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89화 (189/653)

부르고뉴

1487년 6월.

에린섬.

리머릭.

고려와 잉글랜드가 한 번씩 주고받은 이후, 양측의 해군은 서로의 존재를 경계한 채 항구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범선이 항구에서 출항하는 것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잉글랜드 해군들의 실수로 또다시 해상군권을 잡게 된 잭 디건은 그 출신성분 덕에 기만전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변흠규는 여전히 현존함대의 원칙을 지키며 리머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육지에서 벌어지는 에린―잉글랜드 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드워드는 중앙의 군대를 아일랜드로 보내기로 결정한 이후, 가장 빠른 해로를 통해 갈 수 있도록 브리튼섬 중서부에 군영을 꾸렸다.

머지강 오른쪽, 리버풀이라 불리우는 이 작은 어촌마을은 그 인구가 고작 천 명에 불과했지만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하며 한순간에 서부의 주요한 항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려는 에린에 대한 상륙을 막을 형편이 되지 않았고, 잉글랜드는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콘초바가 리머릭에서 막은 잉글랜드 병력은 불과 오천이었다.

그런데 지금 친잉글랜드파 아일랜드 영주들과 합류한 보강된 잉글랜드의 군대는 그의 네 배, 거의 이만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은 처음 아일랜드 북부와 남부를 먼저 정리했는데, 우스터와 먼스터는 불과 삼 개월 만에 떨어지게 되었다.

오직 서쪽 코노트 지방만이 겨우 항거하고 있는 에린섬은 에드워드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에드워드는 너무도 많은 실책을 저지르고 있었다.

금전적 문제에서 파생된 실책이 대부분이었다.

템즈강 하류의 요새화부터 새로운 조선소 건설, 그리고 새로운 군함 건조.

심지어 이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 편성까지.

하나하나가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대사업을 여러 개 병행하자, 당연하게도 자금이 씨가 마르다 못해 부채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에드워드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짓을 저질렀다.

일단 자국 내에 있는 고려인에 이은 두 번째 상인세력,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졌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살해되었으며, 그들의 금전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두 번째로 국가의 세금을 대폭 늘렸다.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장미전쟁 동안의 고세율과 근접할 만큼 상승하였으며, 잉글랜드의 민심은 땅에 떨어졌다.

사방에서 흉악한 소리가 나돌았으며, 몰래 도망친 이들은 곳곳에서 도적이 되었다.

마지막은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였다.

이만 명의 병사들은 현지조달이라는 명목하에 아일랜드에 대한 약탈을 허락받았다.

자국민에 대한 증세를 하는 마당에, 피정복민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소리였다.

약탈은 현지인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잉글랜드인들은 저항하는 아일랜드인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그들의 재물과 식량을 빼앗았다.

점령한 에린의 땅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백성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당시 리머릭에 있던 고려 문인 류주성은 두 가지 언어로 [에린 대학살]이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이 참극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게일인이라면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어마어마한 수의 피난민이 코노트로 몰려들었고, 마지막 저항세력인 오브라이언 가문의 보호를 받길 원했다.

보다 못한 고려는 항구에서 기약 없이 대기하는 함대 중 필수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전부 돌려 육전에서 게일인들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게일인들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보은(報恩)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겠는가?”

김홍이 런던으로 출항하는 사이 스코틀랜드에 난파되었던 고려 해군은 몇 차례 위기에 봉착했으나 결국 대부분이 무사히 리머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협조가 컸다지만 이들의 귀환 자체는 전적으로 게일인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함대를 함부로 이동할 수 없었던 고려 대신 게일인 어부들이 이들을 한 땀 한 땀 손수 이송시켜 준 것.

고려는 처음 게일인들과 손을 잡을 때, 이들을 잉글랜드의 견제책 이상 혹은 이하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양국의 국가적 필요에 의한 동맹.

그러나 게일인 어부들은 그들이 힘든 와중에도 잉글랜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낡은 어선을 끌고 직접 험한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 해안가로 가 고려의 병사들을 실어날랐다.

이들에게 이런 은혜를 입은 순간, 고려가 어찌 이들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일인들 또한 그들과 함께 육지에서 피 흘리기를 택한 고려군에 큰 감동을 느꼈다.

바다 건너 아득한 거리에 있는 이질적인 외모의 국가가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고 인종적 유사성도 더 높은 나라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두 국가는 처음에는 공통의 명분, 즉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으로 뭉쳤으나 차츰 그 사이가 돈독해지기 시작했다.

종교도, 민족도, 언어도, 글자도 다른 두 나라가 서로를 형제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 * *

게일인들과 고려 간의 관계가 서로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넘어 민중적 호감을 사며 진전될 때, 고려와 부르고뉴의 관계 진전은 영 이상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김홍과 잉글랜드의 왕비, 해영이 도착한 저지대의 브레다는 부르고뉴의 땅이었다.

저지대는 한창 혼란의 시기에 빠져있었다.

고려는 해상십자군에 프랑스가 참가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음지에서 선량공 필리프의 부르고뉴 독립을 지원했었다.

비록 당대의 필리프는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독립의 야망은 그의 아들 용담공 샤를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용담공 샤를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지지를 얻고 프랑스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교황이 대표적인 친교황파인 프랑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할 리가 만무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도 헝가리의 마치시 1세와 대립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용담공 샤를은 특단의 결단을 내렸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민중들의 지지를 받자.

그리고 교회에 납부하는 세금을 세속군주의 것으로 만들어 저항할 기틀을 다지자.

에드워드 4세의 아버지, 잉글랜드의 병신왕 헨리 6세가 1470년 처음으로 롤라드파 개신교를 받아들이며 온 유럽에게 충격을 선사하자, 4년 뒤 용담공 샤를 또한 당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던 배설주의 개신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대륙에서는 첫 번째로 군주가 직접 개종을 한 사례였다.

덕분에 주변 국가들에서 박해받던 개신교도들이 저지대로 몰려들며 부르고뉴 대공국의 국가역량은 더욱 상승했다.

저지대 민중들의 호응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대립을 할 기회를 얻은 샤를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격렬하게 대립하며 일방적인 독립을 선포했다.

물론 주변 국가들이 부르고뉴 대공국의 독립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프랑스와 북이탈리아, 아라곤, 카스티야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신성로마제국까지 모두 부르고뉴를 적대시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자동맹을 위시한 신성로마제국의 북부와 칼마르 동맹의 구성원(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 또한 서서히 배설주의를 받아들이며 가톨릭에 저항하니 1474년부터 시작된 이 부르고뉴―프랑스 전쟁을 유럽 종교전쟁의 시작으로 보았다.

애석하게도 일평생 프랑스와 대립한 부르고뉴 대공 용담공 샤를은 오직 한 명의 자손만 보았는데, 그것도 딸아이였다.

당장 후계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살리카 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선포한 부르고뉴 대공국은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 부귀공 마리 또한 자식 운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가문을 이으라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찍 결혼했지만 더더욱 애석하게도 한 명의 자손도 아직 보지 못했다.

첫 번째 남편은 부르고뉴 대공국 내부의 유력가문 귀족이었으나 부르고뉴―프랑스 전쟁 중 전사하는 덕분에 일찍 사별했다.

두 번째 남편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요한 2세의 친척이었는데, 이 또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부귀공 마리는 크게 상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불안정한 대공국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는 후계구도가 명확하게 정립되어야 했으니까.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던 그녀는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처지에 있던 잉글랜드의 왕비 해영과 무척이나 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해영이 김홍에게 저지대로 가자고 한 이유이기도 했겠지.

* * *

셰피 해전 후.

잉글랜드의 로열 네이비가 리머릭 공격에 실패했을 무렵.

전황이 좋지 않아, 부르고뉴의 수도였던 디종(Dijon)에서 저지대의 메헬렌(Mechelen)으로 피난하고 있던 마리 드 발루아부르고뉴는 마차를 보내 해영과 김홍 일행을 메헬렌으로 불러들였다.

“마리!”

“영!”

두 명의 여자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껴안았다.

사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녀들은 실로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친해 보였다.

지고한 신분의 두 여인이 서로 마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동안 서신을 통해서만 교류하고 있었지.

그러나 여인 간의 우애도 사내들 못지않았다.

“당신 소식은 들었어요.”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요.”

해영은 먼저 사과를 했다.

남편에 의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관계는 해영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에는 더더욱.

“당신이 미안해할 게 뭐가 있나요. 단지 당신의 남편이 병신 같은 머저리인걸.”

마리는 같은 개신교 계열 국가지만 그딴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사략함대를 보내 저지대의 해안가를 약탈한 에드워드 4세에게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난처함 반, 동의 반의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 해영이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빠져들려는 마리를 말리고는 김홍을 불렀다.

“여기, 이분은 고려 해군의 김홍 제독이에요.”

해영의 뒤에 있던 김홍이 부귀공의 전면에 나아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그 순간 마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상당히 잘생긴 얼굴.

비록 제독(대행이지만 외부에선 그런 속사정을 알 필요가 없었다.)의 위치에 오른 만큼 나이가 마흔 줄에 가까워졌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중후한 멋이 있었다.

마리의 나이 또한 이제 젊다고는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호감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몰랐다.

김홍. 김홍이라니.

그 대단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가?

김홍에게 유럽의 귀족에게 하는 예법대로 손등에 입을 맞추도록 한 마리는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감탄성을 담아 물었다.

“당신이군요! 저 잉글랜드에게 크나큰 굴욕을 안긴 자가?”

“…패장일 뿐입니다.”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낭만적 이야기의 주인공, 공주를 구한 기사치고는 한 줌의 오만함도 보이지 않는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패배를 자책하고 있었다.

마리는 고려인 일행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해영에 대한 우의의 표시인지 혹은 다른 감정에서 기인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부르고뉴 대공국에 머무르는 동안은 안심해요. 나와 우리의 백성들은 그대들을 적대시하지 않으니까.”

부르고뉴의 협조를 얻어낸 고려인들은 약간은 마음을 놓으며 함대의 수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해영과 김홍은 메헬렌에 머물렀다.

딱히 할 것도 없는 기간, 항구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느니 차라리 머물고 있는 땅의 군주에게 잘 보여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김홍은 잘 보여야 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대체 알 수가 없었다.

“…….”

분명히 지금 이 상황은 그가 생각하고 있던 바가 아니었다.

알몸으로 옆에 누워있는 부귀공 마리가 행여 깰까 조심스럽게 일어난 김홍이 속옷과 가운만을 걸친 채 궁전의 테라스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그의 복잡한 심경과는 다르게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 용케 소선으로 칼레 해협을 건너온 전령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떠올렸다.

[고려 해군 정령 김홍을 파직한다.]

상관 변흠규에 의해 내려진 명령.

김홍에게 전달된 이 소식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었다.

사사로이 군대를 움직여 고려의 함대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 것.

그리하여 군법상 처벌을 내린다는 의미.

어찌 되었든 제독이 와병하여 공식 대행 권한을 받은 것은 사실이므로 즉결처형과 같은 극형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패장의 책임에 대한 이러한 처우는 예상 가능한 범주 아래에 있었다.

‘…….’

그러나 흠규는 또한 김홍의 사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 귀관이 작성한 장계에 따라 귀관과 아국 선원의 미래를 염려하여 내리는 결정이니, 그대는 부디 좋은 선택을 내리길 빈다.

일천이 넘는 고려인들이 부르고뉴에 머무르고 있었다.

흠규는 마지막 명령으로 김홍이 부귀공 마리의 환심을 깊게 사길 원했다.

고려 선원들의 안위를 위하여.

어차피 김홍 또한 일찍 사별한 처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이미 다 컸다고 봐도 무방했다.

또한 변흠규는 그래도 한솥밥을 먹으며 친해진 부하의 미래를 생각하는 덕장이었다.

비록 그가 직접적으로 서신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아국은 내로라하는 무관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한 번 실패를 겪은 무관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아마 없을 게야.’

고려는 항명과 같은 군법을 어긴 것이 아닌 이상 전술적인 이유로 패배한 장수에 대해 극형을 내리진 않았다.

그러나 패장이 군부 내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했다.

김홍은 어쩌면 자신이 다시금 배에 올라 바다를 호령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고려의 다른 무관과 비슷하게도 그 또한 국가와 황실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항상 냉엄했다.

고국으로 돌아가 패장의 멍에를 지고 사느니….

어쩌면 새롭게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김홍이 가진 야심도 작지 않았다.

저항할 수 있었으나 결국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마 그런 면이 있겠지.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