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림브리아 조약
해원과 블라디미르는 현 상황에 대한 몇 가지 타협안을 간단히 조율했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실무를 담당할 신하들을 회담장에 보내고는 자신은 먼저 모스크바로 귀환하기로 했다.
대북방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 덕에 너무 오래 수도를 떠나있었다는 것을 전쟁이 끝난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헤어지기 전, 두 명의 황제는 사진을 찍었다.
“자, 폐하들께서는 이쪽을 봐주십시오!”
사진사가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닦고 황제와 차르가 나란히 웃고 있는 광경을 찍었다.
중요하고 위태로운 시대, 실로 어마어마한 인물 두 명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으니, 사진사는 촬영 이후에도 손을 덜덜 떨면서 인화를 할 것이 분명했다.
이 사진과 이곳에서 열릴 협정으로 해원도 꽤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해원 또한 완전히 순수한 목적으로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이 고려를 보는 시선에는 어쩌면 ‘그들 또한 러시아와 같은 패권적 면모를 언제든지 드러낼 수 있다’라는 우려가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순방함대의 일주 이후에는 더더욱.
사실, 이베리아인들에게 물어보라 하면 그들은 동유럽의 러시아나, 대서양의 고려나 똑같은 존재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고려가 러시아와는 다르게 조금 더 책임감 있는 국제사회의 지도자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지 말고, 평화적 질서를 구축해달라고.
채찍을 휘둘렀으면, 당근을 흔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고려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세계의 평화를 선보일 수 있는 위엄을 지닌 나라는 오직 고려가 유일했으니.
이전에도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지원하고, 또한 보호국들을 세우면서 느끼긴 했지만, 경신대기근과 그 이후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고려의 국민들은 비로소 ‘도덕적 만족감’이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국가의 도덕적 행동은 구성원의 자긍심과 삶의 만족도에도 몹시 큰 영향을 끼쳤다.
정상적이고 자유적인 학풍이 있는 나라면 더더욱.
그러니 고려의 해씨 황실은 이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연방의 국민들과 전 세계에 보여주어야 했다.
우리가 마냥 이 위태로운 시기에 손을 놓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했다.
이 사진이 본국에 가면 대대적으로 신문에 실릴 테고, 그들은 해원과 황가의 자비로움과 평화에 대한 추구를 알게 되겠지.
황실은 또다시 국내외적으로 인기가 오를 것이고, 모두가 칭송할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해원의 속셈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사진을 찍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위대한 두 국가’라는 틀 속, 고려와 나란히 같이 서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상징성을 지녔다.
유럽 정치와 외교의 주도권이 지금까지 파리와 빈, 로마, 혹은 암스테르담에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모스크바가 으뜸으로 설 것이다.
러시아가 손해 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평안하길 빌겠네.”
“그대도, 그리고 그대의 가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헤어짐의 순간에서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해원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는 블라디미르를 멈춰 세웠다.
“볼로댜.”
“…….”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윽고 상의의 주머니에 있던 안경집을 꺼냈다.
“이 흑경, 가지게.”
“오. 고맙군.”
하지만 할 말은 분명히 그게 아니었다.
만약 너와 러시아의 운명이 어찌 되든, 네 가족은 무사히 돌봐주겠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말을 어찌 꺼낸단 말인가.
선물을 받은 블라디미르는 이제는 더 할 말이 없냐는 듯 쳐다본 뒤, 마침내 러시아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해원도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돌아갔다.
그도 아까의 대화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확실한 세계 평화를 위해선 확실한 주도권이 필요할 것이며 그렇기에 선조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 * *
셀림브리아에 설치된 간이 회담장에서는 고려의 외무상서와 러시아의 외교대신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이 지역에 대한 문제는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참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오스만의 외무대신과 이번 일과는 딱히 상관이 없었지만 사태가 어찌 돌아갈지 몰라 국경지역인 니슈에 큰 군세를 모아놓았던 오스트리아의 외무대신까지 네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네 명은 취리히 조약과 비견될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중요하게 평가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셀림브리아 조약]
― 조약에 참가한 사국은 조약을 필히 준수한다.
― 오스만은 콘스탄티니예를 해방하여, 콘스탄티노플 자유시로 만든다.
―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안위와 종교적 자유는 보장된다.
― 콘스탄티노플의 모스크들은 고려가 사들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존속을 보장받는다.
―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 총대주교는 러시아에서 임명한다.
― 콘스탄티노플 자유시의 시장은 고려가 임명한다.
― 하기아 소피아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교적 활동을 중지하며, 추후 이곳은 박물관이나 기타 종교와는 상관없는 평화의 의식이 거행되는 상징적 건물로 사용한다.
― 자유시가 고용한 용병을 제외한 어떠한 외국의 군대도 콘스탄티노플 자유시에 주둔할 수 없다.
― 도시의 방위를 책임질 용병은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로 정하며, 만약 추후 변동될 경우 조약국들의 합의를 통해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는 제3국의 용병으로 정한다.
― 러시아는 지금까지 점령한 에디르네를 포함한 동트라키아의 영토를 오스만에게 반환하며, 캅카스 방면으로부터 오스만의 안위를 위협할 어떤 정치적, 군사적 시도도 하지 않는다.
― 오스만은 불가리아 대공국을 해방한다.
― 오스만은 러시아가 점령한 코모티니까지의 서트라키아 정교회 영토를 그리스에게 반환한다.
― 오스트리아는 그리스를 해방한다.
― 오스트리아령 누산타라는 자와, 소순다, 티모르와 그 근방 섬의 지배권을 가지며, 고려는 이에 동의한다.
― 그리스는 중립국으로 보장된다.
― 4개국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열릴 제1회 국제올림픽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며, 체육제전을 통해 국제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그리고 이 서아시아라는 화약고를 어찌 수습하기 위한 시도가 담긴 의미 있는 조약이었다.
핵심은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정교회의 예루살렘인 이 신성한 도시는 메흐메트 2세 이후로 오스만의 영토였으나, 주변국들은 이들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오스만의 입장에선 이백 년도 지난 일을 지금 와서 굳이 들춰내냐 항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과거의 방식 그대로 사건이 진행되었다면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디미트리오스를 패배시키고 도시를 빼앗았던 것처럼 블라디미르가 아흐메트 3세를 내치고 도시를 장악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것이 오스만이 들이대던 힘의 논리였으니까.
그러니 오스만은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도시는 내려놓아야 했지만 적어도 도시 안의 무슬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스만은 분명히 이 조약으로 엄청난 것을 잃었다.
콘스탄티니예라니.
이곳을 내려놓아야 한다니.
비록 이곳은 조약상 앞으로 자유시로서 기능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백오십 년 넘게 수도로서 찬란히 빛났던 곳을 버리고 예전의 부르사(Bursa)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지극한 수치였다.
어떤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다고 절규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러시아군이 이 도시를 위해선 그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 소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수 주전파들의 의견일 뿐일 터다.
처음 이 상실에 대한 분노는 당연히 러시아에게 향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분노를 달갑게 받아들일지언정, 패배자들의 분노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아니었다.
― 꼬와? 그러면 다시 한번 싸우든가.
다시 한번 싸우면 든든한 고려도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동트라키아나, 혹은 트라페준타를 지켜주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몇 차례나 열 수 있는 나라였고, 오스만은 이제 그들에게 명분(외교적 모욕 등)조차 주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이 하릴없는 분노는 고려에게까지 향했다.
러시아와 같은 정교회, 이교도들.
결국 너희들도 도시를 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냐고.
그러나 아나톨리아 촌구석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람들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고려가 도시의 방위와 안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스만의 군부와 예니체리조차, 고려가 저 무시무시한 러시아군들을 정말이지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플라잉 코리안을 이용해 말 그대로 갈아버리는 것을 보았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고려가 제공한 최신형의 대포와 총, 다혈포 등을 넙죽 받아들었기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술탄이 직접 데려와 도시를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둔 자들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고려가 관리하는 콘스탄티노플 자유시의 총독이 될 동원공 해상헌은 ‘나의 혈관 속에 흐르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피에 걸고 맹세하건대, 어떠한 무슬림도 도시에서 핍박받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이전과 같이 평화로운 세월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약조하기까지 했다.
해씨 종통이 샤리파였던 황후 나디야 이후로 예언자 무함마드, 즉 아슈라프(샤리프)의 핏줄을 가지고 있음은 무슬림 세계에서도 꽤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조카인 해상헌 역시 무함마드의 피를 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그 피를 인정하나, 아슈라프라고 부르기엔 그 신성한 칭호가 모계로는 이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라케시 등의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친고려 무슬림들은 애초부터 아슈라프와 사이이드라는 호칭 자체가 여성, 즉 알리 이븐 아비 탈리프의 아내이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냐며, 그렇다면 나스르 왕조와 같은 적법한 혈통에서의 모계 전승의 권위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해상헌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신앙은 제국교였기에 혈통이 제대로 적용되지는 않을 테지만, 혈통 해석이 어떻게 되었든 상헌이 무슬림을 보호하고자 하는데 오스만인들이 그것을 좋지 않게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고려에게 향하려던 분노는 결국 다시금 하릴없이 떠돌았다.
허나, 비록 지금은 아직 아무도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분노의 끝은 신성했던 오스만 왕조 그 자체에게 겨누어질 것이 분명했다.
러시아는 전쟁의 마지막에 병력이 많이 상하고, 또 점령한 동트라키아를 오스만에게 토해내야 했지만, 부르가스(Бургас)까지의 영토는 가지게 되었다.
부르가스와 에디르네는 지척이니, 오스만은 밤중에도 덜덜 떨면서 북쪽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블라디미르가 해원의 면전에 대놓고 말했듯, 러시아는 만약 고려가 조금이라도 나약해진다면 다시금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아나톨리아를 집어삼킬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에 착좌할 정교회 총대주교의 임명권을 얻었고, 이는 정교회의 수호자라는 그들의 명분에 고려가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고려정교회에서 약간의 실망을 표출했지만, 진주인들도 이제는 비종교인의 비율이 늘어나거나 제국교의 위세가 증가하고 있었기에 정통적 신앙들은 이미 힘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고려는 러시아에게 이 정도의 당근은 던져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또한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 3인방, 즉 몰다비아, 왈라키아, 불가리아 대공국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들 세 국가의 정교회인들은 이를 극히 환영하여 블라디미르를 해방제(Цар Освободител)라 부르기까지 했다.
하나하나는 약소국이나 셋이 뭉치면 웬만한 나라와 견줄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이 되었다.
오스만에게서 해방되어 대공국이 된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밑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 전에 그들 스스로 새로운 대공을 뽑아야 했다.
하지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속국이었더라도 계속 국체를 보존해왔던 것과는 별개로, 불가리아는 동로마 멸망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오스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왕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남아있는 왕가를 찾기도 힘들어 보였다.
물론, 유럽 내 말고 유럽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해원과 상의하여 테오도라 아사니나로부터 기원한 진주 왕가인 아센 가문의 일원 중 하나를 불가리아의 대공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실로 적법한 불가리아의 왕통이니, 딴지를 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 진주에서 다른 왕가들과 같이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고 있던 아센 가문의 종친회에서는 이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해했다.
불가리아?
아센 가문으로서는 정말이지 근본과도 같은 땅이 맞았다.
그러나 그 불가리아에서 뭐가 나오는가?
불가리아의 요구르트는 실로 유명하긴 하지만 진주는 장담컨대, 그들보다도 훨씬 부유하다.
북려에서 제일가는 공장지대였으며, 북려에서 제일 좋은 공과대학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려에서 가장 상인과 공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앙주가 모국인 프랑스를 능가할 수 있을 것처럼 진주 또한 불가리아와 오스만을 다 합친 국력 이상의 규모를 자랑할 것이다.
이게 세상을 지배하는 용의 날개 아래에 있는 힘이다.
비록 정치에는 손을 뗀 지 너무나 오래라, 가끔은 주 내부에 위치한 의사당의 구조를 까먹기도 했지만 덕분에 그들은 머리 아픈 일을 피하고 재밌고 좋고 유익한 일들만 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왕가의 운용 자금?
대충 해씨가 투자했다는 곳에 따라 투자하면 만사 무탈하다.
이 상황에서 사태가 나쁘게 흘러가면 어쩌면 해씨와도 대립할 수 있는 불가리아의 대공위는 아센 가문으로서는 맛있는 떡이긴 하나 체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래도 해원이 까라면 까야 했다.
해씨 황통의 눈치를 보던 그들은 결국 문중에서 한미한 방계를 골라 보냈고, 보내면서도 신신당부하길 비록 불가리아가 러시아의 속국이라고 하나 고려와 척을 지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그럴 바엔 중립노선을 택하라고 철저히 교육시켰다.
[작가의 말]
【지도】
1700년 초반의 지도입니다.
셀림브리아 조약(CE1711) 이후의 지도입니다.
고려의 연방주가 획정되었습니다.
중려 합병 이후, 그들의 주가 현지어로 명명되자 그 영향으로 과거에 한자식으로 지었던 몇 개의 주도 지역 원주민 출신 의원들에 의해 다시금 원주민식 고려글 명명법으로 돌아간 곳도 있습니다.(명주―오하이오주, 호주―이로쿼이주, 경주―피마주)
한주와 미주같이 그렇지 않은 곳도 있고, 선주(善州, 전 니카라오 자치령 및 미쉬키트 자치령)처럼 원주민 부족들이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버리고 명명한 곳도 있습니다.
주의 원주민식 이름은 그 지역에서 사는 원주민(나코다, 다코다)이거나, 원주민들이 지은 이름(니타시난)을 따왔습니다.
고려에서는 원주민 보호구역은 없으며, 합병 즉시 내국인과 완전히 동일한 국민적 지위를 누립니다.
러시아의 성장세는 트란스 옥시아나, 그리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인 사마르칸트까지 먹음으로써 중앙아시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럽도 이미 폴리투의 몰락 이후 그 영향력을 러시아가 꿀꺽해버렸죠.
반면 고려는 공러증을 이용하여 유럽과 아시아, 동시베리아에서 대러시아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동시베리아에 대한 내용은 앞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페르시아는 저번 지도에서 별달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사파비 왕조가 몰락해가며 큰 내분을 겪는 중입니다.
마찬가지로 명나라는 중원의 전통적인 적, 유목민들을 러시아가 죄다 학살하거나 옥저가 꿀꺽해버리고, 나머지 몽골의 소소한 부락들은 두 나라에 의해 간섭받는 처지에 놓이니 상대적으로 명줄이 강제로 연장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안가는 지도에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수많은 양이 세력 및 동이 세력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약탈당하는 중이며 내부적으로는 곪아 들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또한 앞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덕천 가문이 지배하는 북왜는 결국 고려에게 졸라 국호를 바꾸었으며, 그들의 과거의 정체성, 즉 화(和)와 덕천가문의 중시조라 볼 수 있는 이예야스와 노부야스의 휘인 강(康, 야스)을 따 강화라 국호를 지었습니다.
백제는 해적 토벌에 꾸준히 지원을 하였고, 그 덕에 보르네오를 관리할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옛 프랑스의 영역이던 향료제도는 이제 고려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