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6화 (176/653)

첫 번째 열강(2)

고려가 구원을 털어내며 모두와 두루두루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국가를 한 명의 ‘사람’에 빗대자면, 이미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있는 순간이란 것이지.

그리고 앉아있는 식탁에는 급속도로 살이 찌고 있는 고려로서도 도무지 언제 먹어 해치울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높고 맛있는 음식의 산이 쌓여 있었고.

남북려가 이미 정말 넓고 비옥하며 실로 대단한 땅이라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도 알음알음 퍼져나간 상황.

고려는 식탁에 눈을 힐끔대는 유럽인들더러 눈을 돌리라고 윽박지르고는 있었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 사이를 이간질해야 했다.

고려는 진흙탕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럴 역량도 아직은 부족했다.

이 식탁만 방어해내면 되었고 굳이 나서서 적들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저들의 주의를 돌리고 대동양을 막아내면 족하다.

종교전쟁은 한 끼 멋들어진 식사에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겠지.

고려는 그 식탁에 앉아 유럽의 참상을 바라보며 북려대륙이라는 거대한 음식을 맛있게 야무지게 먹어 배를 채울 것이다.

왼손에는 음식을 먹을 때 쓰는 새로운 도구를 쥔 채로.

이 도구의 이름은 증기기관이겠지.

앞으로 인류사를 바꿀 발명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엄밀히 따지면 증기기관의 발명이 아직 산업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 최초의 증기기관은 개천 175년(CE 1450), 장인 장성재 등 3인에 의해 이미 개발되었었지만, 초기답게 실용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인 기술자들이 귀화하여 지식을 보태기도 하고, 고려 내에서도 자체적인 기술적 진보가 일어나자 실용성 또한 조금씩이나마 개선되는 것이 보였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돌이 상민이 대단하게 뭘 발명한 것은 없었다.

다만 장인들의 연구를 후원해주는 정도였겠지.

그것만으로도 고려인들은 충분했다.

개천 185년(CE 1460)년에는 장성재와 니키포로스 등 5인에 의해 최초의 ‘공업적’ 증기기관이 탄생했다.

여전히 단순한 구조였지만 단순한 구조도 쓸모가 충분히 있었다.

가장 먼저 기존의 방법을 대체하기 시작한 분야는 제지와 제분이었다.

‘찧는다’라는 단순반복적 행위만을 요구하는 탓에 기계의 구조를 만들기 쉬웠다.

제지소의 경우, 지금까지는 수차를 이용해서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가 대세였다.

수력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반복적으로 투사할 수 있게 되니, 종이 재질의 한계 또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목섬유(펄프)를 이용한 제지의 방법이 제안되었고, 여러 가지 화학적 실험들이 병행되며 개천 201년(CE 1476)에는 첫 번째 상업용 목섬유 종이가 제지되고 판매되었다.

기존의 닥나무 종이에 비하면 몹시 거칠고 질이 좋지 않았지만, 저가 종이도 이미 엄청난 수요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장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종이의 질 또한 시간이 지나고 화학과 기술이 더 발달하면 빠르게 개선될 것이 명백했다.

제분소의 발달도 눈에 띄었다.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역시 고려의 두 번째 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밀의 제분이었으나, 쌀을 빻아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드는 것에도 쓰이기도 했고 기름을 짜내고 고춧가루를 빻는 곳에도 쓰였다.

수요는 항시 높았던 것에 비해, 기술적 진보는 지금까지 실로 미미했다.

기존 제분소의 경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앗간은 지리적 한계가 있었으며, 내륙이나 고산지대에 위치한 사람들은 방앗간의 동력으로 쓸 만한 규모의 물줄기를 가지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제지소는 종이를 강가에서 생산해 운반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곡식은 그 제분소로 가기 전에 썩어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덕분에 아직도 사람이나 가축의 힘으로 돌리는 곳이 대부분이었지.

거대한 원형 바퀴를 돌려야 하는 것은 실로 고된 노역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은 공간의 제약이 딱히 없었다.

힘도 훨씬 강했고.

제분소는 오히려 제지소의 발전보다도 더욱 체감적이었다.

광업과 같은 산업도 조금씩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돌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원료가 필요했다.

상민은 그동안 남북중려대륙 전부에 탐험가들을 파견해 지리를 탐사해왔었고 결실을 맺었다.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석탄이 나오는 곳은 현 고려의 땅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동고려의 옛 수도였던 건양 동쪽과 삼별초가 처음으로 도달한 동원 부근에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타완틴수유가 자리했던 북부 태동산맥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새롭게 개척하고 있는 북려의 지역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석탄 매장 소식이 들려왔다.

예나 지금이나, 고려는 원자재나 자원이 모자라 헉헉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 젓가락 같은 새로운 종류의 도구를 접한다면 처음부터 능숙하게 쓰지 못하듯, 고려 또한 증기기관을 개발한 순간부터 능숙하게 쓰진 못했다.

그럴만한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증기기관을 통해 산업혁명으로 넘어갈 만한 시대적 배경이 아직은 미흡했다.

― 도시화가 요원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땅이 넓어도 너무 넓다.

고려 내의 경자유전의 원칙,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넓은 고려 내의 농지로 쓰기 적합한 토지면적이 역으로 그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 컸다.

개간, 개척을 장려하기 위해 특혜를 받는 북려의 농민들을 제외한 남려의 농민들은 아직도 분가할 자식에게 주어질 근처의 땅이 풍부한 상황.

창강대평원은 세계에서 광대하기로는 두 번째 가는 평야다.

면적은 그 어마어마한 중원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화북평야보다도 두 배 이상 넓었으며, 강수량과 비옥도 또한 좋으면 좋았지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더 막막한 사실은 고려가 이제 창강대평원보다도 넓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거대하고 거대하여 끝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북려대평원(北麗大平原, Great Plains와 미시시피 유역을 합쳐 부르는 평야)을 조금씩 손에 넣고 있는 참이라는 것.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고려의 인구를 아직도 수용하고도 널널한 상황이다.

게다가 인력에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기면 죄다 북려로 보내 개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로 유입될 노동자가 발생할 여건은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하겠지.

안정적인 토지제도는 안정적인 정치를 가능케 하지만 역으로 아직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의 인식을 바꿀 동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은 기술적 진보 말고도 사회적 여건이 뒤따라야 했다.

상민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일부 선별해 강제로 도시로 처박아 노동자로 만드는 제도는 정말 어마어마한 정치력을 낭비하는 것에 비해 효과 또한 미미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갈 것이다.

* * *

그러나 농경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을 초래하기엔 충분했다.

안정성은 물론이고 새로운 작물들의 소개로 인해 상업 작물들도 상당히 다양하게 재배되는 상황.

이미 고려에는 잉여 농경생산물과 그것을 팔아치울 존재들은 충분했다.

회사(會社, Company), 혹은 기업(企業).

현 고려는 이미 전조 고려 혹은 현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업적인 정신이 가득 찬 나라였다.

이미 국내에는 막강한 자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외무역과 대내무역, 그리고 개척지와 본국과의 무역을 하는 고려인 상인들은 상당한 부를 쌓았고 금은보화를 통해 예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정치적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근대화 시기에 들어서고 있는 국가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당연한 것과 건전한 것은 항상 합치되지 않는다.

상인 계층들의 영향력을 통제 범위하에 놓기 위해서는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의무를 부과해야 했다.

상단의 규모가 커지자, 상무부는 재무부와 법무부와 함께 회사법(會社法)을 제정했다.

추가로 날이 갈수록 과부하가 걸리고 있는 상무부 대신 개천 200년에 연방거래위원회(聯邦去來委員會)가 설립되어 회사들의 불공정거래와 담합을 감시하며 제국과 연방의 상업 준칙을 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민은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을 병행해야 했다.

조정에 저것보다 더욱 큰 권한을 수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상무부를 비롯한 다른 조정 삼성(상서성, 중서성, 집법성)은 막강한 정치적,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이익집단이라 보기에는 구성원들이 너무 다양해 상인들의 원외활동(로비)이 언제든지 스며들 수 있었다.

연방거래위원회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방법을 쓰면 된다.

상민은 이미 거대한 개인의 부를 더욱 늘리기로 작정했다.

제한은 두지 않았다.

상인들의 원외활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쪽도 큰 부를 쌓고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조정을 견제하고 부패를 감찰할만한 존재는 황실밖에 없었다.

금헌칙서로 정치적 권한을 상당 부분 양보했고 앞으로도 절대왕정을 시도하진 않을 것이지만, 여전히 황제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누구보다도 막강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지금은 국가의 군주가 당연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으나, 훗날은 그렇지 않을 테니 미래까지 살아남아 연방을 결속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경제적인 능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참고로 상민과 황실, 그리고 황제는 동의어라 볼 수 있었다.

황실은 상민의 도움을 받아 기본 자산들을 출자하고, 민간의 투자자들을 모아 최초의 주식회사를 창설했다.

유럽과의 무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모가 증가되어 도저히 한 개의 상단이 독점할 수가 없었다.

개천 200년(CE 1474)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는 서유럽회사(Western Europe Company)라 불렸다.

상민과 청해상단은 서유럽회사에서 단독으로 무려 5할 1푼의 지분을 가지게 되었고, 황실은 일 할을 가졌다.

기존의 항로 및 상인망을 가지고 있던 서유럽회사와는 별개로, 북유럽회사(Northern Europe Company) 또한 개천 202년(CE 1476)에 설립되었는데 어떠한 기반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큰돈이 몰렸다.

황실은 사 할 일 푼의 지분을 확보했고 상민 또한 일 할을 확보하여 북유럽회사 또한 조정의 관리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최초 주식회사의 등장과 더불어 증권거래소 또한 청해에 처음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인기는 대단했다.

고려 내에서 충분한 부를 쌓고 있더라도 민간의 상인들 혼자서는 도저히 대외무역을 하지 못했다.

예외는 오직 한 명, 당사자는 죽지도 않고 국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끊임없이 부를 축적해 나가는 몹시 특이한 사람이니 제외해야 할 것이다.

대외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거대하고 튼튼하며 강력한 배들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

남북려를 비롯한 고려의 항로를 수호하는 제국함대들의 시야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무장을 하여 해적의 위협에 스스로 대처해야 했다.

고려 조정의 칼끝 위에 올려져 있는 칼리나해의 해적 나부랭이들도 얼마나 골칫거리인데, 외국의 해적은 어떠할까.

이 거대한 배 안에 타고 있는 수많은 선원들의 봉급도 주어야 했으며, 식량도 사야 했다.

초기 상로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에 삽질을 하는 경우가 태반.

장벽을 넘으면 황금이 기다리고 있지만 넘기까지의 여정은 실로 고될 것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는 존재는 장벽을 조금 더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서유럽회사와 북유럽회사만 설립되었지만, 투자받은 돈만큼의 기업 소유권을 증명하는 권리를 얻을 방법을 알게 된 상인들은 바다 너머로 시선을 돌릴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국가 주도로 개척과 무역을 해 왔지만 이제는 민간이 스스로 나설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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