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1)
1442년 7월
카디스.
카스티야 고려 조차지.
마티외는 카디스에 도착한 뒤 한 교회에 가서 짐을 풀었다.
고려의 입김이 닿은 이 도시는 유럽의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 사라지고 다시 건설된 도시는 전보다 훨씬 깨끗해지고 도로가 넓었다.
카디스의 주교가 육지로 내쫓긴 이후, 이곳은 주교 없는 도시가 되어 있었고, 사제들 몇 명만 교회에 남아 주민들의 성직 생활을 주도할 수 있게 배려를 받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히려 교회의 압력이 적어지는 것을 환영했다.
일단 교회세가 말 그대로 사라졌으니까.
침략자가 무슨 짓을 할까 두려워하던 주민들은 바뀐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세금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보통 땅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집과 창문, 그리고 기타 수만 가지 괴상한 곳에 세금을 뜯겼다.
가족 구성원과 가축의 숫자에도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술과 결혼은 물론 죽음(사망세)까지.
화분에서도 뜯겼고, 술을 제조하는 것에도 뜯겼다.
그러나 고려의 치세 아래에서는 달랐다.
직업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 따져보면 중앙세와 지방세라는 두 번의 세금 납부만 존재했다.
금액들 또한 한 개 한 개를 따져보면 큰 편이었지만 그동안의 세금들이 시시콜콜한 곳에까지 청구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총액은 꽤 적다고 생각될 정도.
환경 시설물 및 군사 시설물에 대한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가니 지방세는 조금 더 줄어들었고.
고려 입장에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동안 면세 혜택을 누려온 도시의 부유한 계층에게도 돈을 걷을 수 있으니.
이 시대에는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들일수록 대체로 세금을 더 적게 내는 경향이 있다.
귀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권력자들은 온갖 면세 혜택을 누려 재정을 좀먹고 있었고 신흥 상인 부자들 또한 얼마간의 황금을 징수관과 관리에게 쥐여주며 조세의 음지를 누볐으니.
하지만 고려에선 신분의 고하건, 부유하건 아니건 세금 징수에 대해서는 얄짤없었다.
가장 무지막지한 고려 조정의 집행기관을 꼽아보자면 항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려의 국세청은 고려에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마약(코카인) 상인들이 악명이 자자한 마약단속국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상인들과 권력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고려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이려던 카디스의 카스티야 상인들이 줄줄이 성의 감옥으로 가버린 이후, 민심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범죄율도 떨어졌으며, 길거리에 노숙하며 구걸하던 사람들도 많이 사라졌다.
경비를 서는 사람들도 그 유명한 ‘고려의 개’라는 악명을 얻은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용병대였으니 전반적인 치안이 개선되었다.
카디스는 유럽의 어떠한 도시보다도 더 마티외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수한 탁상에서, 잉크와 종이를 펼쳐놓은 마티외가 숨을 골랐다.
지금 그가 할 행동은 사실 잔의 행동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교황청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이 그를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단명할 짓을 사서 하는 중이구나.
그러나 잔은 홀로 외롭게 신앙으로 교황과 맞서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티외 또한 펜으로 호응하기로 결정했다.
‘주님, 저를 지켜주소서.’
그는 펜을 들었다.
[본 사제가 여러분들께 고함.]
천천히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는 유려한 필체로 적어나갔다.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가감 없이 적어가는 그의 펜은 한 군데에서도 막히지 않았다.
신앙과 교리는 물론 이성과 도덕에 관한 모든 면을 들며 샅샅이 적어가는 그의 편지는 일곱 가지 주제로 교황과 현 교회를 비판하고 있었다.
―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고해성사는 필요한 것인가?
― 교황이 가진 사죄권은 대체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는가?
― 연옥의 영혼은 구원할 수 있는가.
― 면죄는 가능한 일인가.
― 남용되고 있는 면죄부의 실태는 어떠한가.
― 정직하지 않는 설교는 옳은가.
― 이 사태가 어떤 결말로 귀결될 것인가.
마티외는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느라 식음조차 잊어버렸다.
그도 이제는 중년을 넘어 서서히 노인이라고 부를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에,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건강에는 무척 좋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그의 눈동자 또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창밖의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던 그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쿨럭, 쿨럭.”
한 번도 처소에서 나오지 않은 주교를 걱정하던 카디스의 사제가 하인을 시켜 그에게 마실 물과 빵을 주지 않았다면 마티외는 아마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 * *
그리고 마침내 글이 완성되었다.
그는 그것을 카디스의 고려인 총독에게 가져갔다.
“그 인쇄기라는 것, 이 카디스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써도 되겠습니까?”
고려인 총독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 한 명을 불렀다.
총독은 창양에서부터 마티외를 따라다니는 창언이 지닌 협조 문서를 이미 본 상태였다.
이 프랑스인은 고려 조정에 의해서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는 모양.
“인쇄소는 이 관리를 따라가시면 될 겁니다.”
고려글과 그리스―라틴문자 기반의 알파벳은 몇 가지 장단점이 있었다.
고려글은 몹시 배우기 쉬웠고, 발음하기 직관적이며 개량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건대, 감히 전 세계 모든 언어를 모두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광범위함을 지녔다.
그래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활자를 찍어내기 힘들다는 점.
천지인 같은 시스템 아래에서 10개의 버튼으로 한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후대의 인터넷 시대야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일일이 글자 조합을 찍어내야 하는 중세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상민은 고려글자를 위해 직결식 글꼴이라는 희대의 발명품을 만들어내었지만, 그 가독성과 아름다움이 전통적인 활자보다는 아무래도 떨어지기에 학자들은 지금까지도 활자를 붙잡고 개선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알파벳은 달랐다.
마치 인쇄하기 위해 태어난 글자마냥 알파벳은 놀랍도록 찍기 쉬웠다.
그래서 마티외가 주문한 인쇄는 장애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로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는 라틴 글자 기반이라면 라틴어, 프랑스어, 카스티야어, 포르투갈어 등 모두 인쇄 가능합니다.”
마티외는 라틴어로 쓰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한 자신의 문서들을 건네었다.
“전부, 전부 해주시오.”
― 툭 툭
인쇄소의 관리들이 절그럭거리며 라틴어 기반의 금속 활자를 재배열하는 것을 바라보던 마티외가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아, 참. 문서는 제목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도 행정처리를 해야 하거든요. 이 문서들은 모두 이름이 없는데, 어찌 붙일까요?”
마티외는 인쇄소 관리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본제는 면죄부의 권능과 효력에 대한 논쟁(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인쇄소 관리가 능숙하게 라틴어 제목을 받아 적었다.
제아무리 저게 일이라지만.
고려인들은 위부터 아래까지 교육열이 실로 대단하다 하던데, 저치도 참으로 언어를 많이 아는구나.
“부제는 49개조 반박문(49 Theses). 그렇게 적어 주시구려.”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제각기 인쇄할 부분을 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마티외는 이제야 수마가 그를 덮치는 것을 느끼는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눕히고 이윽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고려인들은 무심하게 인쇄기를 돌렸고 그의 ‘서신’들은 차곡차곡 인쇄되어 한켠에 쌓이고 있었다.
* * *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아무리 교황이라도 얼렁뚱땅 넘어갈 사항은 아니었다.
그녀의 신성성은 이미 선종한 마르티노 5세와 지금은 물러난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모두 공언된 바 있다.
두 명의 교황의 인정은 아직까진 엄청난 권위로 작용하고 있어, 제아무리 현 교황 펠릭스 5세라 하더라도 그녀를 시골 아낙 죽이듯 할 수는 없었다.
교황청은 수많은 눈과 귀가 있는 곳이니까.
이단 심문관들은 그녀를 심문했다.
물론 육체적인 위협이 가해지지는 않았다.
아직은.
수많은 이단심문관 앞에서 잔은 홀로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아직 그대 안에 주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다 생각하는가?”
잔은 첫 번째 질문부터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물론 저 심문관이 그녀의 상태를 통찰하여 저러한 말을 던진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잔은 이미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지 오래.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과거와 나아진 점이 있다면,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더 교육을 받았고 훨씬 더 세속의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그녀는 소망을 담아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만약 과거에 그러한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은총을 받고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하여 은총을 주실 것을 바랄 뿐입니다.”
이단심문관들의 표정이 무너졌다.
예상했던 멍청한 대답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출신이 농민의 딸이라 들었건만, 그동안 신학 공부라도 해온 것인가?
그녀는 한 번의 위기 이후 이단심문관들의 악의 섞인 질문을 능숙하게 받아넘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누벨 오를레앙에 대한 건이오.”
이단심문관들은 그녀의 신성성을 훼손하는 어떠한 증거도 가지지 못하자 두 번째 주제를 가지고 공격을 시도했다.
“그대들은 신성한 성전에 어째서 올바른 쪽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오?”
“그것은 제 기록물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하지만 꼼꼼히 기록한 그녀의 자필 일지와 서쪽의 아즈텍에 대한 기록물은 엄청난 변호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마티외의 인장이 찍혀 있었기에 아직까진 효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했던 그 자리에서 교황이 조금 더 신중하게 그 책을 보았다면, 아마 태우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겠지.
사제의 살해에 대한 응징.
기록물의 내용에서 그것을 면밀하게 확인한 이단심문관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논쟁을 할 정도로 의견이 갈렸다.
“…이 주제는 이쯤 합시다.”
이단심문관의 고위급 인사가 결국 그렇게 말했다.
교황청으로서도 실패한 십자군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는 것은 썩 좋지 못한 행동이었기에, 이단심문관들은 두 번째 주제도 별다른 수확을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 * *
재판 상황은 더디게 진전되고,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렀다.
방구석에서 종일 성경만 읽어대는 여인은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악취 나고 힘든 옥 생활도 그녀의 신념에 금을 가게 하지 못했다.
큰 방패를 부여잡은 그녀는 수많은 사제를 거느린 교황에 홀로 대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펠릭스 5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하, 저자의 의지가 아직은 굳건합니다. 시간을 더 두고 일을 처리하심이….”
“시간은 무슨 시간! 저년은 더러운 고려 놈들과 붙어먹은 창녀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없애지 않으면 이 교황청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게야!”
교황은 약간 손을 떨었다.
기껏 젊은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지도력에 회의감을 품기 시작한 주교들이 많았다.
사제가 문득 떠오른 듯 몰래 물었다.
“그렇다면 이리하심은 어떻겠습니까?”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사제의 말을 듣던 교황이 이윽고 박수를 쳤다.
“그래, 그런 꾀라도 내 주었어야지. 바로 실행하거라.”
사제가 음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 * *
약간 눈을 붙였던 것 같았는데 꿈을 꾸었다.
오랜만의 꿈이었다.
차가운 물이 떨어졌다.
이마에 와 닿는 찬 물방울에 잔이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비가 항상 새는 누벨 오를레앙의 참회실은 아니었다.
그곳이었다면 좋았겠는데.
툭.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자를 발로 한 번 차보았다.
기절한 뒤 꽁꽁 묶인 그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양.
이번까지 합산하면 무려 다섯 번의 시도구나.
죽이려 했는지 범하려 했는지는 몰랐으나 너무나도 역겨운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날이 밝으면 태연스럽게 교도관들이 이자를 수거해 가겠지.
잔은 한 수녀에게서 정조를 지키라며 받은 바지를 정돈했다.
아주 작은 틈 사이, 아직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잠기는 전부 달아난 상태였다.
몸은 서서히 병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특유의 근면함으로 억지로 기운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은 육체를 아직 통제할 수 있었다.
― 찍찍
쥐 소리가 났다.
다른 감옥의 수감자들은 자는지 애초에 별로 없는지 사방은 고요했다.
그래서 저런 일을 꾸밀 수 있었던 걸까.
그녀는 감옥 바깥에 성의 없이 놓여진 물과 음식을 집어 들었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그 죽음이 기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방패를 들고 적에게 항전하는 기분으로 돌덩이 같은 빵을 씹었다.
곰팡이 맛이 심하게 났다.
물도 비릿하고.
한참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사람의 육신과 정신을 좀먹는 곳이다.
신념으로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금방 정신을 놓고 미쳐버리는 감옥이다.
잔은 그래서 바닥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오늘은 꿈에 대해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익숙한 꿈의 내용은 과거의 예시와 한 치도 다른 바가 없었다.
동쪽과 서쪽의 악마가 일어나 그녀에게 불을 뿜는 것.
서쪽의 악마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뜯어먹힌 수많은 시신들과 유골들.
그 악마의 제국에 항거하는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을 위해 자신이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동쪽의 악마는?
잔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죄악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오늘에서야 그것이 오스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결코 쉽게 꺼지지 않을 불길은 오히려 앞으로 활활 더 타오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불길을 뿜는 자는 놀랍게도 그들의 가장 성스럽고 영험한 도시 로마의 교회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으니.
교황이 악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