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78화 (378/653)

패권 전쟁, 페르시아와 아라비아(8)

“그걸 지금 믿으란 소린가?”

“믿고 안 믿고 판단하는 것은 그대들 자유지.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하일 오아시스에 출현한 이방인은 젊고 키와 덩치가 크며, 이국적으로 생긴 고려인이었다.

샴마르 부족도 이 혼란한 와중에 고려가 남쪽의 오만과 손을 잡고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그에 대해 썩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부족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일단 외세―오스만의 예니체리가 이곳에 와서 자행한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상민이 하팀에게 이곳에 온 목적을 고하는 자리에서 초대받지도 않은 각 씨족의 셰이크들은 이리저리 딴지를 걸어댔다.

“어찌 이방인이 사막을 걸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단 말인가?”

당연하겠지만, 상민이 그 힘든 여정의 와중에도 많은 사우드 가문 척살대를 죽인 것은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도리어 샴마르인들은 이 고려인이라는 작자가 남쪽 사우드에서 보낸 첩자, 혹은 이간계의 일종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떠올렸다.

상민이 온 방향도 남동쪽.

게다가 그의 정직한 말대로라면 그는 사우드 가문에서 무사히 풀려나 북쪽으로 향했다 한다.

이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우드가 풀어준 사실도, 풀려난 외지인이 길잡이는커녕 말과 낙타도 없이 걸어서 리야드부터 부라이다를 거쳐, 아드 다나 사막을 통과해 이곳으로 온 것도 모두 믿기지 않았다.

반면 그들이 믿든 말든, 상민은 이곳의 에미르라는 어린 소년의 결정을 요구했다.

“에미르. 같이 사우드에 대항해 맞섭시다.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샴마르를 중심으로 반사우드의 동맹을 만들 수 있소. 고려가 그대를 지원해 주겠소.”

바니 칼리드의 족장은 반사우드 동맹에 대한 회의감을 표시했었다.

그러나 상민은 회의감이고 나발이고 뭉치지 못하면 하나씩 죽어가는 이 상황에서 동맹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아나자, 아마랏, 바니 아티야, 술라바와 같은 군소 부족들은 아직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리고 메카의 에미르인 하심 가문도 아직까지 사태를 관망하고 있지. 그대들이 이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사우드에 맞설 수 있소.”

하지만 소년은 떨리는 눈으로 다른 셰이크들과 상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아이, 눈치를 심하게 본다.

어린 나이 탓에 에미르로서의 권위가 없는 것인지.

게다가 소년의 앞에서 왈가왈부하고 있는 자들은 제각기 여론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공교롭게 되었다.

샴마르가 정상일 것이란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지만, 내부 분열이 이렇게 가시화된 상태인 줄은 몰랐다.

알 마즈마의 전투, 즉 오스만―샴마르 동맹이 패퇴했다는 사실은 정확한 설명이 없었어도 디리야에서 얼핏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 꼴은 마지막으로 저항해 보기도 전에 자멸할 기세였다.

상민의 눈에는 늙어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다른 부족의 셰이크들은 샴마르의 이름이 무색하게 저항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지금 저렇게 대놓고 에미르와 드잡이질을 하려는 것은, 사우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역으로 표현한 것이겠지.

그들은 에미르가 나서서 차라리 사우드에 굴종하는 선택을 내리길 바랄 것이다.

그리하면 그것은 부족을 구원할 선택일 뿐만 아니라, 그 과오와 불명예마저도 온전히 저 순진한 소년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게 될 테니까.

이쪽이 사우드와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다면, 다른 한쪽은 사우드의 만행을 두려워하며 화친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나 화친이 불가하다는 쪽도 또 두 패로 나뉘었다.

상민이 말한 것처럼 뭉쳐서 항전해야 한다는 쪽은 그중에서도 소수였다.

나머지는 심지어 이 샴마르 부족이 사태가 급박함을 인정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예멘에서 타이 부족이 탈출하여 샴마르에 정착했듯, 다시금 자발 샴마르에서 탈출하여 저기 이라크와 자지라의 땅으로 나아가자고.

그곳이 비록 지금은 페르시아와 오스만의 힘겨루기로 이전의 성세를 잃고 황폐화가 된 땅이 많더라도, 지금 이 절망적인 상황보다는 더 좋을 수 있다고.

이들도 베두인이 아닌가.

오아시스를 버리고 떠난다 하더라도 유목민들답게 금방 수습할 것이었다.

그러나 샴마르의 그런 이주 결단은, 아라비아 내에서 사우드 가문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번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이들도 굴종하거나 도망가는 선택을 내리겠지.

고려에겐 최악의 결과였다.

반면 이 자리에서 상민은 또한 유일하게 기대해 볼 만한 이가 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주전파였고 선대의 땅을 맥없이 내주는 일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이 지긋한 다른 셰이크들은 눈앞의 소년만큼 강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 * *

“…날이 늦었습니다. 토론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쯤 끝내지요. 손님은 알 알리의 씨족에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하팀은 제아무리 불순한 이방인이라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그를 가르친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한 셰이크는 이 이방인을 사우드의 첩자라 주장했지.

그러나 소년 에미르는 디리야의 사우드가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저 머나먼 제국에서 온 자를 하수인으로 부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히나 이자는 일신의 기운이 어린 그의 눈으로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기에.

게다가, 어차피 사우드는 안 그래도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뭐 하러 이런 귀찮은 이간계를 사용한단 말인가.

소년은 상민에게 그의 씨족에서 천막 하나를 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저 또한 그대와 할 말이 많지만, 몹시 지치는군요. 내일 가문의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마저 이야기합시다.”

상민은 소년의 말로 눈치챘다.

이 소년은 심지어 상민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인 모양이다.

아마 셰이크들의 눈과 귀가 사방에 깔려 있겠지.

상민과 소년이 독단적으로 뭘 하려고 한다면, 곧바로 딴지를 걸 터.

그보다 더한 짓거리를 할 수도 있었고.

불과 열네 살.

하지만 저 하팀이라는 소년 에미르는 어린 나이임에도 생존형 눈치를 보며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열심히 치고 있었다.

아쉬우나 할 수 없었다.

상민은 그의 거처로 들어갔다.

제아무리 그가 강인한 육신과 탁월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심리적 피곤은 여전하여 그는 천막에 누워 쉬고 싶었다.

이번이 베두인들에게 대접받기로는 세 번째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해서 천막에 뭐가 있을지 상민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직감은 천막 안에 그 말고 다른 자가 먼저 들어서 있다는 것을 곧바로 파악했다.

“음?”

허리춤에 걸린 사우드 척살대의 샴쉬르를 매만진 상민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정도 거리에서는 대구경 권총이라도 들고 있지 않는 한 상민을 대적할 자는 없었다.

“누구시오?”

그리고 먼저 있던 사람도 딱히 상민을 해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맛있는 음식의 향기도 풍겼다.

“실례합니다.”

상민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여인의 목소리였다.

이런 경우가 있나 하여 상민도 다소 놀랐다.

본래 외간 손님 대접은 남성들이 한다.

커피를 대접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남녀칠세부동석의 관습은 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다.

유교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엄숙주의, 성 보수성을 지닌 이슬람 카디자델리적 교리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엄격한 이슬람 교리는 제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는 나중엔 형제가 오더라도 부인은 얼굴을 내비치지 않도록 하니까.

분명히 아직 그런 와하비즘적, 카디자델리적 보수성이 이슬람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가진 않았다.

아직까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로 대변되는 중근세 이슬람적 자유분방함―섬세하고 향락적인 성문화―이 완벽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검은 쓰개와 베일로 몸과 머리카락을 가리고 오직 그 아름다운 얼굴만을 밖으로 드러낸 여인은 복장과는 별개로 분명히 일반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알 알리 씨족은 최근의 전투로 청년들이 많이… 다쳤지요. 제가 귀빈의 식사와 차를 대접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 주세요.”

여인은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부끄러운 듯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인의 말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제아무리 알 알리 씨족의 청년이 많이 죽고 상했더라도 그 수가 아예 없겠는가.

군대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부족도 부족 나름대로 미래를 생각해서 가문을 이을 청년들은 전장이 아닌 후방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에미르께서 보내셨소?”

먼지 묻은 케피야와 이깔을 벗어 정리하며 머리카락의 모래를 털어낸 상민이 담담하게 물었다.

“…….”

한 번에 정곡을 찔렀는지,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미르와 가까운 관계인가 보군요.”

여인은 설마 상민이 오해할까 싶어 그 질문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촌 남매 관계예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 케피야를 벗은 상민의 옆얼굴을 힐끗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상민은 그 시선을 읽었으나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아이샤라 불리는 여인은 상민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 태도가 몹시 공손해서 상민은 도리어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아이샤는 이를 인지했는지 금방 손을 거두었다.

상민이 피식 웃었다.

“혼자서 잘 먹을 수 있소이다. 부인… 아니 아가씨께선 구태여 수고로움을 자청하실 필요는 없어요.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신 것으로 충분히 감사하니.”

“네….”

상민은 그녀가 내온 대추아쟈술을 들이켰다.

“그래서, 전해주실 말이 무엇이오?”

하팀도 하팀이지만, 이 아이샤라는 여인도 꽤나 영특했다.

시대와 세월, 그리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맞는지 먼 나중엔 그저 보호받아야 할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여겨질 아이들도 지금 이 시대에는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도리어 상민은 지금 이 순간, 아이샤가 사실상 하팀과 그가 내리고 있는 의사결정의 본체가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견적이 나왔다.

명석한 아이샤의 입을 통해, 상민은 지금 샴마르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에미르의 속내까지도.

하팀은 아까 보여주었던 기만책과는 달리 속내로는 분명히 고려와 협력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회의장의 일을 엿들었어요.”

한층 더 대담해진 여인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금녀의 구역이라고 볼 수 있는 셰이크들의 회의장을 엿듣는 것은 알 알리 씨족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샤조차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행동이지만, 절박한 그녀는 동생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그쯤은 할 수 있는 것처럼 결의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니 귀빈께서 저에게 따로 설명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사막에 누워 잠을 청하다 보면 가끔은 쏟아지는 듯한 사막 밤하늘의 별빛에 전전반측하곤 한다.

상민은 그녀의 눈에서 그 광경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다.

“고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상민은 남매의 열정에 순수히 감탄했기에 관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아마 그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이라면 꽤나 놀랄 만한 답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결의를 증명한다면, 내가 해주지 못할 것은 없소이다.”

용의 약속.

그 가치는 일견 아무것도 없어 보이나, 실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공허한 말뿐이군요.”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알 리가 없는 아이샤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나름대로 협상을 하려는 어른의 자세를 닮고 싶어 하는 소녀와 같아서 상민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오?”

“예.”

“흠….”

이 어린 소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상민이 머리를 굴렸다.

“그래, 봅시다. 우리가 콘스탄티노플에 제공한 야포와 동일한 구경의 직사포 열다섯 문, 곡사포 열 문, 그리고 다혈포 스무 문, 정윤 375 소총 이천오백 정. 어떻소? 이 정도면 부르사의 예니체리들도 가지지 못한 정도의 무기일 것이오.”

뭐라는 건지. 소녀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었다.

태어나서 군사무기와 대포를 제대로 본 적이 있어야지.

그녀가 아무리 관록 있는 어른 흉내를 내어도, 그녀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녀는 예니체리를 운운한 상민의 말은 알아들었다.

아직도 그 단어를 떠올리면 기분 나쁜 느낌이 온몸을 타고 오르는 듯했지만, 아이샤는 예니체리가 가진 무기들을 자주 봐서 알고 있었다.

비루한 베두인들의 무기와는 차원이 달랐지.

비록 그것을 가지고 대패하기도 했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무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샴마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지원이 분명했다.

“대가는요?”

아이샤가 떨리는 속내를 감추고 물었다.

“대가는 당신 부족이 사우드에 맞서 흘릴 피겠지.”

마찬가지로 아이샤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 혹은 하팀의 선택으로 다시금 부족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야 하는가.

상민은 흘러가는 말로 그녀에게 지독하게 잔혹한 선택을 내리라 종용하고 있었다.

“허나 그대 부족만 피 흘릴 이유는 없소. 함께한다면 그 희생은 줄어들 것이오. 그대가 회담장의 일을 엿들었다면,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겠지. 다른 부족들을 소집하시오. 반사우드 연맹을 구축하라는 말이오.”

“귀빈…께서는 사막의 일을 모르세요.”

“사막의 일은 모르지요. 나보다 더 적게 살아온 당신이 더 잘 알 거요. 하지만 나는 인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일은 더 많이 압니다.”

아이샤는 당신도 그래봤자 젊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내일 전령을 보내 볼게요.”

“에미르의 결단이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팀은 정말이지 아이샤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듯했다.

‘일이 잘 풀렸군.’

상민은 그녀가 내준 술을 스스로 조금씩 따라 마시며 감칠맛 나는 대추야자의 여운을 즐겼다.

아이샤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반사우드 연맹으로 고려가 얻고자 하는 바는 뭐죠?”

“아라비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아이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민이 정말로 순수하게 그것을 바란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그 말을 올곧이 이해하진 않았다.

열일곱 살의 어린 여자애도.

그녀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상민은 충실히 대답했다.

“그대도 들어서 알겠지만, 오스만은 아마 오랫동안 국체를 보존하기가 힘들 것이오. 저 위대했던 국가는 아마 몰락하겠지.”

자칫하면 그녀보다 족히 두 배, 혹은 두 배 이상을 살아온 남자의 처가 될 수 있었던 아이샤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럽의 열강들로부터 자유로운 아라비아의 정세를 원하오. 그대들이 고려와 계속 우호적으로 교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소만.”

뭐, 소소하게는 검은 물 좀 나는 해안가 땅들, 미래로 따지면 조약해안(Trucial Coast)을 일정 기간 조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실히… 당신들의 국가는 저 기독교인들과는 다르다 들었어요. 어느 누구를 먼저 핍박하지도 않고, 노예로 부리지도 않는다고.”

오만에서도 그랬지만, 아프리카와 중동의 땅은 꽤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무타파와 메리나, 부간다와 에티오피아의 상인들은 폭력을 수반한 유럽 상인들의 만행에도 꿋꿋하게 오만과 예멘, 이집트를 오갔고 이곳 아라비아에도 정보를 실어날랐다.

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것이다.

사막 한가운데의 부족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악역은 죄다 다른 놈들이 자청할 때 고려는 그보다 선심을 베풀며, 혹은 베푸는 척을 하며 도덕적 우위를 가지는 것.

혹자들은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냐 하며 눈앞의 이득을 위해 아집을 부리곤 한다.

하지만 연성권력이란 정말로 의외의 구석에서, 정말로 의외의 모습으로 발현되고는 한다.

그 효용가치는 지금 이 시대에 통계와 수식으로 집계하기는 너무나도 어렵겠지만 단순히 식민지 하나를 착취해서 나오는 것들보다 명백히 우위에 있을 것이다.

상민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다는 것을 아이샤의 말로 확인했는지 아까보다는 확연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칭찬 감사하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아이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상민이 그녀에게 말했다.

수백 살 먹은 어른이 소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치인 대 정치인으로서, 상민은 아이샤 빈트 유수프 알 알리와 하팀 빈 라시드 알 알리에게 약속했다.

“약속하겠소. 그대와 그대의 에미르에게. 고려는 이곳에 어떠한 유럽 세력도 간섭할 수 없는 통일 아랍만의 나라를 만드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공허했던 영국의 통일 아랍 왕국 설립 약속은 훗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레바논과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 위임통치령이라는 식민지와 다름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결과까지.

그 울분은 당해 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그렇기에 상민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사백 년 동안 군주와 시중, 그리고 일반인으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었던 것처럼.

“그대들의 나라는 주권이 보장될 것이며,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것이오.

이 땅의 에미르들은 제각기 자신의 부족을 대표할 것이고, 나아가 그들이 모여 당신들만의 나라를 대표할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겠지.”

아이샤는 이제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저 상민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랍 에미르들의 나라.

아랍 에미르 연방국.

사우드 가문만이 나라를 봉건적으로 소유하는 미래와는 다를 것이다.

“라쉬둔 칼리파(정통 칼리파)의 시대처럼요?”

아이샤는 무함마드를 계승한 네 명의 정통 칼리파 시대를 말했다.

물론 그 시대의 선거군주제는 입헌군주나 민주정과는 괴리감이 분명히 있었지만, 마냥 그 뒤의 전제정들과도 유사하진 않았기에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물론 어려울 것이오. 허나 우리가 그 길을 인도해주리다.”

그래,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만 둔다면 이들의 미래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아이샤가 어느새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다른 이들이 우리를 핍박한다면요?”

동쪽의 페르시아의 시아파.

서쪽의 베네치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무리들.

심지어 저기 위에서 내려온다는 흉악한 흰 피부의 슬라브 악마들까지.

그녀는 어떤 나라 하나를 콕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수니 세계가 가진 근본적인 두려움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극단주의적 이슬람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민은 이 자리에서 확언했다.

“그렇다면 그땐 고려가 응답하겠소.”

[작가의 말]

아랍 에미르 연방국은 아마 지금 영어표현으로 하자면 United Arab Emirates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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