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2화 (62/653)

활자, 그리고 학문

인쇄소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안에서 오가며 무엇인가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왔는데도 일거리가 많아 바쁜지 눈 하나 돌리지 않은 채 열심이다.

상민은 그들을 휘릭 둘러보고는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작은 금속들을 가지런히 보관한 통들을 살펴보았다.

금속활자.

활자란 개념은 고려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팔만대장경 등 너무도 유명한 목판 활자들은 다른 재질로 만들었으니 차치한다 하더라도.

국사책에서 배우기론 최초의 금속활자가 고려의 상정고금예문이라 했었지.

그러나 듣기론 전해지진 않았다 했다.

다음 버전은 직지심체요절.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분명 직지심체요절보다는 빠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한자가 아닌 확연히 다른 문자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국문(國文) 활자는 한문에 비해 활자로 쓰기 매우 편리합니다.”

눈앞, 독특한 모양의 한글 활자를 바라다보던 상민이 해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문 활자는 여지없이 모든 글자를 전부 일일이 제조해야 하지. 반면 이것은 그것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니 나쁘지 않구나.”

물론 한글도 처음엔 모든 한글의 글자를 양각하는 식으로 만들긴 했었다.

잘 안 쓰는 뷁뱷붥밹과 같은 단어들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기초적으로 사용하는 음절의 수도 엄청나게 많았지.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

‘게임 한글 패치도 참여하던 인간인데.’

유니코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옛 유로피안 킹즈 시리즈를 번역할 때 참여한 불굴의 인간이다.

직결식 글꼴 정도야 너무나도 쉽게 도입할 수 있었다.

간략히 말하자면 글씨체가 꽤나 독특하다.

순전히 활자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이 글꼴은 자음과 모음의 모양이 모두 통일되어 있었으며, 받침으로 쓰이는 자음의 자리도 자음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활자의 배치 편리함을 위해 다른 글자와 높낮이를 맞춰 일괄적으로 공백을 두고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알파벳에 비해선 활자 수가 많았지만 받침을 다른 줄에 따로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로 그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직결식 글꼴의 경우, 현대인이 보기에는 각지고 딱딱해 좀 보기 짜증 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에게 이 정도의 제약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풀어쓰기를 안 해도 된다는 것 자체가 읽기 쉽다는 뜻.

상민은 그것들로 인쇄해 낸 책들을 한 권씩 챙겼다.

관저에서 볼 생각이었다.

‘조금 볼까.’

궁금증이 심했다.

이 활자로 만든 첫 번째 책.

당연스럽게도 농사일에 관한 책이다.

옛날 김지숙의 장자 김인근에게 일러 편찬하도록 한 권농서의 전농집록(傳農輯錄)은 출간한 지 조금 되었으나 개정을 게을리하지 않아 지금은 많은 양의 정보가 더 수록되었다.

신대륙의 작물들, 예를들면 감자와 목화(육지면), 고구마(비타타)와 가사비(카사바)의 정보도 수록되었다.

고려에서 쓰이는 고구마라는 명칭에 오히려 동예에서 붙인 이름인 비타타가 밀려나고 있다 한다.

자신이 처음부터 해진에게 주구장창 고구마라 부른 영향도 꽤 크겠지.

고구마는 감자와 마찬가지로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서 잘 자랐다.

다만 열대성 작물이라 조금 추운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못해 평원 남부로 뻗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그 특유의 맛과 재배의 편리함에 간식과 든든한 구황작물로 자리 잡은 모양.

반면 가사비, 카사바는 내재된 독 때문인지 아니면 영 입맛에 맞지 않은 모양인지 고려에서 인기 있는 작물이 아니었다.

상민은 전농집록을 덮었다.

농무부의 주문에 인쇄가 끝나 쌓여 있는 이 책들은 고려의 전역에 퍼져나가 농사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 표지를 두어 번 두드린 후 상민은 다음 책을 펼쳐보았다.

‘의경총록(醫經總錄)이라.’

오만하게도 무려 총록, 즉 집대성한 문서라는 말이 붙은 이 책은 오만할 만한 분량을 자랑했다.

총 7권의 두꺼운 책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니까.

겉에 적힌 저자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가장 앞에 있는 자는 역시나 익숙한 사람, 의원 심일석이다.

‘보시오, 역사 속에 고금 제일의 명의 중 하나로 기록된 것을.’

상민은 그 이름을 쓰다듬고는 그것을 들어 한 권씩 펼쳐보았다.

각 권은 위생편 1권, 역병편 3권, 인체구조편 1권, 외과편 2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나구만.’

위생의 개념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하는 현미경의 시대와 함께 엄청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아직 배율이 좋지 못하고 구조가 개선되어야 할 것이 많았지만.

사기니, 탁기니 정체불명의 기가 사람을 허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던 동시대 사람들은 평범한 유리공 장경록(張敬綠)이 만든 최초의 현미경으로 발견된 세포와 곰팡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쓴 ‘작은 세계의 발견’은 한림원과 국자감에서 꼭 읽어야 하는 필수 서적이 되었으며 해진은 이 유리공에게 면포 오십 필을 하사하며 그의 발견을 치하했다.

덕분에 질병이 구체적으로 곰팡이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무엇인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깨달은 덕에 소독과 방역의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였으며 위생도 많이 개선되었지.

위생이 개선되며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 저항력이 강화되었다.

걸린 사람이 있더라도 마냥 손 놓은 채로 순식간에 퍼져나가지는 않는다는 의미.

대표적으로 풍토성 온역을 들 수 있겠다.

이 풍토성 온역(발진티푸스)은 과거의 온역(장티푸스)과는 달라 이곳 남미에 떨어져 처음으로 겪게 되는 질병 중 하나였다.

일반 온역(瘟疫)은 무서운 질병이며, 속된 말로 염병(染病)이라 할 때 그 염병을 칭했다.

고열에 시달리다 죽는 것이 둘 모두 온역이라 칭했으나 사실 증상이 달랐다.

과거에는 소화기관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풍토성 온역은 근육통과 폐렴을 유발했으니까.

풍토성 온역의 근원을 찾던 사람들은 평소에 잘 씻고 다니는 사람에겐 발병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의 매개체를 찾던 의무부는 결국 그 병이 벼룩과 이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이후 역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지는 못했으나 병의 전파를 억제하니, 태조 이후 처음으로 국가 단위에서 일어난 역병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의 사례로 꼽혔다.

일곱 권 전부를 이 자리서 보긴 힘들 것 같고.

의경총록 역병편을 덮으니 그 밑, 의학 말고도 다른 생물학 서적이 보였다.

‘명마의 혈통에 대한 고찰.’

태복시의 관원인 한형복(韓炯福)이 종마 적제의 혈통을 이은 말들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지 상세히 연구한 서적의 이름이다.

말뿐만 아니라 소와 돼지, 나귀, 노새 등 여러 가축들의 종간 잡종과 우성질과 열성질의 발현, 그리고 근친교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서적은 원시 유전학의 기본적 사항에 관해 의문과 그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상당히 어설프고 허점도 많지만 현장 실무자가 볼 수 있는 상당한 양의 자료를 가공해 신뢰성을 높인 점을 높게 평가할 수 있었다.

다음 책은….

‘항해론.’

이것은 상민 그가 직접 항해사 윤주형 등에게 편찬을 맡기며 초보 항해사들이 읽을 수 있게 바다의 기초적인 지식과 바람, 배를 다루는 법에 대해 적은 것이다.

그 밖에도 기초적인 수학, 자연과학, 회계와 인문학 서적들이 보였다.

대단했다.

김인근 그리고 그의 제자 사유원, 그리고 사유원의 제자 장승섭(張承涉)으로 이어지는 증학(證學, 경험주의)의 기조는 서서히 발전해나가며 위정자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류 학풍이 되었다.

물론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으며 제각기 학파를 이루고 있었고, 한림원을 중심으로 보수적 성향이 살짝 있는 합학(合學, 합리주의)도 대두되며 서로 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비난이 아닌 건전한 싸움이었다.

이 땅, 이 동시대의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학문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예절 넘쳐서 그런 것도 있었지.

아주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변질되며 내려오던 관습, 즉 성인을 비판하는 것에 자유롭지 못했던 학문의 흐름은 이제는 다시 생동감이 넘치게 물결치고 있었다.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중원과 멀어져 그들의 책과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빈 백지에 자신이 배양한 학문이 서서히 뿌리내린 것이다.

고려에 한동안 살기 좋고, 먹을 것이 풍족한 나날들이 이어져 내려오니 종교에 대한 관습적인 의존도가 상당히 내려가게 되었고 종교에 대해 꽤 적대적인 문인들의 견제도 이루어지다 보니 지식인들의 학문과 민간의 학문, 그리고 종교가 모두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었다.

물론 눈앞의 학문 서적들은 대부분 관과 학교의 주도로 편찬된 서적이라 갈 길이 한참 멀다.

민간 자본도 책을 편찬하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며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들을 뒤적거리자 맨 밑에 의뢰하지 않은 아주 얇은 책이 보였다.

음, 제목이….

[음란한 치족 하녀와의 열흘]

“크흠….”

상민은 그것을 슬쩍 내려놓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으나, 등 뒤의 감각에 손자 해권이 은근슬쩍 그 책을 품에 넣는 것을 느꼈다.

‘…….’

* * *

보름 뒤, 약속되었던 적강목이 대량으로 들어와 범선 제작에 진척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진척이 있어도, 아직도 용골이 훤히 드러난 것엔 변함이 없었다.

상민은 예전 대항해시대에 푹 빠져 있을 때 서양 범선에 대해 꽤 열심히 찾아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이 전문가가 되어 완벽한 설계도를 장인들에게 주어 한 방에 거대한 전열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돌파구.

자신은 그저 개념과 돌파구를 제시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래도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우수한 함선을 제작할 수 있었던 장인의 후손들에게 맡긴 것이지.

연안항해를 한다 하더라도, 눈앞에 대양이 있어 조수간만의 차가 한반도에 비해 미미한 남미대륙의 동해안은 굳이 평저선을 고집할 요인이 거의 없었다.

한선(韓船)과 서양의 범선을 구분 짓는 가장 근원적인 설계는 바로 배의 바닥에 있는 용골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예 용골이 존재하지 않는 한선은 평평한 저판(배의 밑바닥)을 가지고 있어 주목적인 연안항해에서는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설계라 할 수 있겠지만 원양항해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제주도와 중원, 그리고 일본 정도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용골 위에 늑골을 올리고 그곳에 목재를 이어 맞추는 건조 방식은 배의 크기를 얼마든지 대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원양항해에서 안정된 항해가 가능했다.

여명급 함선을 제작하며 처음으로 시도한 이 설계방식은 그 성공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대형함을 건조하는 기본적 방식이 되었다.

뭐, 덧붙임 이음(클링커 이음)이니 접합 이음(카벨 이음)이니 아직 의견이 팽팽하게 나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다소 내구도는 떨어지지만 품이 적게 드는 접합 이음을 선호하는 자들이 득세를 하는 모양.

여러모로 과도기적 단계였지만 적어도 동예까진 수많은 무역품을 싣고 갈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겠지.

* * *

마침 그다음 날 새벽, 북쪽으로 향했던 배가 돌아왔다.

범선(帆船, 초기 카락)이 아닌 더 작고 좁고 낮지만 가볍고 신뢰성이 좋으며 항해에 필요한 인원이 적은 협저선(狹低船, 캐러밸) 네 척.

꼬질꼬질한 선원들은 몇 명의 동료를 잃은 듯 그 수가 살짝 줄어있었지만 드디어 본진으로 귀환했다는 것에 연신 황상에게 만세를 불렀다.

상민은 가서 탐험가들을 치하했다.

“마침내 통령께서 말씀하신 거대한 강의 하류를 보았습니다!”

동예의 태원을 1차 거점 삼아 나아간 탐험대들은 조금씩 북쪽으로 탐험을 하고 돌아오는 식으로 그 발견 거리를 늘려나갔다.

마침내 첫 번째 고비, 적도 아래쪽, 브라질 가장 동쪽의 연죽곶(João Pessoa)을 발견하여 그곳에 기념 비석을 세운 그들은 마침내 아마존을 찍고 돌아온 모양이다.

작성된 해양 지도를 보니 아마존에 바로 적도가 지나가는 모양.

이 시대에서 얻은 소소한 깨달음 중 하나군.

“그 위로 가본 사람이 있나?”

“…….”

네 명의 선장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갈 때는 일곱 척이었던 것 같은데.

곧 보고를 들을 사항.

처음에는 항해의 손실이라 생각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제독과 두 명의 선장이 청해로 귀환하자는 말을 듣지 않고 다음 날 새벽에 몰래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

탐험가는 명예에 살아간다.

최초로 발견된 땅이나 해협, 항로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욕망은 장군의 군공이나 문인의 학문욕과 버금가는, 혹은 그보다 더 심할 정도의 욕망이었다.

자신이 탐험을 장려하며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정작 탐사대를 이끄는 제독의 주도로 항명을 했다 하니 골치가 아팠다.

“혼이 나야겠군.”

“송구하옵니다.”

철제 가면을 쓴 정체와 나이를 알 수 없는 통령의 입에서 나온 건조한 말에 네 명의 선장들이 덜덜 몸을 떨었다.

바다의 규율은 중요했다.

제독이 아무리 함대를 이끄는 총책임자라 하나, 청해의 관제에선 통령의 지시를 받는 자였다.

게다가 그 비용도 다 상민 자신이 냈는데.

탐험은 대체로 돈이 되지 않기에 후원자가 필요했다.

청해의 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자신과 조정이 후원자가 될 수밖에.

후원자와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탐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망망대해나 어디 열대우림에서 덜컥 죽어버리면 투자된 돈을 다 잃어버리는 셈이니까.

그래도 네 명의 선장과 항해일지는 건졌으니 망정이지.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약속된 황금을 받고 기뻐하며 선원들에게 나누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안승회가 말했다.

“북쪽으로 떠나실 요량이십니까?”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된 놈들.

찾으러 가야 하잖아.

숙련된 선원들과 선장은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저들을 손 놓고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 좋지 못했다.

겸사겸사 때가 되기도 했고.

“그대는 청해를 부탁한다. 태자께서 미리 국정 운영에 대한 예습을 이곳에서 하실지라도 그대가 보살펴 드려야 할 것이야.”

태자는 황위 계승에 대한 교육의 일환으로 자신의 곁에서 이 도시를 경영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태자께서 도성으로 떠나시더라도 그대가 이 도시의 섭정직을 맡으라. 내 그대에게 기대는 바가 크나 그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승회는 다소 복잡한 얼굴로 상민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보고 옛 동고려의 신하였던 자신을 이리도 신뢰하는가라는 표정.

“감동할 필요는 없다. 나는 오직 나에 대한 충성심과 본래의 능력만을 보는 사람이니.”

감동하라고 하는 말이야.

의도대로 되었는지 붉게 물든 눈가를 파르르 떤 승회가 길게 읍을 했다.

상민은 애써 폼잡고 관사로 들어가 밍기적거리며 짐을 챙겼다.

저번보다도 항해가 길어질 듯하다.

‘아, 그 책 가져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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