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7화 (177/653)

떠오르는 열강들

첫 번째 열강이 고려라면, 그다음 열강은 고려의 영향을 몹시 심하게 받고 있는 나라였다….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

아비스 왕조의 포르투갈은 엄연히 동시대의 몇 안 되는 열강이었다.

위대한 왕 주앙 1세와 그다음 왕 두아르트, 그리고 그의 동생 항해왕자 엔히크는 포르투갈의 반석을 확실하게 깔아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 또한 상당히 유능했다.

현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 5세는 부왕 두아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아 몇 안 되는 친고려파라 부를 수 있는 유럽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고려와 교황청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바오로 2세를 설득하여 먼저 화해의 손짓을 내밀도록 한 것도 바로 그였으니.

덕분에 대서양을 미미하게나마 감돌고 있던 흉흉한 분위기도 사라졌으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대한 확장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옆 나라 이웃 카스티야는 새로운 섭정기에 들어섰으며, 아라곤은 여러 가지 혼란한 내부상황 및 베네치아의 견제로 앞가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이베리아의 동료이자 경쟁자들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포르투갈은 빠르게 영향력을 불렸다.

벌써 기니만과 상아해안을 장악한 그들은 고려가 양도한 희망곶 해안까지 폭넓게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다.

최근엔 고려를 본따 1480년에 서아프리카 회사를 설립하기도 한 그들은 단연코 서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고려 스스로 여러 가지 향신료를 재배하고 유럽에 팔기 시작한 이후 인도까지 진출해 후추 무역을 할 동기는 비록 상당히 옅어졌지만,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것도 상당히 이득이 남는 좋은 일이었다.

윤리적으로는 끔찍하더라도.

아프리카는 이미 예전부터 노예제가 팽배해 있었다.

유럽인 개척 전부터 존재했으니 이를 온전히 유럽인들의 잘못이라 칭하는 것도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다른 문명에서도 흔히 보이듯 이곳에서도 민족성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부족들이 서로를 공격하여 노예로 삼았던 일이 빈번했으니까.

오히려 토착계층이 침략자들에게 포로를 팔아넘기는 것에 앞장서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만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207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비록 고려와 대적하는 그릇된(결과론적이지만) 길을 택했더라도 윤리적으로는 도덕적이며 충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노예 금지와 다름없는 칙서, [Sicut Dudum]을 반포하여 당대의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만행을 억제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포르투갈은 예전 칙서의 권위를 박살 내기 위해 209대 교황 갈리스토 3세에게 탄원하여 새로운 칙서, [Dum Diversas]를 얻어내었다.

노예무역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담은 칙서는 그들의 도덕적 제한을 벗겨내었으며 아프리카는 이들의 손에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양심도 없고, 눈치도 없는 이들은 자꾸만 고려에게 노예를 판매하길 원했다.

인력을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미 풍부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고려는 포르투갈이 권하는 흑인 노예들을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황금기를 위해 제국 내를 좀먹는 짓거리를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고려는 고려 내부에도 동화해야 할 수많은 원주민들이 있는 마당에.

게다가 피부색도 너무나 다르다.

처음엔 남북중려 원주민 모두 고려인들과 이질적이라 건국 초기에 진통이 많았지.

그러나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고려와 고려의 원주민들의 피부 차이보다도 몇 배는 더욱 이질적이었다.

생각하기도 불편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상민 개인은 수많은 매체를 통해 학습되어 인종차별주의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은 피부의 색깔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했다.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고려인들까지도.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약간 불안한 내용을 담은 책들이 시중에 떠돌았다.

괜히 비야돌리드 논쟁 같은 게 벌어진 게 아니겠지.

흑인 노예들을 사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제국 내적으로도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이 시대의 잠시의 이익을 위해 먼 미래의 안정성을 해치는 일이다.

게다가 이제 진화론이란 아주 조심스러운 학문이 대두되는 마당에.

덕분에 악랄한 대서양 삼각무역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포르투갈 상인들은 현지에 플랜테이션 농장을 설치해 그들을 부리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국왕과 그들 정부의 친고려 정책 기조에도 불구하고 상민은 포르투갈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로는 도덕적 이유를 꼽을 수 있겠다.

현대인이라면 노예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일 거니까.

두 번째는 플랜테이션 그 자체였다.

노예제가 철폐되며 고려 내의 설탕과 면화, 고무, 카카오와 커피, 백란(白蘭, 바닐라, 중려 원산지의 향신료), 후추 등의 노동집약적 작물의 생산은 아무래도 성장세가 둔화되었다.

반면 인력을 갈아 넣는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은 성장세가 가팔랐다.

앞으로도 그들이 생산하는 작물들의 가격은 낮을 것이고 당연히 고려 작물들의 가격경쟁력은 하락하겠지.

세 번째는 포르투갈의 파트너로 아프리카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 나라가 마음에 걸렸다.

두아르트 시절부터 긴밀하게 연결을 하고 있는 유럽의 섬나라.

섬나라 특유의 인성으로 속이 음흉하며 항상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신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족속들.

잉글랜드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내전의 여파로 인해 아무 짓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곧 하려는 조짐이 들렸다.

포르투갈과 긴밀한 동맹을 맺어 아프리카에 조금씩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하는 모양.

듣기로는 동아프리카의 권리에 대해 협상을 따냈다 한다.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 * *

잉글랜드는 1433년 백년전쟁 종결 이후 거의 곧바로 내전에 돌입했다.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하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를 상징하는 요크 가문을 대표로 하는 양측은 국왕의 지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귀족들 또한 둘 중 하나를 지지해야 했다.

랭커스터를 지지하는 보퍼트 가문과, 요크를 지지하는 네빌 가문까지 모두 선택을 내렸다.

이들은 서로 피로 이어져 있는 인척 관계였지만 권력 앞에서 그런 것들은 무의미했다.

물론 왕이 멀쩡했으면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이었기만 했다면.

그러나 헨리 6세는 병신왕이라 불릴 만큼 심약한 성격과 정신병으로 인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다.

즉위 당시에는 나이가 몹시 어렸기도 했지만, 어엿한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했다.

그는 매일 뭘 하는지, 칩거에 칩거를 거듭했다.

젊은 왕 대신 섭정을 하고 있던 요크 공작 리처드는 기회를 넘보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먼 친척.

부계로는 서열이 밀렸지만 자신의 어머니, 앤 드 모티머로부터 물려받은 모계로의 왕위계승서열이 랭커스터 가문의 잉글랜드 왕들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리처드는 야심을 표출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아직은 어린 국왕의 조언자들이 멀쩡했다.

특히 헨리 6세를 보좌하는 늙은 추기경, 헨리 보퍼트는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1453년, 헨리 보퍼트 추기경을 비롯한 헨리 5세의 노신들이 모두 사망하자 리처드는 본격적인 움직임을 펼쳤다.

병신왕 헨리 6세가 후계를 본 이상 더욱 지체하면 불리하다 생각했던 것.

공교롭게도 헨리 6세의 아들 또한 리처드의 아들과 이름이 같은 에드워드였다.

리처드는 귀족들을 선동하여 헨리 6세에게 백년전쟁의 무기력한 패배와 기타 여러 가지 책임을 물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들 요크의 에드워드를 차기 국왕으로 지지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헨리 보퍼트는 이승을 떠나기 직전 요크의 리처드에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던져두고 간 상태였다.

1440년대 초, 급격하게 불이 붙은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이후에는 오히려 유럽보다도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교황청의 백년전쟁 항복 권유는 크나큰 상처였으며 모욕이었다.

이전부터도 아비뇽 교황청은 아주 친프랑스 기색이 넘쳐났기에 잉글랜드는 불씨가 날아오기 전까지도 이미 마른 건초와 짚단들이 겹겹이 쌓인 곳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위클리프는 파문을 당했고 심지어 사후 부관참시까지 당했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에는 그의 유산이 떠돌고 있었다.

종교가 부패하면 부패할수록 그는 계속하여 언급되었다.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 사건 이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본국으로 귀환하자마자 엉뚱한 일을 꾸몄다.

추기경의 신분으로 위클리프를 복위하려는 운동을 꾀한 것.

당연히 교황청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노발대발했지만 이 운동은 하층민과 중산층 말고도 일부 영국 귀족들에게까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유럽은 마티외와 배설의 종교개혁운동이 끓어오르고 있었고 그들의 개혁가 위클리프 또한 재조명받기 시작한 지 오래, 그들은 단순하지만 명확한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다.

추기경의 큰 일탈 행동에도 헨리 6세는 그를 내치지 않았다.

롤라드파의 지지자들은 그러한 헨리 6세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에는 헨리 6세 군주 개인의 무능으로 여겨졌던 백년전쟁의 패배는 부정한 교황 펠릭스 5세의 실정은 물론 그 후 새롭게 즉위한 갈리스토 3세의 여전한 잉글랜드 멸시 덕분에 아비뇽과 교황청의 잘못이라고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장미전쟁은 왕위계승전으로 시작하였지만 차츰 그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한 민중들은 심지어 귀족들이 벌이는 전쟁기간 동안에도 국왕을 도왔다.

1453년, 겨울 헨리 6세는 장미전쟁 도중 리처드에게 생포되었으나 백성들의 도움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이후 공개적으로 롤라드파로 개종한 헨리 6세는 왕비 마가렛의 측근들과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리처드에 대항했다.

리처드가 반대로 가톨릭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파괴적인 증오의 감정을 실은 전쟁이 그들 영토를 휩쓸었다.

친척들은 친척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을 기꺼워했다.

흰 장미건, 붉은 장미건 이미 핏방울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양측 모두 실로 어마어마한 피가 흘렀다.

승리자는 결국 돌고 돌아 헨리 6세의 아들, 즉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혹자는 그의 어머니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장인 리처드 네빌이 그의 편으로 붙어 이길 수 있었다고 평가할지 몰랐다.

그러나 결국 장미전쟁을 끝낸 자들은 이미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기 시작한 그들의 백성들이었다.

요크의 에드워드는 웨일스에서 롤라드파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되었으니까.

귀족들은 서로의 이권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미 대중들은 가톨릭에 마음이 떠나있는 상태였다.

1470년, 헨리 6세는 자의 반 타의 반, 왕위를 자신의 젊은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4세는 열일곱의 나이로 즉위하여 아예 싹 쓸려나가다시피 한 귀족들의 시체 위에서 봉건제를 끝낼 기회를 움켜쥐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공식적으로 롤라드파를 국교로 선포했다.

자신과 아버지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백년전쟁을 통해 알아차렸던 것.

이제부터 잉글랜드 개신교라 불릴 롤라드파의 공인은 유럽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유럽의 한 국가가 완전히 개신교로 돌아선 것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그들을 옥죄고 있던 종교의 굴레를 벗어던진 잉글랜드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무섭도록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동맹이자 열강에 이름을 올린 포르투갈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추후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 고려에 친밀한 기색을 보이긴 했다.

카나리를 기웃거리며 통교를 청하기도 하고, 북유럽회사의 무역로를 유치하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상민은 그들과 사신을 주고받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전히 섬나라 놈들은 음흉한 구석이 있어 언제든지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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