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전쟁, 페르시아와 아라비아(7)
샴마르.
예멘의 타이(Tayy) 부족 일파에서 기원한 이 고대의 부족은 기원후 2세기 초반에 예멘을 떠나 아라비아의 하일 오아시스에 처음 자리를 잡았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들은 문명이 극적으로 진보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막 민족답게 정말로 느릿하게 살았다.
그래도 그 유서 깊은 전통 덕에 이들은 하일 오아시스 주변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해나갔으며, 마침내 자신의 부족의 이름을 샴마르라 바꾸게 되었을 땐, 하일을 거의 온전히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수많은 계파가 있는 샴마르 부족 중에서도 알 알리 씨족의 통솔 아래, 평온한 나날을 구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토록 재미없지만 잔잔한 삶을 살아갈 이들 부족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남쪽 네지드 고원에 위치한 사우드의 중흥은 그 주변 부족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통적 경쟁자였던 샴마르 부족까지 큰 피해를 입혔다.
지금 이들은 과거의 무크린 가문, 그리고 무크린 가문이 기원한 바니 하니파 부족과는 달랐다.
이전에도 바니 하니파는 샴마르와 많이 다투었긴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분쟁이란 일상적인 소소한 분란이었다.
작은 우물과 오아시스, 낙타와 말 몇 마리에 대한 다툼이었으며 금방 화해의 협정을 맺고 서로 결혼까지 하는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알 사우드는 유례없이 강력하며 잔혹한 상태였다.
군사적 재능과 카디자델리 아래에서의 단결 덕분에 사우드 가문은 주변 부족을 전부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정복에 성공했고 많은 부족들을 밟고 군림하기 시작했다.
샴마르가 조금만 더 일찍 저들의 위험성을 파악하여 저들이 리야드를 온전히 손에 넣기 전에 부족 적극적으로 대항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를 해서 무엇 하는가.
어차피 엎질러진 물, 젖은 모래를 움켜쥐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샴마르는 부족 내에서의 불협화음을 해결하느라 스스로도 바빴으니까.
일단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처음 샴마르는 저들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사우드가 침략하려는 부족에게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청년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다급해진 이들은 디리야, 리야드, 그리고 그 주변의 부족들을 일통한 사우드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종주국 오스만에게 손을 벌렸다.
오스만 술탄 아흐메트 3세는 러시아의 침략과 더불어 콘스탄티니예를 열강들의 조약에 의해 눈 뜨고 빼앗긴 끔찍한 상황에서도 이슬람 세계, 즉 후방 아라비아의 평화를 위해서 병력을 내 주는 관대한 선택을 내렸고, 이에 무려 이천 명의 오스만 정예보병―예니체리―들이 저 머나먼 부르사에서 하일 오아시스로 출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하마드 빈 사우드도 처음에는 그 흉악한 악명을 가진 예니체리들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품질 좋은 총기로 무장한 이천 명, 그것도 나름대로 유럽과 싸워온 예니체리들은 어중이떠중이 베두인 유목민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벽과도 같았으니까.
오스만 위에 러시아가 있고, 러시아 위에 고려가 있다지만, 이 베두인 부족들에게는 피부로 맞대고 살아온 오스만군의 위용만 대단해 보였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이교도들의 군대에는 별 관심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무하마드의 걱정이 무색하게 정작 파병된 예니체리들은 후퇴하여가는 국력과 비례하여 떨어지고 있는 규율과 반비례하는 부패도를 상징하듯, 느긋하게 길을 나서 정말로 한참 뒤에 하일에 도착했다.
심지어 도착하고 나서도 딱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베두인족이 뭐 기특하다고 투르크족이 적극적으로 나서겠는가.
매번 중앙에 반기를 드는 놈들인데.
도리어 이들은 사막 모기떼와 같이 이리저리 그들을 귀찮게 하는 사우드군에 대항해 나서서 싸우기 대신 그저 하일 오아시스에 앉아 식량과 물을 축내는 짐 덩어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는 사막에서는 당연히 제일 풍요로운 대지였으나, 오스만의 아나톨리아에 비할 만큼 풍요롭진 않았다.
일도 안 하고 드러누운 이천 명의 먹성 좋은 전사들을 부양하기에는 더더욱 힘든 곳이었다.
샴마르 부족은 금세 지쳤다.
지치고 화가 났다.
“칼리프께서 저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후, 저들은 약속된 것들을 단 하나도 이행하지 않고 있소. 저들이 과연 전사라 부를 인물들이오?”
“말이 심하시오. 씨족장. 저들이 들으면 어찌하려고….”
“적어도 부끄러움은 알 테니 차라리 잘되었네. 들으라면 들으라지!”
이 불만은 부족장에게도 옮겨붙곤 했다.
“에미르! 뭐라도 좀 해보시게!”
샴마르 부족의 회의, 씨족장들은 소리높여 상국―오스만―의 군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알 알리 씨족장이자 샴마르의 에미르인 라시드 알 알리는 이들을 달래고 오스만 병사들에게 전투 의욕을 불어넣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실로 곤란한 처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오아시스에 마침내 비극이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어날 뻔했다.
이곳에 와 있는 예니체리의 입장도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헤어져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파병 온 인간들은 대체 뭐가 좋아서 이곳에 와 있겠는가.
결혼이 가능해진 이후부터, 이 전투집단은 왕조 자체보다는 자신들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술탄의 권위를 틈타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던 것.
하지만 외지 생활을 하다 보면, 혈기 왕성한 군인들은 향수병과 함께 상사병에 걸리곤 한다.
그 상사병엔 육체적인 쾌락과 연관된 것들도 있었다.
이슬람의 규율에는 성별을 불문하고 정조를 중요시했지만,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가 훨씬 관대했다.
더군다나 엄격한 카디자델리가 투르크의 땅에서 축출될 만큼 다소 성애에 자유로운 투르크인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따라서 예니체리가 그들이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현지 베두인 처녀들을 희롱하자 문제는 실로 심각해졌다.
* * *
베두인들에게 여자란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다.
사람을 자산으로 놓는 것은 일견 무엄한 가치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은 부족의 자산이 맞았다.
젊은 남성이 부족의 현재를 수호하는 자산이라 한다면 여성들은 부족의 미래와 존속을 보장하는 자산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 부족은 멸망한다.
따라서 부족의 여인들은 사막기후에 걸맞은 베일을 쓰고 부족의 가장 안쪽에서 살며 부족민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복장은 엄격하지 않았다.
카디자델리의 영향을 받은 사우드 가문의 부족이 여인들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과 달리, 샴마르는 딱히 여인들에 대해 의복 규정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히잡은 아낙네들이 집안일을 할 때 실로 불편한 의복 중 하나였고, 일 안 하는 부잣집 여인들이나 입을 의복으로 보았으니까.
게다가 코란에서는 여성의 의복, 특히 겉옷과 쓰개를 정숙하고 편안하며 사적인 보호가 가능한 의복이라 규정했지, 머리와 얼굴을 얼마만큼 가리며, 눈을 얼마만큼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일이 규정하지는 않았다.
머리를 덮는 베일은 사도 무함마드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비단 이슬람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쓰고 다니는, 규정하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복이었다.
분명히 이 베두인 처녀들이 예니체리에게 희롱당한 것은 그녀들이 입은 의복의 잘못이 아니었다.
악질 카디자델리의 율법학자들은 여성의 선정적 옷차림이 남성에게 음행의 여지를 준다고 말할 터.
그러나 이는 음행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베두인 처녀들도 사막 민족답게 모래를 막기 위해 긴 겉옷과 베일을 충분히 입고 있었으니까.
자발 샴마르의 에미르이자 부족장인 라시드 알 알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처녀 무리에는 전장에서 전사한 동생의 자식이자 실제 딸이 없는 자신에게 딸 같은 행복감을 선사해주는 유일한 조카딸, 아이샤도 있었다.
자칫하면 이 보석 같은 아이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뻔했던 것.
다행스럽게도 순찰 돌던 베두인 남성들이 술에 취한 채 여인들이 기거하는 천막에서 행패를 부리던 예니체리들을 끌어내어 사건은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일단락되었지만, 다음 날 하일 오아시스의 분위기는 태양이 중천에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싸늘하다 못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놈을 어떻게 할 거요?”
“술에 취했다지만, 오지에 파견된 부하들의 불만이 지금까지 가득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해 주시오.”
“뭐…?”
“더군다나 그대의 부족 처녀들이 유혹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일 정도로 실로 아름답다 하더군. 하하! 아, 이 말은 물론 칭찬이오.”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
잘못을 저지른 것들도 본인들이고, 심지어 부족장의 조카딸을 희롱했는데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다고?
라시드는 까드득 이빨을 갈았다.
하지만 예니체리 지휘관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 그래 이건 어떻소? 그대들 베두인 여인들과 우리 병사들이 맺어지는 것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술탄께서 귀환하라는 명을 내리셔도 이곳에 남아 가족과 부족을 수호할 수 있지 않겠소?”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기도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사막에 대해 욕을 하면서 뭣이 어쩌고 저째?
이곳에 현지처를 두고 성욕을 채운 채 휙 떠나갈 종자들이 무슨.
“아, 그리고 그대의 조카딸 말인데….”
이 예니체리 지휘관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 어딘가 불길했다.
“에미르, 그대가 그대의 조카딸을 나와 이어 준다면 내 기필코 그녀를 내 다른 아내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리다. 또 내 가진 것은 저기 부르사에 있지만, 넉넉한 재화와 함께….”
제아무리 한적하다 못해 궁벽한 곳의 부족장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술탄에게 임명받은 아라비아의 에미르다.
하지만 예니체리 지휘관은 그런 사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실상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라시드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빼 들어 단번에 지휘관의 목젖을 그어버리려는 강렬한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 벌벌 떨리는 손을 억지로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양탄자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그 속내를 아는지, 혹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에미르의 딸이 손아귀에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려서 눈치채지 못했는지 예니체리 지휘관은 한바탕 자신의 제의를 라시드의 면전에 쏟아내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의 천막으로 되돌아갔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라시드는 가슴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 * *
그래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눈치는 보였는지, 예니체리는 마침내 디리야와 리야드를 노리고 행동에 나섰다.
“흥, 우리가 나서면 금방 해결될 놈들이지.”
“비루한 사막 놈들.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대체 어떻게 산단 말입니까?”
사도 무함마드도 베두인 손에서 길러졌지만, 그 사실은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의 기적을 행한 그의 대단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베두인은 그 이후로 여전히 야만인이었다.
투르크가 오스만을 세운 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니체리가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들자 샴마르 부족도 이에 호응해 군대를 일으키긴 했다.
불민한 일이 있었다고 지금 같이 싸우지 않는다면 이는 너무나도 근시안적인 선택이 될 테니까.
만약 승전한다 하더라도 오스만군은 그 승전의 이유를 오로지 자신들에게서 찾는 작태를 보여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승전이 패전보단 나았다.
하지만 오스만과 샴마르의 동맹은 정말로 발만 잘못 내디디면 깨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오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느냐는 물음은 아마 난전 중에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이고 모른 척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먼저 물어본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이들에게 맞서 광야에서 먼저 대기하고 있던 사우드군은 달랐다.
무구도, 병력도 열세였지만 이들은 무하마드 빈 사우드와 그의 노예 출신 장수, 살림 빈 벨랄 알 하릭의 지도 아래 공동의 목표를 위해 똘똘 뭉쳐 있었다.
하나 된 지휘권과 높은 사기.
그리고 그 차이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훗날 알 마즈마의 전투라 불릴.
그 아무도 예니체리의 패배를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우드 가문은 알 마즈마 전투에서 손실된 병력들을 한참 상회할 만큼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사우드가 승리의 영광을 누릴 사이, 오스만과 샴마르는 패배의 비통함을 맞이했다.
앞선 무구와 장비, 훈련도에도 불구하고 이천 명의 예니체리 중 하일 오아시스까지 살아 돌아온 이들은 오직 삼백팔십구 명.
이들도 아마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싸그리 죽었을 것이었다.
나머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사우드의 포로가 되었고, 모든 무구를 압수당한 채 감옥에 던져졌다.
샴마르 부족은 오스만군보다도 더한 피해를 입었다.
부족장, 라시드 알 알리는 전사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로로 잡힌 자들도 멀쩡하진 못했다.
무하마드는 예니체리를 포로로 삼아 나중에 오스만과 협상할 수 있는 패로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같은 베두인인 샴마르 부족은 아니었다.
샴마르 포로들은 모조리 목이 잘렸으며, 이는 ‘선물’로써 하일 오아시스에 보내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 아버지!”
어린 청년이 아버지의 목을 잡고 펑펑 울음을 흘렸다.
이해는 가는 비통함이나, 차기 족장으로서의 모범은 아니었다.
현명한 이라면 아버지의 주검에 대고 복수를 다짐하며 부족들을 단결시켰겠지.
그러나 아직 이 청년, 아니 소년은 그럴 만한 정치적 능력 없이 그저 비통함에만 몸을 맡기고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
이처럼 전사한 라시드의 뒤를 이어 젊다 못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청년 하팀 빈 라시드 알 알 리가 알리 씨족장에 올라야만 할 정도로 알 알리 씨족은 좋지 못했고, 이는 다른 샴마르의 씨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샴마르 부족의 미래는 바야흐로 경각에 달했다.
예니체리들의 앞선 무구와 보급품들은 사우드의 전리품이 되었고, 이 기점으로 사막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하일 원정 대신 사우드가 주변의 불안 세력, 즉 후푸프와 부라이다를 함락시킬 때도 샴마르는 그저 그 상황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들이 두 오아시스를 점령한 뒤에는 어디로 향할지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 *
하팀은 뭘 할 수가 없었다.
알 알리 씨족이 샴마르에 공헌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의 권위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씨족이 전부 다 힘든 상황이지만, 이제는 샴마르라는 같은 이름이 무색하게 씨족들끼리의 불화가 표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범을 보여 가문의 청년들이 많이 나간 알 알리와는 다르게 알 리야, 알 파디하, 알 카루사, 알 루베야, 알 마니는 그래도 몇 명의 청년들을 남겨두고 있었으며 이들은 어린 꼬맹이의 명령을 들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너는 샴마르의 에미르도, 알 알리의 셰이크(Sheikh)를 칭하기에도 너무 어리지 않느냐!”
하지만 어린 하팀도 알고 있었다.
자신 같은 꼬맹이가 물러난다면, 그다음엔?
샴마르는 씨족들끼리 또 차기 에미르의 지위를 두고 다투겠지.
그렇다면 그들 부족에게 기다리는 미래는 오직 파멸뿐이다.
의외로 이때에는 살아남은 예니체리들이 하팀의 권력 유지의 유일한 근간이었다.
“술탄께서 임명하신 하일 오아시스와 자발 샴마르의 에미르는 알 알리 씨족이오. 그대들은 이를 어길 수 없소!”
“…….”
꼴랑 사백 명 정도만 살아 돌아왔다 하나, 이 병력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 뒷배경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우드가 지금 알 마즈마 전투 승전의 기세를 몰아 하일 오아시스에 바로 짓쳐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예니체리 포로를 잘 대접해주고 있는 이유도 오직 딱 하나, 이슬람 수니 세계를 지배하는 칼리프이자 오스만 술탄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정말로 진심으로 술탄이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두고 사우드부터 정벌하고자 한다면, 사우드는 기필코 멸망할 것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하팀의 처소에 사촌누이 아이샤가 찾아왔다.
나이는 꽃다운 열일곱.
열넷에 불과한 하팀과는 세 살 차이로, 이들은 아이샤가 부모를 잃은 뒤에는 마치 친남매처럼 서로 애틋하게 아끼며 살아왔던 사이였다.
사실 남매의 이별은 금방 찾아올 예정이었다.
조혼이 팽배한 이슬람 세계에선 열일곱이면 충분히 결혼할 나이였으니까.
전 부족장 라시드의 꼼꼼한 사위 선별 과정이 제대로 끝났다면 그녀는 행복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이샤가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사막의 꽃, 자말 샴마르의 보석이라고 불린 아름다운 처녀는 그녀 스스로를 희생해 샴마르 부족의 안위를 살리기로 결정한 모양.
자신이 당한 그 치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숭고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지혜롭고 현명했다.
“나를 저 예니체리 지휘관과 결혼시켜 줘.”
하팀이 경악했다.
“누나 미쳤어?”
이미 결혼까지 해서 애들도 있는 사십 대 아저씨를 꽃다운 여자와 결혼시킨다고?
누나를 아낀다면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아이샤는 꿋꿋했다.
“이 방법밖에 없어. 너도 알잖니.”
하팀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씹었다.
아마 에미르, 아니 에미라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그녀일지도 모른다.
“혹시 몰라. 그가 겉보기에는 저렇게… 경솔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아내에게는 충실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그러나 하팀은 누나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부족을 위한다면, 그는 그렇게 해야 했다.
이 이외의 수단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이 예니체리 지휘관이 사촌누이와 결혼해 준다면 지휘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하팀과 알 알리 씨족을 지원해 줄 것이었다.
예전에는 오만했고 지금은 대패에 풀이 죽어있지만, 그래도 이천 명이나 되는 예니체리를 이끌던 자는 마냥 허투루 볼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 같은 사막 일개 부족의 에미르보다는 훨씬 높은 권력을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르사에 간다면 물론 술탄의 호된 질책을 받겠지만 다시금 지원군을 얻어낼 수도 있겠지.
하팀은 누나를 붙잡고 울었다.
도리어 아이샤가 그를 혼냈을 만큼.
“하팀! 너는 에미르야. 셰이크로서의 모범을 보여! 소소한 가족의 정에 부족의 안위를 저버릴 셈이야?”
하팀은 마침내 이틀 밤을 고민하며 꼬박 새우고 결단을 내렸다.
지휘관은 그 와중에도 흔쾌히 승낙했다.
대부분은 아이샤의 미모에 반해서 내린 선택이었겠지만, 아마 조금은 복수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팀은 그렇길 바랐다.
하지만 결혼식이 이루어지기 불과 며칠 전, 엄청난 비보가 하일 오아시스에도 퍼졌다.
“술탄께서…… 술탄께서…!”
예니체리 지휘관은 부르사에서 온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난 부르사에 가야 하겠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술탄이 유폐되었다.
그것도 동료 예니체리들의 모략에 의해.
그가 술탄의 측근, 그리고 패전한 장수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예니체리 지휘관은 아마 자신의 운명마저도 지극한 혼란에 싸여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그의 재산도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당연히 결혼식은 취소되었다.
예니체리 지휘관은 수도로 떠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하팀도 이 결혼에서 얻을 것이 없어졌으니 취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침내 아이샤가 그녀의 참혹한 신세에서 벗어났고, 하팀은 그녀의 품에 안겨 다시금 울었지만, 아이샤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신께서 빼앗아 가셨으니.
아 낙타 탄 초인이여.
소녀가 이 사막에서 목놓아 당신을 부르고 있는데.
어느 천고의 뒤에 오시렵니까.
그녀의 기도는 음성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예니체리가 하일 오아시스에서 모두 사라진 그때.
아드 다나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자연에 맞서 묵묵히 걸어온 남자는 힘든 여정을 증명하듯 온몸에 모래가 끼지 않는 곳이 없었고, 먼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때문에 그 몰골은 실로 너저분했으나 그의 두 눈동자에서, 아이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
그녀의 선지자가 마침내 이 땅에 도래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