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4)
* * *
당시 상승과 화엄, 그리고 다섯 척의 순양함은 포격 지원을 위해 해안 가까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바다는 넓고 한적했다.
그래서 해군도 최대한 함포에 집중하여 해안사구 너머에 있는 적병들을 터트리고 있었다.
“적선입니다!”
전황이 변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나디르 샤가 해적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다우선들이 수평선 너머에서 관측되었다.
당시 견시수들은 곧바로 적선을 보고했다.
저렇게 불순하게 함포의 사거리 밖에서 모여 있는 까닭은 당연히 고려에 적대적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라 간주할 수 있었다.
주포가 아닌 이상에야, 다른 함포로는 영 닿지 못할 사거리라 고려는 별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미 주포는 포격 지원을 해주느라 너무 바쁘기도 했다.
다만 함장은 현측 부포들이 확실히 저들을 겨누고 있도록 지시했다.
저들은 함포전에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접근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줄이라도 걸고 칼을 휘두르며 진입하는 한참 이전의 전술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포의 장전 속도는 주포보다야 빨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속사포라 칭하기에는 어려웠다.
그 이후엔 별일이 없었다.
육지에서는 계속 포격전이 이어졌지만, 바다는 계속 포탄을 뿜어내는 주포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해적들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뭘 위해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려군 함장은 도리어 저들의 행동이 기꺼웠다.
저 해적무리인지 사략함대인지 뭔지 모를 함대가 고려가 주포사격을 하는 틈을 타서 빠르게 기동해 온다면, 고려는 주포를 저들에게 돌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육상병력의 위기가 조금 더 심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저들은 그 황금 같은 기회를 멀뚱히 바라보며 넘기고만 있지 않은가.
달아오른 포신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조금의 유예기간을 둘 동안에도 저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함장은 당연히 방심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올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저녁노을이 질 때, 삽시간에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사람의 시계가 제한되는 가장 어수선한 시기, 견시수는 마침내 먼바다 방면이 아닌 함대 바로 좌우측의 해안가를 따라 다가오는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다.
출렁이는 바다에 반쯤 몸을 숨긴 그것들은, 환한 대낮이었다면 더욱 빨리 발각되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함미 견시 보고!”
괴상한 함선이 반쯤 물속에서 기동하고 있다는 보고는 제아무리 침착한 함장이라도 함교에서 뛰쳐나오게 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밖으로 나온 함장이 망원경으로 이를 바라봤다.
“저게 대체 뭐지?”
그가 던진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인물은 함선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괴선의 정체를 제대로 유추해보기엔 몹시 위험했다.
이미 저것은 함선에 꽤나 근접해 있었다.
견시의 늑장 보고는 아니었다.
도리어 저 수평선에서 얼쩡거리는 해적에 눈이 팔리지 않고 함미의 뒤편 해안가에서 반쯤 물 안에 몸을 집어넣고 다니는 괴선을 본 침착함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적선은 만듦새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크기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대포도 달려 있지 않았다.
애초에 설계를 저렇게 한 의도도 모호했다.
충각?
말도 안 된다.
제아무리 멍청하더라도 강철 거함에 저런 소선을 들이박아봤자 무슨 효과를 기대하겠는….
‘젠장.’
하지만 함장은 망원경으로 반쯤 잠긴 괴선의 앞에 붙어있는 기다란 선수 부분을 관측했다.
눈이 있고, 머리가 있으면 저 기다란 부분이 굉장히 위험한 무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장은 괴선의 선미에 달린 저 흉측한 무언가에 더해 괴선의 흘수선 윗부분, 배의 상체 부분에 타 있는 사람이 이를 악물고 이곳으로 돌진해오는 결의에서 저 괴선의 정체를 빠르게 유추할 수 있었다.
“폭탄이다! 저놈을 막아야 한다!”
전함의 방호력이 과연 저 무기에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일단 위험해 보이는 것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나았다.
현측의 주포는 해적을 조준하고 있다.
그리고 함미에는 부포가 없던 터라, 함장은 재빨리 병사들로 하여금 직접 사격을 가하게 지시했다.
행여 수평선의 해적 선박들이 접근할까 봐 이미 해군 특유의 단축형 소총을 들고 있었던 선원들도 부랴부랴 함미로 와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하지만 괴선은 물 밖에 드러난 곳에 철판이 둘려 있었고, 그 뒤에 엄폐하여 계속 다가오는 저자는 소총의 화력으로 제압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단축형 소총은 비좁은 함내생활을 하는 선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지만, 총열 자체의 길이가 말 그대로 짧았기에 썩 명중률이 좋지도 않았다.
그리고 괴선은 한 척도 아니었다.
힘과 솜씨가 좋은 선원 한 명이 무기고에서 꺼낸 진천뢰를 던져 한 선박을 무력화시켰지만, 다른 괴선들은 꾸준히 다가오고 있었다.
“돌겠군.”
본래라면 위치를 이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함장은 본능적으로 더 이상 접근을 허용하면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그 값비싼 강철 닻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쇠사슬 자체를 풀어버리라 지시했다.
시간이 없었다. 먼바다로 나가야 했다.
해적들이 기다리고 있든 말든, 괴선보다는 차라리 저들을 대면하는 것이 더 나았다.
“파도가 거센 곳에는 저들의 괴선이 전복될 가능성이 높다!”
함장도 숭무감 해군부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뱃밥을 먹어온 사람.
괴선 구조 자체의 한계와 대처를 곧바로 파악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모습으로 보건대, 저 괴선은 조금만 파도가 높게 쳐도 사람이 탑승한 부분과 증기기관 굴뚝같이 생긴 부분에 물이 들어차 제 기능을 못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양동작전을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저들이 먼바다 방면이 아니라 다소 잔잔한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접근한 것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일지도 몰랐다.
함장의 명령으로 마침내 닻이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함장은 기관부에 명령을 내렸다.
“당장 최고 속도로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증기기관을 닦달해봤자, 전함이 바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기관의 예열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전까지 선박은 반쯤 기어가다시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상승함은 몸을 뒤틀며 최대한 현측 부포를 적에게 겨누려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괴선이 함선에 도달한 상태였다.
― 콰앙
엄청난 폭음이 들리고 배가 들썩였다.
그러나 한 번의 폭발로 상승이 침몰당하기에는 다소 위력이 약했다.
한두 방 정도야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정확한 피해 계산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피해 보고!”
바리바리 악을 쓰는 함장의 말이 전성관을 타고 울렸다.
하지만 기관부에서 전해진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얄궂게도 저 괴선은 함선의 후미에 있는 소용돌이 추진기를 단번에 박살 내었고, 심지어 기관부의 일부에도 피해를 입힌 후였다.
그쪽은 애초에 잘 포격을 받지 않는 곳이 분명했으니 장갑의 구조가 취약했다.
추진기도 잃어버리고, 물도 조금씩 들이차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기관장은 반쯤 울먹거리며 최악의 상황을 고했다.
― 적재된 석탄이 불타고 있습니다! 최대한 화재를 진압하려 하고 있지만, 지금 불길이 거세어….
“오, 이런.”
함장은 고려군 최초로 전함의 침몰이라는 불명예를 자신이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둬도 위험한 순간인데, 저 벌떼들이 계속하여 맹렬히 돌진한다면 함선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사거리상 육상에 주포 지원도 힘들어서 전함과 다소 떨어져 해적 선박들을 향해 함포들을 겨누고 있던 순양함들이 마침내 상승함에 다가왔다.
순양함의 함교에서 광학신호기가 번쩍였다.
그 뜻을 이해한 상승함의 함장이 고함을 질렀다.
“…최명수 이 사람아, 그만두지 못해?”
함대의 가장 좌측에 있던 조익현급 방호순양함 한 척이 전함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가로막았다.
포각을 확보한 순양함 우현의 부포가 불을 뿜었고, 일부 괴선들은 다행스럽게도 순양함에 도달하기 전에 격침되었다.
하지만, 순양함 또한 역시 너무 가까웠기에 온전히 그 공세를 방어해낼 수는 없었다.
― 콰앙
순양함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함선이 요동치는 광경이 보이자, 상승함의 함장은 두 손을 모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함의 운명은 뻔했다.
전함보다도 더욱 얄팍한 장갑을 가진 순양함은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을 터.
흘수선에 치명적인 구멍이 나면 군함은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광경을 보면서도 그 근처에 있던 두 척의 순양함들도 전함을 방어하기 위해 앞선 군함과 같은 길을 걸었다.
이와 같은 군인들이 위엄급 전함이 조익현급 방호순양함보다 여섯 배에서 일곱 배 정도 더 비싸다는 사실 같은 것은 곧바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함대의 자랑을 구하기 위해 그와 같은 결단을 내렸다.
순양함들의 희생 덕분에 괴선을 동원한 적의 기습적 공세는 해소되었다.
상승함은 완파되거나 침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부다비의 앞바다는 온통 상승함의 기관부에서 솟구친 석탄 연기로 깜깜했다.
“주포 지원을 중단한다. 저들의 저 공격이 다시 있을지는 모르지만, 화엄함까지 잃을 순 없다.”
안 그래도 육지에선 적과 전투하는 와중에도 바다에서 일어난 난리에 사기가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상승함 함장이 이양한 작전권을 가지게 된 화엄의 함장은 나머지 순양함 두 척과 함께 괴선이 접근하기 힘든 파고가 치는 바다로 나갔다.
이를 구경하던 페르시아 해적들은 도리어 고려가 앞으로 치고 나서자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없이 그저 시선 교란용으로 있던 미끼가 분명했다.
반면 시간을 번 상승함은 화재를 겨우 진압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남는 인원들을 소선에 태워 침몰한 순양함들의 사람들을 구하는 데 열중했다.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 퇴함 명령으로, 침몰한 순양함들의 선원들은 제각기 연참나무 내피(코르크)로 만든 구명조끼를 목에 걸고 해안가로 헤엄치고 있었다.
타고 있던 선원들 중 8할이 넘는 자들이 생존했지만 순양함의 함장은 보이지 않았다.
* * *
나디르의 좆대가리.
이 일이 일어난 후, 고려는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추후의 첩보로는 이것을 페르시아가 아니라 러시아가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했으나, 어쨌든 한 대 크게 때린 것은 페르시아였기에 고려군은 경멸의 의미 반, 놀람의 의미 반으로 외설적인 별명을 붙였다.
괴선의 정체는 뻔했다.
당연히 유인 어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수 부분의 활대어뢰(혹은 기뢰)를 적의 함선에 박아 넣기 위해 제작된 어뢰정이라 볼 수 있겠다.
2차대전은 물론이고 현대에도 가끔 쓰이는 유인 어뢰처럼 말쑥하고 길게 뻗은 미래적 어뢰는 분명히 아니었다.
원통형으로 길게 뻗은 것은 맞지만, 대갈못(Rivet)으로 이어진 철판은 정말로 최소한의 방어만을 제공했다.
품질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아 군데군데 녹이 다소 슬어 있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조그마한 증기기관이며 기술자들은 구조를 보건대 꽤나 구식이 틀림없다고 했다.
안정성도 마찬가지였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것은, 본래의 목적을 이행한다면 선박의 조종자마저도 선박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정말로 치명적이었다.
어차피 물만 막으면 된다는 투의 장갑.
가벼운 어뢰에 추진만 되면 그만이라는 기관.
죽어 나가도 상관없다는 사람.
상민은 이 자살폭탄어뢰정에서 반대로 이들의 절박함을 느꼈다.
‘나도, 너희들도 오만했구나. 바다에서 적수가 없다고 자만했느냐? 다른 이들은 그저 한없이 멍청한 민족이라 절대 제 스스로 해결책을 강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느냐?’
아니, 그들도 이 시대를 분명히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어뢰정이 이를 증명했다.
* * *
사실 최초의 유의미한 기뢰는 고려가 발명한 것이 맞았다.
다만 실전에서의 효용성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국 장수 이윤신이 증명해 내었다.
애초에 항구를 못 쓰게 하는 것보다 점령하는 것을 선호했던 고려는 군사 교리상 기뢰를 살포해 보았자, 결국은 자신들이 소해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했으니까.
강력한 대양해군을 가지면 딱히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후에도 이런 무기체계는 해군부의 관심을 잘 받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해전사에 한 획을 긋는 기뢰가 이윤신의 손에 의해 전술적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고려를 제외한 나라들은 기뢰의 개량 시도에 꾸준히 집중했다.
해군이 다른 나라를 압도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국가들은 항구 자체를 봉쇄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만했으며 또한 이윤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의 흐름을 고려해 적에게 공격을 퍼붓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기뢰의 유의미한 진보는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무기기술자, 코넬리스 드레벨(Cornelius Drebbel)은 본래 항해 가능한 잠수함의 설계자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정부의 의뢰를 받아 기뢰를 개량하다, 마침내 어떤 생각에 다다랐다.
― 물에 둥둥 띄워 놓는 것으론 부족하다. 이 무기를 적 함선에 직접 가져다 댈 수 있다면, 단번에 군함에게 가장 적대적인 무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윤신도 해전용 기뢰를 공격 목적이 아닌 ‘접근 금지’의 목적으로 사용했었다.
단번에 적의 진형을 반으로 가른 뒤에, 적의 수적인 열세가 곧바로 해소되지 못하게 막는 지연전의 개념으로.
그러니 해적들이 기뢰밭에 스스로 몸을 디민 것은 그들의 무지를 탓해야 할 터.
하지만 드레벨은 이 기뢰라는 것이 방어의 목적이 아니라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면 해군 전쟁사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드레벨의 기뢰는 전통적 기뢰가 아니라 어뢰라는 새로운 단어로 불리기 시작했다.
드레벨은 어뢰에 대해 많은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대함공격용 어뢰에 대한 개념은 드레벨의 손에서 온전히 완성되지는 못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어쨌거나 대양해군이었고, 가장 강력한 고려와도 우호적이었으니 고려와 마찬가지로 기뢰에 대한 연구가 절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수요가 창조를 만든다고, 그의 유산은 유럽의 다른 기술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고 이는 다른 절박한 국가들의 무기기술자의 손에 더욱 개량되기 시작했다.
수에즈 통제권을 더욱 완전히 쥐고 싶어 하는 베네치아.
고려의 철갑선을 따라 만들다 다리가 찢어진 프랑스.
고려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하루 종일 고심하고 있는 러시아까지.
재정적으로 건함경쟁을 따라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만, 국가라는 단체가 제해권을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들은 고려가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했다.
그것이 현명했다.
세상의 학문은 고려에 의해 선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마냥 멍청히 고려를 따라 하지는 않았다.
상민이 해놓은 악질적인 장난질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발주자들도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등장하지 않은 소설이지만, 소설이 없다고 붉은 여왕 효과가 존재하지 않을 리가.
상민은 이 어뢰정에서 발버둥 치는 그들의 노력을 보았다.
그리고 반대로 다소 정체된 고려의 여러 가지 군사 기술들을 떠올렸다.
군사적 진보란 서로 주먹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승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려가 주먹에 맞은 경우가 많이 있었는가?
함선 설계의 구조, 함선 장갑의 속성, 경사장갑, 그리고 기타 수십 가지 자그마한 군사적 진보들.
상민은 정치와 역사에 해박하다 자화자찬할 수는 있더라도, 군사 지식까지 그러진 못했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된 길을 단번에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같이 소소해 보이지만 모아놓으면 몹시 중요한 군사적 개선들은 정말로 때리고 맞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종류의 사실들 중 하나였다.
‘맞았으니, 배워야지.’
상민은 여의국 요원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해전의 결과를 소소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해군부와 황립조선소에 보내라. 기술자들에게 일러 전반적인 함선 구조와 장갑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 보라고도 하거라.”
“송구하오나, 그 대응책이 지금 건조 중인 신형 전함에 적용되어야 하옵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순양함보다는 작고 초계함보다는 큰, 대어뢰정 특화 선박을 건조하긴 해야겠다.”
유인 어뢰야, 이제는 이 장난질에 순순히 당하진 않을 터.
그러나 직접 추진 어뢰의 발명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 분명했기에 다음의 방책까지 고려해놓는 게 현명하다.
상민도 어뢰를 상대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어뢰파괴함이 따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도출해내었다.
그 작은 크기의 대어뢰 파괴함이 안정적인 원양 항해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기술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이번에 크게 두들겨 맞은 만큼, 황립조선소의 인물들도 자존심에 엄청난 흠집이 났을 테지.
밤낮없이 고심하며 대응책을 만들어낼 터, 그때 가서 그 계획안들을 검토해 보자.
“흠….”
그 와중, 상민은 갑자기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본래는 이번 해전의 정확한 피해를 비밀로 삼아 최대한 군의 사기와 반전 여론을 저하시키지 않으려 했다.
고려가 자랑하는 전함이 침몰했다는 사실에 비분강개하며 복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러니 왜 그곳까지 가서 쓸모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 모든 우려에도 상민은 도리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널리 퍼트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수치를 당했소 하고 동네방네 떠드는 것처럼.
어쩌면 오늘의 사건이 고려에 적대하는 나라들에게 청년학파라는 희망을 선사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작가의 말]
【사진】
활대어뢰(활대기뢰, Spar torpedo)정, 혹은 반잠수함의 예상 모습입니다(CSS David).
실제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양측 진영 모두에서 사용된 이 함선들은 남부연합의 철갑함 CSS Albemarle를 격침하기도 했죠.
독자분들께 익숙한 구축함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지 말지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만, 결국 작품 내적으로 어뢰파괴함(Torpedo Destoryer)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나중에는 어뢰라는 말도 빠질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