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전쟁, 페르시아와 아라비아(2)
커피를 마시고 대추야자와 무화과를 먹으며 듣는 저녁의 수업 시간은 꽤나 흥미가 있었다.
“귀빈께서도 커피를 즐겨 드신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이 음료를 즐기고 있소.”
오만의 학자는 이어진 상민의 말에 감탄했다.
이슬람의 음료라 칭해진 커피니만큼 이슬람 학자들이 이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은 당연했겠지만, 유럽은 물론이고 이역만리 떨어진 고려와 조선에서도 학자들과 학생들이 커피를 죽어라 마셔대고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겠지.
그것이 세계화였고 이슬람도 오만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다만 대추야자는 아니었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지금껏 고려에 전래되지 못했지만, 직접 와서 먹어보니 대추야자는 몹시 매력적인 과일이었다.
상민은 은연중에 먹던 씨를 슬그머니 모아두었다.
물론 상민도 양심이 있었기에 이 수업 시간을 온전히 흥미로만 듣고 있지는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민은 이 무슬림들에게 다소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상민이 가진 이슬람에 대한 불호를 차치하고 원역사와 지금의 이슬람 문명권을 비교해 보았을 때, 지금의 이슬람은 그가 알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많이 몰락해버렸으니까.
신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유럽의 모략을 종교 개혁과 해군 증강,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막았더라도 유럽의 역량 투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선정된 것은 아프리카와 중동이었지.
아프리카마저도 고려가 훼방을 놓아 무타파와 메리나, 콩고 같은 나라들을 지원한 이후부터는 유럽인들의 맹렬한 팽창욕은 오로지 북아프리카로 향했으며,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가 뚫린 이후로는 아랍과 서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다소 일찍부터 종교 개혁이 터지고, 거대한 현자타임 이후 종교의 구속에서 조금씩 해방된 유럽은 더 이상 십자군 같은 쓸데없는 광신적 짓거리 대신 속물적인 탐욕과 이해득실을 따지며 움직였지만, 그렇기에 훨씬 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로 인해 로마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오스만도 그 엄청난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한 채 몰락했고 북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이 베네치아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물론 동시대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일 뿐, 상민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역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미안한 감정이 있더라도 상민은 아마 열 번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비슷한 선택을 내렸을 것이고.
하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해묵은 갈등의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 나중에 괜히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날 여지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고려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안정적인 경제적인 이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도, 이슬람은 변화해야 했다.
그럼 상민처럼 21세기에서 살아보았던 사람이라면 의문이 생기는 게 정상일 것이다.
이들, 무슬림은 변화할 수 있는가?
이슬람은 변화할 수 있는가?
과거 이백 년 전, 백오십 년 전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면, 아마 상민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전생에서의 극단주의 무슬림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샤리아(이슬람법)’에 입각한 근본주의적 생활방식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지 봐 왔던 상민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서양적 편견으로 규정하기엔 무슬림들의 신념은 극도로 편협해 보였고 너무나 이중적이었으니까.
겉으로는 이슬람포비아를 하지 말라면서 자신들은 샤리아 운운하며 배교자와 불신자들을 때려잡는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장인가.
수많은 이슬람 모더니즘과 개혁이 실패한 걸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민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선 예전 그의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어쩌면 이슬람조차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너무 늦지 않게 ‘적절한 시대’에 ‘적절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이들 안에 자리한 염증이 곪아 터지기 전에 미리 항생제를 주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아마 상민이 생각이 바뀐 근본적인 원인은 마라케시의 변화였을 것이다.
유럽의 대동양 세력 투사 봉쇄를 위한 관문 중 하나인 이 이슬람 국가는 나스르 왕조가 들어선 후에 거의 고려의 번국과도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들은 자국의 상황에 큰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방은 적이고, 기독교인들이 언제고 다시금 그들의 고향을 침략할 수 있었으니까.
내부적으로는 기나긴 내전으로 외부의 망명 에미르가 정권을 차지할 만큼 혼란했으니 자체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마라케시의 술탄이 자신의 공주를 바다 건너의 이교도에게 보낸 것은, 내부의 율법 학자들에게는 큰 비판 거리였겠지만 국제정치적으로서는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동양에서의 팍스 코리아나가 확고하게 구축되자 더 이상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으니.
고려의 그늘 아래, 마라케시는 이베리아에 위치한 과거의 적들이 지브롤터나 멜리야를 넘볼 수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관대한 제국]
저 멀리, 남아프리카에 있다는 무타파와 콩고의 만종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팍스 코리아나는 팍스 로마나나 팍스 이슬라미카, 혹은 팍스 시니카와 몽골리카 같은 시대들보다도 더욱 관용적이며 실제적인 평화를 선물해 주었다.
그러니 이들의 종교 또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종교마저도 배가 부르면 온화하게 바뀌기 마련이다.
또한 실리적인 외교를 위해선, 마냥 종교적인 똥고집을 부리는 것도 절대 현명하지는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면 더욱더.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한다면 무슬림 여자는 비무슬림 남성에게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고려 황후로 들어간 나디아 빈트 무함마드 빈 하산 알리 나스르는 아주 엄격한 율법에 의한다면 배교자에 준하는 취급을 받을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 본인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자식, 고려 황제들은 명백히 이슬람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라케시의 사람들 중 감히 그녀를 배교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녀 덕에 나라와 신민들이 구명을 얻었는데.
그렇기에 나스르 왕조와 그들이 다스리는 마라케시는 종교적 극단주의로 빠져들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마라케시의 무왈라드 수니 이슬람은 후우마이야의 자하리파와 말리키파에서 기원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차라리 수피파(Sufism)라고 불릴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내륙에 위치해 발전에 한계가 있는 전통적인 도시들 마라케시와 페스 말고도 탄자(탕헤르)나 라바트 같은 상업 도시들의 무왈라드 무슬림들은 이미 극도로 세속적으로 바뀌어 있었고 할랄 음식과 음주에 대한 관용 이외에도 코란과 하디스에서 명시한 율법들을 은근히 우회하여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사업에 방해가 된다며 살라트(다섯 기도)를 제시간에 드리지 않고 나중에 몰아서 드린다는 자들도 있었다.
아마 이 실태를 고리타분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알게 된다면 경을 치겠지.
그러나 상민은 이를 반겼다.
종교인은 믿는 종교를 불문하고 교회나 성당, 모스크를 가는 것을 까먹거나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종교에 대한 열정이 식을 때 가장 건전하다고.
종교적으로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맞았다.
기독교도 바뀌었으니, 이슬람도 바뀔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상민이 이 이슬람의 본고장인 아라비아반도에서 해야 할 것은 마라케시의 경우처럼 고리타분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생각들 자체를 바꾸어 놓든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급진주의의 세력이 오로지 소수의 생각으로만 남아있도록 하는 것이겠지.
너무 늦기 전에.
* * *
사실 이슬람은 하나로 싸잡아 묶어 설명하기엔 너무 종류가 다양했다.
주류 수니파와 시아파도 있었고, 오만처럼 그 둘에 속하지 않는 종파도 있었다.
오만은 이바디파로, 수니와 시아 이슬람과는 완전히 별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꽤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슬람 종교에 대해 바라보고 있었다.
“수니가 지금 왜 이렇게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 흐름으로 되돌아가려는지 궁금하오.”
이슬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마친 뒤 상민이 처음으로 질문한 것은 바로 현시점에 왜 수니가 빠르게 보수적인 성향으로 회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왜 이전까지 압바스와 우마이야조의 관용적 이슬람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꼴통이 되어가는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리가 없으니, 명백히 그 문제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 위해선, 수니가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만의 학자는 커피로 목을 축였다.
“시아파의 사파비 왕조 이후, 이슬람 세계는 거대한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전까지는 둘 간의 대립이 심각하지 않았나 보오?”
“사파비 왕조 이전에 수니와 시아의 대립은 단순히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 간의 갈등으로 여겨졌지요.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아마 교리가 뭐가 정확히 다른지도 잘 몰랐을 겁니다.”
지금도 아랍의 문해율이 중세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소리였다.
“하지만 사파비는 영리하게도 그들의 엉성한 기반을 종교적 갈등을 부각시키면서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즉 이란계 민족적 요소를 결부시키면서 칼리프와 메카, 메디나를 통제하는 오스만에 대항할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는 혹독하나 효과적이었다.
기존에 이란의 땅에 들어선 시아파 왕조들은 수니파 봉기에 매번 시달렸고 급기야 수니파로 회귀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나 잔혹할 만큼 수많은 피를 보면서 시아의 개종을 성공시킨 사파비조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덕분에 강력한 시아파 정권을 구축했고, 수니에 대적할 만큼의 기틀을 만들어냈다.
“이미 한번 십자군으로 이슬람을 공포로 몰아넣은 기독교인들은 시시각각 강해져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손에 쥐었습니다. 게다가 사파비 페르시아는 기존까지 단순히 세력이 한미한 이단으로 여겨진 시아파를 단숨에 수니를 위협할 세력으로 끌어올렸지요. 거기에 더 나아가 기존 이슬람의 종주국이라고 볼 수 있는 오스만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며 그 체면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수니가 느낀 위기감은 상민도 공감할 수 있었다.
“이슬람에서 카디자드 무함마드(Kadızade Mehmed)가 주장한 개혁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카디자델리(Kadızadeli), 수니의 종주국 오스만에서 일어난 개혁운동.
종교적 구속에서 벗어나자는 개혁운동이 아니라, 더욱 순수한 종교 생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기독교로 따지면 청교도적 운동이라 비유할 수 있겠지.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가 그러하듯, 예전의 순수한 종교적 생활로 회귀하자는 말은 상당히 과격하며 급진적 교리를 내포하기 마련이었고, 이는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오스만에게서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였다.
오스만의 수니 마드하브는 이전까지의 이슬람 주류 마드하브였던 하나피파.
수니에서도 몹시 관용적이었으며 이성적인 마드하브였다.
20세기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21세기의 터키가 이슬람권 중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속적이며 살 만한 나라인 것도 다 하나피파의 유산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카디자델리파는 오스만의 술탄들에 의해 탄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모두 말소되지 않았고 아나톨리아를 떠나 이곳 아라비아의 반도에 스며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와하비즘 이전에 카디자델리가 있었다, 이 말이로군.”
상민은 무심결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예? 와하비즘이 무엇입니까?”
“아, 실언을 하였소. 계속 말씀하시지요.”
“이곳 아라비아의 베두인족은 튀르크가 주도하는 수니 질서에 기본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지요. 오스만을 비판하는 카디자델리가 흥행할 요소는 충분합니다.”
아랍어를 쓰는 민족은 모두 아랍인으로 분류한다지만, 솔직히 민족 다양성을 묶기에는 언어의 분류는 너무 나약했다.
베르베르인과 이집트인, 베두인과 튀르크인, 페르시아인같이 제각기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창적인 문명을 이룬 자들을 어찌 하나로 묶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주류 수니 학파는 한발리파지요.”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코란과 하디스를 가장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곳이 아니오?”
“맞습니다. 존재와 동시에 말씀이 있었다 주장하는 자들이지요.”
오만의 학자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존재 이후에 말씀이 ‘창조’되었다고 여기며 코란의 절대존재성을 경계하는 현시점 오만의 이바디파들은 한발리파의 주장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저도 오만에 있어 서쪽과 북쪽의 상황은 뒤늦게 듣는 입장이지만, 카디자델리가 한발리파의 주류 학풍과 융화되어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에 퍼져나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상민도 훗날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학풍을 알고 있었다.
그 흉악한 악명은 아마 21세기의 일반적인 사람이라도 국제적 이슈를 다룬 신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몇 번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와하비즘(al―Wahhābiyya).
이 대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은 눈덩이가 굴러 굴러 나중에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사상적 기원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행사하는 종파였다.
과장이 있겠지만 와하비즘이 없었다면 사이드 쿠틉도 없고, 사이드 쿠틉이 없었다면 탈레반도 알 카에다도, ISIL도 없었을 테니.
상민도 처음 이곳에 와서 학자들에게 넌지시 이를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학자의 이름은 그도 몰랐다.
다만 물어보면 어찌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와하브야 상당히 흔한 이름과 성씨겠지만, 그 정도 위세 높은 학문을 집대성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닐 터.
그러나 당사자의 운명이 바뀐 것인지, 시기가 이른 것인지 와하비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타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스만의 이른 위기 덕에 일찍부터 전성한 카디자델리즘이 완벽히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상민의 눈에는 와하비즘이나 카디자델리즘이나 꼴통적인 면모로는 도긴개긴이었다.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은 필연적인가?’
하지만 이내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와하비즘은 와하비즘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
종교는 항상 그렇듯, 그 종교를 후원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에 의해 흥망 여부가 결정되곤 했다.
카디자델리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 위해선 종교적 퍼즐 조각 말고도 또 다른 조각이 필요했다.
사우드(Saud) 가문이라는.
카디자델리즘이 와하비즘을 대체한 현 상황과는 조금 다르게, 정치적 조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작가의 말]
독자분들의 이해를 위해 아주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수피즘 : 수니, 시아에 관계없이 세속적이며 온건주의적, 신비주의적인 학풍입니다.
또한 21세기 모로코의 주된 이슬람 학풍이기도 합니다.
하나피파: 이슬람 대다수의 마드하브고 터키와 이집트, 시리아와 요르단, 이라크의 주류이기도 합니다. 온건적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한발리파 : 중동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 마드하브며 몹시 보수적입니다.
한발리파의 영향 아래, 악명높은 와하브파와 살라프파가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ps.
[작가의 말]
푹 쉬고 돌아왔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힘내서 집필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