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
소문이란 참 신기한 노릇이다.
불과 며칠이 흐르지 않았는데, 바투뭉케가 패주하여 달아났다는 소식은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숨어서 패퇴하는 그 행렬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혹자들은 이미 그 원의 수괴가 죽었다고 떠들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원의 군대가 주둔하며 난장판이 되었던 한양에는 사방으로 도망갔던 피난민들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려는 사대부들을 앞세워 도성에 진입했다.
몽골복 대신 단령을 입도록 허락한 뒤 대열의 맨 앞에서 사령관과 나란히 걷게 하니, 이들을 침략군으로 여기는 자는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경복궁을 다시금 점거한 고려군은 광화문 앞에 간이 연단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도성을 탈환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를 간단히 만들었다.
그러나 연단에서 서벌사령관 진람과 함께 개선식에 참가한 조선의 신료들에게 지금 이 상황이 즐겁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대답을 얼버무릴 것이었다.
영의정 이극돈을 위시로 한 조선의 신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고려인들이 그들에게 관복을 입도록 허락하고, 편한 잠자리에서 자게 해주며, 식사를 꼬박꼬박 잘 주고 경칭을 사용해준다 해도 그들이 패자이며 포로와도 같은 역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것도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에 의해 붙잡힌.
위안이 있다면 대명제국의 천자 또한 그들과 같은 신세라는 것이지.
그래, 그 사실 또한 조선 신료들의 가치관을 박살 내버리는 것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 척 척 척
붉은 병사들은 생김새가 독특했다.
무릎까지만 내려오는 적색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주머니가 달린 혁대를 찼다.
검정 소가죽 신발은 상당히 견고해 보였고, 쓰고 있는 군모는 챙이 좁은 전립과 같았다.
조선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의복은 붉은색으로 염색되고 이리저리 주머니와 부착물이 많아 큰 키의 고려 병사들과 어울려 몹시 화려하고 위엄차 보이지만, 갑주 자체의 방호력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오른쪽에 들고 있는 총.
저것이 그 모든 것을 상쇄해 버린 것일 테지.
그리고 끌고 오는 저 엄청난 수의 화포들도.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 오는 괴물 같은 철갑의 중기병들도.
개성 앞에서 일어난 그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끝났는지, 그 자리에 있던 사대부들은 아마 밤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계속 떠올려야만 했을 것이다.
가장 앞에서 저들의 분열식이라 불리는 행위를 보고 있는 영의정 이극돈은 병사들이 보여주는 숨 막히는 위압감에 등 뒤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우로 봐!”
오른쪽으론 우로어깨총을 하며 왼쪽으로는 힘차게 주먹을 위아래로 흔드는 저들의 걸음걸이는 선두와 후열의 오차를 찾기 힘들었다.
제식이라 하는 것은 고려에게는 몹시 익숙하지만 조선에게는 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전열보병은 대형이 생명이니 고려는 지금까지 엄청나게 많은 공을 들여 제식훈련을 했지만, 기존의 냉병기시대의 군대가 그럴 이유는 없었으니까.
온전히 혼연일체가 된 군세.
발걸음마저도 크게 하나로 걸으니, 그 군기와 규율은 건국 초 조선의 최정예였다는 가별초들도 감히 견줄 수 없어 보였다.
물론 이 모든 훈련을 지시했었던 상민은 행군에 딱히 과한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서구권 일부, 그리고 동구권에서 쓰여진 거위걸음이라는 독특한 발 튕기기(구스 스텝)는 분열하는 병력들의 발과 아랫배에 무리를 주어 피똥을 싸는 일도 허다하게 만들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기에 고려는 지금 옛날의 영미권과 같이 일반적인 큰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기백과 늠름한 모습이 보는 외국인 입장에선 실로 두려웠다.
“…….”
게다가 분열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그 괴상망측한 운율이 계속 유지되니, 조선의 신료들은 분열식이 다 끝나도록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끗 이들을 바라본 서벌사령관 진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고려군은 경복궁을 봉인하고는 광화문 앞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군정을 열었다.
함부로 그 더러운 발을 놀린 몽골 놈들이 이리저리 궁 내에 소변을 보고, 게르를 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경복궁.
그래도 고려는 이를 존중하여 주인이 오기 전까지 함부로 범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었으니 사림계 신료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귀공들께서는 마땅히 이 나라를 원래대로 되돌리셔야 할 겁니다.”
훈구니 사림이니 할 것 없이 모두 앞다투어 진람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치 군주라도 배알하는 태도였다.
예전, 고려인들의 국명을 들어 불경하다느니, 참람된다느니 그런 논의는 이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땅하신 말씀이십니다.”
이계가 행방불명된 지금, 조선의 정치 권력은 텅 빈 상태였고 그것을 위임받을 자는 추풍령에 있었다.
그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국가의 기능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 * *
정묘(丁卯, CE 1507)년 3월 16일
한양 도성에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기구,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었다.
이극돈을 도제조로 하여, 제조와 부제조에 정광필, 남효온, 정여창 등이 임명되니 국난의 위기에 훈구와 사림은 드디어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미친 듯이 국가회복에 주력했다.
경기와 황해 부근의 치안은 고려 경기병대의 활약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아직까지 유교적 관습에 따라 새로운 침략자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조선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부터 조정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기는 곳이었다.
그리고 직접 원의 군세를 격파한 전투를 본 주변의 의병들과 백성들 또한 많으니 이들은 ‘고려’라는 명칭을 가진 자들을 옛 태조(물론 이성계가 아닌 왕건을 지칭한다.)의 후손이 서해 바다에서 다시금 돌아왔다고까지 말을 할 정도였다.
고려의 병사들이 지나갈 때면 꽃가루가 떨어져 내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골치 아픈 일도 있었다.
남쪽으로 달아난 삼천의 정예 케식을 제외하면, 나머지 패잔병들은 제각기 항복하거나 사방으로 달아났었다.
달아난 자들을 유의미한 전력으로 보긴 힘들었다.
사방의 산엔 맹수들과 맹수들보다 무서운 의병들이 있으니 저들은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조선의 군대야,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적들을 끝까지 추격하겠지만 고려의 입장에서는 굳이 내지까지 가 고되고 위험한 추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은 고려인들에게도 아직 우호적인 국가라 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북쪽의 적병도 건재하다.
바르수 볼라드가 이끈다는 적병 육만여 명을 뒤로 두고 내려간다는 것은 아군의 보급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달아난 자들을 제하고 나머지 적병들은 항복을 선택했다.
놀랍게도 포로의 숫자가 여전히 고려군의 총 규모보다 많았다.
물론 이들은 더 이상 싸울 여력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특히 포로병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 그리고 끌려온 해서여진족들은 몽골이 패퇴하자 빠르게 창을 바닥으로 던지고 자비를 구걸했다.
이들은 고려와 싸워서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들의 아군이던 몽골인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었다.
몽골 중기에 의해 등을 짓밟히며 학살된 자들이, 총격으로 죽은 자들보다 덜하다 말할 수 없었을 만큼.
따라서 수월하게 항전 의지를 잃어버린 이만 오천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포로는 고려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부담되었다.
개경에 주둔한 일개 경기병연대의 병력으로 감시하기도 힘들다는 건 뭐 어떻게 넘어간다 쳐도.
일단 병사들로 하여금 장기적인 시간 동안 체류할 수 있는 막사(포로수용소)를 지으라 명한 진람은 난감한 처지를 숨길 수 없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군입이 너무 많아.’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그냥 죽어버렸다면 속이 시원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군율상 무장이 없는 적의 포로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일을 몹시 싫어했으며 그러한 일을 한 자들을 군법에 의해 처벌하기도 했다.
도덕심은 군의 사기와 연관되며, 병사들의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는 이론도 있었으니까.
사실 대다수의 한병들과 여진인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준 적이 딱히 없다.
억지로 끌려와 창을 꼬나쥐거나 말 위에서 일방적으로 총격을 받았을 뿐.
‘초기 식량만 해결되면, 노역을 시키든지 둔전을 시키든지 뭘 하겠지만….’
그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신벽란도에 세 번째 플류트 선박들이 들어와 물자를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벌군의 보급수송을 지원하게 된 다바오 총독 이광영을 끝내 도성의 마포나루로 부른 진람은 그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초기 식량만 해결되면 이들을 둔전을 시키든 뭐를 하든 써먹을 데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식량은 공급해주어야 이자들이 적으로 돌변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개성은 이미 고려가 장악했다.
조선의 치안은 빠르게 안정되었고, 이제는 파종을 하려는 자들도 생겨났을 정도.
사람들이 많이 상했으니, 한병들로 하여금 빈 땅을 경작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식량이라면 걱정 마시지요.”
이광영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 년에 삼모작을 지을 수 있는 열대지방 다바오의 풍년도 풍년이지만, 마침 그가 후원하는 주나라 해적들이 북원의 해안가를 약탈하여 고려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한병이 먹는 식량은 한족이 구한다는 것처럼, 상당히 많은 식량을 노략질해놓았으니 여기로 이송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진람은 광영의 표정을 보다, 문득 말했다.
“총독께서는 조선의 왕이 되고 싶지 않으시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총독께서 더 잘 아실 터인데.”
이광영의 부친, 이홍위는 아직 살아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지금은 은퇴하여 물러났지만, 한때는 고려에서 상서의 위에 오른 적도 있을 만큼의 고관대작이었다.
이광영의 조부도 숭무감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실로 유명한 군사이론가였고 그 증조부는 고려 내 제일의 학자라 불리며 황상의 국구였기도 했으니 조선으로 따지면 ‘전주 이씨 충녕대군파’는 실로 고려의 명문가라 할 수 있었다.
“싫습니다.”
그러나 이광영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려인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고려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미안하외다. 내 실언을 했구려.”
그 모습을 본 진람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령관께선 조급해하지 마시지요. 남쪽의 군세는 고려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격파될 것이고, 조선의 고삐를 쥘 사람도 올라오게 될 테니까요.”
애써 한양에 입성한 고려의 병력이 굳이 조선의 도성을 장악한 이점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적들을 토벌할 이유는 없다.
단지 북쪽과의 보급로를 끊고 포위망을 견고하게 형성하면 그만.
당장 십만이라는 군세는 보급로가 끊긴 순간 순식간에 굶주리게 될 것이었다.
제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때를 틈타 조선군과 마야군이 공격을 해내겠지.
“그 태자라는 사람이 우리의 말을 잘 듣겠습니까?”
광영은 낙동강 상류에서 자신의 머나먼 친척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무엇이 이 나라를 위한 길인지 충분히 알 인물입니다.”
* * *
조선의 비변사는 설치되었더라도 고려의 군정사령부에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체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조선이 눈치를 보았던 터라 잡음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몇 개는 달랐다.
진람은 어이가 없어 당상관들을 불러놓고 호통을 쳤다.
“대체, 농지라는 것이 왜 지주에게 돌아가야 하오? 사람 하나, 그리고 그 가족이 이 넓은 땅을 경작할 수 있단 말이오? 살아남은 농민들에게 알맞게 재분배를 해야 최고의 효율로 농지를 경작할 것이 분명한데, 대체 이곳에 있지도 않은 지주들을 위해 양안(量案)를 들추어 토지 구역을 다시 획정하여 정하자는 것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차라리 의군들의 군공에 비례하여 나누어 준다는 안이었다면 이해라도 가지!”
“…대, 대감….”
“본관은 대감이 아니외다. 다시 작성해 오시오! 농지는 농사를 짓는 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대체 그대들의 나라는 무엇을 하길래 이토록 썩어빠졌는가?”
“…….”
“조선의 노비제는 알겠소. 그러나 의병으로 일어난 자들에게까지 논공의 제한을 적용시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군공을 세운 자들은 마땅히 대우받을 것이오. 또한 그렇지 않았더라도 양인들의 수가 크게 줄어든 지금 세수의 증진을 위해 황해와 경기의 노비들을 죄다 면천시키는 것이 맞겠소.”
“…….”
“게다가 이 난리 통에 공물을 따로 걷어야 하는가? 공물을 아예 폐지하고, 차라리 조세를 늘리시오.”
“…그… 그것은!”
“그러지 못하겠다면, 공물만큼의 가치를 쌀로 받든가. 아국이 그것을 언제든지 아국의 은화로 바꾸어 주겠으니, 물품을 구할 때는 은화로 흥정하시오. 당장 시행하길 바라오.”
조선의 국왕조차 이러진 못했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진 채로 으르렁거리는 진람의 앞에서, 조선의 신료들은 어떠한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개성대첩의 광경도 광경이고 분열식도 분열식이지만, 진람 본신의 위엄이 어설픈 이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려국 서벌사령관의 지위를 범인(凡人)이 얻었겠는가.
호통 소리와 그 기세가 산 중의 범과 같으니, 신료들 중에서는 움찔움찔 몸을 떠는 자도 있었다.
물론 청요직에 있는 신하들이야 죽음을 불사하고 간언을 할 위인이 있긴 했지만, 진람의 논리가 정설에 닿아 있으니 그 아무도 헛된 이유로 반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