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85화 (285/653)

해적 토벌

개천 326년(CE1601)

조선반도.

고려령 개성.

개성의 한 주둔지에서는 오전 일과를 끝낸 병사들이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주철 식판과 식기를 챙긴 자들은 잡담을 하며 지루한 대기열을 견뎌냈으나, 정작 식사를 받는 자들의 표정은 썩 만족스러워 보이지가 않았다.

― 후두둑

“에이…….”

국자에서 무언가가 식판에 툭 떨어지자 자신의 주철 식판를 바라본 고려인 해군 병사가 투덜거렸다.

“이게 전부요?”

뜨끈한 흰 쌀밥 대신 삶은 감자 두 덩이.

알맞게 구운 기름이 뚝뚝 떨어지던 고기 요리 대신 아직도 영 낯이 익숙하지 않은 철제 통(이걸 통조림이라 부른다 했다.)에 들어있는 맛대가리 하나 없는 고기 비슷한 것.

그리고 장식마냥 찔끔 주는 조금의 김치와 생선 한 토막.

초라한 밥상을 받아 든 병사가 투덜거렸다.

“전우님, 생선이라도 한 토막 더 줄 순 없소?”

“불가, 정량이오.”

병사는 몇 초 동안 취사병과 눈싸움을 벌였지만, 취사병 또한 기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은 채로, 뒤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며 국자로 휘적휘적 어서 가 보라는 행동을 취했다.

똥 씹은 듯한 얼굴로 고려인 병사가 식판을 받아들고 자신의 분대가 있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미 배식을 끝낸 병사들이 수저를 들어 감자 덩이를 으깨 김치에 싸 먹고 있었다.

“허 참. 언제 식량 사정이 좋아질지.”

그 또한 마지못해 동료의 옆에 앉아 가져온 수저를 들었다.

고려는 온갖 진미들이 넘쳐나는 나라였으며 음식의 풍요로움에는 제한이 없던 나라였다.

특히나 고기라면 환장을 하는 민족이기도 했다.

과거 왕씨 고려에선 불교적 색채로 인해 고기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지만, 해씨 고려에선 그 반대급부인지는 몰라도 식사에 고기가 안 나오면 밥을 먹은 것 같지가 않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나라였다.

덕분에 평균 신장은 계속 커져만 가, 같은 민족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보다 평균 키가 손 한 뼘은 더 컸으며 육체도 강건했다.

그러나 이 미식가이자 대식가들을 만족시키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었다.

그동안은 주둔군의 취사반 또한 실력이 그렇게 나쁘진 않아 식사 시간은 항상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미식가인 신민들 중에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자연스럽게 고려인 취사병들의 실력도 좋았던 것이다.

반면 이런 음식들은 딱히 그런 조리법이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단 한가지 장점을 제외하곤 모조리 단점뿐인 음식이었다.

‘오늘 배식에 저치들이 뭘 했겠느냐마는.’

반찬 대신 통조림을 절단기로 열고, 생선을 굽고 감자를 찐 정도가 아닐까.

화산폭발과 국난 이후, 비축해 놓았던 유통기한 있는 보급물자를 전부 소비한 이후에는 개성 주둔군 또한 배급되는 식사의 양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양뿐만 아니라 질도.

배급으로 오는 정체불명의 고기 조각들을 숟가락으로 떠 그것이 흘러내리는 꼴을 보고 있는 병사에게, 근처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부사관 하나가 핀잔을 주었다.

“오 상병, 자네도 본국의 신민들 또한 고생이 심하다는 걸 듣지 않았나?”

후임 하나가 그 말에 맞장구쳤다.

고려는 재난 이후 군대 규모 개편을 위해 인원 감축을 하였는데, 많은 수의 고령 병사들을 전역시키고 조금의 신병을 뽑았다.

눈치 없는 이 신병도 최근에 개성으로 온 처지였다.

“가계 형편이 심히 어려운 자는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한다 합니다. 고기도 당연히 못 먹구요. 북려에서는 메뚜기를 구워먹는다고도 하지요.”

“오오, 저런…….”

끔찍하다는 듯 몇 명의 병사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배급을 최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성상 폐하와 신료들 그리고 신민들이 우리를 그만큼 귀히 여긴다는 의미일세. 마땅히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조선만 하더라도 작년과 올해 작황이 좋지 않아 감자도 아닌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자들이 생겨날 만큼 고생하고 있다 하는데 이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저 맛대가리 하나 없는 고기 통조림을 절실하게 원하는 자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을 텐데.

“예…….”

“그러니까 불평 가지지 말고 들게. 엊그제도 커피에 설탕을 못 넣느니 뭐니 그러고 있더만 말이야. 전식용 건육괴(페미컨)로 삼시세끼를 때우는 것보다야 지금의 처지가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삼시세끼 건량과 건육괴라니, 실로 끔찍한 비유였다.

마침내 오 상병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안 부교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 상등병은 부끄러운지 식판에 얼굴을 파묻었고, 다시금 그 식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 * *

북쪽에서 옥저가 러시아와 처음으로 마주하고 서로를 탐색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는 조선이 명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한때 군신의 관계를 맺었던 사이였다.

하지만 세상사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항상 같지는 않았기에 그들의 사이는 과거의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에서, 지금은 서로의 면전에 총구를 들이대는 관계로 발전 아닌 발전을 한 상태였다.

시작은 아마 병인몽란일 것이다.

전 국토의 삼분의 이가 불탄 끔찍한 전쟁 후,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태조 이성계와 무종 이제에 의해 만들어진 뒤이은 전투적 기질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었다.

그 전투적 기질은 조선―북원 관계뿐만 아니라 조선―명 관계에게도 해당되었다.

유학적 사고방식은 평화를 지향한다?

조금은 맞는 말일 순 있다.

유학의 평화사상은 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강조되었으며, 예는 인류의 내면적 도덕성과 보편적 행위의 규범가치를 추구하였고 이상향으로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런 가치들은 자칭 천하패권이니 뭐니 수많은 왕조와 황조들이 싸워댈 때 자신에게 그 알량한 명분을 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반면 조선인들은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동안 세뇌되었던 자칭 중화의 개념에서는 동이족이 세상 패권을 잡는 일은 잘 일어나지는 않았다.

옛 고씨 고려때나 천명이 손에 잡힐 듯 했지.

선비나 거란, 몽골 등 다른 이민족 황조들도 천명을 얻은 뒤에는 중화에 동화되어 그들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고려를 보라.

신화적 인물, 삼황오제(복희와 신농, 황제 등)와 진시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천하관으로 천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제국교라는 독자적인 신앙도 존재했다.

그렇다면 같은 피가 흐르는 범예맥한의 조선이 중원의 국가들에게 동이라는 멸칭을 들을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 천명을 가지신 위대한 황제는 남쪽에 계신다.

우리가 동쪽의 오랑캐라면, 너희들 또한 조선 서쪽의 오랑캐(西戎, 서융)가 아니던가?

그렇게 조명관계는 서서히 긴장의 끈이 팽팽히 당겨지고 있던 것이다.

북원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북원과의 원한이라면 아마 자신들이 제일 원한이 깊다고 앞다투어 주장할 명, 조선, 옥저는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북원의 잔여 세력들은 바르수 볼라드와 보디 알락의 권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 사방에서 몰려드는 군대를 막기는 불가능했다.

삼국은 마침내 지긋지긋한 북원을 멸망시키고 그들을 칭기스칸 이전의 그저 그런 몽골 유목 세력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몽골의 부흥 운동이야 몇 번 일어났지만 이제 화기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동아시아에서도 유목민은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삼국은 마침내 연경(베이징)에 들어앉아 협상을 했는데, 제각기 옛 북원의 영토를 분할하여 점령했다.

이때는 삼국의 군웅들, 즉 이금과 주우철, 이자윤 모두가 폭삭 늙었을 때였다.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가장 명분이 확실한 명나라는 화북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임유관 밑의 지역을 다시금 회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가장 적은 군대를 동원하고, 또한 그나마 가장 원한이 적고 명분도 작은 옥저는 옛날 조선과의 국경을 조금 더 이어 서쪽의 초원을 획득했다.

조선은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요서를 획득하였다.

그렇게 평화롭게 조약이 끝났으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갈등은 그 후에 일어났다.

이제 국경을 마주하게 된 조선과 명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자리에서, 이금이 큰 외교적 모욕을 당한 것.

‘아비를 죽인 아들.’

아직도 저 동이란 것들은 대명에 비해 여전히 미련하다, 그런 시대착오적 생각을 가진 두 명나라 장수가 서로 킬킬대며 입을 열었었지,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나지막한 지나의 언어였지만 이금의 곁에 있던 실력 좋은 조선의 역관들은 패륜적인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으며 자리가 파하고 표정이 이상한 역관들을 추궁해 대화의 전말을 알아낸 이금은 크게 분노했다.

이금은 사실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적은 군대를 동원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았겠지만, 상당한 군사를 동원하고 기껏 요서 하나만 떼어 준 명의 행위에 상당히 빈정이 상해 있던 이금은 외교적 모욕을 구실로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아직 비어있는 임유관을 접수했다.

본래 임유관은 당연하게도 북동쪽에서 오는 외적들을 막게 설계된 곳.

그러나 조선은 이곳의 요새를 반대 방향으로 개축했고, 만리장성도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임유관을 봉명관(封明關)이라 이름을 바꾸고 영구히 군사를 주둔시켰지.

조선은 과거의 그 나라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천조 질서에 입조한 이상, 옛 천조 나라는 그저 국경을 맞댄 잠재적 적국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금은 자신의 눈으로 주우철이 얼마나 비참한 몰골로 북원의 포로가 되었다가 고려의 포로가 되었는지 본 인물이다.

그런 놈들에게 고개를 숙일 순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지 않은가?’

조선의 정치 구도도 확실히 정해진 상황.

과거 동인과 서인의 정권 쟁탈전은 서인이 우세해진 적이 있었으나, 결국 친려파인 동인이 정권을 잡았고 그들 또한 남학파니 자학파니 분화되었다고 한들 기본적인 기조 자체는 새로운 상국 고려를 열심히 섬기자는 것이 골조였다.

그리고 그 반대로 원교근공의 예를 들며 지나의 세력을 경계하자는 것도 골조였고.

사실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과 명 사이는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 않았는가?

“비열한 조선 놈들!”

주우철은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이후 군세를 다시금 일으켰다.

그들의 자존심은 근래에 들어 상당히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옛 번국이었던 존재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수모였다.

명나라식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거의 이십만에 달하는 수많은 군대들이 봉명관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조선 또한 수입해온 질 좋은 고려산 총과 대포, 그리고 개성의 고려 장교들에게 교육을 받은 십만의 대군으로 응수했다.

그렇기에 봉명관은 긴 공성전 동안 수많은 피가 흘렀음에도 그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먼저 뒤통수를 때린 조선의 행동을 묵인하던 고려가 조명 분쟁이 봉명관 동쪽으로 이어져 명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려 한다면 자신들 또한 개입하겠다고 선포하자 표면상의 갈등은 마침내 서서히 가라앉았다.

주우철과 이금 이후, 후대의 명 황제와 조선 왕은 봉명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채로 이 사건을 묻어두었지.

하지만 이 지역은 언제든지 터질 화약고와 같아서 양측은 상당한 병력을 이곳에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 * *

한양.

경복궁.

근정전.

“예, 상황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개성 및 탐라 총독이 주선려군(駐鮮麗軍)의 감축 통보를 전달하자 조선의 조정은 크게 동요했다.

“이 일을 재고하여 주실 수는 없겠소?”

조선 왕 이휼은 크게 근심했다.

양이들의 해적은 카디스 조약 이후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그 세력이 급성장하여 누산타라와 톤도 제도 일부, 그리고 남명의 해안가에는 질서라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명은 주나라와 연계하여 해적에 대항했으나 그 성세는 형편없었고 자신들의 해안가를 수비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들이 해안에서 일정 거리까지의 모든 사람을 소개했을 것인가.

이 동남아시아의 양이 해적들은 이제 강력한 해금 정책을 하는 덕에 딱히 탐나는 곳이 아니게 된 명의 남쪽을 내버려 두고 조선과 백제, 왜의 바다까지 계속 간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대대적으로 이곳에 오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단 조선의 물산이 삼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고려와 겹치는 곡물과 면포, 도자기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있었고.

가장 크게는 고려의 함대가 무섭기 때문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군축에 들어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역으로 다른 봉신국들에게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가뜩이나 봉명관에서 명을 견제하고 있는 조선은 더.

듣기로는 지금 고려는 파견군의 이분의 일만큼을 귀환시키길 원한다는 모양인데.

“상국이 군세를 축소한다면 개성과 신벽란도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의정 이산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임금의 말에 동조했다.

지리적인 환경으로 해적과는 인연이 먼 옥저를 제외하고 고려, 조선과 백제, 그리고 유구(그리고 주나라도 가끔 명의 눈치를 보다 참전했다)는 일정한 주기마다 해군들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탐라와 유구 등지의 해적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벌였다.

이 연합함대는 가끔은 근해를 위협하는 해적들을 토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당히 아래까지 내려갔는데, 그들의 거점이 있는 톤도 제도와 팔라완섬에 가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도 몇 번이고 벌여대었다.

비록 이 누산타라의 해적은 너무나도 복잡한 해안선과 수많은 섬들에 고루 퍼져 있어 아직 본격적인 토벌의 가능성이 너무나도 낮았지만, 적어도 이런 위력 시위라도 해야만 이들이 대만섬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망설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고려의 통보는 한동안 대대적인 해상작전이 없고 군사적 작전도 오직 지극히 수비적으로만 할 것이라는 앞으로의 작계를 함축했다.

상국의 어려움이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조선 또한 지금 흉년이 든 상태였기에 군사작전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줄 수 없는 처지였다.

고려의 사절은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시지요, 전하. 신벽란도의 해안요새는 이미 충실하니 그 기능을 다할 것이고, 한강의 하류 또한 여전히 단단할 것입니다.”

고려는 이미 탐라와 개성, 다바오 등 주둔하고 있는 곳의 요새화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건축된 해안요새는 이 정도의 조그마한 영토를 지키는 것에 비하면 과분하다 싶은 정도였다.

“알겠소이다.”

이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명분으로 독촉을 하겠는가.

사정이 어렵다는데.

게다가 고려는 그 와중에도 여전히 한양은 지켜주겠다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

설마 그 시간 동안 바다의 해적들이 날뛰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희망과는 다르게 원말의 혼란기에 사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홍건적과 비슷하게 조선과 백제의 해안가에도 엄청난 수의 해적들이 몰려왔다.

“곡물값이 금값이다! 조선 놈들을 약탈하자!”

해금령을 내려도 땅덩어리가 무척 넓은 덕에 피해를 흡수할 수 있었던 명과는 달리, 조선은 삼면이 바다인 데다가 땅이 좁아 그럴 수 없는 존재.

그동안 사실 쌀밖에 나지 않아 약탈하기에 매력적이지 않았던 조선은 자신들이 이렇게 예상 밖으로 주목받는 뜬금없는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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