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관파천
마을은 불에 타 있었다.
태평천국에 협력했다는 죄명을 받은 이 마을은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저항하다 베인 시신, 강간당하다 목이 꺾여 죽은 시신, 불타 죽은 시신.
인세의 아비규환이 도래했다고 평할 수 있을 만큼, 이 한족들의 마을은 끔찍한 광경으로 변하고 말았다.
유럽인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흐트러진 바지춤을 올리거나 소유주가 살해당해 없어진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노골적인 욕망 아래, 제국주의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역겹군.’
이 모습을 바라보는 네덜란드 파병군 사령관, 요한 바이난드 반 구르는 12개국군,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선봉을 자처한 3개국(프랑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군이 해 놓은 모습에 토악질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고려인과 예맥한계 4개국인들은 아마 공감하기 힘들기에 모르겠지만, 유럽인은 유럽인으로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들이 대체 왜 이렇게 잔혹해지는지.
지금 이 비극은 오로지 백인들의 열등감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다.
피부에 따른 현존 인류 종의 분류는 대체로 다섯 가지를 따랐다.
고려는 물론이고 대부분 나라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다.
황인과 갈인, 백인, 홍인 그리고 흑인.
이것이 박도상 같은 이들이 주장한 우생학의 잔재라 여겨 거리끼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오로지 보여지는 피부만으로 수많은 인종을 퉁치는 것은 상당히 그릇된 표현이라는 주장도 몹시 설득력 있어 학계에서는 이미 꽤 철 지난 분류법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렇게 따지면 예맥한계와 강화, 지나는 다 같은 인종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프랑스인과 게르만인, 라틴인과 앵글로색슨, 그리스인과 이베리아인이 다 같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도 다른 나라의 대중들과 정치권은 달랐다.
아직 개념만 흐릿하게 제시되었을 뿐 여러 기술의 한계로 미비한 유전자 연구 덕에 눈으로 보이는 표면적인 피부 색깔의 분류는 대중들에겐 꽤 설득력 있었으니.
실제로 유럽인들조차 도이치인, 프랑스인, 스위스인을 구분하지 못했고, 예맥한인들도 말만 제대로 한다면 그들 나라로 입국을 하는 사람이 지나에서 건너왔는지, 강화에서 건너왔는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이를 잘 알았으면, 몰래 아편을 밀반입하는 지나인들을 훨씬 더 잘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피부색은 실례를 들자면 정말 하등 쓸모없는 것에 가까웠지만, 지금 이 시대에선 반대로 너무나도 중요한 선천적 구분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기를 펴고 다니는 인종은 대체 어떤 피부색을 가졌는가.
이는 당연히 황인이 분명했다.
전통적 동양 가치관 속에서 황색은 모든 색의 으뜸으로 여겨졌다.
이에, 황인들은 스스로의 피부 색깔이 가장 좋고 적절하다 여겼다.
또한 그 세력이 가장 강했으니 자긍심도 빼어났다.
과거에는 몽골이 전 세계를 짓밟았고, 지금은 고려가 정점에 있으니 이들은 사실 단 한 번도 으뜸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홍인이었다.
사실 이들은 실제의 피부가 붉은 것이라 보긴 힘들었다.
당장 황인들과 백인들도 옷을 벗고 직사광선을 쬔다면 온몸이 붉게 변하기 마련.
그러니 이와 같은 명칭 자체는 분명히 오류가 있었다.
어쨌든 홍인은 고려대륙 전반에 걸쳐 있는 원주민들을 총칭하는 말이었기에, 남려대륙 원주민들은 우리가 왜 저 미개한 아즈텍인들을 비롯한 중려의 인간들과 같이 엮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이는 북려대륙의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중려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을 일군 중려대륙의 사람들은, 쿠쿨칸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아랫것들과 윗것들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었을 거라며 업신여기곤 했지만.
사실 고려 내에선 이 홍인이라는 분류 자체가 고려의 상당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추세였다.
게다가 이젠 너무 오랫동안 많이 동화되어 구분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도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가장 큰 자긍심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선택받은 민족 중 하나라는 것.
위대한 태조가 이곳에 오고 그들을 지배해 계몽시킨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우리가 오히려 진정한 고려인이다.
그다음은 백인이었다.
대체로 유럽인들이 많이 속하는 이 분류의 인종은, 만약 삼별초 함대가 위대한 여정을 통해 새로운 신문명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그 공백을 차지하고 세계를 지배했을지도 몰랐다.
너무 과장된 추측이 아니냐는 소리가 있기도 했지만, 고려가 카스티야 등의 해양 세력과 마주했던 것을 본다면 이런 예상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고려는 막 바다에 발을 담그려는 이들을 완벽히 틀어막는 것을 불가능하다 여겼고, 도리어 북려에 자리 잡은 유럽인들을 포용하여 같이 동화시키는 것을 택했다.
그들의 종교는 인정받았으며, 황가에도 이들의 피가 흘렀다.
하지만 백인들은 상당한 열등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정작 고려인들은 우생학이 잠잠해진 이후 별반 상관하지도 않고, 오히려 황실 모독이 될까 봐 상관할 수도 없었음에도.
황화론이라는 단어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하지만 이 천조질서는 구축된 지 오래다.
헬라스에서 파생된 유럽의 학문적 가치관은 이미 빼앗겼으며 고려 정교회와 성공회, 제국교 등과 포도뿌리혹벌레로 인해 유럽의 종교적 가치관도 치명타를 입었으며, 산업화와 공장 등은 그들 문명의 기반을 사실상 고려에 종속되게 만들었다.
프랑스 사람이 ‘나 프랑스인이오’ 하는 것보다, ‘나 이민 온 지 별로 안 지났지만 엄연히 앙주 사람이오’ 하는 것이 더욱 높은 삶의 질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이류였다.
러시아가 왜 고려와 대적하는 것을 택하겠는가.
이류라고 취급되는 유럽에서조차 이류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거인에게 대항하는 것을 택했으며 그 사실만으로 자신들을 일류와 동급으로 놓길 원했다.
그러니 요한 바이난드 반 구르는 알았다.
이들이 세력이 약해 착취당하는 흑인들이나 갈인(누산타라인)들에게도 하지 않을 더없이 포악한 짓을 이 명의 땅에서 하고 있는 것은, 도리어 이 명나라 사람들이 고려인이나 예맥한인과 상당히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추악한 질투심이 끔찍한 광경을 빚어내는 것을 보라.
‘너희들이 문명인이냐? 너희들이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있느냐?’
시신이 썩어가는 악취를 맡으며, 이 참극을 말을 타고 걸어가고 있는 찰나.
― 응애
어디서 갓난아이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으면서도 끝까지 아이를 자신의 몸으로 덮어 악적들의 총칼로부터 보호한 아낙의 시신을 만지작대는 어린아이가 거듭해 울고 있었다.
어미의 죽음을 인지할 나이도 아니건만.
그 비참한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망설이다 그 아이에게 안식을 선물하려는 병사를 제지한 요한이 말에서 내려 직접 그 아이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빠진다. 스타텐 헤네랄의 질책은 내가 감수할 테니 전군은 파푸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거라.”
청문회의 결과로 옷을 벗게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병신 같은 곳에서 병사들에게 살육을 지시하고 피 흘리며 싸울 의미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예.”
네덜란드에도 이권만 바라보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에는 또한 존경받을 만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더욱 많았다.
국왕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그분도 부르고뉴김의 가문이시니.
요한은 아이를 품에 안고 말에 오르기 전, 아이 어미의 목에 걸린 십자가를 풀었다.
‘태평천국교도들은 무슨….’
지나에 가장 많은 선교활동을 한 예수회의 흔적이 분명했다.
고려와 명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고려가 명에서 벌어진 비극에 굳이 개입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런 행동이 비단 명에서만 발생했을까.
‘너희들은 제국을 꿈꾸어 그와 같이 되기 위해 만행을 저지르니, 언젠간 진정한 제국의 분노를 받으리라.’
십자가를 아이의 목에 걸어준 그와 네덜란드의 군대는 그들이 왔던 영파의 항구로 향했고 가장 먼저 이 땅에서 벗어났다.
* * *
서황비는 일국의 황비로서 조정과 함께 경사로 돌아와야 했다.
경사를 떠난 자는 제위에 오를 수 없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의 아들은 아예 영영 천자의 자리를 취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주동휘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나 주도권을 잃어버린 그녀는 동황비 일파에게서 살아남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구중궁궐의 암투란 어쩌면 전장보다 살벌하여, 언제 어디서 비수가, 독이, 기타 등등의 모략이 그녀와 아들의 목숨을 노리고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었다.
― 미끄덩
어느 날은, 심지어 그녀가 자주 가는 경로의 계단에 수작질을 부린 경우도 있었다.
발을 헛디디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도록 돼지기름을 바른 것이다.
그 계단이 몇 층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자금성은 명의 궁궐답게 대부분의 전각이 꽤나 많은 계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 번만 잘못 넘어져도 머리에 큰 충격을 입고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때 서황비는 손목이 접질리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한 그녀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보다, 이와 같은 사소한 모략으로도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기름을 바른 범인은 잡히지도 않았다.
이번엔 계단, 다음엔 대체 무엇이 올까.
독이 든 음식? 비수를 품은 자객?
궁궐 내의 실권조차 아예 동황비가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는, 처음에는 유일한 황실의 어른인 황후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황후도 동황비의 눈치를 보며 덜덜 떨고 있는 상황.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다른 신하들과 신료들도 그러했다.
‘그냥 영파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서황비는 그리하여 마침내, 경사 내에 있는 주옥저 대사관으로 향했다.
저관파천(沮館播遷)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안 그래도 외세의 힘을 빌려 지금 이 지경을 초래했다는 사실로 비판을 받고 있던 그녀는 더더욱 맹렬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목숨은 구원할 수 있었다.
마안산 전투에서 심각하진 않지만 후방에서 적당히 요양해야 할 법한 부상을 당한 나라동훈은 얼떨결에 서황비의 근접 경호를 맡게 되었다.
“역도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상처인가요?”
흉갑이 보호하지 못하는 팔에 얕지만 긴 검상을 입은 나라동훈은 왼쪽 팔목부터 어깨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의 호위로 주는 옥저의 처사에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도리어 사연을 물어보았다.
“예, 전하.”
“미안하군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라동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서황비도 피식 웃으며 그녀의 팔목을 흔들었다.
그녀도 석고붕대를 하고 있으니 참 웃긴 일이다.
“우리 꼴이 참 재미있네요.”
경사의 대사관 거리는 정말 안락했다.
예맥한계 4개국과 고려 대사관은 이 거리에 모두 붙어있었다.
다른 유럽 열강들의 대사관은 제각기 조차지 근처에 있거나 하기도 했으니 이들이 가장 경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외교집단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동황비도, 아니 명 황제 주동휘가 갑자기 뇌사상태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이곳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강화를 제외한 3국군이 번갈아 가면서 주둔하며 치안을 다스렸고, 명국군의 진입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황비는 이곳에서 겨우 평온을 찾았다.
자식 교육에 성의를 다하는 그녀는, 유학자를 불러 모아 아들을 가르친 동황비와는 다르게 양이와 동이의 학자들을 초빙해 아들을 가르쳤다.
공장과 철도, 전신과 같은 문물이 명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명은 절대로 변화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외세와 결탁한 앞잡이라는 누명에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척화는 단순히 감정적 대응일 뿐이었다.
이는 고려 대사가 서황비를 위로하고자 옥저 대사관에 방문했을 때 더더욱 느꼈다.
도리어 이번 일로 명의 지식인들은 고려에게 꽤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탐욕스러워도 되었을 나라는 이번 일에 거의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어떠한 군대도 파견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고려의 대전략이 이라크에 집중되어 있으며 중원의 현상 유지라는 것을 모르는 명인들은 고려의 천조질서 인정은 둘째 치고 그들이 보기 드문 진정한 군자의 나라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외신(外臣)이 전하의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몇 가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려 대사는 꽤나 신기한 물건을 보여주었다.
“이걸 어디에 쓰는 거지요?”
가운데는 납과 같은 금속으로 된 둥그런 원통이 있었고, 그 위에는 자그마한 바늘이 달려 있는 기관이 있었다.
고려 대사는 자세한 설명보다 직접 시연을 해 주었다.
즉시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아주 약간의 잡음이 동봉되어 있긴 했다.
“자명악(오르골)이군요?”
“자명악의 원리를 딴 것은 맞으나, 고려에선 이를 축음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재생이 아닌, 녹음까지 가능하니까요.”
원통형 축음기의 설명을 들은 서황비는 크게 놀랐다.
“정말인가요?”
“예. 지금 들으시는 이 곡은 고려의 예당에서 악공들이 직접 연주한 소리입니다. 여러 번 재생하신다면 그 품질이 조금 떨어지겠지만, 다른 곡들도 가져왔으니 들어보시지요.”
서황비는 전율했다.
한 번 태엽을 감기만 하면 계속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재생되는 이 기구는 자명악보다도 더욱 복잡한 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
사람과 악기의 소리를 녹음한다?
이런 것을 대체 어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작가의 말]
외신이라는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주군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군주나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사들에게서 상당히 흔하게 쓰였죠.
가령 주조선 영국 대사가 고종에게 자신을 외신이라 칭한 것처럼요.
보통 축음기는 원판형 SP판이나 LP판이 익숙하지만 초창기 축음기는 왁스나 납으로 된 원통형 축음기였습니다.
이 시대의 축음기는 내구도가 약해 많이 재생하면 음질이 좋지 않아졌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