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대첩
정묘(丁卯, CE 1507)년 3월 11일 신시(오후 3시)경.
“폐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케식들이 바투뭉케를 감쌌다.
이미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보군의 본대는 토끼보다 더 비참하게 도륙당하고 있었으며, 남은 기마들 또한 적들의 경총기병대에게 일방적으로 사냥당하고 있었다.
“대칸! 훗날을 기약하소서!”
바투뭉케는 패배의 원인을 곱씹는 것을 멈추고, 말머리를 돌렸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그의 케식들이 필사의 호위로 그를 인도했다.
“북쪽은 길이 막혔습니다!”
적 경기병대는 이미 북쪽으로 도망치는 몽골기를 주살하고 있었다.
저곳으로 돌파를 강행한다면, 정예 케식 또한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총기병이라는 것들은 몽골인으로서도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병종이었다.
만구다이의 전술도 쓸 수 없었으며, 기본적인 화력도 강했고 또한 근접전에서조차 가진 체격과 말의 덩치 크기로 인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과 어린 아이 간의 싸움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올로스 볼라드에게 가자꾸나.”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 수밖에 없다.
북쪽으로 갈 수 없다.
한양에도 갈 수 없다.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 즉 조령을 공격하고 있을 자신의 차남에게 가자는 명을 내린 바투뭉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선왕은?”
그러나 그가 이계를 찾을 동안, 갑자기 먼 거리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 탕
“으윽!”
바투뭉케는 순간 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말에서 떨어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황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가까운 케식들 또한 마치 낙마하듯 말에서 하마하여 황제에게 달려갔고, 나머지 케식들은 화살이 닿지 않을 만큼 꽤나 멀리 위치한 초가의 위에 흰 연기와 함께 엎드려 있는 자를 발견하고는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저놈이다!”
총상의 충격과, 낙마의 충격을 받은 바투뭉케는 의식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 와중에 혀를 깨물어 정신을 잃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복부에서 총상을 맞아 피가 울컥울컥 번져 나오는 것을 애써 비단천으로 막으려는 케식 하나를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그 많은 케식 중에서도 그가 믿고 총애하는 케식이 틀림없었다.
“너, 이… 이리 오거라.”
“대칸!”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그의 의식은 명료해졌고 판단 또한 뚜렷해졌다.
오만.
방금 전까지, 그 부덕으로 인해 바투뭉케는 일생에 다시 없을 거대한 실패를 맛보았으니.
더 이상의 잘못은 하지 않아야 했다.
대초원의 운명이, 오로지 그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지… 짐이 남쪽으로 가, 간다면… 북쪽…의 경계는 허술해질… 터… 너는… 몸을 수… 숨기다 크흑….”
“대칸! 부디!”
“뒤…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부, 북쪽으로 나아가라.”
바투뭉케가 손짓으로 뒤의 내관을 불렀다.
황제의 뜻을 짐작한 내관이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이윽고 고풍스럽고 화려한 목함 하나를 가져왔다.
꿈틀거리는 용, 금으로 장식된 목함 안의 내용물은 비록 케식들이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무엇인가가 들어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명을 받은 케식이 무릎을 꿇으며 덜덜 떨리는 손길로 함을 받았다.
“그리고 대도로 가, 황후 만두카이에게… 이것을 주거라. 그… 그리고, 마, 만약 결단할 일이 생긴다면, 이것을 투루에게 넘겨주라 저… 전해다오.”
황제의 표정과 음성, 그리고 눈을 바라본 케식이, 피가 선명하게 배어 나오도록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결의가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명을 받듭니다.”
그가 서둘러 말을 끌고 본대에서 멀어지는 것을 본 바투뭉케가, 그제서야 헛기침을 내뱉었다.
“쿨럭, 쿨럭.”
“황상! 저들이 달려옵니다.”
“짐을 말에 올려라, 몽골의 사내라면 죽더라도 말 위에서 죽어야 하는 법이다.”
케식들이 그를 말 위에 올리면서 울며 고했다.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올로스 볼라드 칸에게 갈 수만 있다면, 황상께서는 다시 기력을 되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의식이 희미해지는 까닭에 바투뭉케는 케식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천하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었다.’
명을 격파하고 화북을 공격해 나갈 때, 낙양의 폐허에서 발견한 신물(神物).
겉면이 불에 탔지만 그래도 형태는 온전했던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정말로 천하를 손에 쥔 것 같은 기분에 뛸 듯이 기뻐했다.
위대한 선조들, 테무진과 쿠빌라이 또한 그것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따라서 하늘이 정말 자신을 선택했다고밖에 믿을 수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니 신물은 자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구를 위해 육백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더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풀리지 않은 의문의 답을 구했다.
바투뭉케의 케식들은 저 멀리 적의 공포스러운 중기병대가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며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그들의 대칸을 호종하고는 남쪽으로 달렸다.
* * *
개성의 동남쪽은 평야 지대라 원래는 논밭이었고 따라서 버려진 초가도 드문드문 있었다.
그중 적의 본대와 가장 가까운 초가로 잠입한 두 명의 사내는 지붕에 올라 준비를 했다.
흙의 색깔과 비슷한 옷을 입은 채로, 심지어 얼굴과 노출된 피부에도 죄다 검댕과 진흙을 묻혀 남들의 이목에서 몸을 숨긴 이들은 가지고 온 기다란 목함에서 도구들을 꺼냈다.
유난히 총신이 긴 한 자루의 소총이 담겨 있었다.
이것을 운용하는 요원들도 기밀 사항이었지만, 이것을 만든 곳은 더욱 베일에 싸인 극도의 기밀 사항이라 쓰는 당사자도 이것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엄청난 손재주를 가진 장인이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아 보였지만 화약을 전면부로 밀어 넣는 것은 고려의 다른 총과 같았다. 다만 탄의 모양이 어딘가 독특했다.
기존의 활강형 수석식 소총은 단순한 구형의 둥근 탄환을 쓴다.
그러나 사내가 들고 있는 원추형의 총탄은 특별히 제작된 듯 섬세한 세 줄의 홈이 겉면에 파여 있었다.
총열에도 그것에 대응되는 나선형 홈이 있겠지.
탄환을 총열에 밀어 넣은 사내는 시간이 들더라도 꽂을대로 탄을 확실히 끝까지 밀어 넣었다.
화약접시에도 화약을 채운 그는 조심스럽게 엎드려 소총의 위에 달려 있는 기다랗고 크며 걸리적거리는 망원경을 바라보았다.
“무너지진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길 바래야지.”
옆에 있는 사내가 같이 엎드렸다.
소총 위의 망원경보다 훨씬 더 큰 망원경을 가지고 온 그가 풍향과 세기를 측정했다.
이 시대의 군대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의 깃발을 들고 있기에, 표적 주변의 바람 상태를 확인하기는 무척이나 쉬웠다.
“방향은 서풍, 강도는 중하.”
관측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수 또한 정보를 수집하고는 작게 대답했다.
“확인.”
후우.
날숨을 반쯤 내쉰 사수는 다음 숨을 들이켜지 않은 채로 호흡을 멈췄다.
대신 그는 온몸의 힘을 뺀 채로, 부드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 타앙!
“…….”
관측수의 망원경 너머로, 적 부대가 삽시간에 당황하여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보였다.
“표적 명중, 철수 준비.”
사내들은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특별히 제작된 수제 저격용 소총이라도, 흑색 화약을 쓰는 이상 한 번 총탄을 발사하면 다른 수석식 소총과 같이 흰 연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위치는 곧바로 노출되기에 서둘러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표적을 맞히면 적병들이 분노하며 이곳으로 달려올 거라는 생각은 바로 깨졌다.
다행스럽게도 아군의 중기병대가 이곳으로 말머리를 향하고 있었던 것.
적들이 부랴부랴 도망가는 광경을 바라본 사내들이 느긋하게 짐을 챙겼다.
“잘했네, 역시 최고의 명사수답군.”
“…과찬이십니다.”
택주의 사냥꾼 출신인 이 사내는 어릴 적부터 사냥총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강선이 없는 활강형 소총으로도 거의 팔 할에 달하는 명중률을 보였는데, 그를 위해 제작된 특별한 총을 들고서는 백 발을 쏘면 아흔아홉 발을 맞추는 신기를 선보였다.
정작 사수는 하복부가 아니라 가슴팍의 핵심 장기나 머리를 맞추지 못한 것을 아깝게 여기고 있었지만.
이 시대상, 심장과 뇌는 말할 것도 없고, 폐만 맞추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죽었으니까.
“음?”
택주의 사내들은 눈이 좋았다.
사실 사내도 망원경 같은 기구가 없어도 멀리 있는 표적을 간단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저기, 몽골 놈 하나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래?”
사내의 눈에 저 멀리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수풀로 몸을 숨기는 몽골 놈이 여실히 보였다.
아군의 기병대는 그를 전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철수해야 하지만, 상황이 좋으니 굳이 한 발 더 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네.”
“예.”
환영한다는 듯 그가 다시금 털썩 엎드렸다.
두 손에 무언가를 소중하게 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가 되었든, 이번에는 기필코 가슴팍을 맞추고야 말리라.
* * *
조선왕 이계는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었다.
자신의 신료들의 눈도 피했으니 곁에서 내관 두 명이 그를 따르기만 했을 뿐이었다.
“헉, 헉!”
― 철썩 철썩
매우(梅雨, 임금의 오줌)를 한가득 지려버린 이계는 축축한 몽골 의복 델이 피부에 달라붙는 것을 억지로 떼며 산길을 달렸다.
“이… 이 길이 맞느냐?”
“전하… 아니 폐하, 서두르십시오!”
“으으….”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지금 한창 뜀박질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광경을 보았었지.
저들의 군세는 북원의 군세와는 격이 달랐다.
북원이 선보이는 공포는, 유목민에 대한 정주민의 두려움, 즉 야만과 난폭함, 잔혹함과 피비린내의 공포였다.
그래도 얼마 정도는 익숙하기도 한 부류의.
그러나 저 고려구의 군대는 어떠한가.
총구에서 번쩍이는 불꽃.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화염.
거대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것은 저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까지 화약 특유의 냄새를 선사한다.
그랬다.
고려가 선사하는 공포는, 비단 정주민과 유목민의 숙적관계에서 비롯되는 공포가 아니었다.
진보된 문명이 그렇지 아니한 문명에게 선사하는 압도적인 무서움.
모든 방면에서, 그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와 같았다.
특히, 그 군가.
멀리 있는 저들이 목소리 높여 부르는 군가는 애석하게도 이계 또한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였다.
그리고 반복되는 그 가사를 드디어 인지했을 때, 이계는 그만 방광의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의 중기가 몽골의 중기를 끔찍하게 박살 낼 때, 머릿속에서 거대한 위기감과 아랫도리의 축축함을 느낀 이계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
다른 북원의 무리들도 홀린 듯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감시 임무를 받은 가장 가까운 케식 두 명만이 그를 제대로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계가 지린 꼴을 보던 두 케식은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갯짓을 하며 그와 두 명의 내시를 근처의 숲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케식들이 요란스러운 전황에 정신이 팔려 다른 곳을 보는 틈을 타, 이계는 내시들과 힘을 합쳐 돌로 둘의 머리를 내려쳐 죽이고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정면에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예가 빼어난 케식들을 일격에 격살한 것은 실로 엄청난 행운이지만 지금 이계는 자신의 불운에 한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어야 했지 않는가! 무능한 놈들 같으니!’
발을 놀리면서도 동래에서 일을 그르친 자들을 욕한 이계는 자신이 나중에라도 탐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를 구축하는 대신 토벌군을 보냈다는 것을 반성하지는 않았다.
“몽고 놈이다!”
“육시럴 놈!”
갑자기 이계의 앞에 흰 끈을 두른 자들이 튀어나왔다.
고려와 원의 전투는 목격자가 꽤 있었다.
개경의 백성들은 몽골의 침입에 서쪽의 해주 방면으로 대부분 도망갔었고, 그곳에서 의병이 되어 나중에 해서정맥(海西正脈)이라고 불릴 산맥에서 활동했다.
개경을 점령할 때도 북원군과의 충돌 이외엔 단 하나의 약탈과 방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던 붉은 군대가 마침내 그들의 숙적, 몽골을 격파하자, 산에서 숨죽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의병들은 기뻐 날뛰며 사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는 일부는 그 자리에서 패퇴하는 원의 군세를 죽이기도 했다.
의병의 입장에서, 지린내를 풍기며 등장한 사내 셋은 영락없는 몽골 놈과 같았다.
특히, 선두의 놈은 축축하게 젖은 몽골의 의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 그만두거라! 네놈들은… 이, 이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내관들이 허둥대며 호통 아닌 호통을 쳤다.
그러나 전혀 소용없었다.
“조선말을 하니 네놈들은 몽고의 앞잡이렷다! 썩어빠진 놈들!”
의병들의 몽둥이가 허공을 갈랐다.
* * *
임진강은 바투뭉케의 호언장담마냥 피로 붉게 물들었다.
물론, 그 피를 흘린 주체가 그의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칠만의 몽골군은 대부분 사살되었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오직 정예 케식 삼천 정도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다.
실로 압도적이며 완벽한 패배였다.
반대로, 고려군에게는 찬란한 승리였다.
고려군의 사상자는 모두 178명.
그중, 현장에서 즉사한 43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빠른 야전 치료를 받았다.
“으아악!”
“참아라!”
다친 고려군은 전투 중간에도 응급처치를 받았고 전투가 끝나자마자 설치된 간이병원에서 빠르게 추가적인 치료를 받았다.
사실, 전쟁의 상처라는 것이 핵심 장기를 손상당한 자들은 고칠 수 없었고, 회복 가능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소독과 출혈 관리에 집중한다면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으니까.
값비싼 주정(주로 당밀주를 한 차례 더 증류하여 주도를 높인)을 상처에 부어 소독을 한 뒤, 출혈을 잡고 미리 삶아둔 깨끗한 면으로 감는 것으로 전상자 치료는 그 할 일을 다한다.
부상자 중 절반 이상이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되어 다시금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고려군은 다른 수확도 거두었다.
저격 사건으로 경황이 없어 바투뭉케 바로 옆에 있었던 조선왕 이계도 끝내 놓친 북원의 군세는 조선의 신료들도 데려가지 못했다.
엎어져 목숨을 구걸하는 조선의 신료들을 손쉽게 획득한 고려군은 심지어 그들의 주둔지에서 새장 안에 갇힌 젊은 사내 또한 획득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자가, 그 제국의 황제입니까?”
“그런 모양이다.”
여러 가지 전리품 아닌 전리품을 노획한 고려군은 아예 이 틈을 타 한양으로 바로 진군했다.
부상자들은 벽란도로 이송하고 개경에 주둔할 소규모 군대를 제외한 전부 다.
또다시 반쯤 인질로 잡힌 사대부들이 길 안내를 할 것이었다.
행군은 보병의 필수요소일 뿐만 아니라 전쟁을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동아시아에서는 보병의 행군 거리를 대체로 하루에 약 30리(13~15km) 정도로 계산했다.
이를 1사(舍)라 불렀다.
미래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느릿느릿한 것이 틀림없지만, 애초에 이 당시 끔찍한 장비와 신발로 비포장된 도로를 걷는다는 것은 다른 시대와 비교하기 미안했다.
그 시대 무장들은 이 정도의 거리가 병사의 체력과 낙오자, 추후의 전투력을 고려해 보았을 때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개경과 한양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는 거의 130리, 돌아가야 하는 길을 더 잡으면 150리가 넘었다.
기병이 아닌 보병으로는 걸어도 족히 5일이 걸리는 거리.
그러나 고려는 행군을 시작한 지 불과 3일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했다.
낙오자가 많지도, 체력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있었고 조금 더 빨리 걸으라면 걸을 수 있었다.
“이거 참 좋단 말이야.”
쉬는 시간, 땀으로 젖은 말랑말랑한 고무 깔창이 다 마른 것을 확인한 병사가 깔창을 소가죽 군화의 밑바닥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병사가 말했다.
“내일 아침, 도성으로 진입할 때는 사령관님이 분열(分列)을 직접 보신답니다.”
“어휴….”
병사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큰걸음을 하며 들어가야 하는가.
“그래도 이번에는 제발 도성이란 곳의 길이 적어도 평탄하길.”
창양의 포장도로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흙길이라도 다져놓았길.
지나가는 장교들도 병사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투를 직접 보지 못한 군중들에게는 이 열병식이라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그래도 승전으로 사기가 충천해 있으니 다행이다.
정묘(丁卯, CE 1507)년 3월 15일 오시(오전 11시) 경.
고려의 군대가 한양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