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도(2)
파병군의 규모가 확정되자, 다음 수순은 일사천리였다.
부대를 선별하는 것이 그나마 조금 토론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것도 금방 해결되었다.
고려인들이야 의용군을 운운하며 보내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지만, 조정은 어차피 한정된 수의 병사만 보낼 수 있는 여건상, 제대로 훈련된 군대만 보내기로 결정했다.
현 고려는 남북려대륙에 강력한 세력이 모두 없어지거나 알아서 제국의 그늘 아래에 들어와 있는 상황.
비대한 육군을 유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물론, 북려의 북부는 여전히 누무누와 동화되지 못한 원주민들이 산발적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일정한 군대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국가의 영토와 체급 자체에 비해서 육군은 그리 많이 있지 않았다.
근위군을 비롯한 중앙군은 기껏 오만여 명.
누무누를 정복하고 정북행성의 개척을 도와주는 연방군은 불과 삼만 명.
나머지는 향군(鄕軍)이니 그저 고향을 지키는 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현 고려가 대부분의 전력을 해군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어차피 태평양과 대동양이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해자 둘을 가진 이상, 그저 바다에서 저들을 막으면 되었으니까.
그래도, 근위군은 집중적인 훈련과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극히 정예했다.
하지만 상민은 이번 서벌에 맨날 보내던 근위군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금을 가까이서 호위한다는 근위(近衛)의 뜻과는 다르게 고려의 제국근위군은 이미 과거부터 많은 분쟁에 파병되어 상당히 다목적의 군대로 변질된 상태.
여러모로 한계점을 느끼고 있었던 상민은 이번 기회에 서벌의 목적을 들며 이 비대해진 조직을 수술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직 아홉 개의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 편제를 바꾼 것.
다만 근위군은 배려의 목적으로 그동안의 전통을 존중하여 앞으로 고려 내에서 유일하게 1에서 9까지 한 자릿수의 부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근위 1연대부터 6연대까지는 보병, 척탄병, 포병의 편제였고, 나머지 7, 8, 9연대는 그동안 주로 북려에서 활동하던 돌격용 중기병(장다름 중심의)과 기병총(Carbin)을 장비한 흉갑경기병(과트라체 중심의)이 혼합된 기병을 중심으로 새롭게 신설된 병력이었다.
인원은 삼천 명으로 기존 연대의 한도 규모까지 가득 완비된 상태, 게다가 기존의 다른 일반적인 연대와 같이 하나의 단일한 병종이 아닌 서로 다른 병종들이 섞여있었다.
작전수행도 독특했다.
이들 부대장들은 근위대장의 명령을 받지만, 그보다는 황제나 시중의 기본 명령을 더욱 우선시하기 때문에 상당히 미묘한 입장에 서 있었다.
물론 독자적인 작전수행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개별 연대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편제 개혁이 끝난 후, 상민은 이 아홉 연대를 기존의 연대 편제로 해석할 수 없음을 들며 여단(旅團)이라는 분류명칭을 도입했다.
이 아홉 근위여단들은 앞으로 정말 근위라는 이름에 걸맞게 편제상 신설된 제도방위사령부(帝都防衛司令部)에 소속되어 창양을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 거의 삼만에 달하는 근위여단들의 병력을 제외하고, 기존 근위군에서 일반 상비군이라 볼 수 있는 중앙군으로 격하된 병력들은 대신 최초로 고려의 대규모 대외 원정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근위여단 편제에서 빠진 이들은 처음엔 불퉁한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이내 자신들을 중심으로 원정군을 편제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환호하며 수도에 짱박혀야 하는 옛 동료들을 놀려대었다.
― 으하하하! 우리가 조선에서 신나게 놀 동안 너희들은 이곳에서 뺑이나 치고 있으라고!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껴안은 원정군 장교와 병사들은 무구들을 챙기고 해문에 정박해 있는 배로 향했다.
행군하는 내내, 길가에 나온 청년들의 부러운 시선이 그들을 향해 닿았다.
본래 근위군만 입을 수 있었던 붉은 정복(Red Coat)은 중앙군 모두도 사용 가능했기에, 이들은 자랑스러운 붉은 정복을 굳이 바꿔입을 필요가 없었다.
보병들의 행군 뒤로, 수레에 실린 주철대포들이 한가득 따랐다.
북려에서 활동하는 기병대는 이미 말을 달려 서쪽으로 떠났겠지.
보병들 또한 일차적인 집결지인 미주로 향했다.
* * *
“빌어먹을!”
구 아즈텍, 현 니카라오인들은 고된 노동을 끝내고 맛있는 일용할 양식, 틀락스칼리(tlaxcalli, 토르티야의 원명)를 먹으려던 찰나에 들이닥친 범선을 보고 이제는 차츰 자연스럽게 덜 쓰이게 된 아즈텍어 대신, 고려어 욕을 질퍽하게 내뱉었다.
한두 척이 아니었다.
아마 보름 동안 미친 듯이 고된 노동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선조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신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운하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가?
“…….”
물론 운하 통행료가 상당히 풍족했고, 덕분에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은 배를 전혀 곪지 않았기에 푸념일 뿐이지만, 고된 일을 할 때에는 그러한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래도 저게 있어서 다행이지.”
― 뿌우우
괴상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철괴물이 움직였다.
굴뚝과 같은 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자, 그 철괴는 천천히 한곳으로 이동한다.
물론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나무와 철근(고려인 기술자들은 저것을 궤도(軌道)라 불렀다.)의 구조를 볼 때, 오직 앞과 뒤로 이동할 수밖에 없어보였다.
그 괴상한 물건이 천천히 앞으로 가자, 이윽고 그 꽁무니에 매달려 있는 쇠사슬이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려지더니 이윽고 팽팽해졌다.
니카라오 운하 노동자들이 이미 진작 그 쇠사슬을 범선의 전면부에 연결해 놓았던 덕분인지 범선은 노잡이들이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일을 하자고.”
아직 저 철괴물은 힘이 약해 빠르게 끌 수는 없다.
니카라오의 노동자들은 아릿아릿한 어깨와 굳은살 위에 굳은살이 생겨 이제는 곰의 앞발과도 같은 손을 부여잡고 노를 저어나기기 시작했다.
“저 인간들은 고려인이 아닌데?”
몇 차례나 범선을 끌던 사람들이 교대하고, 다음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일을 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니카라오 호수는 순서를 기다리는 고려의 배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니카라오 강을 거슬러 올라온 새로운 형식의 배가 그 대기열에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저 깃발. 익숙하다.
“마야놈들이군.”
― 퉷.
니카라오인들이 강물에 침을 뱉었다.
견고하고 정교하게 건조된 고려의 범선과는 달리, 마야의 범선은 아직 과도기에 들어가 있었는지 어딘가 여전히 어설프고 심지어 추레해 보였다.
물론 마야는 처음엔 철기 하나 제대로 못 만들고 두창이라는 전례 없는 대역병에 의해 시름했으며, 심지어 자기 동포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하늘에 바치던 국가였다.
그러나 상민의 평정 아래 이후 백팔십여 년 만에 고려와 비슷한 정치체제와 평온한 종교, 발달된 철기와 공예문화, 심지어 이제는 고려의 인도가 있다곤 하나 바다로까지 진출할 역량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괄목상대가 아니라 환골탈태라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니카라오, 정확히 말하자면 니카라오에 터를 잡은 아즈텍인 포로의 후예들은 이 마야라는 인간들에 아주 강력한 경쟁적 감정을 품고 있었다.
종교는 이미 둘 모두 쿠쿨칸교를 중심으로 믿고 있었지만 여전히 국경을 마주 대고 있었고, 생김새와 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동질감은 질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조상을 잘 만난 덕분이지.’
명확하게 따져보면 잘 만난 것이라 보기도 애매했다.
마야 역시 아즈텍과 같이 지금의 가치관으로 해석하기엔 난폭하고 잔인하며 따라서 미개하고 야만적인(그들 후손들이 스스로 선조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다른 점은, 먼저 쳐맞아 속죄(?)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거지.
자신들은 멍청한 돼지왕, 폐왕 몬테수마와 전쟁광 틀라카엘렐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세뇌되어 후대에 정벌되었다는 것이 달랐고.
물론 니카라오도 결국 오십 년이 더 지나 고려에 정복된 지 백 년이 된다면 정말로 자치령이란 이름답게(지금은 고려의 총독이 파견되어 있었다.)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니카라오의 질투와는 별개로, 마야는 그야말로 고려에게 이쁨받을 짓만 골라서 하는 중이었다.
[우리도 파견하겠습니다.]
[쿠쿨칸의 적들을 징벌하는 성전에 어찌 우리 첫 번째 자식들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카롬테께서 직접 명령하여 친정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쁘게 미친놈들이 따로 없다.
이미 마야가 제시한 수많은 사료들을 통해 첫 번째 청해의 통령이 태조였다는 사실은 이미 고려의 학계 내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는 상황.
루밀 키치파닐(Lu'umil Ki'ichpanil, 아름다운 땅)이라는 마야어 이름이 붙은 길주(뉴질랜드)의 영유권을 얻은 것을 보은하고 또한 고려 태조 해민, 즉 쿠쿨칸의 적들을 정벌하는 성전에 참가하고자 마야는 일만의 대군을 일으켜 친정에 나서기로 했다.
고려는 보급의 문제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의기가 가상하여 이들의 합류를 허락한 상황.
니카라오가 이런 고려와 마야의 특별한 외교적 관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였다.
* * *
네덜란드.
저지대.
여왕 마리와 용맹공 김홍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자 부르고뉴김가(家)의 첫 시조라 할 수 있는 왕자이자 고려식으로는 태자로 해석될 기욤은 열일곱의 나이가 되며 어머니에게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곳이 바로 홀란트 지방.
본래는 신성로마제국 소속의 홀란트 백국(伯國, Graafschap Holland)이라고 불렸지만 네덜란드가 세워지며 기욤의 영지가 된 후로는 정식 공작령으로 바뀌었다.
수도는 덴하그(Den Haag),
입지상 기존의 항구였던 브레다나 안트베르펜보다 북쪽으로 있어 수도 메헬렌과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기에 북해에 대한 지리적 이점은 더욱 좋아, 덴하그와 남쪽의 로테르담(Rotterdam), 그리고 북쪽의 암스테르담(Amsterdam)은 어느덧 저지대 최고의 항구를 넘어 유럽 최고의 항구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 마리와 아버지 김홍이 태자를 얼마나 아끼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기욤 또한 이에 보답하듯 불과 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주변의 조언을 귀담아들으며 선정을 통해 공작령 내의 여러 지방과 자유도시들을 명민하게 관리하니 외지에서는 네덜란드가 홀란트라 불리는 일도 가끔 일어나기까지 했다.
유럽 최고의 항구도시인 로테르담이 거점을 옮긴 괴젠을 중심으로 한 상당한 규모의 해군병력이 주둔한 군항 반 민항 반에 해당되었다면 암스테르담은 순전히 민간의 무역거점으로 사용되는 일이 잦았다.
암스테르담에는 유럽 최대의 조선소가 들어서 있었다.
매일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바쁘게 일해야만 했다.
엄청난 수의 배들이 건조되는 빡빡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유럽의 참나무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는 수많은 배가 탄생하고 각지로 팔려나갔다.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암스테르담과 더 나아가 네덜란드의 재정에 혁혁한 공로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본래는 이 조선소의 각 선창에는 제각기 다른 배들이 탄생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두 동일한 규격의 대형 플류트가 건조되고 있는 것.
다른 일들은 죄다 뒤로 미루고 이것부터 먼저 해달라는 기욤 공작의 말에 조선소 노동자들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쉬는 시간 노동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청어절임과 빵을 뜯었다.
“거, 손 좀 씻고 드시오.”
“…알았수다.”
고려계 괴젠의 핀잔에, 네덜란드 노동자 하나가 투덜대며 끓인 빗물을 담아놓은 통에 손을 씻으러 갔다.
다른 이들은 빵을 내버려두고 간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윽고 남겨진 식량을 탐냈으나 손을 씻으라고 보낸 괴젠이 눈을 부라리자 목을 움츠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노동자 하나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물었다.
“저 배들은 죄다 어디로 가는 게요?”
똑같은 배의 주문이니, 아마 동일한 곳에서의 대규모 발주가 분명했다.
암스테르담 조선소급의 규모로도 역대급 수주였다.
“죄다 저 고려가 사들인다는구만.”
“거기 조선소는 뭐 하고?”
그들이 유럽 최대의 조선소라 하나, 세계의 조선소 규모로는 4위에 불과했고 1위, 2위, 3위는 죄다 고려 내에 있었으니 그런 질문은 당연했다.
그래도 리스보아나 런던, 세비야, 이니스맥노튼, 로마와 베네치아보다 높은 순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거기도 우리만큼이나 매일매일 격한 노동에 시달린다 하네.”
“…대체 그 인간들이 뭘 꾸미는 거지?”
괴젠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빵을 먹는 것을 슬쩍 바라본 조선소의 노동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몽골을 정벌한다 하던데?”
“몽골?”
노동자들이 몸을 떨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몽골이라는 단어는 유럽인들에겐 공포의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유럽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인들을 바다의 몽골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고려계 괴젠은 이번에도 별말이 없으니 무언으로 긍정을 대답하는 것과 같았다.
“무시무시한 나라야, 정말로.”
의문이 해결되자, 노동자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지구 반대편에 대규모 원정을 보낸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저 거대한 용이 바다 너머로 언제든지 불길을 뿜을 수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지금껏 카스티야와 잉글랜드가 당해왔던 ‘소소한 전투’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전쟁이 틀림없었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네. 고려는 우리의 우방이 아닌가?”
그러나 덕분에 네덜란드는 조금 더 평화로워졌다.
사사건건 국경에서 시비를 걸어대던 프랑스가 웬일인지 조금 잠잠해졌지.
아마 고려의 미친 짓에 대해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그들을 막을 생각을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대규모 병력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낸단다.
유럽이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고려의 실질적 육상전력을 정확하게 몰라 과대평가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유럽의 강대국들은 진작 쥐어 터진 잉글랜드를 교훈 삼아 수도의 방어시설을 보강하고 괜히 바다에 해안포대를 쌓는 등 서둘러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서쪽을 향해 포효하자 동쪽에 있는 여우들이 지레 움츠러든 꼴이었다.
“자 작업 시작하시오! 오늘 내로 할당된 일을 전부 끝내면 모두 은화 1환씩 추가 보상을 준다 하니,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을게요.”
노동자들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