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2화 (172/653)

소치기, 그리고 보안관(2)

황무지에 모래바람이 한바탕 거칠게 불었다.

― 휘이잉

치음 북쪽의 자그마한 마을 소평.

의원(상주하진 않았다)과 작은 상점이 있고 마을 촌장과 일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고려식으로 건축된 가옥들이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너와지붕이 돋보이는 목조 주택들은 대체로 단층집이었지만 마을의 회관 노릇을 하는 큰 건축물은 큼지막한 이 층 건물이었다.

마을 회관의 2층 난간에는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모래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지평선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 청년은 이윽고 황급히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회관 안에는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가족들을 대피시킨 후 남은 남자들은 자경대를 조직했다.

오전에 잠깐 훈련을 마친 것이 전부였지만.

어쨌든 이들은 총기를 쓸 줄 알게 되었고, 앞으로의 전투에 앞서 화약과 납탄을 쓰기 편하게 작은 종이에 나누어 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교분(攪粉, Corning)된 화약을 다루는 일은 위험한 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감독하던 안섭은 차남의 말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젊은이들과 중년인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덜 손을 떠는 자도, 괜시리 코를 훌쩍이는 자도, 자그맣게 욕설을 뱉는 자도 모두 긴장이 역력해 보였다.

“주목!”

주민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안섭은 눈에 띌 정도로 낮아 보이는 이들의 사기를 북돋기로 했다.

“오전에 했던 것만큼 침착하게 총을 쏜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저들은 잔인하지만 강한 놈들이 아닙니다. 단지 말을 타고 오는 도적 떼일 뿐이지요.”

인간이란 결국 총탄을 맞으면 죽는 존재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와 총성에는 꽤 익숙해졌다.

나머지는 그냥 과녁에 겨누고 쏘면 되는 일.

비록 장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아까 배운 절차들을 기억하며 되뇌고 있었다.

“옆에 있는 이웃을 믿는다면 우리는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옳소!”

총을 쥔 자경대들이 호기롭게 외쳤다.

연설에 감화되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절실함이 음성에 역력히 묻어나왔다.

그래도 이들은 집과 땅을 지키기 위해 자원해서 남은 사람들이다.

한 줌의 용기 정도는 있었다.

‘허수아비와 고정된 과녁을 쏘는 것과, 달려드는 난폭한 적군을 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긴 하지만.’

안섭은 굳이 그 사실을 알려주진 않았다.

마을주민들은 모두 회관 밖으로 나와 정렬했다.

모두 구부러진 갓을 쓰고 있는 것이 진정 고려의 개척민들이었다.

마을의 도로에는 탁상과 의자, 수레며 여러 가지 큰 장애물들이 이리저리 쌓여 있었다.

대단한 목책은 아니지만 최소한 적의 접근을 허용치 않을 수준은 되어 보였다.

― 질겅질겅.

“뭘 그리 씹나.”

안섭은 마을에서 안면이 있는 이웃에게 긴장을 풀 겸 말했다.

“치클이라고, 요즘 마야에서 한창 잘 팔리는 기호품이라더군.”

“그래?”

이웃은 약간 망설이다 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비싸게 구한 것이긴 하지만, 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구두쇠마냥 아껴서 뭐 하겠어.”

그는 안섭은 물론 옆의 사람들에게 치클을 나누어 주었다.

안섭은 갈색빛이 감도는 이 작은 환을 보고 영 미심쩍은 얼굴을 하다가 그 환을 입에 넣어 씹었다.

“으음….”

괜찮다.

한 입 씹으니 거북열매의 향이 진하게 났다.

단맛이 입에서 피어오르니 무언가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질겅질겅 무언가를 씹기 시작한 사람들도 약간 긴장이 풀렸는지 자신들끼리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봉투가 웃기는군.”

눈과 입이 그려진 웃고 있는 거북열매가 엄지손가락을 들고 있는 광경.

엄지손가락이 위로 향하는 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은 아마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이겠지.

― 두두두

저 멀리 피어올랐던 흙먼지가 이제는 가깝게 보였다.

다른 곳을 약탈하고 불태운 평원 부족 놈들이 드디어 그들의 마을로 오고 있는 것이다.

“준비하라!”

안섭의 외침에 자경대들은 서둘러 화약낭을 매고 총을 쥔 뒤 지정된 자리, 즉 너와집의 지붕으로 향했다.

그들이 모두 자리에 가는 것을 확인한 안섭 또한 차남과 함께 근처의 지붕 위에 올라갔다.

* * *

나이샨데, 누무누, 키와.

평원의 세 부족 동맹의 전사들은 동등한 동맹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의 하나의 부족처럼 여겨지며 서로 사이가 몹시 돈독했으나, 여전히 약간은 경쟁하는 면이 있었다.

가장 인구수가 많은 것은 누무누족.

고려 또한 평원 부족을 편의상 누무누라 칭할 정도로 많은 이들은 평화 시에 부족을 지도할 평화 추장을 배출했다.

가장 강인하며 공격적인 전사들은 나이샨데.

걸출한 지도자 웅크린 늑대는 전쟁 시에 부족을 지도하는 전쟁 추장의 자리에 있었다.

반면 키와는 어중간했다.

규모도 적었고, 용맹함도 약간은 떨어진다 평가받았다.

지도자 또한 없었으니, 부족 내의 입지가 조금씩 조금씩 위태로워지는 것이 사실.

키와 전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부족 내에서의 입지를 올려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하지만 앙주는 강력했고 틈은 보이지 않았다.

고려인의 개로 전락한 동부의 부족 놈들, 촉토와 치카소, 무스코기들은 예전처럼 키와족의 약탈에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

몇 번의 습격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그들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게 되었지.

이번 아즈텍 난민 사냥은 별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가진 것 하나 없는 놈들.

죄다 죽여 시체가 썩어가도록 방치하면 그만인 단순한 일이었다.

그래서 키와족은 조금 더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고려 놈들과 한바탕 싸워보자.

정확한 규모는 몰랐으나, 상당한 숫자의 고려군이 남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들을 지켜줄 무리는 당장 없겠지.

당연히 위험한 족속들이긴 하나 그 사냥감을 잡았을 때의 이득 또한 대단했다.

많은 수의 가축과 쓸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의 정착지는 구미가 당기는 사냥감이었다.

키와 전사들이 남쪽으로 향했다.

어느덧 말을 충분히 다룰 줄 아는 전사들이 거의 이백이 가깝게 되었다.

제대로 된 무구는 없었지만, 기세만큼은 충분히 흉험했다.

그들은 마을 두 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피난 가지 않고 남아있던 그곳의 고려인들은 모두 죽거나 끌려갔다.

그러나 이번 마을은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도로에는 말이 쉽사리 돌아다니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로 가득했다.

가옥의 입구 또한 잡동사니들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고지대의 지붕에 올라가 있는 남자들은 천둥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천둥막대기를 들고 있지 않은 자들은 기다란 나무판자를 들고 원주민들의 투척무기를 막아내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타타탕!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전사들 몇이 땅으로 떨어졌다.

“별거 아니다! 정신을 차려라!”

우두머리의 일갈에도 불구하고 키와 전사들은 저 끔찍한 천둥막대기에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숫자가 적은 덕분에 전사들이 입은 피해 또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저 굉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고, 말들 또한 일거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고려인들은 꽤나 일사불란하게 재장전을 시도했다.

설치된 장애물들과 2층의 고지대를 점유했다는 것이 상당히 위안이 되는 모양.

게다가 전투를 지휘하는 명백한 우두머리가 없던 다른 마을과는 달리 이곳에는 전사의 느낌이 물씬 나는 놈이 폭음 사이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키와 전사들의 우두머리도 그에 질세라 명령을 내렸다.

“정신 차려라! 소리에 현혹되지 마! 우리의 숫자는 여전히 많다!”

전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활과 창, 그리고 도끼를 던져대었으나 고려인들이 들고 있는 나무판자 덕분에 효과는 미미했다.

그것을 본 우두머리는 입술을 씰룩이며 사방에 손짓을 했다.

“뒤로 돌아 넓게 포위해라!”

말을 몰아 판자가 지켜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돌게끔 지시한 우두머리는 스스로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적당한 거리까지 가서 도끼를 던져 적의 수괴를 쓰러뜨린다면 고려인들의 기세는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키와의 우두머리는 도끼 투척술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니 저 높은 곳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은 좋은 표적에 불과할 것이다.

저 천둥 막대기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평원 부족 동맹이 촉토 부족을 공격하다 고려의 총병대에 의해 크게 패퇴한 날.

무섭지만 다시 쏘기까지 한참이 소요되는 병기였다.

그전까지 저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 * *

안섭 또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의 눈을 읽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말을 다루며 투척 도끼를 쥐는 태가 예사롭지 않다.

뒤로 돌아서 오는 탓에 몸을 숨길 곳은 딱히 없었다.

도끼를 피할 수는 있을까?

그러나 안섭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등 뒤에는 문짝을 들고 방패로 쓰고 있는 차남이 있었다.

전면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도끼들을 방어하느라 바쁜 아들은 도저히 몸을 뒤로 돌릴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자신이 피하면 아들이 다칠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전투란 결국 기세, 총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몸을 숙여서는 아니 되니.’

군율이 지엄했던 총병대의 일원으로 안섭 자신은 그렇게 교육받아왔다.

따라서 자신이 저놈을 먼저 죽이는 수밖에.

― 철컥

이미 한 번 격발해 텅 비어버린 화약접시를 열었다.

서둘러 종이를 찢어 장전을 했다.

그러나 손가락의 부재는 생각보다 더욱 사람을 힘들게 했다.

나머지 사수들도 이미 한 차례 사격을 했기에 한창 장전을 하는 상황.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손가락이 없는 그보다도 더욱 느릿느릿한 건 착각이 아니겠지.

이해할 순 있었다.

저들은 민간인이고 실제로 살기등등한 적들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부터 온몸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으니까.

비록 고지대를 점유한 덕에 아직까지 잘 대응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평지에서 저 원주민들과 마주했으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가기 바빴을 것이다.

반면 안섭은 그들과는 달리 그러한 긴장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화약과 탄환을 총구에 집어넣고, 빠르게 장전을 했다.

하지만 불운은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 빠각

디디고 서 있는 너와가 시공이 제대로 되지 못했는지 성인 남성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며 일순간 금이 갔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옆으로 짚으며 발이 빠지는 것을 최대한 억제했지만, 그때는 마침 공교롭게도 총기 밑에 있는 꽂을대를 뽑는 순간이었다.

안섭은 그만 꽂을대를 놓치고야 말았다.

― 툭

빠진 틈, 가옥 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긴 막대기를 바라본 안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근처에 있는 장남이 소리를 질렀다.

바로 옆에 있는 차남은 갈팡질팡했다.

화살이 날아오는 앞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판자를 뒤로 돌려 저 우두머리가 던질 도끼를 방어해야 하는가.

그러나 안섭은 태연하게 신색을 가다듬었다.

“아들아. 뒤의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안섭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며 총기를 바닥에 세게 두들겼다.

꽂을대로 밀어 넣어야 할 화약과 총탄이 밑으로 잘 도달할 수 있도록.

그리고는 총기를 들고 손가락이 멀쩡한 왼쪽으로 적을 조준했다.

마침 저 건장한 원주민 전사 또한 힘차게 팔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이것이 격발되고 총탄이 명중한다면 자신은 사는 것이고, 이것이 불발되거나 맞추지 못한다면 자신은 죽는 것이겠지.

도끼(토마호크)를 든 키와 우두머리의 팔근육이 물결칠 때, 안섭의 총에서도 화염과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 타앙!

* * *

“끄응.”

낯익은 천장이다.

안섭은 허벅지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여보.”

아내가 침상에 기대 졸고 있었다.

쩍쩍 갈라졌지만 명확히 들리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섭은 구태여 아내를 깨우진 않고 잠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고려 마을의 입식 가옥.

방어를 위해 가재도구를 밖으로 전부 빼낸 탓인지 가옥 안은 실로 황량했다.

나무 창문을 열자 밖의 풍경이 보였다.

도로를 점유했던 장애물들은 이미 정리되었는지 사라져 있었다.

‘해치웠나.’

옛 전우들에게는 절대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지.

죽였다고 생각한 아즈텍인들이 시체 더미에서 일어나 동료 등에 칼을 꽂은 기억을 되새기며.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일어났어요?”

아내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뜨고는 황급히 물었다.

안섭은 쓴웃음을 지었다.

“또 이런 꼴이라니. 미안하구려.”

“…흑…흑.”

아내는 이윽고 원망과 안도, 그리고 일말의 존경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 덜컥

“아버지!”

안에서 어미가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이 열리며 장남과 차남, 피난했던 어린 딸까지 줄줄이 딸려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빠!”

“…이 아비가 고작 이런 상처로 죽겠느냐?”

안섭은 힐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투척도끼를 맞은 곳은 길게 자상이 나 있었지만, 그리 깊어 보이진 않았다.

안섭이 먼저 그 우두머리의 흉부에 정확히 총탄을 꽂아 넣었으니 마지막 순간에 그 힘이 다 빠졌겠지.

‘아주 온몸이 흉터투성이구만.’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자식들에게 자신의 상처들과 그에 섞인 무용담을 자랑하다가, 이윽고 아내에게 등짝을 한 대 맞고야 말았다.

한바탕 가족들이 해후를 나누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숙우가 힐끔 고개를 내밀었다.

“나으리, 무사하셨군요.”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숙우는 씩 웃었다.

“다친 사람은 좀 있어도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게 다 한 발에 적의 우두머리를 격살하신 나으리 덕분이지요. 덕분에 저들도 기세를 잃고 전부 물러갔습니다.”

“크흠….”

안섭은 다행스러운 마음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야?”

장남이 친우에게 물었다.

“쓰러지신 동안 정북행성에서 조사관이 파견됐습니다. 지금 마을 회관에서 나으리가 깨어나시길 기다리고 있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