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전쟁, 페르시아와 아라비아(3)
사우드 가문은 훗날 아라비아에 들어설 왕조,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명의 근원이기도 한 부족의 이름.
아라비아의 면적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네지드(Najd) 중앙고원에서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토착 부족들 중 하나였다.
지금은 디리야라는 곳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위대한 혐성국 대영제국에 의해 지원을 받아 아라비아의 패권을 움켜쥐는 주인공이라 봐도 무방했다.
‘세계사 문제의 절반 이상은 영국이라는 말은 웃어넘길 농담만은 아니야.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해 놨는지.’
상민 또한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금을 들고 세계 역사를 주물럭거리는 상황.
후대에 미칠 여파를 따지고 국가적 도덕성과 연성권력을 추구한다고 하나 그보다 먼저 근본적인 자국의 이익부터 재고하는 입장이다.
가끔은 그도 충분히 잔혹했고, 충분히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민의 여러 행동들도 대영제국의 놀라우리만큼 혐오스러운 행동들에게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태양 앞에 반딧불이라고 할 만큼.
특히 중동에서의 그들의 혐성은 빛을 발했다.
아마 이슬람 급진주의가 발흥한 원인 중 꽤나 많은 부분은 대영제국의 몫일 터.
3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그야말로 전 이슬람의 재앙으로 여겨졌던 잉글랜드의 군주 사자심왕 리처드까지 가지 않아도, 제국주의 대영제국은 이후 두고두고 중동과 이슬람에 크나큰 민폐를 끼쳤었다.
오스만을 엿먹이겠다고 이슬람 근본주의 꼴통 사우드 가문을 지원해서 두고두고 큰 후환이 될 와하비즘을 반쯤 그들의 손으로 후원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근현대 중동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끔찍한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이스라엘을 만듦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일으킨 주범이었지.
나치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해 이슬람을 해친다?
정말로 놀랄 만큼 멍청한 생각이지 않은가.
물론 고려는 상민은 물론 해씨 황조가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 한 시오니즘을 지지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유대인들만의 땅을 원한다면, 토착 원주민은 물론이고 아무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었던 무인도를 골라 적절한 가격에 구매한 뒤 새로 나라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마저도 고려는 태평양의 무인도를 그들에게 팔 생각이 없었으니 어디 뭐 인도양의 세이셸 같은 곳에다가 국가건설을 해야 하겠지.
어쨌든, 지금은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우드 가문은 대영제국의 지원을 받고 승천한 것이 맞지만,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대영제국은 물론이고 잉글랜드나 알비온 연합과는 딱히 교류한 적도 없다.
하지만 괜히 주인공이었겠는가.
사우드 가문은 대영제국의 지원이 없어도, 이미 이 시기에 슬슬 발호하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맨땅부터 자수성가한 왕조들은 흔치 않은 법이다.
정말로 밑바닥부터 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명나라가 특이한 경우였고(사실 그조차 백련교를 이용했지만), 대부분은 왕건과 이성계처럼 어느 정도의 기반이 있는 사람이 왕조를 개창하기 마련.
사우드 가문의 이름이 기원한 시조, 사우드 빈 무하마드의 아들 무하마드 빈 사우드(Muhammad bin Saud)는 지금 휘청거리고 있는 오스만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만의 왕조를 개창할 생각을 노골적으로 품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건강 문제로 은거하자, 무하마드는 정권을 제대로 잡기 위해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형제들을 죄다 죽여버렸다.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능력도 출중하다니, 어찌 이방원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기존의 선조로부터 내려오던 알 무크린(Al Muqrin)의 가문명 대신 가문의 세력을 크게 불린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알 사우드(Al Saud)의 가문명을 쓰며 본격적으로 아라비아의 패권에 대해 야심을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오아시스의 일이 이곳 오만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린다는 소리는, 정말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소리겠지.
시기는 꽤 일러 보였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니, 충분히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셀림브리아 조약으로 오스만의 실태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자국 수도이자 그토록 아끼던 갈망의 도시를 눈 뜨고 빼앗길 만큼 참담한 꼬라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비유하자면, 공중장소에서 옷을 다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흉측한 꼴일 터.
이렇게 원역사보다도 빨리 오스만이 흔들린다면, 사우드는 더더욱 이른 시점에 전면에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크린 가문, 아니 사우드 가문을 그토록 걱정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단어에 관용이라는 표현은 없을 게요. 급진적인 카디자델리를 가장 악독하게 잘 써먹을 세력이라 이거지.”
다른 방면에선 무지했으나 이상한 방면으로는 현 상황을 꽤 잘 인식하고 있는 상민을 보던 오만의 학자가 부정은 하지 못하고 낯빛이 어두우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렇습니다만.”
네지드 고원의 혼돈은 오만도 바라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근본주의 수니파들이 이바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그들도 확실치 않았다.
게다가 현 오만 술탄은 지금 좀 몸이 좋지 않았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는 적절한 외교적 행동을 취하기엔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렇다면 선생께 묻겠소. 그들에 대항하는 자가 하나도 없소?”
아라비아의 모든 부족이 카디자델리를 환영하고, 사우드 가문의 지배를 처음부터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반대 세력은 존재할 터, 그것이 역사의 섭리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견훤의 후백제와 겨루었듯, 네지드 고원 내에서도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세력에 반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없다면, 혹은 있었다가 없어졌다면 정말로 문제가 심각하단 소리겠지.
“…….”
오만의 학자가 눈을 감은 채 수염을 쓸어내리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디리야 오아시스의 무크린 가문은 사우드 가문으로 이름을 바꾸기 한참 전부터 전통적인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지요. 북서쪽으로 오래 가다 보면 나오는 하일(Haʼil)의 오아시스에는 샴마르(Shammar) 가문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부터도 무크린 가문과 항상 마찰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렇소?”
“샴마르는 사우드와는 달리 오스만과 가까이 지냅니다. 그들의 오아시스는 오스만에서 메카와 메디나에 순례하기 위해 지나는 주요한 경로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또한 그들은 과거엔 한발리를 따르고 지금은 카디자델리를 이용하고 있는 사우드 가문과 달리, 오스만과 같은 하나피 마드하브를 따르며 순례자들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합니다.”
상민은 기가 막힌 대답에 무릎을 쳤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좋은 정보를 곧바로 알아낼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오만의 학자가 먼저 웃으며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슬람 사회는 종교 이전에 혈연과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샴마르 또한 상당히 큰 대부족이니 이곳 오만에도 그들과 인연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씨족과 부족사회의 특징이 아직 남아있는 아라비아는 국토 자체는 광대한 면적을 자랑하나, 몇 다리를 건너면 어찌어찌 가문끼리 다 엮여 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심지어 예멘의 시아와 오만의 이바디, 네지드 고원의 수니까지.
그래, 반대로 말하면 이런 곳에서조차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지곤 한다는 거다.
“실로 좋은 정보로군, 감사하오.”
상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곁에서 이슬람에 대해 알려준 오만의 학자가 덩달아서 일어났다.
몹시 당황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상민은 금방이라도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저 먼 사막의 오아시스로 갈 것처럼 보였다.
오만 학자의 눈에 비친 이 상당히 특이한 젊은이는 아득한 바다의 심연과도 같은 혜안과 먼 옛날의 신화 속에서나 나올 정도로 강건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체할 필요가 있겠소? 충분한 식수와 음식을 챙긴 채 그곳에 직접 걸어 가보려 하오.”
“그건 미친 짓… 아니, 극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동안의 인연 덕분인지 오만인 학자는 이 고려인 귀족 청년에게 꽤나 감화된 상태였다.
그가 이슬람을 앞으로도 절대 믿지 않을 불신자라고 확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무의미하게 죽길 바라진 않았다.
이 사람은 분명히 사막을 얕보고 있다.
거대한 대자연의 힘은, 일개 인간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모래의 바다에서 일반적인 사람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탈진하여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영토인 디리야와 리야드는 하일보다 더 가깝다.
그들이 고려인들에게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좋게 좋게만 넘어갈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친 짓이라, 당장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
그러나, 이 야성미 넘치는 청년은 도리어 오만인 학자의 말실수에 더욱 자극을 받았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 무슨 객기란 말인가!’
“내가 떠난다면 선생께서도 다시금 무스카트로 돌아가야 하시겠지요. 그동안 고마웠소이다.”
작별의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상민은 가득 들어찬 은화 주머니를 그에게 건넸다.
오만 학자는 곧바로 그것을 사양했다.
인품이 좋고 종교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귀빈께서 주신 책들도 상당히 귀하니 재물을 받을 순 없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신 게로군. 부디 그 책들을 그저 하람으로만 여겨 불태우지 않으면 좋겠소. 그리고 선생, 나 또한 그대의 술탄과 같이 지고한 신분이니 내가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내 체면을 부끄럽게 하지 마시구려.”
오만의 학자는 그의 자연스러운 말에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그는 범상치 않은 신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막 횡단은 다시 숙고해주심이 어떠십니까? 적어도 혼자 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기적인 카라반(캐러밴)에 합류하시거나 숙련된 길잡이와 낙타를 빌려 이끌고 가시지요.”
“충고는 고맙소. 하지만 아라비아의 사막들은 여러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고행을 겪으며 홀로 걸어간 신비로운 땅이라 들었는데 그들의 발자취를 좇는 것이 어찌 쓸모없기만 하고 그저 위태로운 일이라고만 할 수 있겠소이까?”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학자는 도저히 그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아, 선생의 존함을 아직 물어보지 않았구려.”
“…저는 아킬 빈 무하마드 알 야루비라 합니다.”
“역시 그대도 왕족이었군.”
혈연의 역사에 정통하기 위해선, 일단 그 가문의 위세가 제법 번듯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으로 먹고사는 대신 율법과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힘들 테고.
술탄 또한 귀빈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어중이떠중이를 붙여주진 않았을 것이다.
수틀리면 감시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는 현 오만 술탄의 먼 친척뻘이 확실했다.
“하하, 귀빈께 오해를 풀어드리자면, 같은 성씨를 지닌다 하더라도 왕족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알 야루비를 가문명으로 한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이맘이자 술탄과 같은 선에 놓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미래의 일은 모르는 일이지요. 어쨌든 선생의 존함을 기억하겠소이다.”
상민의 이름이야, 술탄과 이 학자에겐 가명으로 알려주었다.
학자는 그것을 짐작한 듯했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이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같은 청년은 학자가 짐을 챙겨 청년의 거처를 빠져나올 때 이미 낙타에 무언가를 싣고 있었다.
학자는 그 광경에서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마 저 청년은 사막조차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눈동자는, 아마 가장 지혜로운 이맘조차도 보여주지 못한 종류의 현기였으니까.
완성되지 못했던 자들이 고행을 통해 완성되었다 한다면, 청년은 단지 고행을 통해 먼저 걸어간 자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하고 있어 보였다.
주장하지 않는 자, 다만 이해하려 하는 자.
그리고 또한 앞서 아는 자.
순간 아주 아주, 아주 불순한 생각이 아킬의 머리를 스쳤다.
코란에서는 오직 스물다섯의 예언자를 인정한다.
그중 알라가 보낸 자(聖使, 성사)는 모두 넷,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와 무함마드만 인정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이후엔 심판의 날까지 예언자는 출현하지 않는다고도 믿었다.
‘허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하는 감정은 대체 무엇인가.
그를 가르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민이 아킬로부터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배웠듯, 아킬 또한 상민으로부터 세계와 고려에 대해 알아갔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엄청날 정도로 압도적인 지식과 지혜를 자랑했다.
대체 자신이 마주한 사람이 그저 일반적인 사람일까, 정말로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러나 아킬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에 경악하며 빠르게 샤하다를 읊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시다.’
하지만 아킬의 손은 그가 멀어진 이후에도 계속 떨리고 있었고, 아킬의 시선은 그의 등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그가 걸어간 모래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사우디아라비아 치세의 디리야는 훗날 더 확장해서 리야드와 합쳐진 뒤 수도이전을 통해 지금의 리야드가 됩니다.
거기가 거기니, 위례성과 서울의 관계라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