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32화 (132/653)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7)

마티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이 프랑스 남부의 해안 도시는 야속하게도 무척이나 날씨가 좋았다.

왼쪽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이 보인다.

끼룩대는 갈매기와 쉴 새 없이 항구를 오가는 자들.

마티외는 가만히 떠난 말들의 말발굽을 보았다.

말이 없어 뒤쫓아가지도 못한다.

뒤늦게 마티외는 잔이 자신을 위해서 그리 행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그 또한 젊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오가는 이 시대의 식자이며 주교였다.

순간적으로 성녀의 순교가 가져올 상황을 계산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녀가 남긴 저 말발굽, 피에 물든 그 말굽 뒤로 다시금 교회 내에서 정화 운동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마티외는 가슴을 쳤다.

‘어리석은 것아.’

수십 년의 성직 생활에서 깨달은 것이 겨우 누구를 희생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더냐.

그녀는 그런 최후가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는 썩어 있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 있었다.

바젤 공의회가 펠릭스 5세를 내세워 실권을 잡았으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오히려 신민들은 이중으로 교회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

이제는 저 면죄부까지.

신앙이란 미명 아래 그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가.

자신은 꽤 과거부터 이를 알고 있었으나 외면했다.

혹은 필요악이라 규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티외 그 자신의 눈도 지금에서야 서서히 떠지고 있었다.

옳지 못했다.

누군가는 지적해야 했다.

지금의 잘못을.

그리고 교회에 깔려 있는 전반적인 모순을.

‘필연적인 것이다.’

성직자는 권력을 쥐면 안 된다.

민간의 권력은 오직 세속 군주들에게.

성직자들은 오로지 신민들을 위해서만 존재해야만 했다.

그는 항구로 돌아왔다.

고려인 선원들이 타고 있는 배가 또 항구 관리인의 검문에 걸렸는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벨 오를레앙의 주교직을 상징하는 인장을 보여주자, 항구 관리인이 내키지 않은 얼굴로 물러났다.

고려인들이 질색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어디 떠나시려고 합니까? 성녀께서는 또 어디에 계시고요?”

선원들을 이끄는 이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분께선 멀리 떠나셨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개 선원치고 상당히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성이 재차 물었다.

이름이 독특했었지.

“지금은 아니오. 하지만 앞으로라면… 모르겠군.”

마티외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려 하니, 카디스로 가주시오.”

“알겠습니다.”

* * *

잔은 요한을 데리고 아비뇽에 도착했다.

요한은 자신도 사제로서 부끄러운 짓을 행한 것은 알긴 아는지 두 손이 포박된 상황에서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비뇽엔 처음이오?”

“…….”

대답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요한은 이 냉기 서린 침묵이 자신의 목을 옥죄는 것 같아 자꾸만 입을 놀려야 했다.

“아비뇽의 교황궁은 참으로 화려하고 장엄하지.”

묻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떠드는 사람이 귀찮았다.

그래도 의외로 아는 것이 많아 도시를 구경하는 것이 약간은 편리하긴 해.

“클레멘트 6세 성하 이후로, 이곳은 종교적 중심지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소.”

거장 시몬 마르티니와 마테오 조반네티를 포함, 전 세계의 화가와 예술가들을 불러모아 건축한 아비뇽 교황궁은 어떠한 유럽 군주들의 성들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장엄했다.

게다가 성벽은 높고 험하다.

벽은 단단하며 엄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하면서 쓸모없지.”

잔이 슬쩍 요한을 쳐다보았다.

“내가 말한 것은 아니오. 저지대의 장 프루아사르라는 사람이 그리 말했던 것을 인용했을 뿐.”

수많은 사제들은 물론 상인들이 오가는 곳은 교회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어쩌면 세속 군주와 닮아 있었다.

이미 눈을 떠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는 잔에겐 이 교황궁은 이제 전혀 아름답지도, 신성해 보이지도 않았다.

푸른 하늘을 눈동자에 담은 잔이 눈을 감고 한숨 한 번을 내쉰 이후 다시금 가슴을 펴고 당당히 교황청에 들어섰다.

* * *

클레멘스 6세가 지은 신교황궁.

마침내 교황을 대면하게 된 잔은 인사를 올렸다.

펠릭스 5세가 그녀를 환대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잔은 인사를 하면서도 에우제니오 4세의 행방이 문득 궁금했다.

“어서 오시오, 성녀.”

그녀는 몰랐지만, 과거의 펠릭스 5세를 이미 알던 사람들은 그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조금 놀랄 것이다.

꽤 호리호리하며 건강했던 아메데오 8세 시절을 아는 자들은 더욱더.

자리는 사람을 바뀌게 만든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곤 했다.

아마 펠릭스 5세는 후자의 명백한 사례로 꼽힐지도 몰랐다.

펠릭스 5세는 어느 순간부터 두툼해진 손가락과 출렁이는 뱃살을 가지고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몇 번 마주친 상인들이 그가 자신의 손가락에 맞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지를 버리고 몇 개나 장신구를 새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알려주었지.

어부의 반지를 포함해서.

그 모습을 보던 잔의 눈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적의나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마르세유에서 저질렀던 일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양.

게다가 증언자 또한 자신이 체포해서 왔으니, 지금 이 순간이 그에 대한 보고의 자리가 되겠지.

“그래, 북려대륙에서 한동안 고난의 길을 걸으신 성녀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이오?”

이제는 예순에 가까운 펠릭스 5세가 보내는 노골적인 시선에 잔이 얼굴을 찌푸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또한 교황이 마냥 성적으로 순결하다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성직자로서 모든 규율을 전부 준수하는 교황도 있었지만 꽤 많은 수의 교황들이 공공연하게 정부(情婦)를 들였으니까.

그러나 공과 사를 구분할 역량조차 없다니.

그녀는 엄연히 기사였고 이러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선대 마르티노 5세와 에우제니오 4세 또한 그녀를 여인이 아닌 정치적, 신앙적 동료로 존중해 주었는데.

저 모습을 보라지.

‘…….’

그러나 잔은 일단 참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즈텍에 대한 보고입니다.”

잔은 짤막한 설명을 곁들였다.

펠릭스 5세는 그녀의 말을 듣고 크게 분개했다.

그러나 그 분노하는 꼴이 몹시 가식적이라 잔으로서는 불안감이 들었다.

“세상에 그런 나라가 있단 말이오?”

“자세히 기록한 일지가 있으니 이를 지금 바치겠습니다.”

펠릭스 5세는 그녀가 건넨 책을 받았다.

그리고 몹시 건성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흐으음.”

“성하, 누벨 오를레앙은 지금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겠지요….”

분개하는 척한 방금의 상황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지원 요청에 펠릭스 5세가 인상을 찌푸렸다.

돈은 꽤 들어오고 있으나 지출할 구석은 많고 많았다.

한 번 해상십자군이 패배해 정치적인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된 펠릭스 5세는 로마 교황청의 부흥을 이용한 권위 향상으로 그것을 메꾸려 했다.

그는 이미 수개월 동안 배덕을 저질렀다.

면죄부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정식으로 공표된 항구적인 세금으로 바뀌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또 다른 교회세에 불과하지 않는가?

단 한 번의 자기기만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았다.

이곳도 황금, 저곳도 황금.

낡고 퀴퀴한 로마를 온통 헤집고 다시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

이제는 그것에 중독되어버린 그는 맨 처음 알폰소 추기경에게 면죄부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 경악했던 자신의 모습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 고려에도 교회가 있다 하셨소?”

“예.”

잔은 고려라는 말에 어딘가 두려움을 느끼는 교황에게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자들은….”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을 모두 들은 펠릭스 5세가 푹신한 모피가 깔린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었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이 뒤섞인 얼굴을 한 그가 말했다.

“후우. 그러한 사항을 미리 말을 해 주었어야지.”

비록 튀니스로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지만 배운 자들은 자신 치세의 실패로 해상십자군을 손꼽는다.

펠릭스 5세는 다소 원망스러운 얼굴로 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잔으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보고 자체가 불가능한 점도 그랬지만, 이 사람의 성격상 그 사실을 먼저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못된 말이지만 사람은 맞아 봐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다.

“…저로서도 보고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국의 항로는 모두 막….”

“행여 독실함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오?”

잔은 어이가 없어 해명하던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냥 그녀에게 쌓인 원망을 풀고 싶은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 동안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입술을 씰룩인 펠릭스 5세가 내뱉듯 말했다.

“그래서, 그 고려의 교회가 우리에게 요구를 했다고?”

“요구사항은 이곳에 있습니다.”

이번에 건넨 것은 책이 아닌 양이 적은 두루마리기에 교황은 펼쳐서 읽으려는 의지는 보였다.

친절하게도 라틴어로 쓰여 있구나.

그래서 내용은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다 읽은 그는 그것을 탁상에 집어 던졌다.

“이런 미친놈들!”

고려의 요구사항은 참으로 듣기 힘들었다.

“뭣이 어쩌고 어째?”

다섯 총대주교좌의 자리는 신성하며 정통성이 있었다.

하지만 창양 총대주교좌를 신설한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들어줄 수 있는 범주 아래에 있을지도 몰랐다.

뒤의 내용을 듣지 않았다면.

총대주교를 포함한 사제 일체를 전부 다 고려의 재량하에 한다는 것은.

전례와 의전을 존중하며, 예식과 미사를 준수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함정 문구였다.

유럽의 전통과 고려의 전통(예를 들면 제사) 사이에서 이단과 비이단을 재정립하겠다는 말은 교리의 문제였으며.

금전 단 한 푼도 로마로 흘러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교회의 세금에 대한 문제였으며.

남려와 북려를 모두 총괄하겠다는 것은 대륙에서 영영 꺼지라는 영역의 문제였으며.

교황과 창양 총대주교와의 상호 보완적이며 독립적인 관계에 대한 내용은 자신을 별개의 종파로 여겨달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명목상 넣은 창양 총대주교좌가 성직의 위계에서 교황의 아래에 있을 것이라는 문구조차 허황되게 느껴졌다.

모든 면이 전부 다 말이 되지 않았다.

이는 협상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이것이 무슨 재치권! 이것은 교회 수장(首長)에 대한 권한을 논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수장권에 대한 이야기.

의도가 무엇이냐.

교황 자신을 기만하는 것?

내가 이런 것까지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느냐?

“고려 놈들! 사탄의 종들! 적그리스도들!”

펠릭스 5세는 진노했다.

그 진노는 이 두루마리를 가져온 잔에게까지 튀었다.

“성녀는 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길래 이러한 무도하고 사악한 협상을 가져오는 것이오!”

― 쾅!

펠릭스 5세의 주먹에 탁상이 흔들렸다.

힘이 세서 요란한 것이 아니라, 체중을 실어서 요란한 것이 틀림없었다.

잔은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성하께선 무엇을 하고 있으시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십니까?”

펠릭스 5세는 대놓고 받은 모욕에 순간적으로 벙쪘다.

마침, 전령 하나가 황급히 교황에게 다가왔다.

잔은 직감했다.

자신이 부린 난동이 마침내 교황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펠릭스 5세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가 죽인 자, 그 염소수염의 남자는 만약 미래의 직함을 빗댄다면 이달의 훌륭한 영업사원이라 꼽힐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평소 성품답게 교황에게 질책의 말을 쏟아냈다.

면죄부를 당장 철폐하라는.

온갖 분노가 뒤섞여 마침내 폭발한 펠릭스 5세는 그녀를 교황청의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대에 대한 처분은 곧 내릴 것이니!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참회하고 있으라!”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가는 잔을 바라보던 펠릭스 5세가 주변에 말했다.

“종교재판을 준비하라!”

펠릭스 5세는 주교와 사제들을 소집했다.

광신과 탐욕이 적절하게 혼재된 자들은 이미 자신의 아래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직의 임무 말고도 다른 임무도 하고 있었는데.

이단심문관(Inquisitor)의 임무는 그들에게 있어 별로 어색하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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