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5화 (145/653)

가지치기(3)

물론 의미는 없었다.

제국의 황위는 철저하게 관리된다.

황제들이 앞장서서 통치했던 건국초에 비해서 재상중심제의 도입 이후 황위 승계에 대한 기풍이 약간은 종통(장남 및 중전 소생)의 권위를 지키는 쪽으로 보수화 되긴 했지만 그래도 황위는 같은 위계(형제 관계) 내에서는 아주 명료한 원칙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

― 능력은 정통보다 위에 있다.

만약 황상이 붕어하고 국본이 훙한다면 제위는 다시 그의 할아버지들 혹은 숙부들 중 하나에게 돌아갈 것이고, 이때 그 빌어먹을 시험상속제가 다시 적용되겠지.

우석의 조부, 양왕은 이미 훙한 지 오래.

오랫동안 병석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는 아버지 정남공이 쟁쟁한 사촌과 동생을 뚫고 제위를 쟁취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노인네.

지금 자신이 이런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겠지.

그는 자신의 아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이번의 일들까지도.

연회가 무르익어갔다.

입으로는 벗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우석의 머리는 다른 일들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화루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청기의 멋들어진 거문고 소리도, 그리고 친우들의 감탄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제위가 다 무엇이냐!’

물론 그보고 황제를 시켜준다 하면, 단연컨대 이 설화루부터 저기 저 창천궁까지 삼보일배하며 걸어갈 수 있으렷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포도가 시게 느껴진다고, 우석은 애써 황제의 자리가 그리 좋지 않다고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일단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삶이었다.

그 숨 막힐 정도의 압박감, 아마 월담하여 밖을 싸돌아다니는 순간 그 시선은 바로 싸늘하게 바뀌겠지.

또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바도 적었다.

그놈의 금헌칙서를 써버린 태상황 덕분에 신하들은 이제 황제의 권한이 법에 의해 제한받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현 황제 해광이 예악에 심취한 것은 종친은 물론이고 일개 신민들까지 모르는 자들이 드물었다.

어쩌면 금상 또한 살아남기 위해 저리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중…….’

가면 쓴 괴인.

아버지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자신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절대 밉보이지 말라 했을 뿐.

암암리에 도는 소문들 중 하나는 그 또한 해씨라는 것이었다.

태종 혹은 진왕의 후손이며 먼 방계라 하던데.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청해를 한 손에 움켜쥐고 고려라는 거함의 조타륜을 잡은 저자는 고려 황제가 가져야 할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옛 중원의 학문 유학이 이때는 아쉽구만.’

군주와 황실에 대한 충정과, 정통과 관습에 대한 수호를 부르짖는 유학자들 대신, 이 나라 이 땅에는 경험과 합리를 중시하는 증학자(경험주의)와 합학자(합리주의)들, 그리고 이제 막 떠오르는 계학자(계몽주의)들만 있을 뿐.

내키는 대로 하다간, 아마 얼마 가지 못하고 진압당해 유폐되겠지.

군사?

당연한 말이지만 이 땅에선 사병을 기를 수 없다.

모든 군인은 죄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이제 황제보다는 국가에 충성하는 부류였다.

황실을 수호하는 근위군이 자신을 신경 쓸 리는 만무했고.

‘젠장.’

게다가 건드린 여자가 근위군의 아낙이다.

우석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상석에 앉은 자의 분위기가 처지자 청기 또한 슬그머니 거문고 소리를 멈추었다.

“청량한 곡조로 부탁하네.”

그 와중, 한 미남자가 청기에게 고갯짓을 하며 일렀다.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꽤나 정중한 어투였다.

고려인으로서 천민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기생 또한 천한 취급은 받을지언정 신분은 양인이었다.

법으로 강력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말.

게다가 청기는 수많은 기생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여인들.

대부분의 남자들 또한 이 예인들을 어느 정도로 대우하고 있었다.

청기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인 후, 조금은 더 경쾌한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 자 형님, 한잔 더 하시지요.”

청기에게 말을 걸었던 미남자, 헌왕계 예천공의 장남이자 우석의 육촌 친척인 청송후 해기택이 콸콸콸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이 잘생긴 얼굴 뒤에는 자신 못지않은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랴.

“고맙구나.”

그러나 우석에게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동질감이 더 들 뿐.

아무래도 황자들 또한 동복동생끼리 친하기 마련이라 양왕과 헌왕은 다른 형제들보다도 우애가 좋았다.

그 가문의 피들 또한 마찬가지.

“종숙께서는 기체후 만강하시더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은 기택이 이윽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예, 뭐 잘 계십니다.”

동병상련의 아픔.

종친 내에서 손꼽히는, 품행이 바르지 않기로 유명한 탕아 두 명은 비슷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하하, 참 우리의 꼴이 정말이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한참 조소한 그들이 다시금 술잔을 나누며 불만을 표출했다.

“…금상께서 이 피붙이들을 이렇게 대우하시는 게 과연 옳은 일입니까?”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자기위안적 되뇜은 방금 전까지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에 새로 뽑을 군왕위였다.

서열상으로는 우석이 분명히 다음 제위와 가장 가깝다.

먼 옛날 갓난 아기였던 태상황을 상대로 역모를 꾸몄던 젊은 파남공과 남해공이 파주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물론 후손들의 계승권 또한 박탈되었지.

그 인간들을 제하면 양왕계의 자신은 종통에 가장 가까웠다.

당시 성종의 중전에게서 태어난 차남 목왕은 이미 훙했고, 목왕의 직계 또한 질병과 같은 여러 이유로 단절되었으니까.

그러니 제위를 줄 수 없다면, 군왕위라도 주든가!

‘제위는 상관없다! 군왕위를 얻는다면, 오히려 저 허울뿐인 황제와는 달리 지방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야!’

먼 과거 태조의 일곱 아들 중 이민족 부족들은 제각기 고려에 귀속하는 대신 자신의 봉역 내에서의 자치권을 얻었었다.

과트라체(마푸체)와 강족, 치족 등의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친왕작을 얻었고 이들 후손은 쌍용지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대신, 제왕지손(諸王之孫)이라 불리며 특수한 권한을 얻었다.

건국시 그들을 포용한 태조의 서약에 따라, 지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된 것.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그 자치권이 대부분 사라졌고 친왕의 힘 또한 없다 해도 무방했으나 지위 자체는 그들의 핏줄 내에서 계속 세습되고 있었다.

이 같은 특수한 우대는 고려에 귀의한 다른 부족에게 큰 영감을 주었지.

앞장서서 고개를 수그리기만 한다면 오랜 기간 동안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타완틴수유를 정벌하고 있었던 해윤에게 근처 한가락 하던 원주민 부족들이 자신의 딸들을 앞다투어 보냈던 사례를 생각해 볼 때, 이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물론 태상황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욕정에 불타 수많은 여자를 탐하는 우석과는 달리, 태상황은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는 황후 안씨에게만 사랑을 주었으니까.

다행이다.

만약 태상황이 자식들을 많이 보았다면, 자신은 군왕위라는 이러한 기회를 잡을 가능성조차 없었겠지.

군왕위.

어사대도, 사헌대도 추밀원도 닿지 않는 곳.

그 아무리 엄격하며 꼼꼼한 그들도 배를 타고 거의 두 달을 보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의 개척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다.

지방의 중서성 의원과 행정을 통솔하는 주지사만 어떻게 구워삶는다면 자신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도 방계 군왕가문을 새로 세우고 영원히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미친 시중은 유럽의 부왕제라는 어디서 근본도 없는 이상한 것을 참조해, 고려의 외방 개척주들에 대한 군왕위를 내림에 있어 다른 기준을 적용하도록 했다.

― 이제부터 고려 내방의 친왕과 고려 외방의 군왕은 그 시점 종통의 팔촌 이내에서 동등한 기준으로 선별할 것이다.

― 만약 팔촌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방계위를 따르며, 이는 촌수에 따라 차등으로 점수를 매긴다.

― 일신의 능력 검증이라 함은, 황상의 앞에서 특시를 치러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또한 군왕의 작위는 자식에게 세습되지 않으며 비위를 저지르면 군왕위를 언제든지 박탈당할 수 있다.

이는 허수아비 황상의 재가를 받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가.

저게 주지사랑 다를 바가 무엇인가?

― 쾅!

우석이 불만을 토하며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기택이 옆에서 계속 그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뭐 황상이나 시중을 어찌하자는 말이냐?”

기택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침없는 우석의 말에, 좌중은 얼어붙어 있었다.

아까 술을 따라 주었던 쥐 상의 사내는 자신의 입에서 행여 숨소리라도 튀어 나갈까 무서워 입을 꼭 틀어막고 있었다.

“아… 아니옵니다! 어찌 감히 그런 흉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기택이 진저리쳤다.

우석 또한 거칠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반정은 성공한 적이 없다.

황성은 요새였고, 근위군은 마치 돌로 빚은 병사들마냥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석은 파남공과 남해공의 전례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만 우리의… 형제들은 다르겠지요.”

“……?”

기택의 말을 들은 우석의 잔이 갑자기 멈추었다.

“날이 늦었구만.”

그것을 본 기택이 슬그머니 웃더니 이윽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자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이들은 이런 대화를 들을 깜냥도 안되고, 격이 없는 자들이다.

‘입단속은 철저히 해야지.’

친밀하고 믿음직스러운 몇 명만 남아있게 된 방에는 냉기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살기가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얼마 전 종친의 연회가 열렸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곳에 참석했던 황족들은 아직 죄다 창양에 있습니다. 군왕위의 임명이 코앞이니까요.”

우석은 재판도 목전에 두고 있었고 태상황과 시중의 눈초리가 무서워 참석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택은 그런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제가 들은 것이 있습니다.”

기택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황상께서 창강에 큰 배를 띄우고 종친들과 낚시를 하실 계획을 세우시는 모양입니다.”

“…삼천공 전하께서 이야기하셨나?”

“예. 제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흐음…….”

그의 종숙, 낚시광으로 유명한 삼천공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신뢰가 갔다.

“얼마나 모인다 하더냐?”

“황상과 친밀함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아우의 짧은 생각으로는 거동할 수 있는 자라면 대부분 참석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외유였다.

“계속해 보거라.”

“종친들은 위계로 나뉘어지는 바, 연배가 있는 당숙들은 황상이 타고 있는 배에, 그리고 그렇지 아니한 형제들은 다른 배들에 탈 것입니다. 황상의 배는 언감생심 바늘조차 들어가지 않겠지만, 그렇지 아니한 자들이 탄 배들은…….”

“…누군가가 개입하기 쉽겠지.”

성종의 아들들, 즉 우석의 조부 세대는 나이 차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양왕과 순왕의 나이 차이는 열 살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숙들 또한 나이가 비슷했다.

모두가 지금은 다 나이가 든 상황.

후사를 볼 수야 있겠지만, 막 태어난 갓난아기는 경쟁자가 아니다.

기택의 말은 경쟁자, 사촌과 육촌 형제들을 제거하자는 뜻과 같았다.

심지어 친형제까지.

정원후 우석은 구성후와 형제지간이었으며 청송후 기택은 죽전후와 윤암후와 형제관계였다.

동복은 아니라 사이는 썩 좋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기택과 우석의 촌수보다는 가까웠다.

‘크흠.’

모질고도 독한 말.

우석마저도 그 악의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이 방에 남아있던 자들 또한 모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기택이 남아있는 자들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그대들에게도 제의를 하나 하겠네.”

“…예에 전하.”

약간은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기택은 그 잘생긴 외모와 영활하게 돌아가는 머리, 그리고 세 치 혀를 요사스럽게 잘 쓰기로 유명한 자였다.

“그대들 또한 그대들의 상단에서의 입지를 위해서는 맡은 실적을 내야 하겠지. 만약 그대들이 우리가 군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협조한다면, 내 나중에 받을 봉지에서의 특혜는 보장해 주도록 하겠다.”

상인 출신 측근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야. 다만 어느 순간에 배 밑바닥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으면 좋겠군.”

상인들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이윽고 고개를 슬그머니 끄덕였다.

방계 황족들이 탄 배는 아무래도 근위군의 시선 밖에 있었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창강은 무척이나 넓었다.

만약 한가운데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한다면, 생존할 수 있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수영을 잘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택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우석을 바라보며 자신의 추가적인 계획을 계속 설명해 나갔다.

“이 창강에는 피라나(鈹邏懧)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평상시는 겁이 많아 사람을 피해 다니는 물고기지요.”

태조께서 이름 붙이신 그 물고기는 여러모로 유명했다.

내륙지방에 살고 낚시에 관심이 없어도 이름 자체는 거의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렇지.”

“그러나 자꾸만 낚시를 하기 위해 먹잇감을 뿌려대면, 그 물고기라는 놈들 또한 머리를 쓰는 모양인지 항상 그 근처에 몰려들어 맴돌게 됩니다. 황상께서 낚시를 가실 곳은 안 그래도 빈번하게 떡밥에 노출되었지요.

피라나가 만약 큰 집단을 이루게 된다면 이 겁이 사라진답디다.”

겁이 사라진 피라나라.

“…….”

그래, 한 낚시꾼이 그 물고기 떼에 물려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혈향에 쉽게 흥분하는 이 물고기는 떼로 몰려다니면 엄청난 위험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고 하던데.

상처 입은 소 한 마리가 창강에 빠졌을 때 불과 찰나의 순간에 내장까지 뜯어 먹혔다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지.

“피도 흩뿌려 놓는 것이 좋겠군.”

우석이 마침내 시큰둥한 기색을 집어던지고 의견을 내놓자, 기택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