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17화 (217/653)

현 고려와 연방은 창양, 그중에서도 천하의 지배자인 황상이 기거하시는 창천궁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세계의 경도를 잡았다.

그곳은 정확히 경도 0도라 간주된다.

그리고 서쪽으로 움직인다면 그곳은 창천궁을 기준으로 서경 몇 도가 되는 것이고, 동쪽으로 간다면 동경 몇 도가 되는 것이다.

고려의 해양패권이 워낙 강하고 또한 항해전통이 워낙 확고한 덕에 당금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카스티야와 같은 유럽의 항해사들도 지금은 같은 경도체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청해의 증권거래소에 이미 상장을 한 동아시아 무역회사는 북유럽회사나 서유럽회사, 심지어 남아프리카회사에 비해서 처음에 그렇게 많은 자본과 관심이 몰려들진 않았다.

일단 물리적으로 정확히 지구 반대편이다 보니 남려에서 도달해야 하는 거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었고, 태평양이란 드넓은 바다에 대한 미지의 불안감은 항해기술이 발전하는 고려인들의 마음속에도 언제나 존재했었다.

게다가 이곳은 제국 경도에 따르면 거의 180도에 위치해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먼 거리를 돌아 보급품을 싣고 온 상선들이 다바오에 도착했다.

섬이 아닌 오랜만에 마주한 제대로 된 육지를 보고 한동안 감격에 젖어있던 고려인 선원들은 약속된 보급품들을 내리고 한동안 정비를 한 뒤 다바오의 총독 이광영의 관리하에 ‘동아시아 무역회사’의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기후네. 비는 자주 쏟아지고. 그러니 건물을 전주(電州)나 파남식으로 짓자고."

"예, 나리."

벽돌을 쌓고 견회를 발라 큼지막한 건물을 올리는 중이지만 아직은 약간 초라해 보였다.

이 초라한 도시와 동아시아 무역회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거래처가 필요할 것이다.

광영과 이제 막 도착한 동아시아 무역회사의 수뇌부들은 기나긴 회의를 해야만 했다.

* * *

개천 226년 4월 17일.

목적지가 보였다.

앙주 출신으로 동아시아회사의 사장인 로베르 드 아르크(Robert d’Arc)는 회사의 이름을 걸고 항해한 상단이 마침내 첫 번째 결실을 맺을 곳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정신을 온전히 놓진 않고 입항을 준비하라 명령을 내렸다.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화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포르투갈의 견제를 방어키 위함과 동시에 상단에 대한 명 조정의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해 다바오에 대포와 화약을 많이 놔두고 왔기 때문.

몸을 보호할 수단은 기껏 명나라도 쓴다는 자모포 열 문과 소총 정도에 불과했다.

"소총은 괜찮겠지?"

"명국은 그 노밀총(魯密銃) 비슷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습죠. 항상 그렇듯이 노밀총에는 별 관심은 없을 겁니다요."

그의 옆에 서 있던 꽤나 친해진 조선 출신 주나라 선원, 득팔(得八)이 입을 열자, 로베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미 군사 전략상 화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려인 출신이라 그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득팔은 조금 더 부연설명을 했다.

그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조의 인물들, ‘고려인’이라는 자들과 이제 꽤 오래 지낸 만큼 이들의 풍습을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중원에서 화약은 귀하지요. 게다가 명의 노밀총이란 것이 걸핏하면 나가지 않고 터지는 등 불량이 많아 차라리 대포를 쓸지언정 노밀총을 쓰는 군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가.

로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에는 고려 또한 초기의 화기를 개발함에 있어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고 한다.

태조와 태종께서 꾸준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금전적 지원을 하신 성덕에 힘입어 지금의 수석식 보총이 나오게 되었지.

그 또한 성씨까지 물려받진 않았지만 해씨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위대한 선제들의 업적에 경외하는 마음이 컸다.

"그나저나, 그대는 주의 해적··· 아니, 주의 남해도독부의 속하인데 어찌 명의 상황을 이리도 잘 아나?"

득팔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도독께서도 빌어먹을 주씨들에 대한 원한을 잊으신 바는 아니시겠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당금 중원을 장악한 명국과 교역을 해야 했습니다요."

공무역은 명 조정에서 허락할 리 없었다.

"밀무역을 말인가?"

"예. 나으리."

"조정에서는 막지 않고?"

"비록 주가 지금은 스러졌다 하나, 아직도 광동과 절강, 복건성에는 그날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옛 주의 땅에서 자행되었던 주고치의 대학살은 그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악명이 이어져 내려오는 모양.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이 다바오에서 동아시아회사의 기틀을 확인할 때만 해도 다바오에 기거하는 주나라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당연히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당장 내일의 미래도 불안한 해적질 말고도 그나마 안정성 있는 밀무역이라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경창을 비롯한 주의 해적들은 동아시아회사가 명과의 공식적 무역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말에 별다른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만섬을 비롯해 대주의 영역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삐질 여지라도 있었겠으나 지금은 어찌 비벼볼 만한 성세가 아니었으니.

‘설마 우리를 주의 사람이라 보진 않겠지?’

로베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부러 미주에서 골라낸 선원들이 보였다.

명과 주의 복잡한 관계를 의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와 조선, 명과의 복잡한 과거사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리했지.

선박엔 근래에 통혼한지라 아직은 피가 적게 섞여 유럽인의 특색이 진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 한둘이 중원인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진 않을 것 같은데.

로베르의 염려하는 마음가짐과 별개로 배는 마침내 명나라의 땅, 절강성(浙江省)에 위치한 영파(?波)에 가까이 다가갔다.

당(唐)대부터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어 왜와 신라,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이 유서 깊은 항구는 현 명대에 와서도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다.

조선인들과 남북조를 비롯한 왜인들, 그리고 방가시 상인들.

그리고 마카오에 주로 있다던 포르투갈 상인들과 카스티야, 이탈리아 및 이슬람 문화권의 상인들.

항상 시대를 호령했다던 중원의 강대국의 저력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영파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실로 각양각색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로베르는 그중, 포르투갈인들의 나우가 분명한 범선을 바라보았다.

후기형 나우인지 그 크기가 상당히 컸다.

항구에 정박한 다른 국가 혹은 명나라 사람들의 선박에 비교해보니 더욱 대조적이었다.

"전방에서 소선 한 척이 접근해 옵니다!"

최근 부쩍 늘어나는 양이들의 출현에 애써 건조한 큰 복선을 끌고 나온 명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아무리 크기를 키워 보았자 중원의 함선이라는 것은 중범선과 나우 같은 누범선에 비해서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는 그들의 접근을 허락했다.

명의 복선이 다소 무례하게 갈고리를 던져 배를 끌어당겼다.

― 덜컹

"끄응."

땅딸막하고 푸짐한 사내 한 명이, 주변의 부축을 받아 범선으로 오르는 사다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코를 씰룩이며 주변을 둘러본 그 사내가, 이윽고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본관은 대명국(大明國)의 시박사(市舶使) 소속의 도거(都?) 엄등(嚴騰)이다. 선박의 수장이 누구냐?"

빽빽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이 아니꼬울 만한데도, 로베르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정중히 읍하고는 부하에게 준비했던 서류를 내밀도록 했다.

"흐음?"

양이가 보이는 정중한 예법에 눈썹을 한 번 꿈틀한 엄등은 자신이 이끌고 온 관리 하나가 서류를 받아들고 귀엣말로 읽어나가는 것을 들으며 다시 한번 더 눈썹을 꿈틀했다.

"미국(美國)에서 왔다고?"

주나라 출신 조선인 선원은 졸지에 통역관이 되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 약간은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명의 관리는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미주(美州)입니다."

세상에 양이에게서 이토록 한자로 잘 병기된 문서를 받아들지는 몰랐던 엄등은 흥미로운 눈으로 로베르를 뜯어보았다. 로베르는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띠어 보였다.

거짓말 하나 안 했다.

동아시아 무역회사는 그 특성상 엄연히 미주에 위치한 회사였으니까.

"흐으음···."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엄등은 선수에 매달린 깃발을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불랑기포는 아국의 선박을 해하기 위함인가?"

로베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랄 났네.’

엄등이 등을 돌려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고려의 자모포.

이곳에서는 포르투갈에 의해 처음으로 보였다는데, 어째서 프랑스를 음차했다는 불랑기포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몰랐다.

저것보다 짧지만 몇 배는 더 굵은 옹포와 길이도 길고 굵기도 긴 중포를 보았으면 아마 더욱 난리를 피웠겠지.

사전에 미리 빼 놓았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저거마저 빼 놓으라고? 맨몸으로 다니란 이야긴가?

"설마 그렇겠습니까? 근방에 해적 무리들이 날뛴다는 소문을 들어···."

"지금, 대명국의 국치(國治)에 대해 비꼬는 것이더냐?"

엄등이 순간 노발대발했다.

통역을 하던 조선인 출신 해적이 그의 말을 황급히 전달하는 척하며 작게 덧붙였다.

"이 돼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묵직한 은입죠. 대충 쥐여주면 넘어갈 위인입니다."

그 말을 들은 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뇌물의 법칙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이곳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로베르는 선원들에게 난간에서 자모포를 분리하라 이르고는 사람을 시켜 큰 상자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자신보다 족히 반 자는 더 커 보이는 거구의 사내들이 그에게 다가오자 엄등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금방 사내들이 내려놓은 묵직한 상자를 보고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열어보거라."

도거는 종5품의 고관.

직접 허리를 굽힐 생각은 없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부하 관원 두 명이 상자를 열자, 엄등은 떡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명나라 사람들이 침묵에 잠겼을 때, 로베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인들이 은을 좋아한다 하여 미리 은을 가져왔는데, 설마 이 양이 부족한 것인가?’

제국의 환(換, 은화)이라도 쥐여주어야 하나?

그러나 시중께서 내린 명령은 최대한 고려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무역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셨지.

복잡한 과거사를 풀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으니 그저 지금은 양국을 오가며 최대한의 단물을 뽑아내라는 말씀도 하셨고.

명나라도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아랍의 상인들에게서 ‘고려’의 존재를 듣긴 들었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반도에 예전에 존재했었던 고려를 칭하는 것인지, 혹은 그저 음만 비슷한 완전히 별개의 국가인지는 그네들 스스로도 의심하는 구석이 있다 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양이들과 색목인들의 말을 잘 믿지도 않았고.

‘그럼 환들을 녹여서? ···그것은 국법을 중대하게 어기는 일일 텐데···.’

그러나 로베르의 생각과는 다르게 엄등은 뇌물의 규모에 넋이 나간 것뿐이었다.

‘이··· 이게 다 얼마인가.’

종5품은 비록 고관이지만, 이 정도 크기의 상자를 전부 채운 순은(純銀)을 뇌물로 받을 정도의 자리는 아니었다.

시박사를 총괄하는 시박제거사(市舶提?司) 본인은 모르겠지만.

‘지엄한 아국의 위세에 덩치만 큰 이런 양이들 또한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니, 이 어찌 황상의 은덕이 아니리오.’

황상의 은덕(恩德) 아래, 이렇게 자신도 은덕(銀德)을 누릴 수 있고.

당금의 명의 위세 앞에서는 포도아(포르투갈)의 상인들도, 가서리야(加西理耶, 카스티야) 상인들도, 회회인들도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황화론(黃禍論)을 앞장서서 실행하고 있는 고려의 영향이라는 것을 모르는 엄등은 그저 모든 것이 행복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에게 상자를 챙기라고 지시하고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킨 뒤, 애써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미국의 상인들에게 입항을 허락하니, 추후 세관의 지시를 따라 영파에서 교역하라. 교역에 따른 세금은 추후에 공지할 것이니···."

미라는 국가는 처음 들었다.

국적기 또한 처음 보았고.

그래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나라들이 있는 터라, 엄등은 별달리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미국이 아니라, 미주입니다."

그러나 엄등은 그 말을 채 듣지 않고 서둘러 상자를 챙겨 도망치듯 중범선에서 내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