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와인, 그리고 포도(4)
“……!”
완벽한 맛이다.
프랑수아 1세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그 원료에 시선을 두어 심상을 표현한다면.
이것은 뜨거울 정도로 찬란한 햇살 아래, 광활하게 뻗은 풍요로운 대지에서 위대한 자연의 축복을 올곧이 얻어 태어난 신의 은총이라고.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오직 그 맛의 절정을 다루기 위해 매진했던 농부들의 땀이 당연한 과실로 돌아온 것이라고.
그 배경에는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이 없고 다만 여유로움과 평화로움,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의 감정만이 담겨 있을 뿐이라고.
와인이 정말로 신의 피라면, 이것이 바로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맛일 거라고.
‘으음…….’
주변을 둘러보니, 왕과 대사들도 제각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상태로 술잔에 입을 자꾸만 가져가고 있었다.
저 다른 연회장의 귀족들 또한 웅성웅성한 것이 같은 것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다.
프랑수아의 미식에 대한 식견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대단하여 비교되는 감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왕과 여기에 초청될 정도의 귀족들은 모두 미식가에 속한다.
부족함 없이 자라온 이들이니만큼 당연히 와인 정도야 그 맛을 판별하지 않겠는가.
“대단한 맛입니다!”
“우아하며, 깔끔하고, 역동적이며, 생기발랄해요. 마치 가장 아름답게 핀 여인의 전성기를 그리는 것 같군요.”
“역시… 이게 보르도의 맛이로군.”
순수한 감탄을 하는 귀족들도 있었고.
그냥 프랑스가 꼴 보기 싫었던 잉글랜드의 귀족이 은근슬쩍 아키텐 여공 엘레오노르의 결혼 이후부터 백년전쟁 이전까지 보르도가 잉글랜드의 영토였다는 점을 들며 그네들의 공을 주장하기도 했다.
“옛날 잉글랜드가 보르도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그대들은 고맙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 하시오?”
그러나 저 연회장의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 1세는 도리어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마셔본 가장 좋은 포도주들―보르도를 포함하여 수많은 프랑스 지방의 좋은 와인들―에서는 이런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마지막 포도주 디켄터를 들어 마셨을 때도 여실히 느껴졌다.
맨 마지막 포도주가 그의 자랑스러운 프랑스 보르도 와인일 것이라고.
“내가 졌소.”
체사레는 후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맛의 차이라면, 그는 이탈리아 와인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알베리히 또한 못마땅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대사들 또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프랑스 와인은 당대 최고의 와인이군요. 특히나 이 와인, 정말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다.
침묵을 지키는 프랑수아 1세 대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콘초바 4세가 손뼉을 치더니 주의를 환기했다.
“그렇다면 서열을 매기시지요. 순서대로 드셨으니, 순서대로 그 점수를 기입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주변의 시종들이 바쁘게 오가 여론을 적은 무기명 투표지를 수렴했다.
프랑수아는 무엇을 주저하는지, 끝까지 망설이다가, 결국 콘초바의 채근에 대답을 했다.
“나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까?”
― 오호
누군가 그의 그런 모습에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고려에서는 속이 좁고 편협한 사람을 소인배라고 한다지요. 그의 반대말은 고려어의 접두사 구조에 따르면 대인배일 것이니, 왕께선 분명 대인배라 칭해지실 수 있겠습니다.”
프랑수아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떠올라 갑자기 다리가 풀리는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근래에 그의 궁정 신하들이 하나같이 고려의 술을 마시며 칭송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뭐, 바그 코히엔이야 프랑수아 1세도 양백현을 등용하면서 받아들인 문화니 상관없는데.
최근 한 상인이 궁정에 정말로 황홀한 맛을 가진 고려의 와인을 진상하는 일이 있었다.
프랑수아는 근래에 일이 바쁜 데다가 마셔서 검토하고 선별해야 할 프랑스 와인이 산더미였기에 보잘것없는 고려의 와인들을 제대로 마셔보는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기회도 없었고, 딱히 마시려는 의지도 없었다.
고려는 엄연히 와인이 아니라, 소주로 유명한 국가니까.
그러나 그의 아내이자 현 프랑스의 왕비인 마르가리트는 고려의 와인을 몹시 좋아하고 있었다 한다.
식사시간마다 따로 내오라고 했을 정도라 하니.
기껏 저 궁벽한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에서 살던 마르가리트가 와인의 참맛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프랑수아로서는 기가 차긴 했었지.
그러나 그는 궁정에서 왕비의 시녀를 들던 미녀인 메리 불린과 그녀의 여동생 앤 불린를 그의 정부(메트레 상티트르 Maîtresse―en―titre)로 삼는, 남자로서는 실로 당대의 행운아로 기록될 위대한 업적을, 여자들로서는 실로 끔찍한 행동을 저지른 참이었기에 한창 냉각된 마르가리트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지.
식사도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따로 하고 있었고.
그래도 마르가리트는 현 신성로마제국 카이저 알베리히의 여동생이다.
위대한 프랑스의 왕조차도 함부로 홀대할 수 없는 고귀한 지위였으니 오히려 프랑수아는 그 상인에게 오히려 더 많은 고려산 와인, 더 비싼 고려산 와인을 사 놓아라 그렇게 지시를 했었다.
그렇게 해서 마르가리트가 그 맛있다는 고려 술에 취해 특유의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고 얌전하게 잠이 들면 그 후에 프랑수아는 미녀 자매 두 명을 끼고 신나게 침실에 들어가면 되었으니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는 당시에 정말 모든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랬던 기억이 났다.
그가 그러한 기억을 더듬어 불길함의 근원을 찾고 있을 때, 콘초바 4세는 조금 높이 솟은 연단에 올라 결과지를 받아들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윽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대망의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10위는 포르투갈의…….”
“오오…….”
― 짝짝짝
“9위는 아라곤의…….”
“8위는 이탈리아의…….”
“7위도 이탈리아의…….”
프랑수아의 험담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 몇 개의 와인은 많은 표를 받아 체면치레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의 순위는 온전히 프랑스의 독식이었다.
“6위는 프랑스의…….”
“5위도 프랑스의…….”
천천히 박수를 치는 귀족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놓여 있는 와인의 정체가 몹시 궁금한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인들이 자랑하는 보르도 와인은 2위에 안착한 상황.
프랑수아 1세가 분명 비밀스러운 무기를 남겨두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대중적이면서도 너무나 품질이 좋았던 포도주는 그들에게 충격 아닌 충격을 선사했으니까.
당연히 그것이 저 일등의 위치에 올라 있을 것이고 그 국적은 여전히 프랑스가 맞을 것이었다.
“그 떼루아가 어딜지, 정말 궁금하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콘초바는 연단 위에서 주변의 반응을 바라보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대단하군.’
자신이 짓궂은 일을 준비할 때부터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이 와인이 가장 수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본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도 고려의 와인을 많이 마셔보긴 하여 이들의 양조기술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엄연히 고려가 유럽과 아랍에 비해 후발주자였을 것이다.
다만, 그 성장세는 정말로 놀라워 어느덧 양조기술은 많이 따라오고 있었지.
저들은 남는 게 곡물이다.
따라서 곡류의 증류법에 관해선 이제 유럽은 고려보다 앞서있다 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후발주자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와인의 선천적 요구조건, 즉 포도의 재배 조건은 와인의 원류, 유럽에는 아직 비교하기 힘들다 생각했었다.
프랑스는 정말로 와인을 위해 만들어진 국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제국은 제국이다.
그 광대한 땅에, 프랑스만큼이나 포도를 기르기 축복받은 곳이 있었을 줄은.
“대망의 1위는…….”
훗날, 이 순간을 프랑스인들은 ‘파리의 심판’이라 부를 것이다.
그들의 자존심이 정말로 땅에 떨어지다 못해 산산조각으로 짓밟힌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당대 모든 문화의 표준이 이제 다른 거대한 존재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고려의 나파골(Napa Valley)의 떼루아에서 생산된 와인입니다.”
* * *
그 굴욕 후로, 프랑수아 1세는 한동안 그의 살롱에 출몰하지 않았다.
그뿐이랴, 불린 자매를 찾지도 않았다.
그저 방 안에서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을 만큼, 그는 정신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그 고려산 와인을 가져오는 바람에 프랑스가 이런 수모를 겪었소! 당신 때문에! 우리 프랑스가!”
부부관계가 좋지는 않았어도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처소를 찾아온 마르가리트에게, 오히려 프랑수아는 역정을 내며 그녀에게 집기를 내던져 볼에 붉은 상처를 내었을 뿐이었다.
― 쾅
“이게 왜 내 탓이죠? 당신이 멍청해서 벌어진 일인걸!”
마르가리트도 분노를 참지 못하며 짐을 싸서 친정인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대응했다.
‘이 인간이 보자보자하니까!’
그녀는 엄연히 피해자였고, 이 모욕을 마냥 참아야만 하는 사회적 지위에 있지도 않았다.
적당히 용서를 구하고 물러날 줄 알았던 왕비가 한 번 더 들이박자, 프랑수아는 이성을 잃었다.
“당신, 그럼 이혼할 준비를 하시오!”
남편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마르가리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입술을 비틀었다.
“여보, 당신이 정말 나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이혼을 준비하려 한다면, 그 전에 먼저 우리의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준비해야 할 거예요.”
알자스와 로렌.
안그래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는 여러군데에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으니.
와인 하나로 모든 것이 상당히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프랑수아의 신임을 얻던 궁정백 양백현은 곧바로 괴상망측한 죄목들을 받아 궁정의 감옥에 구금당했으며 고려의 첩자니 뭐니 하는 누명이 씌워졌다.
그러나 그런 분풀이적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떨어진 위신이 다시 오르겠는가?
이미 다른 나라의 국왕들은 아주 신나게 프랑스의 허영을 씹고 있었으며 프랑수아를 미련한 돼지라 부르며 경멸하고 있었다.
“프랑스 와인? 하, 고려의 와인들이 더욱 우수하지.”
“그렇고말고. 미주의 나파골은 물론이고 남려 서해안의 속리골이나 무릉골의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들은 보르도의 와인들보다 더욱 좋다 하더군.”
“어차피 우리 조국에선 와인이 나오지 않으니 앞으로 프랑스 와인을 마실 바엔, 그냥 고려의 와인을 마시겠네.”
“가격도, 품질도 더 좋은데 안 그럴 이유가 없지.”
반응이 이런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프랑수아는 정말로 그의 인생은 물론이고, 조국과 유럽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 * *
연방 해안경비대.
고려의 정식 해군에서 분리된 이 조직은, 말 그대로 고려의 해안을 경비하는 군사조직이다.
이제는 상당히 잠잠해졌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마야만과 칼리나해의 소규모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고, 외국의 함선이 고려에 와 밀매를 하는 것을 단속하기도 했으며, 아국 상선의 호위를 맡는 등의 소소한 업무를 하는 조직.
안 그래도 극히 비대한 고려 해군의 업무 과다를 나누기 위해 새로 편성된 조직이기도 했다.
고려 해군은 저기 톤도 제도의 다바오니, 개성이니, 탐라니, 맨섬이니, 카디스니, 아소르스니, 마데이라니, 이런 곳에 파견하느라 안 그래도 과다한 업무와 해군 특유의 인력난에 헉헉대고 있는 조직이었으니까.
함선과 장비, 물자 등은 최우선으로 보급되는 해군에 비해 2선급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그 전력은 대단했다.
그 명칭으로 경찰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주 전력은 순양함과 쾌속선으로 웬만한 해양전통이 없는 나라들을 혼자서 항구봉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해안경비대라는 조직은 단일 전력이 대단했지만 영 시원찮기도 한 모순을 가진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일한 조직이 거의 백 척에 달하는 순양함과 그보다 많은 소형선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크기가 커질 예정이라도 그 주목적인 ‘고려의 해안을 수호한다’라는 명제를 지킬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이 빌어 처먹을 땅덩어리의 해안선은, 그 길이를 표현할 수식어가 부족했다.
고려는 해안 방위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방위선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전면전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면전이 실행된다면, 잠재적 적국은 출항하기 한참 전부터 그 징조를 드러낼 것이고, 그 징조는 고려의 정예한 요원이 아니더라도 일반 상인들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면 고려는 해군을 이용해 선제타격을 하는 등 전술, 전략적인 포석을 두면 되는 것이지.
전쟁은 비밀리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해적도 마찬가지.
혼란스러운 누산타라 해적들마냥 성세가 큰 해적들은 제각기 근거지를 두고 있다.
누산타라로 원정을 가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고 다른 속셈도 있기에 고려는 이를 내버려두고 있지만, 코 앞마당인 칼리나 해와 마야만에서의 해적 준동은 용납한 적이 없었다.
첩보가 들어오면 곧바로 그 해적소굴에 대규모 함대를 보내 아예 박살을 내었으니까.
그러나 암상? 근거지도 없는 비리비리한 해적?
막는 것이 불가능하지.
아무리 항로가 한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바다는 그 자체로 몹시 광활하다.
이곳을 전부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토를 확장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상민도 이 둘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레이더도, GPS도 없다.
위성정찰과 항공정찰, 감시 드론도 꿈도 못 꾸는 상황.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 좁아터진 대한민국도 해안방어가 제대로 안 되어 서쪽 민폐국의 사람들이 틈만 나면 오가는데, 남북려 전부를 수호해야 하는 해안경비대가 이 해안선을 완벽히 방어할 수 있겠는가.
연죽곶이나 화주 최남단, 그리고 운하 등의 주요 요충지 등의 순찰을 철저히 할 수밖에.
그래서, 오히려 해안경비대가 이렇게 밀수업자를 발견한 것이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려.
곡암도(谷巖島).
― 콰과광
“저놈들을 쏴라!”
고려가 아무리 내륙에서의 대외상업을 금하고, 아소르스나 카나리 등에 가서 상행위를 하라 하더라도, 암상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교수형을 시켜도, 돈에 눈이 먼 자는 항상 나왔다.
그것은 유럽인뿐만 아니라 고려인들도 마찬가지, 사람 사는 곳에는 항상 꼴통이 있기 마련이니.
고려의 해안경비대는 그 돈에 눈이 먼 자들의 함선 중 대부분을 침몰시키거나 나포했지만 원체 그 수가 많았기에 몇 척의 암상인들이 서둘러 동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진 못했다.
이 섬 곡암도(Newfoundland)는 동 북대서양 북부의 해류가 북해의 유럽으로 가는 곳.
풍향도 편서풍이니 마음먹고 도주를 한다면 잡을 수 없는 정말로 오지 중 오지였다.
해안경비대의 제독도 망원경을 들어 후다닥 도망가는 선박들의 뒤꽁무니를 보면서도 딱히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 넓은 해안가에서 이렇게 암상들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고 해도 무방했으니까.
사실, 조정으로부터 내려온 조금의 정보가 없었다면 이들을 발견하는 일 자체도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전부 추포하라! 테르샤로마의 법원으로 가 구형한 뒤 처형할 것이니.”
“예! 제독!”
* * *
그렇게 해서 베일에 싸인 북려 포도나무의 묘목이 프랑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예전, 누군가를 통해 유럽 전역에 알음알음 퍼져나갔던 감자는 이제 서민들에게 정말로 필수적인 음식이 되어가는 상황.
이번의 포도 품종 또한 다시금 유럽,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에 활약을 할 것이었다.
그 보고서를 읽는 상민은 피식 웃었다.
또 고려의 씨앗을 뺏어갔구만.
뭐, 용서하지.
사실 따져보면 고려가 유럽에게서 훔쳐 온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참포도 씨앗이건, 다른 종자들의 씨앗이건 다 유럽에서 가져왔었으니까.
심지어 의곤밀의 한쪽 조상도 그랬고.
농산물뿐이랴.
축산물, 즉 유럽의 돼지 품종들이나, 말 품종이나, 소 품종들을 가져오기도 했었지.
그러니까 용서한다.
“우리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네만, 뭐 그렇게 결과가 나왔다면 나온 것이겠지.”
심드렁하게, 상민은 포도주잔에 포도주를 직접 따라 마셨다.
“나파골의 포도주도 이견의 여지 없이 좋지만, 내 취향은, 조금 더 하제의 속리골 포도주가 더 맞단 말이야.”
이번 ‘파리의 심판’이 그러한 압도적인 표 차로 결과가 나왔던 것의 배경은, 고려의 포도가 프랑스의 포도보다 훨씬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신대륙의 와인이 구대륙을 꺾은 원래의 일화는 유명하지만 현재의 이 차이는 순전히 고려 주조기술의 진보와 온갖 실험들, 품종개량의 노력 등으로 포도주의 상업성을 최대한 끌어올렸던 그들의 노고 덕분이겠지.
아니면, 뭐 정말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의 존재가 가져온 결과든지.
어쨌든, 고려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떡은 자신들이 먹은 상황이다.
고급 포도주에 대한 수요는 이번 일로 치솟다시피 했으니, 상민도 포도뿌리혹벌레에 의한 근심을 다소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근심은 저들이 해야 할 것이다.
상민은 도덕적인 사람이며, 합리적인 사람이기에 지금의 이런 무모한 짓을 꿈꿀지언정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라.
고려는 오히려 아소르스에서 무역을 하여, 최대한 이런 역병이나 벌레들이 퍼져나가지 않게 통제하고 있었지.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반면, 책임감이 없는 자들은 이런 유럽의 암상들, 그리고 그 암상의 뒤에 있는 배후였다.
운하를 통과할 생각은 못했으니, 북려 동해안에서 방법을 찾아봤겠지만.
글쎄.
이번 북려 포도 흉작은 그들의 생각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제독은 승진시키고 일 처리를 깔끔하게 잘해 준 그 암상이 다시금 고려로 돌아온다면 특별히 사면권을 발급해주게나.”
“알겠습니다. 당하.”
“자네도 수고했네.”
― 쪼르륵
“화… 황공하옵니다.”
그는 친히 고생한 여의국의 요원에게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황송한 마음을 담아, 요원은 두 손으로 잔을 잡고는 고개를 돌려 마셨다.
반면 상민 그 자신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저 포도주잔을 들어 올린 상태로, 음험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