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과 조약, 협상과 동맹
러시아가 자신의 서쪽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이번에는 탐욕스럽게 자신의 남쪽에 있는 오스만을 내려다볼 때, 유럽은 한숨을 돌리고 집안 사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취리히 조약으로 유럽 각국이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자신들의 외교의 방향성을 알게 된 것일 터다.
같이 양립할 수 없는 자와, 동맹이 가능한 자.
전자는 스웨덴과 러시아 같은 경우였고, 후자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스웨덴 같은 경우였다.
전후, 국가들은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들은 급변하기 시작하는 시대 속에서 그들 자신의 안위와 영향력을 올리기 위해 국가끼리의 연합을 꾀했다.
특히나, 과거와 달리 국민개병제가 도입된 현재는 수십만의 거대한 규모로 치고받기 시작한 대륙 국가들이 혹시나 자신들의 안온한 섬을 넘보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던 브리튼섬에서는 적어도 위기 상황에서는 세 나라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브리튼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아직도 잉글랜드였다.
뉴펀들랜드를 제외한 식민지가 딱히 없음에도,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비옥한 땅들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컸다.
고려가 이들을 내버려 두었으면, 이들은 기필코 통일을 완수했을 운명이었을 터다.
하지만 에이레도 이제는 엄청나게 성장해 잉글랜드와 국운을 걸고 겨루면 누가 이길지 도무지 모를 정도로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식민지 누아 에린은 뉴펀들랜드보다는 훨씬 쓸만했고.
그러니, 스코틀랜드의 위치도 덩달아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보았자, 세 나라는 기본적인 국가체급이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과거의 영광과는 다르게, 잉글랜드는 아마 다시금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하라면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과거를 넘어 미래를 봐야 했다.
과거의 악연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풀리고 있었으니, 세 나라는 그들의 영토 가운데 있는 섬, 맨섬에서 모여 여러 가지 미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훗날 알비온 연합이라 불릴 세 국가 동맹의 탄생이었다.
국가 연합은 연방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성원 간의 단결이 상당히 약했다.
연방국가의 대표 사례는 고려연방이었다.
고려의 경우처럼 연방국가는 단단했다.
연방제국헌장으로 소속원들을 구속하였으며, 외교권과 군사권, 행정권과 사법권, 집행권을 단일한 정부가 가져 진정한 하나의 국가로 취급되었고, 또한 구성원 간의 이탈을 허하지 않았다.
만약 이탈한다면, 연방정부는 그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다시금 연방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무력을 포함한 강제력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알비온 연합과 같은 국가 연합은 진정한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구성국 정부의 능동적인 협조가 필요한 단체였다.
또한 구성원 중 누군가가 만약 국익에 해가 되어, 혹은 그저 빈정이 상해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들은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알비온 연합 외에도 대륙국들도 결속이 필요했다.
스웨덴의 주도로, 프로이센 왕국과 폴란드 대공국은 정식 협상을 맺었다.
이 세 나라의 협상(Triple Entente)은 만약 러시아가 이 ‘협상국’들에게 공격을 가한다면, 구성국들은 곧바로 반격할 수 있게 만전의 태세를 갖추어 놓자는 의미였다.
또 다른 얀 소비에스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간은 지체할 수 없었다.
이 협상국들은 협상에 참여한 세 구성원 외에도 네덜란드와 알비온 연합, 고려를 파트너로 두어 거대한 반러시아 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이에 맞서 동맹을 꾀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소모품에 불과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로서는 놓지 말아야 할 끈이었다.
프로이센에게 이를 갈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러시아와 동맹을 희망했다.
고려의 위세는 잘 보았으나, 여전히 가까이 있는 주먹이 무섭고, 가까이 있는 원수가 더 싫은 법이다.
그러나 러시아―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는 부족했다.
협상국의 핵심축인 프로이센을 포위하기 위해선, 다른 방면에서의 공격도 필요로 했다.
후보는 역시나 프랑스였다.
* * *
그러나 프랑스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대북방전쟁 도중에도 계속 파리의 동향을 신경 쓰던 러시아도 몰랐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파리에 검은 요원들을 파견해 놓으면서 상황을 관찰하는 고려도 몰랐으며, 심지어 그곳에서 살아가는 당사자인 파리 시민들도 몰랐다.
파리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튀렌이 죽고 수많은 파벌이 범람하는 프랑스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극한의 혼돈상태에 빠져들었다.
시작은 아무래도 낭시와 메스에서 봉기한 노동자군이었다.
비록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튀렌의 역량으로 프랑스―바이에른 공화국의 국경이 온전히 뚫리지는 않았고, 튀렌이 외젠과 클로드에게 패퇴한 뒤에는 프로이센의 빠른 남하로 바이에른 대동계 1계가 와해되었다 하더라도 프랑스 동부의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대동계 1계의 영향을 깊이 받은 그야말로 극도의 좌파였다.
생산시설의 국유화와 사유재산의 철폐를 앞장서서 주장하는 이 바이에른파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무력을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해는 되었다.
처음 부르봉 왕정은 알자스 로렌의 소요사태를 탄압하기 위해 가혹한 수단을 총동원했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까.
많은 지분을 주장하는 것에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 대의와 이상향은 공감받지 못했다.
정작 바이에른파는 파리에서 진행된 어떠한 시위에도 지분이 없었으니, 파리 시민들에게는 동쪽의 촌놈들이 얼굴이 벌게져 들어와 난장판을 피우는 것 이상으로 인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엄연히 프랑스 대혁명은 제3신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3신분은 가난한 서민이나 노동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에게 사유재산 철폐를 주장한다는 것은, 아예 네놈들이 싫다고 면전에서 쏘아붙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바이에른파는 다른 파벌들의 견제를 받아 제일 먼저 진압당했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파리의 상황에 여차하면 동쪽으로 도망가 다시금 노동자 봉기를 일으켜 내란을 통해 집권하려는 꿈을 꾸고 있던 장 마르텡은 대동계 출신으로 1계와 2계의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있던 한 부하의 배신으로 붙잡혔다.
“배신자 놈들!”
침을 뱉는 노동자들에게, 배신자는 도리어 화를 내었다.
“당신들이야말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당신들이 인백(정여립의 자) 선생의 공화이론을 공산이론으로 왜곡시킨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너는 인백 선생의 겸애교리(兼愛交利)를 잊어버린 것이냐!”
“인백 선생께서 겸상애, 교상리를 말씀하신 것은 묵가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공동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면서도 상호 호혜와 공정성을 논하라는 것이지요. 그 어떤 곳에서도 사유재산의 언급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왜곡하시면서 이제 선생의 말씀까지 억지로 뮌처와 캄파넬라의 주장과 엮어 왜곡하시렵니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은 공유하지만, 근대적 재산권을 수호하자는 제2계는 제1계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념적으로 양립이 가능하지 못했다.
붙잡힌 장 마르텡은 파리로 끌려와 내란조장죄로 처형당했다.
다 좋은데 딱 하나 진압군에게 아쉬웠던 점은, 바이에른파의 3대 노동자(장, 껑땅, 마크) 지도자 중 마지막 인물인 껑땅이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일 테다.
집권한다면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킬 과격한 극좌 집단을 처단한 프랑스 국민의회의 인사들은 한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왕당파와 비왕당파 간의 싸움, 비왕당파 내에서도 산악파와 평원파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튈르리 궁전에 유폐된 루이 13세의 삶은, 사실 따지고 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감시받는다는 생각은 항상 존재했지만, 대우가 시원찮은 것은 아니었다.
밥은 제때 나왔고, 이전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궁핍하지도 않았다.
옷과 장신구들도, 수발을 드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다.
또한 국민의회에서도 왕을 해한다는 생각을 품은 자들은 거의 없었고, 그럴 생각이 있던 자들(바이에른파)마저 탄압당했다.
루이 13세는 자신의 운명을 결국 입헌군주정처럼 모든 권위와 권한을 내려놓고 뒷방의 늙은이가 되는 것으로 짐작했다.
네덜란드와 고려처럼.
비록 고려의 해씨는 뒷방의 늙은이라고 보기엔 힘들 만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고 부르봉은 도리어 해 처먹은 빚 때문에 원성을 사고 있었지만.
그래도 목숨이 위협받거나,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테다.
튈르리 궁전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된 루이 13세는 차츰차츰 현실을 인정하면서 누구를 총리로 임명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클로드 혹은 외젠이라는 소리인데….”
젊었을 적, 어린 청년 장교인 외젠의 면전에 대놓고 너 못생겨서 내 곁에 두기엔 부끄럽다고 말한 당사자인 루이 13세는 도무지 외젠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외젠이 루이 13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확연히 느껴졌다.
가장 선망하는 대상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은 순간, 청년 장교의 선망은 그보다 훨씬 강한 증오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니 루이 13세는, 또 다른 국민의회의 영웅인 클로드와 접촉을 해야 했다.
호쾌하고 명예로운 사나이인 클로드는 루이 13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다른 귀족들, 그리고 국민의회의 왕당파 및 보수파들과도 자주 어울리니 국왕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통치할 총리이자 원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다.
루이 13세는 이후 클로드에게 미래를 약속하면서 협조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점, 국민의회는 여러 가지 한계에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국민의회의 진압군이 토벌한 바이에른파와 그를 지지하는 메스와 낭시의 노동자들은 국민의회에서 유일하게 하층민을 대변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단체가 다른 단체들에 의해 탄압당하자 파리에 자신들의 소통창구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노동자들은 또다시 폭력적인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 투쟁에 농민들도 동참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지주들과 귀족,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방어권을 행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멀쩡한 논밭과 공장이 불타는 것은 당연히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실은 또 왜곡되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군대를 모으자, 파리에서는 이 사실이 와전되어 귀족들이 파리로 올라와 국민의회를 다 죽여버릴 거란 소문이 퍼졌다.
그야말로 전국적인 대공포(大恐怖) 현상이 일어났다.
클로드는 그래도 현시점 제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외젠을 찾아가 향후의 일들을 논의하고자 했다.
외젠이 이끄는 ‘산악파’들이 국민의회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를 표명한다면 대공포 현상은 빠르게 진정될 수 있을 것이었다.
클로드가 왕당파와 평원파(온건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면, 외젠은 공화파와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던 상황.
하지만, 정치적인 대립을 지속해왔던 두 명의 친우는 그 만남에서 더 이상 둘의 사이가 이전과 같이 친밀하게 어울릴 수 없음을 깨달았을 뿐 어떠한 협력도 도출해내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클로드는 가톨릭 세력과 연계하여 대공포 현상을 누그러뜨리고, 봉건제를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하고 인권선언문을 채택하며 소득비례적 세금을 물린다 천명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을 누그러뜨린 뒤, 반대로 귀족들에게는 소유권을 탄압하는 제1계적 공산 사상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아내겠다 약속하면서 정국을 필사적으로 안정시켰다.
* * *
그러나 이 중요한 시기에 루이 13세가 또다시 일을 저질렀다.
“폐하! 우리가 저 불량한 인간들을 토벌해 다시금 부르봉 왕조의 깃발이 프랑스에서 당당히 휘날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클로드가 알았다면, 뒷목을 잡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 에미그레(프랑스의 망명 귀족들)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복벽(復辟)을 주장하고 있었다.
실현 가능성도 충분했다.
콩데의 유산을 이용하기만 한다면.
1차 추심전쟁으로 고려에게 패배한 뒤, 알제에 유폐되었던 데 콩데 공작은 고려로부터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고려군 사령관은 공작을 예우하여 용한 의사를 붙여주어 당시 콩데를 괴롭히던 통풍을 콜키쿰이라는 백합과 식물에서 추출한 약물로 치료해주기까지 했다.
콩데는 추심전쟁이 끝나고 알제가 베네치아에게 매각된 뒤에는 자동적으로 풀려났다.
물론, 이후 그는 고향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베네치아령 알제에서 한적한 삶을 즐겼다.
그러나 그는 계속 프랑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미 늙었다고 손사래를 치기만 하며 그저 튀렌을 응원하는 것에 그쳤으나, 막상 튀렌이 패배한 뒤에는 이대로라면 부르봉이 완전히 몰락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행동에 나섰다.
콩데는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외국으로 망명하는 프랑스 귀족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가톨릭 세력에게 접촉했다.
그는 교황에게 부르봉 왕가의 정통성을 공인받았으며, 만약 저 위그노들이 프랑스까지 장악한다면, 가톨릭 세계는 형편없이 쪼그라들 것이 분명하다고 설득했다.
제아무리 교황이 이제는 중요치 않다고 하나, 여전히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가지고 있었다.
이후 콩데는 그의 유산이 가져올 결과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행보는 프랑스 에미그레들에게 큰 족적이 되었다.
―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나바르 왕국를 대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지원을 얻는다. 카스티야는 왕비의 모국이니 충분히 지원해 줄 것이다.
― 위그노들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교황과 연계하라.
구체적인 복벽의 계획이 완성되자, 이들은 튈르리의 루이 13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현실과 타협하던 이 왕년의 절대왕정 군주에게 다시금 헛바람을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
클로드?
집어치우라.
프랑스 국왕은 마땅히 왕좌에 올라 전 프랑스를 다시금 호령해야 하노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영광이 다시금 떠오르자, 루이 13세의 마음은 다시금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루이 13세와 왕비 에스테파니아는 파리에서 남하하여 보르도와 나바르를 통해 마침내 카스티야의 마드리드로 도망간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야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