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11화 (311/653)

냉동고

* * *

해인규의 사후, 그의 명망 높은 세 제자인 윤우겸과 이의, 정성태 등은 네 개의 법칙(유도 기전력의 법칙과 전자기 유도의 법칙, 자기 법칙과 회로 법칙 등)을 하나로 묶어 스승의 이름을 붙인 인규의 방정식을 집대성했다.

그 이후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전기의 기틀을 여는 오른손법칙과 전동기의 기틀을 연 왼손법칙이 등장하니, 전기는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순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반면 애석하게도 전기의 발견 이후로도 신민들에게 차가운 파라콜라를 마실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실로 요원해 보였다.

지금 상태의 학문과 기술 발전 상황에 따르면, 그의 예상으론 적어도 한 세기는 더 지나야 가정용 냉장고라는 것이 발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완벽하게 산업시대를 내달리고 있지만, 여러 가지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있었고, 상민 또한 그 난관을 해결할 마땅한 방책은 없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오랜만에 청해의 사택으로 돌아온 상민은 책상의 서류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세상을 묶고 고려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거대한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 머리가 아팠다.

마침 달달한 것이 땡겨, 설탕을 넣은 우유커피 한 잔을 주문하려 고개를 든 그는 어질러진 책상 사이에서 호출용으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을 흔들어 대려고 했다.

― 똑똑

“뭔가?”

“여기, 얼음을 띄운 파라콜라입니다.”

“뭐라고?”

뜬금없는 소리에 그가 벌떡 일어났고, 덕분에 책상이 거칠게 흔들렸다.

“냉동고의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5분 전에 기술선도국에서 파발과 함께 얼음을 보내왔습니다.”

“…….”

어딘가 말문이 막힌 용안을 힐끔 쳐다본 부관이 그의 속내를 잘못 짐작한 듯 애써 얼음을 가져온 사람을 옹호했다.

“아무래도 12월이다 보니 가져오며 따뜻한 날씨에 많이 녹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콜라에 넣을 만큼은 충분히 넉넉하니….”

“아니야, 아니야, 내 당장 지금 가 보겠네.”

역사적인 첫 얼음 콜라를 마다한 채, 상민은 허겁지겁 청해에서 가장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건물과도 같은 기계가 서 있었다.

하도 벌어들이는 돈이 거대한 데다가, 천재 공돌이들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예뻐하는 상민은 대체로 기술 선도국에서 얼마의 연구비를 요구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다 들어주는 입장이다.

아마 최근에, 그의 앞으로 결재가 올라온 서류에서 이번에 큰 실험을 하려 하니 돈을 좀 달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았다.

백에 아흔다섯은 실패하고, 백에 아흔넷은 아예 건물을 날려버릴 만큼 대실패를 하고, 오직 백의 하나만이 성공을 했지만 상민은 오로지 백의 하나의 성공만을 신경 쓰는 위인.

웬만해서는 금전적인 지원을 가지고 쪼잔하게 뭐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주문한 몇 개의 주도적인 개발 이외에는 다른 실험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천재란 작자들은 그렇게 자유롭게 풀어놔야 대단한 발명을 하는 족속들이니까.

설명도 듣지 않았다.

뭐 설명을 해 준다고 상민이 알아들을 리도 만무했고.

비록 상민이 기초과학을 어느 정도 만진 선구자적인 인물이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단순한 암기가 아닌 진정한 자연과학적 소양은 자신이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본 진짜 첫째아들이자 천문학자인 정종(貞宗, 추후 성종 해정에 의해 추존됨) 해준보다도 떨어진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공교육으로 받은 능력은 밑천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저게 냉장고라고?”

냉장고는 마땅히 전기로 작동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문과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상민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히려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거대한 규모의 냉장시설이 먼저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었다.

냉장시설 바로 좌측에는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뜨거운 열을 뿜어내는 증기기관이 석탄 연기를 피워올리며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어딘가 그의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팀펑크적인 광경이 보였다.

기술선도국의 학자들이 머리를 모아 마침내 만들어 낸 것.

냉매의 압축과 팽창을 이용한 냉장고의 원리는 굳이 전기가 필요가 없었다.

냉매를 압축하는 힘만 있으면 되었고, 그 힘은 비록 효율은 떨어지더라도 지금의 증기기관으로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다.

응축기와 조임막이(밸브), 증발기, 압축기로 구성된 이 단순한 초기 냉장고는 덩치가 정말 산만 했지만 본래의 목적은 충분히 이행할 수 있어 보였다.

기술선도국의 수석 기술자 한 명이 칭찬을 바라는 표정을 지으며 상민에게 다가와 설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냉동고입니다.”

냉장을 구현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무식한 크기는 대체로 섬세한 온도 조절보다는 크기만큼이나 무식한 냉방을 자랑하는 모양.

수석 기술자의 말대로 냉장고가 아니라, 냉동창고라고 해야 되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궁금증이 도진 상민은 성큼성큼 냉동고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갔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설비는 외부에 따로 있는 모양.

냉동고 안에서는 그저 무미건조한 단열재로 된 흰 벽이 보였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얼음으로 변한 게 단열재의 표면에서 잘 보였다.

분명히 밖은 12월 말의 따뜻한 날씨였지.

그러나 이 공간에 들어오니 갑자기 저 멀리 한주의 이름 모를 설산 위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상민은 팔에 우수수 난 소름을 쓸어내렸다.

효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다.

창고의 가운데에는 실험용인지 목제 그릇에 담긴 얼음이 보였다.

원래는 물이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분명 손으로 두들기면 손이 아플 만큼 단단한 고체다.

상민은 어쩐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늙으니 주책이다.

드디어 이 삶이 시작된 이후, 그가 전생에서 누려왔던 것 중 아주 일부분이 완벽하게 복구된 것처럼 보였다.

기껏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얼음이 담긴 콜라에 삼백 살 먹은 사내새끼가 눈시울이 붉어지느냐는 자괴감이 들 법도 했지만, 그는 한참이나 나무 그릇 위의 얼음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

상민은 감정을 다스리고는, 이 냉동 시스템을 이용할 곳을 궁리했다.

당연히 첫 번째로는 보존 식품이 아닌 일반적 식품에 대한 획기적인 저장 방법이 생긴 것을 축하해야 했고.

두 번째로는, 출력을 조금 낮출 방법을 찾은 뒤 의료용으로 쓸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얼음을 띄운 차가운 음료수니, 얼음보숭이니 그런 것들은 오로지 부차적인 목표겠지.

“알겠습니다.”

옆에서 기술자들이 열심히 받아적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민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냉매는 어찌하였나?”

“냉장 기술에 대한 직관은 간략하게나마 제공해 주셨기에 연구진들이 도리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사용되는 재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에테르(Ether)가 냉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기 1275년 카스티야의 귀족이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승인 라이문두스 룰루스(Raimundus Lullus)가 그 존재를 확인하고, 1540년 신성로마제국 출신의 발레리우스 코르두스가 제조법을 만든 에테르는 한동안 화학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에 와서야 유기 용매로서의 효능성이 재조명된 물질이었고.

지금 당장은 부작용이 심각하여 위험하지만 별다른 대체재가 발명되지 않은 고로 의료용 마취제로나 쓰이는 에테르가 드디어 제대로 된 용도를 찾은 모양이다.

증발열이 커 냉매로 사용하기 적합하니 단열재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저 구불구불한 구리 관 속에서 열을 흡수하고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겠지.

그 모습을 바라보니 궁금한 것이 또 생겼다.

“단열재로는 무엇을 사용했는가?”

과학자 한 명이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최근에 진주 북쪽에서 발견된 광산에서 질 좋은 돌솜이 많이 채굴되어 잘 쓰고 있습니다. 이 창고는 전부 돌솜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단열재로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저렴하니 정녕 축복을 받은 광석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음, 그래.”

상민은 그것을 만져보며 의례적인 대답을 하다, 이윽고 멍하니 생각하고는 한 박자 뒤늦게 과학자를 바라보았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방금 그대가… 돌솜이라 했지? 내가 맞게 들었는가?”

과학자는 두 번이나 반복되는 상관의 물음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예.”

상민은 이마를 감싸쥐었다.

무슨 일인지 당최 짐작조차 안 가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희대의 발명품을 시연하는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상관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냉동고에서 빠져나왔다.

* * *

일단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자면, 자신이 곧바로 돌솜이라는 말에서 한자어 기반의 단어를 유추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전생의 기억 중 상당수가 희미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자신이 그래도 빠르게 알아차린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외는 전부 좋지 않은 소리만 있었다.

상민은 고민했다.

‘…이 경우는 내가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었겠구나.’

돌솜.

석면(石綿)의 고려 이름이자 지금은 유럽인들조차 도올소옴 등으로 발음하고 있는 단어.

섬유처럼 생긴 규산염 광물이다.

솜같이 생긴 돌이라는 단어가 실로 적절했다.

석면의 위험성은 현대인이라면 상식으로 배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돌섬유 조각들이 폐로 들어가 오랜 시간 뒤에 석면진폐증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졌던 사실.

마땅한 치료법도 존재하지 않는 끔찍한 질병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폐에 적용되는 방사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나 그 위험성과는 별개로 이 광물의 효용성은 정말 만능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았다.

국책사업으로 대대적으로 교체되기 전까진 옛날에 지은 학교나 관공서에는 석면이 거의 빠짐없이 쓰였다.

심지어 상민이 이곳으로 넘어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낙후된 지역과 시골에서는 석면 슬레이트 지붕이 심심치 않게 보였을 정도니까.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도 석면을 완벽하게 놓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지금의 고려가 존재하는 이 17세기에는 돌솜만큼 뛰어난 성능을 가진 단열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었다.

생산성까지도 고려하면 더욱더.

땅에서 파내면 그만, 추가적인 공정이야 해 봤자 돌솜을 방적하는 기술 정도가 전부였고 이는 산업 시대에 들어선 국가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마침,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되는 돌솜 광산이 북려대륙 곡암도 북쪽의 지역(원 역사의 퀘벡)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온갖 모략에 세상의 식민지들 대부분을 다른 유럽의 열강들에게 뜯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이 아직도 사수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희망곶 부근에서도 거대한 돌솜 광산이 있다 하고.

고려는 이리저리 돌솜을 구하기 쉬운 입장이었다.

그리고 널리 쓰기에도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일단 주거의 환경을 꼽아보자.

온난한 기후에 있는 대도시야, 단열재의 필요성이 그렇게 강조되지 않는다.

창양과 창강대평원 유역, 마야만과 화주 반도, 진주 남부와 미주 등의 온난한 지역은 이 소빙기의 추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그렇게까지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영하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저기 조선 반도마냥 얼어 죽을 혹한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조정, 더 나아가서 상민의 뜻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고려인들을 보내 살게 하는 지금의 정책상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런 단열재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기후에도 도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추위에 자다가 얼어 죽거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창문을 닫아놓은 공간에서 석탄과 나무를 과도하게 때다 땔감이 불완전연소하여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는 것보다, 차라리 돌솜을 껴안고 자는 것을 택할 것이다.

고려가 아무리 다른 나라보다 생활환경과 영양상태가 훨씬 좋고, 노동자들의 대우가 좋으며, 의료혜택이 비교할 수 없어 평균 수명 자체가 네덜란드(다른 유럽과 아시아국은 비교할 자료가 마땅치 않았다.)의 예상 평균 수명인 서른여덟 살보다 다섯 살 이상이나 높은 마흔세 살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순이 넘는 사람은 환갑이라는 잔치를 즐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니 오랜 시간이 흘러야 나타나는 석면진폐증은 남의 이야기라는 소리인 셈이었다.

주거환경 말고도, 산업환경에서도 대체재가 없었다.

증기기관의 단열재로, 그리고 냉동고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환경에서도 돌솜은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산업과 연구 모든 분야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필요악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장고 끝에, 상민은 석면에 대한 사용금지처분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제아무리 위험지역을 빙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상민으로서도 이 같은 결정은 불가능했다.

다만, 현장의 근로자들부터 일반 가정집까지 석면의 위험성을 교육하고 취급할 시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하는 것만으로 아주 조금은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겠지.

적어도 석면 슬레이트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미개한 관습은 생겨나지 않게끔.

다만 상민은 큰 경각심을 가졌다.

과학 기술이 대체로 인류 문명을 좋은 방면, 즉 정방향으로 안내하고 있더라도, 역방향의 발명 또한 산업혁명의 시기에는 적지 않게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이뿐이겠는가. 산업현장 전면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다른 곳에 신경 쓰다가 미처 놓친 것들이 돌솜만은 아닐 터.

제국의 안전교육을 다시금 강화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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