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59화 (259/653)

조천사(4)

동아시아에서 온 네 국가는 이번 사행에서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았다.

상국의 위엄에 대해 인지하고 경외하는 마음가짐은 당연히 모두 공통적으로 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물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에 대해선 현실적이고 심적인 제약이 많아 제각기 다르게 받아들였다.

일평생 그들을 지배했던 유교적 가르침과 상당히 반대되는 개념이 많았으니.

네 국가 중 체급이 가장 큰 조선만 해도 사신단들로 온 문인들이 제각기 상국을 다르게 해석했다.

남곤과 조광조 모두 상국을 본받아 조선을 부강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막상 고려에게서 배울 점으로는 서로 다른 것을 보았다.

조광조는 고려의 농지제도에 집중했다.

“상국의 번영은 안정된 토지제도에서 나왔으니, 강력한 한전제를 시행하여 노비의 수를 줄이고 자영농을 육성해 농자지대본을 확고히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에 더해 현재의 일천즉천을 버리고 노비종모법을 시행함으로써 나라를 다시 한번 뒤흔들어야 하는 과감한 개혁을 의미했다.

반면 남곤은 다르게 해석했다.

“아국은 상국과 달라 광대한 농토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또한 넓은 평야조차도 보기 힘들다. 조선은 오로지 상국과 남왜, 옥저와 교역해 중상을 통해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이야.”

건국부터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땅에 떨어진 나라와, 수천 년이 넘도록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혔던 나라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남곤은 현실적으로 토지개혁이라는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하니 상업을 중시하여 나가자는 주장을 펼쳤다.

둘은 성리학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남곤은 연서궁에서 받은 충격으로 상국의 학문을 앞장서 수용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먼 옛날 이곳에 오셔서 자리를 잡으셨던 충녕대군께서 이미 두 학문을 융합시킨 선례가 있는데, 어찌 상국의 학문을 재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조광조는 고려의 평등한 신분제도나 희미해진 사농공상의 구분은 소홀히 살펴보았으며 기본적인 국가의 틀을 이루는 체계와 학문들 또한 취사적으로 선택하니, 기존 성리학의 한계를 인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고려의 문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어부의 말은, 오로지 남곤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듯싶었다.

“물산이 풍요롭고 사람의 근심이 적으나, 이는 비옥한 땅과 훌륭한 토지제도, 명확한 재상중심체제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사치스러운 것과 음탕한 것, 그리고 탐욕스러운 것을 금하지 않으니 이는 분명한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만의 법도를 잊지 않은 채, 훌륭한 재상과 강한 신권 아래에서 새롭게 개혁을 해 나가야 합니다.”

남학(南學)론자의 큰 줄기는 처음부터 서로의 시선이 많이 달리 출발했던 것이다.

이미 뿌리내린 국가의 관성이란 여전히 무거웠다.

그것은 남왜조의 무리들도 마찬가지.

상국에 입조한 부여의흥은 평생의 숙원인 부여씨와 ‘백제’의 국호를 허락받았지만, 여전히 국가는 갈 길이 멀었다.

주요한 다이묘들은 전부 숙청되었거나 혹은 납작 엎드려 충성을 맹세했지만, 언제 이놈들이 뒤통수를 칠지는 몰랐다.

도래인은 아직 구주에 사는 왜인들보다 그 수가 무척이나 적었다.

따라서 부여의흥은 신민들을 강력한 충과 근왕의식을 함양하는 성리학적 질서로 묶어놓길 원했으니 백제 또한 근본적 통치 이념이 유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두 국가에게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주자학의 위상은 낮아졌고 옛 중원의 고사들과 성인들의 이야기 또한 이제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정도라 할 수 있겠다.

반면, 맨땅에서 새롭게 창업한 옥저나 나라가 작은 유구는 그러한 면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고려의 학문을 받아들였다.

옥저는 이민족과의 통합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고려의 문물을 과감하게 수용했다.

노비제를 혁파하고, 사상의 자유를 천명했으며, 농토의 분할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두면서도 상국이 하사한 일만 관의 은을 통해 상업을 육성하고 척박한 토지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요하가 흐르는 거대한 평원이 있는 서북지역과는 달리, 동북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토질이 썩 좋지 못해 아무리 감자를 재배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모피라도 상국에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구는 고려를 보고 많은 것을 배운 모양이다.

주식회사의 개념과 증학 특유의 실리적 학문의 수용 등을.

그러나 그들은 고려만큼이나 유럽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저 멀리 그들과 비슷할 정도의 국토만을 점유했을 뿐이지만(튀니스를 제외한다면) 세상을 호령하며 지중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베네치아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라고 동아시아의 베네치아가 되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겠는가.

유구인들의 속내를 상민이 들었다면 부디 도덕적으로는 본받지 말라 당부했을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유구국은 이번에 고려에 올 때 가지고 온 돈을 탈탈 털어 산 몇 척의 중소형 범선에 몸을 싣고 지중해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이 베네치아를 동경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베네치아가 되기엔 유구 자체적인 노력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명이 덩치가 커 위압감에 짓눌릴 정도라거나, 혹은 사쓰마의 시마즈 같은 왜의 세력이 폭압적으로 그들을 다룬다면 언제든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겠지.

그러나 그들에겐 무척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남왜조의 왜왕을 몰아내고 백제왕이 될 오우치 요시오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후인들도 같이 상국에 입조한 처지의 유구를 건드릴 생각을 안 할 것이 분명했다.

명 또한 신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국력을 통일하지 못하고 주와 갈라져 있다.

반도의 세력 또한 남북으로 나뉜 상황.

그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볼 역동적인 국제구조가 생긴 것.

제각기 다른 수확물들을 가지고 네 나라의 사신들은 다시금 태평양, 혹은 대동양을 건넜다.

* * *

유럽인 사절들도 떠났다.

먼 미래, 외국 공항의 면세점을 들르는 것마냥 타고 온 배의 짐칸이 터질 듯 꽉꽉 무역품들을 눌러 담은 유럽의 사신들이 먼저 그들의 나라로 떠나고 나서 상민 또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굳이 이 먼 거리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이유는 장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정말로 이때 이대로의 명소를 구경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지난다면 다시 볼 수 없는 광경.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이 정도의 관광은 해도 되지 않겠는가.

‘은퇴가 마렵구나.’

버릇처럼 떠올린 생각을 지운 상민이 다시금 업무에 집중했다.

“당하, 이번 성절에 무타파 사절을 초대한 것을 두고, 포르투갈의 사절이 은근히 불편함을 표하고 있사옵니다.”

“불편하다?”

상민은 피식 웃었다.

“불편하면, 앉을 때 허리를 펴고 제대로 앉는 습관을 기르라 전하거라.”

“…예에….”

부관은 상민과 비슷한 헛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적어넣었다.

“다음은 아우구스부르크의 야코프 푸거(Jakob Fugger)가 보낸 서신입니다.”

“푸거가?”

[존경하는 당하….]

상민은 도이칠란트어로 쓰인 편지를 펼쳐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향상성 가득한 그의 취미란 가끔 시간 날 때마다 외국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었지.

250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제 더 익힐 언어가 없어 아쉬워하는 참이었다.

“소문이 참으로 빨리 퍼지는구만, 대체 아국이 이와미 광산을 열었다는 것을 어찌 이리도 빨리 아는가.”

“…아랫것들을 한번 단속할까요?”

아랫것들이라 하면, 재무부와 상무부, 추밀원과 정보총국이 속하겠지.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 부서.

상사라면 부하들의 고충을 알아야 했다.

내환이 심히 의심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되었다. 서로 교류가 빈번하니 소문은 들었을 테고 이번에 우리가 포토시를 걸어 잠갔음에도 서쪽의 은은 계속 돌고 있으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례 보안 점검으로 충분해.”

도이칠란트를 넘어 유럽 최고의 부자, 금융업과 광산업으로 푸거 가문을 일으켜 가문 자산만 합쳐도 무려 유럽 내 총생산의 2푼에 달하는 거대한 부를 만들어낸 야코프 푸거.

그는 티롤과 보헤미아, 헝가리 등의 광산채굴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매년 무려 100킬로 정도의 금과 10톤의 엄청난 은이 산출된다지.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도 빚을 서둘러 갚으라 독촉하는 서신을 보낼 정도로 위세 높은 야코브 푸거마저도 남쪽에 도사린 괴물에게는 거의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몸을 수그리며 의향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그에게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Keine Sorge(걱정 말라).]

* * *

―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줄리아노입니다.

“드시게.”

부관을 내보내고 새벽호에 실을 문건들을 분류하고 있던 상민이 고개를 들어 손님을 맞이했다.

얼굴이 길쭉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잘생긴 이탈리아 청년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눈빛이 선하면서도 총명함이 넘치는 이 청년의 이름은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uliano di Lorenzo de' Medici).

지금은 죽었지만, 피렌체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차남이었다.

고려의 국가 규모가 증대되자, 금융사업 또한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니, 진작부터 팽창해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고리대금업을 비롯한 금융사업 또한 성장했다.

고리대금업으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금융사업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 더욱더 자라나는 성향이 있었으니.

상민 자신이 경제학에 조금 자신이 있더라도, 금융사업은 이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그는 외국에서 전문가를 불러왔다.

고려인들도 중상주의 기풍이 커지며 전문적인 금융업을 확장하고 있지만, 저기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무려 11세기부터 금융업이라는 사업에 뛰어들어 이미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자들이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그리고 내륙의 수많은 도시들.

그중 가장 강력한 은행 가문은 피렌체의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메디치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문은 비극적인 연극의 주인공처럼 시대의 흐름을 움켜쥔 보르자 가문에 의해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결국 사방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중 가문을 무너뜨린 당사자이자 가주인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는 아라곤으로 망명했다가 그 후에는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결국 그곳에서 그와 메디치 가문의 재물을 노린 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반면 차남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아라곤으로 간 이후 고심하다가 자신을 따르는 가솔들과 함께 고려령 카디스로 망명했고 마침내 고려 본토에 이민을 청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그가 이끄는 메디치가에서 상민에게 망명을 요청한 것이 먼저라 할 수 있겠지.

망명하고 나서 보니 메디치를 몰아낸 보르자 가문의 딸이 시중의 아내가 되어버리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시중은 공사의 구분이 철저하여 그런 것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사람이었고 가문의 귀한 여식으로만 자라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루크레치아 또한 메디치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들을 탄압하려 들진 않았다.

덕분에 상민은 스스로의 노하우는 물론이고 유럽 내에서 아직도 큰 인적 연결망을 가지고 있는 가문을 홀라당 삼켜버릴 수 있었다.

메디치 은행은 고려 최초의 민간상업은행이 되었고.

재무부에서 화폐에 대한 권한을 분리 독립시켜 연방중앙은행을 만들고 있으니, 근대적 은행체계의 성립도 실로 머지않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상민은 빼곡하게 쓰여진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내 이탈리아로 가기 전 당부해야 할 것들을 적어 놓았네.”

강박증 같은 근면함.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듯, 적혀있는 많은 사항들을 훑어내린 줄리아노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상민이 은행 지분의 절반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하니 줄리아노는 사실상 그의 봉신과 다름없다.

상민 또한 그를 아꼈다.

사람 자체도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스테레오타입과는 다르게 고아원을 운영하고 가난한 자를 신경 쓰는 등 선행을 자주 베풀어 실로 모범적인 자라 할 수 있었다.

아마 옛날 그가 형 대신 피렌체의 군주가 되었다면 역사는 다시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믿겠네. 로마에 갔다 온 뒤에 할 것이 참으로 많아.”

흡족한 미소를 지은 상민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근데 정말 이탈리아에 갈 생각은 없는 겐가?”

상민의 말에도 줄리아노의 표정엔 별로 변화가 없었다.

“저는 이미 고려의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가문을 일으키고 가업 또한 융성하니 더 이상 그곳에 미련 가질 이유가 없지요.”

이곳 고려에 와 살아가다 보니 누군가가 누구를 독살로 죽이고, 칼로 찌르고, 끊임없는 물밑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수라장과 같은 이탈리아의 상황을 다시 겪어보고 싶진 않은 모양.

고려에서 고려인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이미 아이도 둘이나 있는 까닭에 그는 자신의 형제와는 다르게 정말로 이탈리아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나이가 들면 가끔은 고향 생각이 나곤 한다네. 아직 자네는 젊어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

“시중께선 고향이 청해시지 않습니까?”

청년의 탈을 뒤집어쓴 노인은 자신의 고향이 조선의 한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물쩍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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