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10화 (310/653)

전자기

상민은 큰 죄악을 저질렀다.

비록 전생에서 가졌던 신념, 즉 붉은색의 콜라보다 푸른색과 태극무늬의 콜라가 더 맛있다는 그의 신념은 확고부동했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시중에 퍼져 나가는 따뜻한 콜라의 건은 분명히 그의 죄악이 분명할 것이었다.

파라켈수스가 마침내 콜라를 발명했을 때, 상민은 그 레시피가 완전히 원역사의 콜라와 똑같은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만족했다.

어차피 맛이야 시대가 지날수록 바뀌고 개선되어지니, 이 기본적인 제법을 알기만 하면 되었다.

파라켈수스는 상민의 말대로 불사의 약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돈은 받았다.

그는 상민의 입장에선 티끌과도 같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평생 놀고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온갖 향락과 재미있는 과학 실험에 펑펑 쓰다 천수를 누리고 떠났다.

그때 당시의 콜라야 시중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아직 판매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으니, 그 금은보화는 라이센스에 대한 선지급금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상민은 자신의 사람을 악랄하게 부려 먹기로 그 흉악한 악명이 자자했지만,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파라켈수스 사후, 상민은 그 제조법을 유지하고 개선시키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결국 콜라가 차 문화화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당대의 음료라는 것은 대부분 따뜻하게 마시는 것이었으니 고려인들이 이 음료를 처음 접했을 때 데워 마실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삼별초 시기, 저 반도에서 가지고 온 차 문화.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원두를 가지고 와 자리 잡은 커피 문화.

중려와 남려 북부에서 자생하는 카카오 문화.

셋 모두 그 원재료를 말리거나 볶은 뒤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시는 것이니.

상민은 동시대 사람들이 콜라 원액을 뜯고 주전자에 올리는 광경을 목도할 때마다 그 만행을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했다.

* * *

첫 번째 과제, 즉 탄산의 제조는 꽤 쉽게 풀렸다.

상민은 자신에게 화학적 조예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옛날 생애에서의 이과에게는 상식인 사실조차도, 자신에게는 그게 무엇이냐 반문해야 할 사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자신의 부족한 부분은, 이제는 동시대의 천재들의 두뇌를 빌릴 수 있었다.

사람이 혼자 다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려고 키웠지, 암.

사실 이미 탄산수의 제조법은 알고 있었다.

산소의 존재를 발견하며 근대 화학의 기틀을 다진 박신의의 제자이자 동료인 원영익은 탄산의 제조법을 발견했었다.

이산화탄소를 물에 녹이다, 나중에는 석회석에 산을 첨가하여 대량의 탄산을 만들게 된 것.

다만 이때 당시, 원영익이 개발한 탄산수는 음료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고려의 권세 있는 여인들이 자신의 피부 미용을 위해 목욕을 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목욕물을 마시라고? 그게 무슨 망발인가?”

“…자네, 그런 취미인가?”

“…….”

오죽했으면 남려대륙에서의 반응이 저랬을까.

시간이 지나고, 다시금 상민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할 때도 기풍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꽤 난감했을 것 같은 미용적 용도의 탄산수를 음료로서 주목받게 하는 일은 의외로 돌파구를 찾자 쉬워졌다.

고객의 타겟을 변경하는 것, 즉 지역을 달리해서 겨냥하면 되었으니까.

비록 회사의 본사 자체는 기업적 여건으로 청해에 있지만, 탄산수의 음용 문화 전파는 북려에서 훨씬 더 잘 일어났다.

탄산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석회수 성분의 센물(硬水, 경수)이 그 속에 들어있는 석회질이 불용성 고체로 변해 침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남려대륙은 석회질이 많은 곳이 별로 없었다.

남려 동해안의 고원지대(브라질 고원)과 쿠스코 근처의 땅, 그리고 북쪽 전주(베네수엘라 부근) 정도.

인구밀집도는 아직까지 썩 높은 곳들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 사는 창강대평원의 식수는 석회수라 보기 힘들었다.

반면 북려대륙은 사정이 달랐다.

화주 반도(플로리다)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물물을 길면 센물이 나왔고, 택주와 앙주, 진주에서도 센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 더욱 심했고.

중려대륙, 특히 마야는 아예 반도 전체가 거대한 석회암 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들의 특산품이 석회암과 대리석이라 쏠쏠히 잘 판매하긴 하지만, 단물(연수)에 대한 갈망은 항상 존재했다.

단물은 그 성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맛이 몹시 좋지 않았고 마시면 설사와 복통을 유발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탄산수로 마시게 된다면, 이런 걱정에서 해방된다.

양호한 수질을 보장받게 되는 것.

톡 쏘는 맛 또한 중독성이 있었고, 소화 또한 잘 되는 것 같았으니 어찌 영험한 효능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탄산수에 콜라를 섞어 정말로 제대로 된 콜라가 나온 개천 360년(CE1635) 이후부터는, 이 악마의 음료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며 전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

탄산음료의 보관과 운송이 몹시 힘들어, 압력을 버티지 못해 병이 터져버리는 사건사고가 몹시 빈번하게 일어나 운송이 용이한 해안가의 대도시들에서나 구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의 소매점 주인들이나 약사들은 기를 써서 콜라를 구비해 놓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훗날, 개천 398(CE 1673)년, 젊은 화학자이자 기업가 한 명이 탄산 분수(Soda Fountain)을 발명한 이후에는 내지에서조차 언제든지 탄산수를 마시게 되었다.

탄산수의 제조에 성공한 이후에는, 이제 죄업을 씻어야 할 차례였다.

지질학적 차이 덕분에 북려는 탄산수 광풍이 몰아닥치고 있었지만, 남려는 여전히 뜨거운 차를 마시는 문화가 주류였고, 탄산수의 소비는 적었다.

이는 ‘차가운’ 음료 도입 전에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옛 선조들조차 빙고(氷庫)를 만들어 삶의 질을 향상시켰었지.’

지금은 선조라고 보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조선시대마저도 얼음과 차가운 것의 효용을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

창양과 청해는 기온이 온화하여 조선마냥 여름에 폭염이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음료가 땡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얼어 죽을 만큼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 한국인이다.

따라서 그는 냉장고를 만들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 즉 문명의 발전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단순히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싶다는 그 욕망 하나로 그는 냉장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 무엇이 필요하든, 그는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그 결실은 피라미드의 저 맨 꼭대기에 있었지만.

한 걸음씩 움직이다 보면 결국은 그것마저도 해결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것도 사실 그가 아니라, 그가 키운 다른 천재들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 * *

이 시기 가장 진보한 학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군사적 위협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한 고려에 이민을 와서 자리를 잡은 학문의 거장 세 명이 있었다.

이들 세 명은 각기 다른 국가들, 즉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기에 제각기 나고 자란 환경이 달랐지만, 모두 학문에 대한 야심 하나만으로 대양을 건너 문화도 관습도 언어도 다른 타국에 이민을 올 결단을 내린 괴짜 중의 괴짜였다.

고려의 이민법은 점차 강화되었지만, 이민자들이 종교적, 민족적으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위험성을 내포하지 않고, 또한 고려의 사회에 이득이 될 사람이 명백하다면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었다.

비록 세 명은 젊었으나 낭중지추라는 말이 틀리지 않아 이민 심사를 받는 와중에도 자연과학적 재능을 뽐내었다.

모두 고려에 동경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유럽의 친고려파였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로 개종하는 등의 결의까지 보이는 자도 있었으니 고려에 무사히 정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

이들은 그들 못지않은 괴짜들이 가득한 연서궁의 한림원에 들어가거나 각지의 대학에서 학문을 더욱 정진하기 시작해, 마침내 시간이 지나 그 결실을 꽃피웠다.

이들의 이름은 각각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윌리엄 길버트라 했다.

그들 중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라는 자는, 개천 294년 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청해 대학으로 유학을 오고는 아예 청해 대학에 정착한 학자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이라는 타이틀은 왕씨 고려 성종, 서기 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을 계승하고 근대적 학위제도를 도입한 창양의 국자감이 가지고 있었고, 볼로냐 대학이 그 뒤를 잇고 있지만 케임브리지 대학도 마냥 무시할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연구지원에 산더미 같은 황금을 퍼붓는 청해 사립대학이나, 이 세계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저절로 획득하는 창양 황립대학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이런 외부 대학의 인재들은 그들 모국에서 공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고려로 유학을 오는 상상을 한 번쯤 하게 되는 것이다.

천재들의 공통점이라면, 상상을 현실화하는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고.

본래 길버트는 화학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연금술 같은 허황된 것들이 아니라, 근대 화학의 기풍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고려에 올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청해에 정착한 후 길버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화학보다는 전기와 자기 현상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올 동안 대양을 건너는 항해사들이 나침반을 쓰면서도 그 원리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스스로도 궁금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후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길버트는 비슷한 시기에 온 갈릴레오 및 케플러와 공동으로 연구하여 동역학적 우주론의 기반을 세우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진행한 연구들 또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전기학과 자기학이 있겠지.

당대 전기학과 자기학은 애매모호하게 표현되던 자연적 현상이었다.

비록 나라를 세운 태조께서는 그 신묘하신 혜안으로 미리 앞날을 예지하셨고 또한 높은 건물에는 필히 피뢰침을 세우라 명령하셨었지.

창천궁의 전각에는 이미 고풍스럽게 장식된 금속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말고도 도시의 시계탑이나 종탑 등지의 유난히 큰 건물에는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 낙뢰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무서운 법칙이었으나 피뢰침의 도입 이후에는 적어도 그것들이 설치된 곳 근방에 있으면 안전이 보장받게 된다는 것을 고려의 신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게 되었다.

고려의 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일컬어, 자연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낳는다고 하며 원초적인 인류의 공포, 즉 번개를 극복한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기도 했다.

과학과는 거리가 먼 어떤 누군가들은 그것마저도 하늘의 번개를 좌지우지하는 태조의 신묘한 가호가 아니겠느냐며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길버트는 전기학과 자기학 모두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었다.

그는 번개가 전기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고, 도체와 부도체의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이온화 방전(Corona discharge)을 관측해 내기도 했고, 그가 고려에 와서 얻은 화학적 지식들로 아연판과 구리판, 소금물 등을 이용해 아주 원시적이나마 전지를 만들어보기도 하는 등의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사후, 그의 제자 중에서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유달리 특출난 과학자가 등장했다.

해인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아들을 둔 성종 해정의 손자 익산공의 후손(익산공파)이었다.

현 고려는 국성 창양 해씨의 숫자가 명백히 다른 성씨보다 많았고 대다수는 엄청난 자손을 든 성종 해정의 손자들에서 분파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종통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 오래라 국성, 창양 해씨의 성씨만을 유지할 뿐 완전히 일반인과 다름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상인 가정에서 자라며 공부를 하다 마침내 본격적인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한다.

그리고 청해의 대학에서 수학하며 스승 길버트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스승의 사후에도 전기학과 자기학을 다시 재정비했다지.

그의 스승은 위대했으나, 몇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승의 한계를 지적, 보완하고 학문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제자의 미덕.

해인규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전기학과 자기학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다시금 증명해 내어 두 학문을 전자기학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었다.

그는 고려의 물리학계에 있는 중력방정식에 영감을 받아 전하의 역제곱법칙(쿨롱의 법칙)을 증명해 냈고, 길버트 전지를 더욱 진보시켰으며, 전류와 전압의 개념을 주장하며 그의 스승의 발자취를 뒤이어 당대 학계의 거물 중 하나라 칭송받았다.

‘그리고 너는 마침내 위대한 발명을 해내었던 게로구나.’

그리고 그 거인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을 열 손에 꼽아보면 분명히 그들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상민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먼 혈육이 묻힌 묫자리에 적힌 문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새긴 것이 아니라, 해인규의 제자들이 새긴 문구였었지.

[전자기학의 아버지]

그것을 떠올릴 때면 다른 학자들의 위업을 되새길 때와는 약간 다른 묘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조금은 사적인 이유.

묘 주인의 얼굴조차 제대로 몰랐지만, 결국 그 또한 자신의 후손이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현 황제나 이미 타계한 해인규나 같은 손자인 셈.

먼 후손의 업적에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네가 발견한 법칙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바꿀 것이다.”

해인규가 예순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인, 개천 370년(CE 1645)에 주장한 ‘전자기 유도의 법칙’.

이에 비로소 고려는 자신들의 문명에 전기라는 위대한 대자연의 힘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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