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2)
입항을 허락받은 동아시아회사의 수송용 소형 중범선은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포르투갈의 나우 바로 옆의 접안시설에 은근슬쩍 머리를 들이밀었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쉬고 있는지 무역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남아서 돛대를 정리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이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다바오의 소식이 아직 퍼지지 않았어.’
포르투갈은 의외로 명과 상당히 잘 지내고 있었다.
고려 덕분일 것이다.
명이 고려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것과는 달리, 고려와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도록 교류해온 유럽인들은 어느덧 간략하게라도 고려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주 자세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고려라는 나라가 어디에서 파생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있었다.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들은 13세기, 세계를 뒤흔들었던 제국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말발굽으로 거대한 강역을 손에 쥐었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결국 사방에 뿌리를 내렸지.
그리고 그 잔재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한창 세력을 넓히고 있는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제 겨우 그 굴레를 벗어던진 참이었고.
게다가 바다에서는 정말 최강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고려 또한 따지고 보면 그 몽골 제국에 항전하다 대피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 한다.
그러니 고려에 의해 억눌려 왔던 이베리아의 사람들이, 먼 과거라 하나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몽골 제국에 대해 가지는 본연의 두려움은 상당히 클 것이다.
유럽 세계, 특히 피레네산맥 이남은 몽골인들의 얼굴조차 구경해보지 못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그 몽골 제국 또한 새롭게 등장한 중원의 패자인 대명제국에 의해 멸망까지 갈 뻔했다 하니까.
결국 유럽인들의 뇌리에서 떠오른 국가 성세(盛世)의 부등호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제국>대원제국>고려연방제국.
그들이 명나라 사람들을 보자마자 굽신거리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쥐어 터지기 싫으면, 허리라도 굽히는 것이 맞았으니까.
고려 연방의 구성원으로서 그런 평가는 아마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연방의 저력과 영토는 조금 과소평가하고, 명의 저력은 너무나도 과대평가한 유럽인들이었지만, 사실 전근대의 국력의 힘이란 인구수에 기반하는 것이 상당했기에 완전히 틀리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지.
지금은.
‘대외의 의견이 무슨 소용이겠나, 결국 국가의 부는 우리 같은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데.’
그들이 돈을 벌어오면, 국가는 그 자금을 현명하게 사용한다.
남려의 인구는 늘어나고 북려의 황무지는 개간된다.
고려는 끊임없는 역동성과 혁신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차피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기항한 직후, 다시 한 차례 배를 꼼꼼하게 검사받은 로베르와 선원들은 영파에서 한 주를 꼬박 쉬고서 여섯째 날(고려의 한 주는 여전히 5일이다.)이 되어서야 찾아온 관리에 의해 교역을 시작했다.
"여기, 대명제국 영파의 무역을 책임지시는 시박제거사께서 내리신 감합(勘合)이오."
명의 무역은 감합무역이라 한다.
설명 듣기로는, 외교적 의례와 함께 되는 조공무역의 일종.
밀무역을 없애고,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준동하는 해적들과 왜구들의 조공 사칭을 견제하기 위해 명 조정은 감합이라는 것을 발급하여 내왕하는 조공 사신(使臣)들에게 주었다.
따라서 본래 이 감합이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 간의 무역에서나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당금 남중국해 부근의 무역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상단의 내왕으로 인해 얻는 부의 효과가 상당하자 명 조정은 꽤나 유연하게 감합을 발급했다.
즉 믿을만한 상단에게도 이를 주게 된 것.
당금 명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라 볼 수 있는 성종 천덕제 치세부터 실시된 무역법에 따라 강남의 세수는 껑충 뛰어올랐고, 이는 에센 타이시의 대숙청 이후 다시금 중흥기를 구가하고 있는 북원을 견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었다.
엄등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그도 시박사에 소속된 지 거의 오 년이 다 되어가는 관리.
일개 해적과 왜구들이 그 정도의 은을 엄등 자신 같은 사람에게 선뜻 건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맞았다.
게다가 예의를 알고, 씀씀이도 괜찮은 이 미국에서 온 양이들과 좋은 관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싶었던 엄등은 자신의 몫을 떼어서라도 시박사에게 직접 이 사건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말했고, 시박사 또한 그 은을 받고서는 조정에 최대한 우호적으로 보고를 할 것이다.
엄등의 영향을 받아, 말단의 관리조차 어딘가 친절한 구석이 있었다.
"이곳에 상단의 일행의 정보와 무역 목적, 가지고 온 무역품과 일정 및 기타 사항을 꼼꼼하게 기입하십시오."
로베르는 품속에 감합을 증명하는 황동패를 넣으며 형식적인 서류를 작성했다.
예상하기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다.
전 세계 관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모두 엉덩이가 무겁다는 것이겠지.
게다가 명은 해적과 왜구들의 준동에 지금 피해를 보고 있는 입장이니 경계심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나, 로베르가 준 은의 양은 그 모든 경계심을 산산조각내기 충분한 모양이다.
로베르는 천천히 생각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상대의 계급에 비해 너무나도 과다한 뇌물을 찔러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허어, 실수로다.’
사실, 당금 고려의 은값은 실로 묘한 구석이 있었다.
금과 은을 모두 주화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고려는 태동산맥의 풍부한 광석자원을 채굴하여 귀금속의 공급에 전혀 차질이 없었다.
아니, 사실 다른 의미로 차질이 있긴 했다.
무종(武宗) 해윤이 타완틴수유 정벌기 때 발견한 남려 최대의 은광, 포토시 광산은 그 규모가 정말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일국을 전부 사 버릴 수도 있다는 어마어마한 은이 잠들어 있다는 광산.
게다가 날이 갈수록 화학이 발전하며, 수은채취법(수은아말감법)과 연은분리법(회취법)이 등장함에 따라 광석 안의 은 획득량도 비약적으로 좋아지니 고려의 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돌기 시작했다.
시중께선 이 상황을 몹시 중대하게 여겨 초기 다소 무분별하게 발급되었던 국영 광산인 포토시 광산의 채굴권을 갱신해주지 않고, 오직 극소수의 자들만 은을 채굴하여 국가의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는 그 대망의 괴상한 법을 발동시키셨지.
시중의 결단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 내의 상인들과 광인들은 죄다 그 법을 악법이라고 헐뜯고 있었다.
아대륙자원 보호법(我大陸資源 保護法)이라니.
이름부터 수상한 그 법은, 요약하자면 우리 땅을 열심히 파먹기보다 남의 땅을 파먹으러 떠나라··· 라는 게 법의 요지였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남북려 대륙의 희귀자원들을 함부로 난굴(亂掘)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명목으로 온갖 광산을 죄다 국영으로 돌린 시중은 근래에 상당한 정치적 비판을 안고 있었다.
‘꼬우면, 외국에 나가 채굴권을 얻어오라 하셨지.’
로베르는 험담은 그만했다.
평소에 왜 자신을 손주 보는 것마냥 그리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시중께선 동아시아회사의 주주시다.
게다가 로베르에게 친히 가용한 곳에 쓰라 사재를 내리시기도 했고.
지금 엄등이라는 관리에게 준 은도 사실은 시중께서 주신 은과 진배없었다.
‘명국에서는 은이 고려보다 훨씬 귀하다. 앞으로는 이를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해.’
어찌 되었든 일이 잘 풀린 것은 명백하기에 로베르는 더 이상 안타까워하진 않고 다만 교역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과 민의 묘한 어울림이 있는 당금 명의 감합무역답게, 내지의 교역소 또한 각양각색의 명나라 상인들로 가득했다.
강남의 물산과 유럽, 그리고 아랍의 물산이 뒤섞인 영파답게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잔뜩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그리고 심지어 그들 무리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운학까지도 모두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영파도 별것 없군.’
시장의 크기는 고려의 물산이 전부 모인다는 청해보다 작았고, 진귀한 물건이랍시고 내놓은 것도 지중해와 아프리카, 대동양과 북해의 물산이 전부 모이는 카나리와 용경도에 비하면 뒤떨어져 보였다.
오가며 흘깃 보니 상품의 품질과, 흥정의 방식, 거대 저울의 공정성과 추의 객관성, 관리들의 감시 모두가 다소 뒤떨어졌다.
‘허어··· 저기 또 사기를 치는구만.’
표준화된 거래 절차(저울의 영점을 맞추고, 추를 직접 들어보는 등의)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상인들의 비행을 감시하는 고려에 비해서 너무 허술하지 않는가.
저걸 누가 당해줘.
라고 생각을 하자마자, 상인 하나가 흡족한 듯 물품을 사는 것이 보였다.
로베르는 구입처보다는 일단 판매처로 다가갔다.
"물품을 거래하고 싶소."
"어떤 종류의?"
"시가라 하오."
득팔이 말을 옮기면서도 그 자신조차 시가가 무엇인지 몰라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로베르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한번 피워 보시든가."
로베르는 시가를 피우는 방법을 손수 알려주고는 상인을 바라보았다.
설명받은 대로, 끝을 자르고 불을 피워 연기를 들이마신 상인이 한참을 쿨럭대자 주변의 사람들이 오며 가며 그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걸 물건이라고 팔려는 것이오? 카흑, 퉷!"
바닥에 침을 뱉는 것이 무례함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목이 답답하여 한동안 쿨럭거리고 있었으니까.
시가를 처음 접한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긴 하다.
"허허,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시오."
로베르는 빙글거리며 웃고는 다음 협상에 들어갔다.
사실 판매하려 가져온 물건은 시가 말고도 많았다.
백색에 가깝게 정제된 설탕과 카카오, 그리고 무척이나 질 좋은 면포와 향신료들.
고려 자생종뿐만 아니라 유럽의 향신료들까지.
이번에는 제대로 된 무역품을 소개받은 상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괴악한 것을 건네주기에, 완전히 허탕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건실한 상단이었군."
육지면으로 짠 포를 한 번 쓰다듬은 그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의 말씀이시군, 어디 구매처를 소개해 줄 곳이 있으신가?"
"내 동향 사람이 하는 곳이 있다오. 가서 모가 놈 소개로 왔다 말하면 적어도 장난질을 치지 않을 게요."
* * *
살 것은 정해져 있었다.
유럽인들이 환장했다던 중국의 도자기 또한 별로 필요가 없었다.
수공예의 질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도 않았고, 도자기야 고려의 도자기가 더 좋아 보였다.
험난한 항해 도중 자기를 깨트리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도 고약한 일이기도 하고.
다른 물품들도 딱히.
로베르는 사치품들은 귀하거나 화려한 것 대신 특이하고 신선한 것들을 위주로 골랐고, 서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로베르도 한 가지 앞에서는 정신을 놓았다.
"비단···."
고려가 잘 구하지 못하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물건.
오히려 유럽을 통해서 들여와야 했던 그런 귀중품.
옛 향수를 자극하는 옷감.
고려 황제의 곤룡포 또한 과거에는 이런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했지.
비단을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로베르는 마침내 눈을 딱 감고 질렀다.
"가장 값비싼 최고의 비단으로 전부 주시구려."
"대금을 지불할 능력은 있으시오?"
양이들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견포점에 와서 정신을 놓았고, 이를 본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명인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로베르는 수중에 있는 은을 확인해 보았다.
비단의 가격은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빌어먹을.’
그제서야 다시금 후회를 시작한 로베르였지만, 이번에도 그의 구원자는 존재했다.
의문스러운 눈길로 헐레벌떡 그의 앞으로 온 남성을 바라본 로베르가 이윽고 그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시가라는 것, 다시 한번 더 피워 볼 수 있겠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