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부얀 해전(4)
전투가 끝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간간이 포성이 들리고 사방에는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저것은 전후처리.
합종국의 수군들은 이제 한숨을 돌리고 떠다니는 시체를 건지거나, 반항하는 적을 사살하거나, 항복하는 적들을 포박하는 등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선봉에 나선 이윤신의 활약과, 그러한 이윤신을 충실히 잘 보좌했던 이순신, 가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준 이운룡과 권준, 이억기 등의 참모들 덕에 훗날 바부얀 해전이라 불릴 해상 전투는 마침내 합종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위대한 결과였고, 대전쟁을 앞둔 찬란한 서전이었다.
딱 그렇게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대감,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순신은 아까 윤신이 전투 도중 갑자기 복부에 손을 대고 얼마 남지 않은 난간을 부여잡는 것을 보았다.
전열전술은 가까이 접근하여 카로네이드와 옹포를 이용한 근거리 포격전을 주고받는 전술.
합종국 수군이 두 열로 한 열을 감싸며 수적인 우위를 점했다 하더라도 서로 포격전과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충무호는 수많은 포격을 앞장서서 받은 함선.
제아무리 대단한 해문 황립조선소에서 최고의 나무로 건조한 가급 전열함이라고 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것과 버티기 힘든 것이 있기 마련이다.
장장 두 시진 동안 일어난 해전에서 충무호의 수병들은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지금도 주갑판 아래에 위치한 선내 의무실에서는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선의(船醫)와 의무병들은 진땀을 흘리며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순신은 행여나 원수가 다치지 않았을까 덜컥 걱정하는 마음부터 먼저 들었다.
“으음.”
그러나 윤신은 고통에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리고 있을망정, 운신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입부, 이 사람은 괜찮네.”
기침을 한두 차례 하며 웅크렸던 몸을 서서히 윤신의 복부 부위에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총탄에 맞아 찢겨진 홍철릭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신이 다급히 입을 열려 하자, 윤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지휘봉으로 돛을 가리켰다.
“이 수사, 위급한 함선의 수리가 먼저다. 피탄된 선체는 이미 복구하고 있으니 손상된 삭구와 돛을 교체하라. 서둘러야 한다.”
지엄한 원수의 명에 이순신이 다시금 갑판으로 내려갔다.
윤신은 사방이 박살 나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실로 어지러운 기함의 갑판을 바라보다 복부의 탄흔을 어루만졌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잡혔다.
우둘투둘하게 찌그러져 있는 이것이 본래 둥글었을 납탄환이라는 것을 짐작한 윤신이 손가락을 튕겨 납탄환을 바다에 빠트렸다.
‘이번에도 살았구나.’
비록 총알이 맞은 자리는 나중에 확인해본다면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홍철릭 안에 비단으로 된 견(絹)갑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홍철릭도 비단이 재질이긴 하나, 그것은 정말 정직한 옷이니 비단갑옷이라 말하진 못했다.
이 비단갑옷은 부위상으로는 흉부만 보호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효능은 정말로 탁월했다.
벌써 그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주었으니.
이 시대 좋은 지휘관이란 여전히 앞에 나아갈 때 주저함이 없어야 했다.
그것이 냉병기의 시절과 같이 검을 들고 직접 용감무쌍하게 적병을 도륙하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위치에는 있어야 했다.
수군 지휘관은 당연히 그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웠고.
반면, 총병들은 이전보다 상대의 지휘관을 노리기 쉬워졌다.
숙련된 포수들은 신뢰성 있는 총을 선별하여 가지고 다녔고, 멀리서 적의 지휘관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예전에는 뭐 기사도니 그런 같잖은 일로 전열보병을 이끄는 상대방의 지휘관을 공격하는 것을 무례한 행위라 생각했었다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먼 옛날부터 저격하는 행위를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다.
화살을 쏘아 적장을 죽이면, 활을 쏜 사람의 궁술을 치켜세울 일이지 헐뜯을 일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동아시아의 전장에선 숙련 저격병들이 참 많이 활약했고 그는 원수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몇 번이고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속에 입은 비단갑옷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
그는 천천히 비단갑을 쓸어내렸다.
사실 비단 정도야 조선의 종1품 원수, 육군과 수군을 모두 통틀어 무관의 최고계급인 그가 구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갑옷을 정녕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앞뒤의 두터운 비단층 사이에 껴 있는 황금색의 질긴 옷감.
비단 자체도 본래 몹시 질겨 충분히 두텁게 만든다면 화살을 막을 수 있다.
총탄 또한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면 방어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까울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
윤신은 이번 함대함의 전투 때 자신을 겨냥한 그 이름 모를 해적의 수석식 소총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웠던 총구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 그 안의 옷감은…….
‘이런 귀물을 어찌 이 사람에게 주신 겁니까. 게다가 어떻게…….’
사관학교 시절, 하나의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다.
고려의 충실한 보호국, 메리나에서는 수많은 거미가 살지만 왕거미속의 나무껍질거미(Caerostris darwini)라는 특이한 동물이 산다 한다.
듣기론 이 동물의 황금색 주사(蛛絲, 거미줄)를 이용하여 비단과 같은 옷감을 만들 수 있다 들었다.
이 거미비단은 한 벌의 충실한 갑옷을 만들 때마다 거미 7만 마리와 숙련된 장인 50명, 그리고 7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지.
정말 극소량의 주사를 얻기 위해서 실로 무지막지한 노동력과 섬세함, 장인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귀중했기에 메리나 토후국(土侯國)은 이 주사들을 상국에 엄청난 돈을 받고 독점적으로 팔았다.
제대로 직조를 하여 갑옷을 만든다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방호력을 자랑하는 신물을 만들 수 있으니.
총탄에 의한 암살을 막는다?
고정된 수요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값비싸다 하더라도.
고려에서도 아주 극소수, 실로 특별한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다는 이 무가지보(無價之寶)는 종통 중에서도 오직 세 사람, 즉 황제와 태자, 황후만 소유하고 있었다.
마야, 옥저, 조선, 백제 같은 충실한 고려의 번국의 군주는 천문학적인 재물을 바친다면 ‘구매’할 권리가 있었고.
그의 주군, 이휼 또한 번국 중에서 가장 체급이 높은 나라의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부담스러워 구매하지 못했지.
그렇기에 윤신은 자신에게 선뜻 이런 선물을 준 은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과 정체, 그리고 동기까지 전부.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분도 나이가 많이 드셨겠지.’
수염을 가꾸어 나이를 얼추 짐작하기 어렵게 하고 다녔던 그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상하게 젊었다.
연방사관학교 재학 당시 서른이 넘어갔던 윤신에게는 분명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그렇게 직접 말을 했긴 했지만.
‘되었다. 어디에 계시든 잘 지내실 분이다.’
그저 ‘그대가 조선에 남기로 선택하였으니 조선의 백성들을 잘 지켜다오’, 그리 말씀하셨지.
반지를 한 번 쓰다듬어 짤막한 생각을 끊어낸 윤신은 전장 정리가 얼추 끝난 바다를 둘러보고는 갑판에 있는 수군들에게 말했다.
“해류상으로 아직 터지지 못한 구들이 남쪽의 해로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배를 돌려 유구로 향하거라.”
“예, 대감!”
합종국은 바부얀 해전으로 순양함 두 척, 초계함 스물 세척이 완파되었고, 전열함 한 척과 순양함 세 척, 초계함 열다섯 척이 반파되어 수리 없인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나포한 함선은 순양함 한 척, 중범선 두 척, 초계함 아홉 척으로 이것들 또한 수리가 필요했다.
반면 연횡국은 전열함 한 척, 순양함 열한 척, 중범선 스물일곱 척, 초계함 아흔네 척이 침몰하였다.
도주한 적의 반파 상황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 * *
북려.
한주.
해서산맥(海澨山脈, Coast Mountains) 어딘가.
이곳 해서산맥은 미주 남부에서부터 한주 북부 먼 곳까지 솟아난 엄청난 길이의 산맥이다.
다만 극복할 수 있는 지형에 속하는 미주의 해서산맥과는 달리, 한주의 해서산맥은 고위도 특유의 추위와 악랄한 산세 덕에 한주의 내륙팽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리적 장애물이었다.
괜히 현재 한주의 거점이 어딘가 어정쩡한 섬, 하이도에 위치한 것이 아니겠지.
인간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았던 이 전인미답의 영토.
백의와 그 위에 백색의 두터운 두루마기, 그리고 머리에는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착용한 것처럼 보이는 두꺼운 털모자를 쓴 일단의 무리가 방한의류로 중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뼈가 시릴듯한 추위에 바삐 몸을 놀렸다.
― 후우, 후우
내뱉는 숨은 뿌연 안개로 변한다.
아까 소변을 보며 얼핏 보았는데,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빠르게 살얼음이 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의국의 훈련 속에서도 극한의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은 필수적으로 수료해야만 했지만, 어디까지나 훈련의 목적이라 인명을 경외시하지는 않았었지.
그렇다는 말은, 지금 이 험지는 정말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오갈 정도의 끔찍한 곳이라는 뜻이다.
춥고, 황량하다.
고산지대라 인간이 이용할만한 식생도 그렇게 풍족하지도 않다.
겨울이면 더 끔찍할 것이다.
게다가 추위와 배고픔만이 적은 아니었다.
남북려대륙은 그 광대함만큼이나 맹수 또한 많았다.
고려의 개척이 따뜻하고 괜찮은 해안가나 강가가 아닌 오지로 무차별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적대적인 일부 원주민도 한몫을 하지만 맹수 또한 큰 지분을 차지했다.
고려표범이니, 푸마(Puma concolor, 루나 시미에서 유래했다)니, 코요틀(Canis latrans, 나와틀어에서 유래했다)이니 늑대니, 붉은스라소니(Lynx rufus)니 하는 것들이 산과 들판에 맴돌며 인간을 위협했다.
하물며 초식동물이라는 것들도 만만치는 않아, 괜히 무방비하게 북려들소는 물론이고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무스)등에게 다가가 자극한다면 내장파열로 이승을 하직할 수도 있었다.
숲과 강에는 온갖 종류의 뱀과 악어 같은 파충류들이 있었고.
심지어 북려대륙 북부에는 이 땅에서 가장 끔찍한 맹수로 꼽히는 놈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일견 만만해 보이지만(그나마) 떼로 덤비면 지극히 공포스러운 회색 늑대였고, 두 번째는 그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곰이었다.
북려에는 곰이 정말 많이 살았다.
남려에도 태동산맥의 서늘한 고산 지역에 안경을 쓴 것처럼 보인다 하는 안경곰이 서식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유순한 성정과 작은 몸집은 끔찍한 북려의 곰들에 절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곰들은 한 종류만 있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까지 자주 내려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심심치 않게 일으키는 북려흑곰(Ursus americanus)이나 미주흑곰(U. a. californiensis) 등은 몹시 유명했다.
그러나 그런 북려 흑곰들도 무서워서 슬슬 피하는 존재가 있었다.
큰곰(Ursus arctos).
달리 북려큰곰, 혹은 갈색곰이라 일컬어지는 이 거대한 육상동물은 무지막지한 덩치만큼이나 무시무시한 포식자로, 자극하면 뼈도 못 추릴 존재였다.
식성은 잡식이며 온갖 것을 다 먹는다 하는데, 당연하게 인간 또한 그 식사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렇기에 이 일행은 충분한 식량과 물, 따뜻한 방한도구를 챙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경계해야 했다.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을 공격할 맹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지만, 굶주린 맹수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 * *
“이곳이 접선지일 터인데.”
일행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요원들은 일단 이곳에서 쉬어가기로 결정한 지휘관의 의사에 따라 빠르게 잡목들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마쳤다.
“저도 이곳이 맞다 생각합니다.”
다른 요원도 나침반과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잃으신 걸까?”
그러나 지휘관의 걱정에도 다른 요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범인을 아득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럴 리가요.”
맹목적인 믿음인지, 신앙인지.
방향감각은 선제께서 가지신 신묘한 힘에 포함되지 않다는 말은 지휘관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을 해 봐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기다려보자꾸나. 잠시간이라도 체류할 수 있는 확실한 거점을 만들고. 불이라도 크게 피워 연기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좋겠다.”
“예.”
요원들은 주변에 분주히 돌아다녔다.
[작가의 말]
20210831 수정.
거미 자료 조사를 하다보니 왕거미(Araneidae)와 무당거미(Nephila)에 대한 명칭 혼동이 있었습니다.
황금무당거미 → 나무껍질거미 수정.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이 나무껍질거미(Caerostris darwini)의 본래 이름은 다윈의 나무껍질거미인데, 정말로 외견이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처럼 생겼습니다.
(검색하실 때 혐 주의…)
거미 중에서 상당히 강력한 장력과 내구성을 가지는 거미줄을 만들기도 하고(단순한 수치상으로는 케블라의 10배), 강과 강 너머로 거미줄을 날려보낼 만큼 긴 거미줄을 만드는 거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