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79화 (279/653)

제국교(2)

수많은 황실의 일원들이 공식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제국교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 쌍용지손은, 그렇기에 아슈라프나 사이이드보다 더욱 고귀하다.

지금까지의 조정은 하나의 체계에 속하지 않아 통제 범위 밖에 있는 개신교를 썩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은연중에 개신교들을 홀대하고 있었다.

종교활동의 개시나, 그에 관한 시설을 건축하는 것을 기존 주요 교단들(조계종, 천태종, 고려정교회, 고려성공회)이 등록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롤라드니, 배설교회니, 재세례파니 하는 개신교 교회들은 철저한 허가제를 따랐다.

이는 고려 내에서 ‘경계해야 할 종교들’에 속한다는 의미.

기존의 허가제를 따른 종교들이 쿠쿨칸교나 만종교, 무왈라드파(수니계) 등 어딘가 꺼림칙한 종교들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개신교는 처음부터 그렇게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교는 창단부터 주요 교단급, 즉 등록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다른 종교의 반발이 있었으나, ‘높으신 분들’께서 믿는 덕분에 그 인맥의 끈이 실로 대단했다.

해선, 이놈도 그 뒷배 중 하나리라.

“…….”

상민은 밤새 고민했다.

대체 그가 지금까지 제위를 지키고 있었다면, 무슨 꼴이 났을지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

이 제국교도들이라는 자들이 살아있는 신인 자신을 믿는답시고 세계에 자행할 패악질들을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종교의 시대, 이는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과 같았으니.

대외적으로 자신은 죽었기에 망정이지.

그러나,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들은 이젠 너무나도 많았다.

자신의 국가 통치 명령이 자신의 불멸성과 태조의 권위를 타고 효율적으로 계승―전달되는 범주와, 비밀이 지켜지는 범주의 경계는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었고, 덕분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황가 최고직계.

각 주의 현직 군왕들.

사실상 자신의 또 다른 직계인 앙주의 드 아르크 가문.

최고 계급의 신하들, 즉 상서령과 중서령, 집법령.

그뿐이랴.

자신은 많은 여자들과 관계하여,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맨 처음, 태조 시절 왕예 말고도 후궁들을 들여 지방의 제왕지손들을 분봉했었지.

연화와의 사이에서도 딸들이 있었고.

지금의 반려인 루크레치아와의 사이에서도 무려 여섯의 자식들을 본 상황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풍족한 삶을 보장해 주겠지만, 이 자식들은 제각기 일반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비밀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는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그 자식들이 자신을 사랑한답시고 무슨 짓을 꾸밀 수 있는지 누가 장담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여의국.

국가에서 가장 많은 권한과 행동을 어떠한 법에도 얽매이지 않고 행사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정보단체.

상민이 이들의 충성심을 정말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온전히 장악한 이들이지만, 그렇기에 이 충성심이 지극하게 높은 이들 중 정말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있을 수 있었다.

상민이 영원토록 제국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물론, 이들은 자의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상민의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따르는 단체였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 제국교의 득세는 사실상 자신이 방조한 것과 다름없다.

그의 피가 닿아 있는 후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지를 표명한 것을 보면.

이런 일이 언제고 일어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을 해 놓아야 했었다.

‘망설이고 있었나.’

손에서 놓는다고, 놓는다고 그렇게 공언을 했건만, 정작 자신이 제국을 온전히 믿지 못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마냥 불안에 떨었던가.

혹은 권력욕?

항상 휴가를 가고 싶고, 항상 물러나 은퇴를 꿈꾼다지만, 지고의 위치에서 지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든 사내들의 욕망이었으니까.

그는 매번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제국을 경영했던 것이지.

그는 정말 하루 동안 낮과 밤이 새도록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해보았자 결론은 오직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 고민은 아마 마지막으로 미련의 줄기들을 잘라내는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금 한 걸음을 물러나야 제국은 두 걸음을 앞으로 나아간다.’

탈출전략은 이미 충분했다.

제국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대학에 들어가 군대까지 전역한 징그럽게 큰 아들놈과 같았다.

그저, 사회에 나가기 전 용돈이 조금 필요한.

그래 돈 줄게, 준다고.

상민은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침실엔 이제 중년에서 노년의 시기로 접어든 그의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주름이 여실히 느껴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루크레치아.

그녀 또한 이제 예당의 업무를 서서히 손에서 놓기 시작했다지.

잠시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니, 그녀가 잠결에 눈을 뜨고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지고 잠귀도 밝아지나 보다.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고민은 끝났나요?”

삼십 년 이상을 살아오면 부부는 뜻이 통하기 마련이다.

“그렇소.”

루크레치아가 환한 미소를 물었다.

“…준비할게요.”

* * *

남려.

청해.

― 쿵쿵쿵

‘이런 야심한 밤에, 누가 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인가?’

2층에 위치한 자신의 서재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던, 중년의 교수가 책상에 올려져 있는 값비싼 회중 시계(청해의 교수들에게 수여되는)를 흘깃 바라보았다.

오전 2시.

자식들은 전부 약관이 지난 지 오래, 장성해서 장가나 시집을 갔고 아내와는 일찍이 사별하여 홀로 지내는 까닭에 집은 그 혼자만이 거주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은 밤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실례 중 실례였다.

혹은 실례를 무릅쓰고 와야 할 긴급한 상황이거나.

“끄응.”

그는 돋보기안경을 내려놓았다.

터벅터벅

집의 계단을 내려간 그가 마당을 나가 정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전 물었다.

“뉘시오?”

수상한 이라면, 차라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 좋았다.

비록 나무문이었지만 이것을 소란스럽게 부순다면 근처를 순찰하는 경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청해, 고려 내에서 치안이 가장 좋기로 소문난 곳 중 하나였다.

심지어 이 골목은 청해 대학에서 근무하는 교수들이 대거 기거하는 곳이다 보니 다른 동료 교수들 또한 잠결에 이를 들어 깨어난다면 경관들에게 신고를 할 수 있겠지.

그가 아무리 근래 학계에 제출한 논문 덕에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당한다 하더라도, 아무렴 그 정도의 동료의식이 없을까.

그러나, 그의 경계 섞인 상상의 나래는 곧 꺼졌다.

“…청해의 통령 관저에서 왔습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그는 문을 슬쩍 열었다.

집 밖에는 가죽 흑립을 쓰고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다섯 명의 남성들이 서 있었다.

“정 교수님.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댁들은 정확히 뉘시오.”

흑의인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게 칠한 적강목에 금색으로 눈이 양각된 신원부.

신원부 가운데, 그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은 소름 끼쳤다.

“…추밀원 소속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시중께서 찾으시니 짐을 챙기시지요.”

추밀원이라.

그 밑의 조직이나, 그런 것에 대해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정 교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호… 혹시 내… 내가 쓴 논문 때문에 성상이나 시중께서 진노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

정 교수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흑의인 하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씀드려 주시오. 그것은 오직 태조 폐하의 신성성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합리적인 역사성을 위하여…….”

“빨리 짐을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흑의인들의 독촉에 교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기 바로 직전인데, 대체 뭘 하라는 건지.

의도가 뭔지, 대체 왜 나인지.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갔지만 불안함만 증폭되었을 뿐, 뭐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알겠소, 알겠습니다. 대체 뭘 챙겨야 합니까?”

“오랜 시간 입을 옷가지나, 생활용품 등을 챙겨 주시면 되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정 교수의 그 말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 *

“이곳은 청해 통령 관저로 가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그분께선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통령 관저로 가는 대신, 청해의 항구로 간 정교수와 수상쩍은 흑의인들은 마침내 거대하고 화려한 새벽호가 기항한 부두에 도착했다.

청해에 살다보면, 이 거대한 배를 보는 경우가 몇 번 있기 마련.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추밀원을 사칭하는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여전했다.

시중께서 뭘 원하시는 건지.

그러나, 의외로 새벽호의 집무실에 앉아있는 시중의 표정은 그리 어둡거나 화나 보이시진 않았다.

“그래, 오셨는가.”

“당하…….”

팔랑팔랑 논문을 보고 있던 상민이, 손바닥을 펴 그를 집무실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도록 명했다.

교수의 신분에서 삽시간에 논문심사를 받는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낀 정 교수가 그의 옛 스승에게보다도 훨씬 더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청해대학교의 정영택 교수, 고려 제일의 역사학자 중 한 명이자, 실증주의 학파의 선두자라.”

“…….”

“초기 고려 및 옛 반도 고려 역사 전문가기도 하지.”

“…….”

“이 사람이 말한 수식어 중 잘못된 것이 있소?”

그에 대한 칭찬이기도 한데, 막상 어딘가의 뉘앙스는 참으로 묘해 마냥 좋게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다음 말을 들어보라, 당연히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겠는가.

“한림학사 손우경의 절친한 학문적 벗이기도 하지. 그가 사회계약론을 주장할 때 많은 근거를 제공했다고 들었네. 맞는가?”

이쯤 되니, 이제는 정영택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반발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하. 방금까지 말씀하신 것 중 그릇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 꿀꺽

그가 침을 삼키고는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오나, 당하. 고려의 학문적 자유는 개천제 이후로 그 누구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이라, 설령 당하께서 소인을 겁…박하신다 하더라도 소인은 물론이고 고려의 어떤 학자들도 그들의 뜻과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상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면 바깥으로도 여실히 느껴질 정도의.

그 미소는 차츰 커져, 마침내 그는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너털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의외의 모습이라, 정영택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세.”

진정으로 흐뭇해 보이는 시중의 모습에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웃음을 터트리던 상민이 신색을 가다듬고 말했다.

“자네는 내 은퇴 여행에 좀 같이 가주어야겠네.”

“예?”

대답 대신, 상민은 그에게 새벽호의 선실 중 편한 곳에 짐을 풀라는 사실상의 축객령을 내리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항해사가 다가왔다.

“당하, 어디로 뫼십니까.”

그러나 상민이 그에게 명령을 내리기 전, 주 돛대의 망루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고함을 질렀다.

“우현 견시 보고! 다수의 함대 발견!”

“…….”

맹렬히 청해로 다가오는 함선.

그들의 국적기는 너무나도 명백했기에, 새벽호의 선원들은 멀뚱히 상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감싸 쥔 상민이 서둘러 항해사를 독촉했지만 돛을 펼치고 항구에서 나와 근해의 바다로 향하던 새벽호는 이미 충분히 속력을 받은 수많은 함선에 의해 포위되었다.

― 제국근위함대에서 알림. 선박은 정지할 것.

고려국 함선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신호기를 펼친 호위함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 선원들의 능력들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새벽호를 감쌌고, 이윽고 둔중한 전열함마저도 천천히 다가와 그 포위망에 합류했다.

새벽호도 빠르고 강하지만,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점을 두었기에 전투용 군함들보다 기동성이 뛰어나진 않았다.

게다가 전열함을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압도적인 크기의 거함에 실린 엄청난 수의 대포.

포문은 겨누는 것 자체가 불경이라는 듯 전부 닫혀 있지만 나가려면 아예 배를 돌진시켜 충각이라도 하라는 듯한 진영을 펼치고 닻을 내리는 강짜에, 새벽호마저도 돛과 닻을 내려야 했다.

이제야 동이 떠오르는 새벽.

청해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괴상망측한 사건에, 저 멀리 일찍 일어난 어부들이 어업을 준비하는 것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구경하며 떠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마지못해 선실에 짐을 풀었던 정영택 교수도 갑판에 나와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사방을 보며 덜덜 몸을 웅크리고 떠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시중과 황제가 서로 다투기라도 했을까.

“에잉…….”

시중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 끼이익

“당하! 접선하겠습니다!”

전열함에서 제국해군의 제독으로 보이는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허락이 아니라, 통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을 거면서 뭘 그리 소리를 질러대는가!”

“송구합니다, 당하! 그러나…….”

하지만, 이미 이곳으로 줄을 타고 넘어온 수병들이 단단히 두 배를 묶었고 이윽고 두 배를 오가기 쉽게 간이 판자가 놓였다.

그리고 고려의 황제인 해선이 성큼성큼 그 다리를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 * *

해선은 한숨을 내쉬고 주위에 말했다.

“포박을 풀고, 그대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으라.”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고 단지 충성심이 강할 뿐인 수병들은 갑판으로 건너오자마자 잠재적 불순분자들, 즉 새벽호의 선원들을 죄다 포박한 상태였지만,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명령을 받은 것뿐이지.

붉어진 손목을 움켜쥐며 투덜거리는 새벽호의 선원들과 머쓱한 얼굴을 한 수병들이 모두 커다란 배의 갑판에서 떠났다.

“할아버님께서 야반도주를 꿈꾸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는데 말이오.”

“…….”

한숨을 내쉰 해선이 말했다.

“적어도 소손에게는 귀띔을 해 주셨어야지요.”

여전히 상민은 불퉁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몇 번이고 말을 드렸는데 말이오.”

“할아버님! 여당과 야당의 당수도 지극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삼(三)서령 또한 마찬가지지요! 이렇게 무책임하게 떠나시는 것이 맞사옵니까?”

상민은 한참을 눈을 감은 상태로 있다 말했다.

“그렇게, 어중간하게 하다 보면, 결국 다른 이유를 들며 떠나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떠나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선아. 제국교 말이다. 네 작품이더냐?”

“…….”

날카로운 그의 물음에 해선이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희들이 통치를 했었다면 정말 좋은 치세를 만들 수 있었겠지. 진이와 권이, 정이가 그랬던 것처럼.”

태종과 세종, 성종의 치세를 읊은 상민이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너와 건이, 광이의 역량이 그 아이들보다 덜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너희들이 나를 믿고 참아준 것이 고마울 뿐이지.”

사실 상민이 엄격하게 후손을 관리하여 그럴 성품을 가진 아이들을 고려의 제위에 올렸던 것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이들이 커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러나 아니야. 작위적인 계몽군주는 허상이다. 이제는 민의의 지도자가 너희를 인도해야 한다.”

“…실존하는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그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상민은 손을 펼쳤다.

“중서성 의원들에게 시중 선출 투표를 하라 하거라. 훗날, 만약 충분한 시간이 지나 모든 기틀이 잡힌다면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모든 국민이 시중을 선출하도록 하라.

너와 네 황실도 민의를 따르거라. 난 제국의 건설자이지만 한 번도 그것의 소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다.”

이제는 정말 가능하다.

철도가 깔리기 시작하며 이 거대한 국가는 하나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초창기에는 좌충우돌하겠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경험이라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반면 더 이상 미루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고.

해선이 물었다.

태종 해진은 야심이 있기에 오히려 아버지를 떠나보내었지.

그러나 이 아이 해선은 처음부터 한 번도 국정을 운영한 적이 없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와 황실에 미래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대에 해윤으로부터 내려왔던 이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불멸의 재상이 사라지는 것에 엄청난 부담을 느끼기도 하겠지.

“제국에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지나가리라.”

“기근과 전쟁, 내부의 분열이 우리를 혼란케 할지 모릅니다.”

“너희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어찌하오리까.”

“모든 고난은 극복할 수 있다. 너희가 뽑은 지도자를 믿어라. 부러진 뼈는 더욱 단단하게 붙는 법이니.”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애초에 떠난 적이 없도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짐이 이 나라를 떠날 일은 없다 하지 않느냐.”

여전히 그는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개입할 때는 개입하겠지.

막대한 자금으로, 혹은 황가에 주어진 정치적 권한으로.

너무나 어설프고 무능하거나, 사상이 극도로 과격하여 국가를 파멸로 인도할 지도자는 사실 그 자리에 오르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선도국가. 그런 지도자를 선출할 이유 또한 적을 것이다.’

하지만 시중의 지위를 내려놓는 것은 거대한 포기임이 확실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선지자와 우리의 영도자를 잃는군요. 할아버님. 대체 저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자유, 그로 인한 모든 것.”

그는 해선의 등을 두드렸다.

“할아버님이 소유하신 그 회사들. 그것들이 제국과 황실을 지킬 수 있습니까? 대단하다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북유럽회사와 서유럽회사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여도 여전히 사람들은 세속의 정치 권력을 최고로 꼽지.

황제인 해선조차도 아직 상민의 부를 전부 알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군주의 명령에 상인들은 속절없이 휘둘리는 것이 지금 시대의 상황이니까.

그러나 훗날의 거대 자본가의 위력을 보지 못한 자들만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나는 무적이고 나스닥, 아니 고려의 경제는 신이 되리라.”

“……?”

해선은 뜻 모를 소리를 하는 그의 선조를 바라보았으나 시중은 이제 그를 등 떠밀어 전열함으로 내보내기만 할 뿐이었다.

설득이 통한 것인지, 혹은 확고한 선조의 결심을 돌릴 방법이 없음을 알았는지.

전열함과 호위함은 마지못해 길을 터 주었다.

풀려난 새벽호의 선원들도 갑판으로 나와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쳤다.

예전, 아주 예전, 해문에서 그가 아들 해진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떠났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내부의 혼란에 다시금 돌아왔었지.

‘이제 시중으로서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을까.’

어중간한 일들은 이들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그마한 바람을 품으며 아침의 햇살을 만끽했다.

해선이 고함을 질렀다.

“제국교는 영원할 겁니다!”

‘망할 자식.’

그래, 저거부터 어떻게 좀 해결하러 가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