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60화 (260/653)

오르베텔로 조약

먼저 고국으로 돌아간 유럽의 사신들은 제각기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풀어놓기 시작했다.

고려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흥미로웠지만, 군주들은 이내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천명을 잃었다?”

어느 유학에 정통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천명이라 함은, 기독교에서 신의 가호와도 같은 개념이란다.

그렇다면 그 천명을 잃었다는 것은 ‘파문’을 당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국가의 상황을 나타내는 객관적 수치에는 천명이니 뭐니가 결합할 여지가 없겠지만, 아직까진 이런 기막힌 논리가 통하는 시대였다.

중원의 국가, 즉 북원과 명을 상당한 수준의 문명국으로 대우하고 있던 유럽의 군주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바스쿠 다 가마의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

그는 명을 약탈하여 엄청난 재물을 벌어들였다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바스쿠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명의 남쪽 해안가를 약탈하며 챙겼다.

해남도를 손에 넣기도 했고.

그가 그 엄청난 금전으로 싱가포라에 세운 말라카 총독부의 세력만큼이나 강력한 세력을 또다시 해남도에 구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유럽인들은 고려가 어찌 나올지 궁금해했다.

멀리 떨어져 있으나 서로 비슷한 문명권이기도 했고 역사적인 관계도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고려가 바스쿠 다 가마를 짓눌러 터트린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인해 고려가 오히려 명에게서 사실상 관심을 끄겠다는 선언을 하자, 유럽인 군주들은 생각했다.

― 명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았지만 사실상 경비원 없는 보물창고와 같은 꼴이지 않은가?

명으로 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는 역으로 오스만 같은 국가와 다르게 명의 보복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구가 막강한 명의 강력한 육군은 몰라도, 해군은 정말 일개 포르투갈 총독, 바스쿠에게 망가지고 있을 만큼 처참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

토벌하고 싶어도 배가 없고, 배가 있더라도 항해술과 조선술이 형편없으니 기껏 일군 함대는 순식간에 몰락하는 것이 전부였다.

명의 육군이 육지에서 씩씩거리고 있지만, 그 육군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양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오겠는가.

게다가 중국은 원래부터 사치품의 기원이었다.

실크로드가 중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인도보다도 더 많은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파문당한 놈들이란다!”

해양에 나갈만한 유럽국가의 군주들은 부랴부랴 사략해적을 확충했다.

이제는 트렌드와 같았다.

비록 포르투갈이 바스쿠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본국과 먼 거리에 세운 해양세력은 반쯤 독립적으로 행동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칠 세금이 무척이나 탐이 나는 상황.

어차피 카디스 조약에 의거하여 나누어 먹은 누산타라에 조금씩 발을 뻗고 있는 국가들은 프랑스 동인도회사니, 이탈리아 동인도회사니 사실상 주식회사의 이름만을 차용한 사략해적들을 편성했다.

실로 절망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명의 명군, 주우철은 서쪽에서 다가올 거대한 위협을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 *

이탈리아반도.

토스카나 지방.

오르베텔로(Orbetello) 요새 부근.

이탈리아의 통일왕, 체사레 1세는 근거지를 두 곳으로 두고 있었다.

아무리 이탈리아를 통일했다지만, 로마를 비롯한 교황령을 몰수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조금 더 살았다면 그럴 여지가 살짝은 더 생겼겠지만.

알렉산데르 6세가 보르자 가문을 위해 온갖 더럽고 추악한 짓거리를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세계에서 교황의 권력은 여전했다.

또한 제아무리 새롭게 즉위한 교황, 니콜라오 6세가 추기경 시절 보르자 가문의 입김을 많이 받는 자였다고 하나, 자리에 오른 이상 예우를 갖추어야 하는 상황.

그는 전통적 근거지인 라벤나―로마냐와 새롭게 얻은 땅인 피렌체―토스카나를 중심으로 밀라노 중심의 북이탈리아와 나폴리 중심의 남이탈리아를 합치고 있었다.

상민 부부는 로마에서의 7박 8일여간의 휴가를 마치고 체사레의 배에 올라 오르베텔로 요새로 향하는 길이었다.

도시 관광은 잘 끝났다.

산타 마리아 인 몬세라토 델리 스파뇰리 성당에 안치된 로드리고 보르자의 관에 예를 표한 상민은 장인어른의 죽음을 극복하긴 했는지 고향으로 돌아와 신이 난 아내와 함께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서나 나올법한 그때 그 시절의 로마를 구경하며 마침내 그의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삭제할 수 있었다.

고려에 비해서 거리가 깨끗하다거나, 시민들의 표정이 밝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 특유의 생동감은 존재했다.

이들 자체의 혁신, 르네상스가 실로 활발히 이루어진다는 것도 체감했고.

이미 정체된 동양,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지만 곧 정체될 이슬람 문명권과 비교해서 이들 유럽인들은 정말 외부의 문물을 수용하는 것에 놀라울 정도로 탄력적이었다.

고려의 문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슬람의 문화까지도 가리지 않았다.

종교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의 혁신은 이 세상 어디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다.

유럽의 저력이란 지금부터가 분명했다.

상민은 고려가 지금 당장은 선구자로서의 이점을 누리고 있지만 언제나 후발주자의 추월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수많은 위인들을 직접 하나하나 만나보면서 더욱 더.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미켈란젤로 말고도, 유럽을 살아가는 당대의 수많은 명성 높은 위인들을 대면했다.

몸도 좋지 않았는데 스스로 만나길 희망했던 르네상스의 선구자 보티첼리.

미켈란젤로의 라이벌이라는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다빈치)와 그들의 후배 라파엘로.

그리고 체사레의 충신 니콜로 마키아벨리까지.

그의 밑에 일하고 있다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라는 젊은 청년도 만났다.

훗날 그가 제국의 시중을 보며 쓴 재상론이라는 책이 이상적인 계몽군주의 모습을 담아내고, 개명전제주의(開明專制主義), 혹은 계몽절대주의라 불리는 근대국가체제의 한 일파의 사상적 효시가 될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없었지만.

당대의 엄청난 지식인들은 제각기 수많은 분야에서 거의 틈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번뜩이는 지성을 보이는 가면을 쓴 제국의 위대한 재상에 찬탄했지만, 본인은 그 대담 이후 머리가 온통 지끈지끈 쑤신다며 선실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이 틈을 타 뭘 하기야 하겠는가.

지금 그를 초청한 사람이 체사레였으니 손님에 대한 위해는 통일왕 체사레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카나리 함대에 배속된 전열함 세 척과 호위함 다섯 척, 그리고 그 정도까지의 무장은 과하다 싶어 하지 않았으나 원체 배의 체급이 큰 새벽호가 뒤따르고 있는데.

대동양을 지키지, 평소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거함들을 바라보던 체사레가 동생에게 말했다.

“잘 지내고 있니?”

마냥 어린 줄 알았던 동생에서 이제는 어엿한 어머니가 된 루크레치아 또한 서른이 넘었다.

같이 로마를 구경하러 온 맏이는 열 살, 둘째는 여덟 살이고, 연약한 아기인 탓에 이곳에 오지 못하고 정녕당에 남은 셋째와 넷째는 세 살과 두 살이니 한창 정신없을 때였다.

게다가, 그녀 또한 예술의 전당의 총책임자로서 특정한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철야하는 남편의 옆에서 같이 업무를 보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레치아는 정말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민에게 있어서 정치적 이유로 행한 축첩제를 제외한 외도란 애초에 없었다.

게다가 막중한 금전이 오가고 민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업무까지 맡기며 신뢰를 보내니 부부 사이는 처음의 불협화음이 무색하게 날이 갈수록 끈끈해졌다.

게다가 둘 모두 공통된 예술적 관심사를 가져 평소에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대화 또한 원활했으니.

그와 그녀의 사이에서 자식이 많이 생긴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네. 오빠.”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한 대답을 들은 체사레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린 조카딸 정아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떠날 때는 불과 십 대의 꽃다운 소녀에 불과했지.

그러나 이제 서른 살의 완숙한 여인이 된 루크레치아는 완벽히 저 제국 시중의 여자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남편과 보르자 가문을 택하라면 주저 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 분명한.

“네가 보기에 네 남편은 우리 가문과 이탈리아에게 어떤 감정을 보이고 있는 것 같으냐?”

이탈리아의 시뇨리아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로마는 고려와 많은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카톨릭 세계 또한 마찬가지고.

동쪽 초원의 지배자인 대칸이 목이 잘려 제물로 바쳐졌다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고려와 좋지 못한 관계를 가졌던 옛 구적들에게는 끔찍한 두려움을 선사해주긴 충분했다.

그러나 루크레치아는 오빠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죠.

공허한 믿음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끌지만 상호 이익은 서로를 살린다―라구요.”

“…….”

“계속 서로 간의 이득을 논하세요. 그럼 보르자는 서쪽의 용으로부터는 안전할 테니.”

* * *

오르베텔로 요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리 와 있었다.

이 중 일부는 창양에서 보았던 사절들도 보였다.

거기에 더해, 내륙지방에 있던 터라 고려와 별로 교류가 없어 굳이 창양에 사절을 보낼 이유를 찾지 못했던 나라들의 대표들도 존재했다.

북유럽, 혹은 도이칠란트 쪽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니 대부분은 개신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녔다.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적지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요.”

체사레의 주재 아래, 훗날 오르베텔로 조약이라 불릴 국제법의 시초가 탄생했다.

유럽은 서기 1470년, 잉글랜드가 롤라드파를 공언하고, 1474년 저지대에 몰아친 배설주의의 영향으로 부르고뉴가 독립한 이후부터 현재 1510년이 되어가도록 수많은 종교전쟁에 빠져들었었다.

1503년 카디스 조약부터 조금 뜸해졌지만, 15세기 후반만 해도 유럽은 아예 아수라장과 다름없었다.

무분별한 마녀사냥.

영주들 간의 이단선포와 전쟁.

네덜란드와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스위스, 보헤미아, 개혁동맹과 브란덴부르크 간의 전쟁들.

칼마르 조약 내의 내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브란덴부르크―튜튼 기사단의 충돌.

삼십 년 동안 정말 쉴 틈 없이 실컷 싸운 이들은 이제 드디어 현자타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휴전을 하길 원했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개신교와 카톨릭의 싸움이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의미와 명분이 없게 되었다.

개신교의 시발점은 마티외 주교(이제 고려 성공회상으로는 성 마태오라 불려야 할)가 쓴 49개조 반박문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마티외 주교는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알다시피 고려로 넘어가 성공회를 세워, 제국을 문명의 그늘로(그들의 정신승리상으로 이해하자면) 인도했지.

그러나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여지없는 이단이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없었어야 했다.

그러나 후대의 교황들이 실리적 이유를 대며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심지어 성공회를 인정한다고까지 하자 카톨릭은 명분을 크게 잃었다.

마티외주의와 배설주의가 그럼 다른 게 뭐냐?

이런 주장은 독일과 저지대, 북유럽을 휩쓸고 있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무적의 논리를 부여했으니까.

두 번째로는 그들이 싸울 때 열심히 꿀을 빨고 있었던 나라들이 있다는 것.

가장 대표적인 포르투갈은 자신도 카톨릭 국가면서 종교전쟁에는 아예 신경을 끄고 열심히 노예무역과 인도무역, 동인도 파먹기에 열중하여 엄청난 부를 얻고 있었다.

고려와 무역하는 베네치아 같은 곳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나라들의 배가 심히 아픈 것은 당연했다.

세 번째로는 공통의 적으로 부상한 오스만이 심상치가 않았다.

젬을 이용해 한 번 그들을 건드려보았던 신성동맹 덕분에 크게 노한 바예지드 2세가 지금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와 크레타, 심지어 같은 이슬람계 국가인 맘루크까지 노리고 진지한 정벌군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 신성로마제국은 그 소식을 듣는 즉시 곧바로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이 세 가지 사실과 더불어 아주 최근에 도는 소식이지만, 마침 저 멀리 명이라는 풍족하면서도 아주 엉성한 곳간을 지닌 존재가 부각되고 있기도 했고.

사실 종교전쟁은 주로 카톨릭이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아 박해를 하고, 그 박해를 받은 개신교가 뿔이 나 반격을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러나 카톨릭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아 보였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등의 수도사에 의해서 카톨릭 내의 자정 운동의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분위기는 이미 인문주의적, 계몽주의적, 경험주의적, 합리주의적 학문이 서쪽에서부터 흘러들어온 덕에 실리적 흐름을 타고 있었지.

극히 세속화된 교황청은 펠릭스 5세 이후로 권위를 많이 잃었고.

드디어, 1510년.

니콜라오 6세 교황과 체사레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자리에서 카톨릭과 개신교는 오랫동안 치고받고 싸워온 종교전쟁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회의 자체는 오르베텔로에 와서 앉아 있는 와중에도 질질 끌렸다.

의전 문제와 용어의 정의, 누가 언제 왜 전쟁을 했는지의 이유 명시 여부.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요? 그냥 다시 싸우든가?”

그러나 이 자리에 참관한 상민이 짜증을 한 번 내자, 개신교도들의 삐딱한 자세와, 카톨릭의 고약한 성질머리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화의에 서명한 국가들은 모두 종교의 자유를 허한다.]

개신교 국가들의 대표와, 카톨릭 국가들의 대표, 그리고 교황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추기경이 모두 인장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증인의 자격으로 참관한 상민 또한 제국 시중의 인을 찍어 이를 공증했다.

“…….”

사람들이 힐끗, 옥새와 같은 무겁고 큰 도장을 찍는 상민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보았다.

고려 성공회 특유의 로렌 복십자(Cross of Lorraine).

프랑스 로렌 지방의 십자이자 앙주의 여왕 잔 드 아르크(훗날 성공회의 성인 성 요안나 아르켄시스로 불리는)가 마티외 총대주교와 상의해 만든 성공회의 공식 상징물이기도 했다.

죽은 연인의 유품이기도 해서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고(심지어 손에는 아직도 왕예와 맞춘 옥반지를 끼고 다니기도 했다) 악세사리 하나로 기독교인들을 안심시켜 고려에 친근감을 줄 수 있는데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상민은 눈앞에서 실로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나 베스트팔렌 조약과 비견할 만한 역사적인 오르베텔로 조약이 체결된 순간에도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미 북유럽회사는 종교전쟁으로 전쟁특수를 달달하게 누려왔다.

이 전쟁은 언젠간 끝날 전쟁이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이들이 무의미하게 싸운 시간들은 고려에게 있어서 귀중한 성장의 시간이었다.

광활한 남북려대륙의 해안가를 서서히 먹어갈 수 있는.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종교전쟁의 끝이 유럽인들끼리의 싸움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이제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은 오로지 국익과 왕조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니 우리가 개입할 여건이 더욱 많아졌다.’

물론 이제 고려는 이들의 시선을 또 돌릴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방책은 의도하긴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남곤이라는 조선의 문신에 의해 실행되어졌고.

또 하나는 알아서 스스로 이들을 위협하니.

“재상께서는 신성동맹을 적대하지 않으신다 확언하셨지요?”

“그대들이 먼저 아국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고려는 항상 그럴 것이오.”

“알겠습니다.”

교황령과 지중해와 맞닿아있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유럽이 마침내 오스만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명군들의 시대가 코앞에 있다 하나, 오스만이 성장한 유럽을 이길 수 있을까?’

하다못해 셀림도, 쉴레이만도 아직 술탄이 되기에는 한참 남은 상황.

상민은 오스만이 역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직감했다.

원역사였다면,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는 저 멀리 신대륙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종교전쟁은 조금 뒤에 터져 오스만의 명군들이 그들의 치세를 누릴 수 있었겠지.

그러나 유럽은 고려가 한두 세기를 서둘러 달려나가는 것을 제일 먼저 추격하여 자신들도 반세기에서 한 세기는 먼저 달려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신대륙에 대한 성장동력이 제한된 지중해의 국가들이 북아프리카에 힘을 쏟는 바람에 이슬람 문화권 자체가 쇠퇴하고 있었으니.

‘관심 없다.’

아니, 너희들이 우리 대신 모래주머니가 되거라.

애초에 너희들 또한 침략자였으니, 이것 또한 업보이겠지.

그들이 스스로 숙이고 들어와 친교를 다져야 할 판에 오히려 이미 고려의 봉신화가 된 마라케시에 대해서 무왈라드파가 이단이니 뭐니 땍땍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나디야가 지금 제국의 황후인 줄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상민은 순간 손주가 자신에게 말한 말을 떠올려내었다.

― 카이세리 룸(Kayser―i Rûm)이라니. 할아버님,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실로 그러하도다.

[작가의 말]

카이세리 룸은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칭한 말로, [모든 로마인들의 카이사르]란 뜻입니다.

참 건방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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