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토벌(4)
조선국 도원수 이윤신은 병인몽란 때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제수된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전사하지 않은 인물인 이백록의 손자였다.
이백록은 당대 이금의 치세에서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북방도원수와 좌의정을 거쳐 말년의 봉명관 전투 때 도체찰사로 활약하였으며 마침내 생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병인몽란 때 소백산맥에서 함께 싸웠던 이금은 노년까지 그를 붕우로 여기며 사석에서는 스스럼없이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깊었던 터라, 이백록은 사후까지도 그 대우가 좋았다.
그는 충무(忠武)라는 시호와 공의 작위를 받아 충무공이라 불렸으니 무인으로는 받을 수 있는 시호 중 가장 높은 것을 받은 셈이다.
병인몽란에 큰 공훈을 세웠던 남이도 그럴 만했겠지.
하지만 저 옥저에서 먼저 태조 이자윤의 장인이자 스승인 남이를 충무공으로 봉했기에 조선에서는 어쩐지 떨떠름하게 여기며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어쨌든 옥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그를 조선의 무인이라 여겼으니까.
이백록의 아들 이정(李貞)은 무인이 아니었고 품계도 그리 높이 올라가진 못했지만, 개성에서 고려와 조선 간의 여러 일에 대한 연락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인 연락관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니 덕분에 그의 네 아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이정은 신(臣)자를 돌림자로 하여 자신의 네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형제들의 이름을 전부 보면 호신(瑚臣), 조신(璪臣), 윤신(玧臣), 규신(珪臣)이라 하였다.
호와 조, 윤, 규는 모두 군주를 상징하는 물건.
호(瑚)은 호련(瑚璉)으로, 군주의 전통을 상징한다.
조(璪)는 면류(冕旒)로, 군주의 절제를 상징한다.
윤(玧)은 충이(充耳)로, 군주의 의지를 상징한다.
규(珪)는 진규(鎮圭)로, 군주의 통치를 상징한다.
모두 옥돌 변의 부수를 가지고 있으니, 뒤의 돌림자 신과 함께 그 의미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네 이름에 따라 성상을 보필하여야 한다.]
이정은 자신의 아들들이 그의 조부 이거처럼 문관으로 조정에 출사하는 바람이 있어 그렇게 작명을 하였지만, 오직 조신만이 문관으로 관직에 나아갔을 뿐 어릴 적 단명한 호신을 제외한 윤신과 규신은 무관으로 출사를 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정은 장성한 세 형제를 아꼈다.
그중 윤신은 특출난 능력을 자랑하였기에 더더욱 마음이 쓰였다.
하필이면 그의 이름이 저 상국의 황제 중 하나인 해윤(解玧)의 휘와 같아서 그러하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어릴 적부터 무관의 자질이 충분했다.
그는 스물두 살이 되는 해 무과 식년시에 급제하였는데, 성적은 병과였지만 당대의 합격자들 중에서 가장 젊어 주목을 받았다.
그가 젊었을 때만 해도, 조선은 전통적인 무예관과 고려에서 넘어오는 근대적 전쟁관이 혼재된 과도기적인 상황에 있었다.
무장은 여전히 일신의 무예, 즉 목전이나 철전, 편전을 쏘고 말을 타며 기사, 기창을 하고, 격구를 치는 등의 역량을 보았다.
병법과 경전에 대한 교육도 중요했으나 문과에 비하면 그 비중이 현저히 낮았고, 초시와 복시 모두 대체로 무예에서 많이 당락이 갈렸으니 장군의 자질은 여전히 앞에 나아가 싸우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흐름은 이윤신이 관직 생활을 할 때부터 서서히 바뀌었던 것 같다.
봉명관 분쟁 이후 상국에서는 군사적 지원의 일환으로 적지만 꾸준한 수의 총을 공급해 주었고, 화약 또한 그들의 군대마냥 몹시 풍족하게 쓸 수는 없더라도 일군을 훈련하고 운용할 수 있을 만큼은 안정되게 제공해 주었다.
사신단의 왕래 같은 관의 교류는 물론이고 민간과 군사 교류 또한 활발해지니, 조보와 같은 여러 매체를 통해 먼 세상의 이야기들이 조선에 들어가는 것도 이제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조선은 조금씩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스스로의 눈에 씌워져 있던 미몽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깨어나고 있는 제일 큰 이유라 한다면, 심대한 정치―군사적 경쟁자를 바로 옆에 두었다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을 들 수 있었다.
그것은 명도 마찬가지라, 두 나라는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박살 낼 수 있을지 적어도 군사적 면에서는 빠르게 외부 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제아무리 지금의 고려가 한자문화권의 영향이 많이 퇴색되고, 라틴어계의 문화가 많이 공존하고 있다지만 뿌리 자체는 동아시아에 있었기에 이들 국가들은 외부의 신진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나 옥저인들, 백제의 도래계 인들은 그냥 책을 가져와 읽으면 읽히는 수준이었으니.
고려글이야 이미 병인몽란 이후 조선에서는 서민들도 부지깽이로 슥슥 적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상황.
외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명도 조선어에 해박한 자가 상당히 많아 이 이점을 같이 누리고 있었지만 삼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선의 군부도 서서히 그 영향을 받았다.
이제는 전통적인 가치관 대신 근대적인 가치관이 도입된 것.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윤신.
무예는 일신의 용력이 빼어난 다른 무장들에 약간 빛이 바래는 감이 있지만, 일군을 다루는 것에 그야말로 미증유의 잠재력을 지닌 이 장수는 총병과 기병, 대포의 시대에 누구보다도 걸맞았던 것이다.
* * *
이윤신을 비롯한 젊고 재능있는 무관들이 상국의 연방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윤신은 영의정이자 조선 제일의 장수였던 충무공의 손자.
따라서 그와 같이 유학을 떠났던 동기들이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명문가의 도련님이라 여기며 경원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윤신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의 능력과 인품으로 붕우들에게 흠모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지.
그는 매사에 당당하면서 공정했다.
또한 완벽주의자라 동료나 부하들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높아 몹시 닦달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스스로의 행동부터 완벽하게 하다 보니 주변인들이 처음에는 불만을 가지다가도 나중에는 그의 행동에 절로 감화되었다.
생도들의 역량평가에서 그와 그가 속한 조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아직까지 구전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매사에 편집증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흐트러져야 할 때는 흐트러지기도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벗들과 더없이 친밀하게 놀았으며 칼이 아닌 술로 동기들을 전부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그가 맨 마지막 졸업식 때에 고별사를 하는 자리(Valedictorian)에 올라도 시기하는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원전은 또한 사관학교를 같이 다니며 그와 둘도 없는 벗이 되었다.
나이는 윤신이 다섯 살 위로 조금 더 많았지만, 벗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나이기도 했고 동기 생활을 하였으니.
‘허나 자네를 이런 꼴로 맞이하게 되어 내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패장인 자신과 자신의 형을 대신하여 새로운 총지휘관이 온다는 말을 듣고, 원전은 상투를 풀어 헤친 뒤 소복을 입고 거친 멍석 위에 꿇어앉아 그를 기다렸다.
벗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준다는 수치감, 죽어간 병사들에 대한 미안함과 비통함, 형에 대한 원망과 그래도 혈육이라 드는 안타까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중 극히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윤신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동래 통제영 관아의 문을 열고 들어오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죄를 청하고 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통제영 우후 원전을 비롯하여, 수군 장수들이 전부 꿇어앉아 있으니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이곳이 상갓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윤신은 천천히 다가가 원전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대감.”
“통우후는 이만 일어나시구려.”
“주상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또한 허무하게 스러져 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랠 수도 없습니다.”
윤신은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면서도 느꼈지만, 동래의 통제영은 상당히 잘 관리되고 있었다.
원흉(元凶, 원균의 멸칭)의 성정으로 미루어 볼 때, 백주대낮에도 여자를 끼고 음탕한 짓거리를 하거나 술에 잔뜩 취해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 분명했으니, 아마 이와 같은 부대 관리는 전부 통제영 우후의 몫이었을 것이다.
“주상께서는 그대의 패배에 대한 죄의 처분을 이미 결정하셨소.”
“…….”
“이르시기를, 그대는 몹시 큰 죄과가 있으나 그간의 공로를 참작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 그리 윤음을 내리셨소이다.”
백의종군이라 함은, 비록 보직해임을 당해 군의 지휘권은 없는 상태였지만 다른 지휘관을 보조하여 공을 세워 만회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처분이다.
작은 벌은 아니었지만, 큰 벌도 아닌 상황.
게다가 이휼이 직접 그와 친한 도원수를 이곳으로 내려보내었으니 사실상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원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는 그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후, 윤신은 관아로 들어갔다.
관아의 책상에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상했던 모양인지 원전이 가지런히 정리한 보고서와 군의 장부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작성된 것들이라, 윤신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조금의 시간을 두고 원전이 들어왔다.
백의종군을 명받아 그러한진 몰랐지만 소복은 바뀌지 않았고 다만 몰골이 흉악하다 생각했는지 풀어 헤쳤던 머리는 다시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래, 저 상투.
사관학교 생도 시절, 고려인들은 전부 머리를 잘랐었고 조선인들은 전부 상투를 유지했었지.
우리는 제아무리 비슷한 문화라지만 여전히 어딘가 이질적인 상국에서의 생활 땐 그런 사소한 것으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피어오르는 추억에, 윤신은 다만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어찌 그동안 편지 한 통이 없으셨소.”
“송구합니다. 도원수 대감.”
“주변에는 아무도 없소이다. 당경(當勁).”
윤신이 자신의 자를 부르는 와중에도 원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큰 충격을 받아 아직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그동안 자신의 동기이자 친우에게 연락하기 주저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 원균과 이윤신의 대립은 아주 유명했다.
군 내에서 그들은 제각기 자학파와 남학파를 대변했으니.
원전 또한 유학을 갔다 왔으니 남학파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놈의 가문 덕에 어쩔 수 없이 형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허나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단 말인가.’
그 알량한 가문의 영광 덕에 그의 부하들이 바다에 수장되었지.
원전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억나는가? 당경.”
원전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무엇이?”
“우리를 훈육했던 교수들 중에, 가장 젊었던 이가 했던 말을.”
“…….”
얼핏 그 얼굴이 떠올랐다.
키는 훤칠하게 크고, 얼굴은 잘생겼던 인물.
그러나 온몸에는 기품과 위엄이 서려 있어, 절로 감탄이 들곤 했다지.
듣기로는 그 교수는 수없이 많이 윤신에게 접근하여 그의 귀화를 설득했다 한다.
하지만 윤신은 끝까지 조선의 무장으로 살아가겠다고 대답했고.
당시 원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러한 영예를 발로 찬단 말인가.
조선에서 고려로 가는 것이 불명예는 아니었다.
아직도 양국의 인구 유출은 거의 일방적이었지만, 조선도 고려에게 너무나도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기에 이제는 이를 별로 개의치 않고 있었다.
게다가 윤신은 엄연히 가문의 삼남. 장남 호신이 어려서 죽었다지만 조신이 가문을 이어받을 것이기에 고려로 귀화를 결정해도 반대하는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인데.
“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선, 그 사람이 안락한 자리에 서 있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전받는 자리에 서 있는 순간을 지켜봐야 한다, 그리 말했었지.”
“그래, 그랬네.”
“도망치지 말게.”
원전은 윤신의 냉엄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맞서 싸우게, 전쟁이 다가오고 있어.”
“…….”
“나는 그대가 필요하이.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수군 장수인 그대가 말이야.”
원전이 없었으면, 원균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심지어 출전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통제영이 그 위용을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은 그 동생의 공로가 무척이나 컸으니까.
아마 정말로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의 함대를 자침시키고 도망가는, 그런 추태를 부릴지도 모르지.
원균이 스스로가 세울 전공에 들떠 출정을 결정할 만큼, 통제영의 수군을 정돈해 왔던 원전의 역량은 뛰어났던 것이다.
비통함, 비애감, 자괴감, 수치감.
원전의 눈동자에서 그런 감정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신 들어차기 시작한 것은 오직 단호한 결의.
윤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 *
둘만의 사적인 담화를 끝낸 이후, 윤신은 다른 제장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에는 삼남에 주둔한 육군과 수군 모두가 모여 있었다.
윤신은 이곳으로 오며 이휼에게 원수(元帥)라는 조선사 이후 최고의 무관직을 수여받은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고려 중후기 때야 도원수니, 대원수니, 상원수니 하며 원수의 직책이 유명무실해질 만큼 많이 생겨났지만 문치를 주장하는 조선에서는 원수의 이름을 거의 쓰지 않았고, 주었다 하더라도 오직 도 정도만 관할하라는 의미의 도원수만 내린 것이 전부였다.
태조 이성계 또한 동북면원수였으니 군권을 장악한 이들이 역모를 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주 이씨들이 가장 잘 알겠지.
그러나 이윤신이 제수받은 원수는 고려의 군 계급 편제에서 참조한 것으로 군사령관에게 임시로 부여하는 직책이 아닌, 엄연한 계급이었다.
게다가 조선과 고려는 그 전통이 달랐다.
해군이 육군보다도 더욱 강성하여 해군 원수와 육군 원수를 모두 편제한(대부분 공석으로 놔두었지만) 고려와 달리, 조선은 비록 판옥선 등으로 수군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더라도 여전히 보조적인 병과로 여기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조선의 원수는 도원수처럼 육군 전선의 한 방면을 총괄하는 자리 정도가 아니라 수군을 포함한 조선의 전 병력에 대한 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
현재 이휼이 윤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왕씨 고려의 왕순(王詢, 현종)이 인헌공 강감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라는 세간의 평이 정말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인선이었다.
그러한 그의 위엄 덕분인지, 혹은 그 완벽주의적 성격에 불똥이 튀어 괜히 혼이 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해적이 물러갔다 들었소이다.”
“예. 그들이 원래 목적한 바가 곡식을 약탈하는 것이니, 나주 부근의 곡창을 턴 뒤로 다시금 떠났을 것이옵니다.”
원전은 이제 완전히 예전의 신색을 되찾은 듯싶었다.
“그러나 곡식의 가격은 여전히 몹시 비싼 상황이고 그들 자체도 농사를 짓는 대신 약탈에 의존하는 습성을 지닌 바, 식량은 만성적으로 모자랄 것입니다. 또한 곡식의 부피가 큰 만큼 비좁은 해적선에 한 번에 실어나를 수 있는 양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니 마침내 그들은 다시금 이곳에 올 것이옵니다.”
“실로 그렇소.”
― 탁
이윤신이 지휘봉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금 곤경에 처하겠지.”
조운선은 다시 위협받을 것이고 해안가는 약탈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톤도를 완전히 정벌할 계획이오.”
그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좌중의 지휘관들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