게 되었네요.”
“이조차도 사실 녹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의 선율을 완벽히 담아내긴 모자라지요. 언젠가는 전하께서 예당에 직접 내왕하셔서 직접 들어보실 기회가 있으시면 좋겠군요.”
고려 대사는 참으로 자신의 직무에 정통하여 그녀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그러나 서황비는 씁쓸한 웃음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 ♩♪
지금 들리는 교향곡은 창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사에서조차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채선도의 교향곡 3번 '부름',
마치 시대의 부름을 받는 위대한 위인들이 느꼈을 그러한 비장하고 엄숙한 선율이 느껴졌다.
상념에 빠진 서황비를 바라보던 고려 대사가 잠시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보더니, 이윽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곤 밖으로 떠났다.
녹음된 원통은 그렇게 길진 않았다.
꽤나 긴 교향곡을 전부 다 담기에는 무리라 오로지 곡의 일부분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축음기의 재생이 끝나버린 후에도, 서황비는 마냥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동훈은 직접 축음기를 조작하기로 했다.
채선도의 교향곡은 대체로 그 특유의 고전적 비장미와 웅장함이 느껴지는 곡이다.
듣기에는 좋지만, 곡의 성격상 지금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는커녕 도리어 그 우울함을 증폭시키는 것 같아 동훈은 다른 원통을 집어 들었다.
― 류인호 찰현협주 다장조
처음 고려의 음악계는 음악황제 해광에 의해 관에서 주도하여 집대성되었기에 관형(官形)파라 불렀다.
건반악기와 기타 여러 가지 새로운 악기들이 창조되었지만, 음악의 성격은 주로 웅장함이나 비장함, 결의와 충정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반면, 예당의 건립 이후 가극과 희곡들이 인기를 얻은 뒤에는 그 풍조가 많이 바뀌었다.
가극에 넣는 곡들을 쓰던 후대의 작곡가들은 기존의 딱딱하고 엄격한 관형파적 흐름에 반발하여 인간 본연의 서정성을 강조했고, 그 이후로도 그러한 곡들은 인기가 많아져 교향곡과 합주곡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 서정(敍情)파라 했다.
관형파의 거장 채선도보다는 확실히 서정파의 거장 류인호의 음악이 나을 것이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밝고 명랑한 류인호의 변주곡, '아름다운 해변과 따사로운 햇살'이 울려퍼졌다.
사람 자체가 재치 있는 작곡가의 성격이 그대로 담겨있는 찰연협주가, 드디어 서황비의 얼굴에서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즐거운 노래네요.”
“한 곡 추시겠습니까?”
동훈은 자신이 직접 말하는 순간에도, 그딴 말을 지껄였는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나름대로는 고심하고 있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했던 것인데, 듣는 입장에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흘려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서황비도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정말 독특한 사람이군요?”
그제서야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전투에서 얻은 상처보다 지금의 멍청함이 더 속이 쓰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과는 달리 손을 내밀었다.
“이끌어 주세요.”
어려운 일이었다.
장교가 춤을 알면 얼마나 알겠고, 특히 옥저인이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려류는 빠르게 솔빈에 전파되긴 하지만, 애초에 이건 려류가 아니라 유럽풍이기도 했다.
그래도 시류에 밝은 동기가 여자 꼬실 때를 대비하여 익혀두라는 말을 해놨기에, 그는 몇 번 사람들과 춤을 춰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누구를 가르칠 순 없었다.
서황비도 그걸 알았다.
허나 말과 행동의 그 어색한 간극이 도리어 진심을 담고 있었기에 그녀는 꽤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발이 밟혀도.
황비는 황제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온전히 그 사랑을 독식할 순 없었다.
게다가 주동휘는 남에게 뭘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지, 주는 것을 즐기진 않았다.
성격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그녀가 아들 주문호를 출산한 나이가 불과 열여섯.
그러나 그 이후 그녀의 궁정생활도 사실상 후계 문제를 정하는 등의 암투극으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아직 서른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이미 감정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렇기에 도리어 이런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어수룩한 젊은 장교 하나는 물론이고, 온갖 궁정의 풍파를 헤쳐나온 서황비조차도 절제할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빠져들어가고야 말았다.
* * *
그날 그때를 기점으로 한낱 옥저군 장교와 무려 명의 서황비 간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 더 내밀해졌으며 조금 더 친밀해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들 사이의 관계를 숨긴다 하더라도, 당연히 주변에서 그와 그녀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대사관은 그렇게 큰 건물이 아니었으며 일하고 있는 직원들 중 많은 수는 사실상 옥저 조정이 엄선한 첩보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장에 나설 땐 더없이 용맹하지만, 그래도 일개 정황기 장교에 불과한 나라동훈의 일거수일투족은 상부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그의 직속 상관, 이윤진이 먼저 그의 이상을 발견하여 한바탕 꾸지람을 내뱉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예맥한 및 강화의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기에 경사에 남겨둔 부하 한 명의 상태까진 알 겨를이 없었다.
대신 주명 옥저 대사관에 있는 주재무관이 그를 호출했다.
정령 계급이고 전투에 관한 직무도 아니지만 최근 민감한 시대 상황을 고려했는지 상부에서도 꽤 전도유망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배정했다 들었었다.
설상가상으로 정황기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양황기 출신의 장교라고도 했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었는지 안경을 쓰고 있는 딱딱해보이는 중년 장교가 대사관 지하에 있는 차가운 취조실에서 그와 독대했다.
“귀관이 명의 서황비와 정서적으로 밀접해졌다는 소리가 들리는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나라동훈은 이실직고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었다.
정직하게 나가는 것이 그의 성미에도 맞았고, 그나마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터.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견책과 근신 정도로 끝날 일 같지가 않았다.
한 나라의 황후와 결부된 일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무책임하고, 멍청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지만, 지금 와서 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주재무관의 입에선 사뭇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라면 귀관의 행위에 대한 징계를 해야 하겠지.”
본래라면?
“허나 조정에서는 귀관이 그대로 서황비를 경호하는 임무를 유지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귀관은 이제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더욱 서황비와 가까워져, 그녀가 귀관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도록 하라.”
“진심이십니까?”
“지금 이 자리가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우스워 보이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도를 잘 지키리라고 믿는다. 그녀는 일국의 황비이자, 나중에는 명의 태후가 될 사람이야. 귀관이 섣부르게 행동하여 책잡힐 여지를 만든다면 좋지 않겠지.”
주재무관이 무언가 작은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귀관의 작전에 쓸 물건이다. 직관적…으로 생겼으니 뜯어보면 어떻게 쓸지는 바로 알 것이다.”
이 무슨.
동훈은 상자에 적힌 단어를 보고 표정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리 고무가 이제 많이 생산되어 시중에 잘 보이게 되었더라도 아직도 이런 것은 구하기 힘든 축에 속했다.
돈 걱정 없고, 다른 걱정이 많은 상류층이나 사용할 터.
얼이 빠진 채 그것을 바라보던 동훈의 귓가에 주재무관의 딱딱한 말은 계속 이어졌다.
“또한 그녀의 아들에 대한 친밀감도 형성해 놔라. 우리가 태후에게 정치권력을 실어주겠지만, 그녀의 권력도 결국은 그녀의 아들에게서 나오니 이를 명심하길 바란다.”
다 들었으면 나가 봐.
동훈은 축객령이 있을 때까지 멍하니 있다, 마침내 눈총을 인지하고는 피임낭이라 쓰여진 상자를 챙기고 경례를 한 뒤 머뭇거리며 나갔다.
* * *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의 3개국군의 진군은 마침내 그 목적지, 무창에 도달하고 멈추었다.
서기효를 물리치고 의기양양해져 있는 남왕군은 이번에도 충분히 상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부딪힌 군대들은 한낱 하북군 따위와는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결과는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제대로 된 열강의 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지리도 좋았고, 사기도 좋았고, 민심도 그들의 편이었지만, 너무나 현격히 벌어진 기술적 격차를 당해낼 수 없었다.
괜찮은 유럽의 소총을 꼽아보라면 빠지지 않을 프랑스의 생테티엔 소총과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소총을 쏘아대는 열강군은 남왕 팔천세 하며 격렬히 저항하는 태평천국군을 손쉽게 도살했다.
3개국군 입장에서는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다.
“남왕 전하, 도저히 버틸 수가 없습니다! 훗날을 도모하소서!”
“모두 후퇴한다!”
남왕 곽인귀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창을 버리고 형주로 도망쳐야만 했다.
반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아귀들의 손에 떨어진 무창은 지금까지 그 어떤 마을이 겪었던 수난보다도 훨씬 더 큰 수난을 받았다.
지금까지 3개국군이 자행한 짓들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무창대학살'이라는 사건이었다.
무창은 명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그 밑의 한양과 한구와 묶어 이 도시권을 무한이라 부르기도 했다.
경사를 수도로 두고 있는 명대에 들어, 중원의 관심은 기존 중화 문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황하에서 아래쪽인 장강으로 이동했다.
황하의 심한 기복도 기복이지만, 일단 위치적으로도 장강이 훨씬 좋았다.
회수는 감히 다른 두 강에 비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 조정은 장강과 장강이 흐르는 내륙의 물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무창은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지점이라 투자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으니, 당연스레 엄청난 부가 모이곤 했던 것이다.
태평천국의 주요 인물들도 이곳을 점령한 이후 어느 정도의 미래를 확신했으며, 명 조정도 이곳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나라가 크게 위태로워졌다고 제대로 인식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는 도리어 이곳을 침략한 군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탐스런 먹잇감이었다.
“죽이고 빼앗아라!”
남왕군을 물리치고 도시로 진입한 3개국군은 걸신들린 듯 약탈을 저질렀다.
살육과 강간, 방화는 으레 뒤따르는 여흥과도 같았다.
그들은 돈이 될 것 같은 것들은 전부 끄집어냈으며, 건물이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 얼마나 오래 전에 지어졌는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파괴에 골몰했다.
그들이 머문 닷새 동안, 무창은 거의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정도였으며 실제적인 풍경도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변했다.
장강을 오가는 3개국군의 증기선에는 현무호의 사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재물과 재화가 실려 영파로 향했다.
지금까지 봉변을 당했던 작은 마을들이야 어찌 뒤처리를 잘 한다면 쉬쉬하며 덮을 수 있었다.
지나는 넓고, 사람 목숨은 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지나가 그렇더라도 이 정도의 대도시는 절대로 벌어진 일들을 숨길 수도 없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기존까지의 열강들의 횡포가 아편을 팔아대고, 여러 경제적 이권을 침탈하던 수준에 그쳤다면 무창대학살은 마침내 그들이 ‘직접적으로’ 명의 사람들을 도살하기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외세의 감정은 돌이킬 수 없었고, 모두가 이 불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와는 별개로 지금 당장 태평천국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북왕도 패하고, 남왕도 패하니, 이제 관수경은 그가 가진 모든 패가 다 까발려진 것도 모자라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장사에 처박혀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도착한 북왕의 제의는 실로 시기적절했다.
동황비에 의해 한밤중에 풀려나 태평천국의 진영으로 귀환한 북왕은 열과 성의를 다해 동황비의 의견을 전달했고, 마침내 관수경을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천세지주, 함께하면 저 양이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대는 그 여우 같은 계집을 믿는가?”
“지금 이 지경까지 온 우리가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관수경의 허락을 받은 북왕은 명 조정에 밀서를 보낸 뒤 태평천국 최후의 군세를 이끌고 장사에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방어전을 하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