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선대제
개천 41년(CE 1316)
청해의 종신 통령.
상민의 방은 고려의 집무실치고는 참 독특했다.
삼층 벽돌 저택은 문도 나무문에, 창문은 유리로 꾸며져 있었다.
수수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미니멀리즘….
설명은 때려치자.
후대의 사람들이 본다면 한옥을 재해석하여 단순하고 과감하게 건축했다고 평가하겠지.
상민은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게 장식된 방에서 철제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해진이 청해의 통령(統領)직에게 하사(선물)해 준 이 가면은, 통령직을 대대로 세습할 수 있다는 표면적인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이곳의 통치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가면을 써 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낯설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는 후임자를 위해 자리를 떠날 필요가 없다.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에 비해 단지 일개 자유도시의 통령직은 주목도가 상당히 달랐다.
승계 또한 그리 번거롭지 않게 되겠지.
‘…보두앵 4세도 아니고.’
예루살렘 왕국의 유명한 나병 왕이 저절로 생각이 났다.
자신과 그 둘 모두 훌륭한 통치자나 한 명은 일찍 죽는 비극을 맞이하고, 한 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비극을 맞이하니 무슨 운명의 장난이 이렇게 교활할까.
그는 청동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되게 음흉한 정계의 흑막 같네.
‘회색 추기경(La éminence grise)… 아니 회색 선대제가 된 셈인가.’
상민은 호위병을 데리고 청해 순시에 나서기로 했다.
이왕 가는 김에, 일행 두 명을 데려가기로 했다.
“태자께 이 사람이 도시를 순시하려 하는데 함께하시겠느냐 여쭤보시게.”
그의 명을 받은 병사가 떠난 지 삼 분도 안 되었을 때, 마침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잔뜩 흥분한 청년이 달려왔다.
이놈, 누굴 닮아서 저리 잘생겼지.
잠시간 자신의 DNA를 감상하던 상민이 힘차게 외치는 태자의 목소리에 살짝 놀랬다.
“할아ㅂ… 통령!”
얘야, 또 실수할 뻔했구나.
“예, 태자 전하.”
태자 권, 자신의 손자가 자신의 앞에 다가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가면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이 슬쩍 웃었다.
은근히 편하단 말이야.
가면을 쓰면 표정을 굳이 관리할 필요가 없다.
“정녕 이 사람과 함께 순시를 가실 생각이십니까?”
“예, 채비하십시오.”
자신의 손자는 성년에 거의 도달했으나 저리 신나하는 것이 딱 십 대 청소년의 나이였다.
보안상의 이유로 외부에 잘 나가지 말도록 했기에 이번 기회가 정말 소중하겠지.
해진은 제국의 후계를 자신에게 보내 교육을 당부했다.
해권이 이놈은 훈요 128권의 내용을 전부 암기한 희대의 미친놈이었다.
순수학문으로 똑똑하기로는 자신의 장남을 능가한 이 아이는 마치 지식의 갈증에 빠진 사람마냥 하루 종일 자신을 귀찮게 굴었다.
덕분에 자신의 밑천까지 탈탈 털린 상민.
그래도 귀여운지 그는 웃으며 황급히 옷을 입으러 뛰어나간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외출복을 입었다.
‘아, 이제는 조금 살만해졌구나.’
목화 산업의 부흥 이후 방직기술도 그와 발맞추어 천천히 발달함에 따라 당장 의생활이 개선되었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하다.
한번 면 옷을 입으니 거칠거칠한 마 종류의 옷을 입기가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두루마기와 코트의 혼종 같이 생긴 붉은 외투를 걸치고 위에는 관모를 쓰니 영락없는 창양 조정의 대신과 비슷했다.
황제가 정한 청해 통령의 관품은 정1품.
자신이 어지간한 대신들보다 조금 더 화려한 면이 있었지.
해진은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냈다.
‘감히 선대제의 의복을 제한하는 것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상민은 대답했다.
‘자황포와 오사고모는 오로지 군주가 입는 것이오. 이 아비는 한번 입어보았으니 괜찮소이다.’
‘제 마음속 아버지는 항상 제 곁에서 그것들을 입고 있으니, 이 못난 아들은 항상 구중궁궐에서 그 모습만을 그리며 눈물만을 흘릴 뿐입니다.’
얘가 늙었나, 왜 이리 편지가 감상적이야.
상민은 훈훈한 답장을 보냈다.
그것의 내용은 부끄러우니 남들에게 알리지는 않겠다.
― 똑똑
“들어오시게.”
집무실의 나무문을 두드린 중년의 보좌관, 안승회는 그에게 찾아와 외출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통령께오서 행차하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수고했소.”
동고려 최후의 재상은 자신의 인재 수집욕에 활활 불을 붙였다.
망국의 능신은 이제는 청해의 총관이다.
자신의 수많은 감언이설과 꼬드김에 넘어간 그는 결국 자신의 옛 주군의 죽음 이후 죽기만을 기다리던 처지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렸다.
상당히 독특한 인물이다.
안승회의 아버지는 옛 고려의 판태사국사 안방렬.
그 한심스러웠던 간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견부 밑에 호자가 태어난 셈.
‘역시 자식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그들은 거리를 누볐다.
자유도시의 ‘시민’들은 권리를 보장받은 채 도시에서 활발히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앞바다의 내륙 도시 제포(濟浦)와는 활기와 역동성 자체가 달랐다.
쭉 뻗은 가도.
무슨 성분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흰색, 혹은 살구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햇살에 화사하게 빛났다.
마치 지중해에 간 느낌이다.
시내에서 보이는 해변은 화룡점정.
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몇 명이 그곳에 차양인지를 깔고 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중세시대임을 감안해 볼 때, 이곳은 어쩌면 지구상에 구현된 천국이 아닐까.
개개인의 위생도 발달했다.
바다와 가깝고 비도 충분히 내리며 섬 자체적인 수원지도 있다 보니 상하수도를 만드는 것도 쉬웠다.
하수관이야 조금 토목공사를 열심히 하여 도시 하수구를 만들어 바다로 배출하면 되는 것이고.
상수도가 문제인데.
집집마다 수도꼭지에 물을 배달할 기술력은 아직 없으니, 상민은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이곳에 공중 목욕장을 만들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그는 곳이 아니다.
구리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씻는 간이 샤워장은 대중들에게 항구적인 위생을 제공했다.
구리 금속 자체가 고려에 풍족하게 공급되고 있으니, 공사는 딱히 문제가 아니었다.
덕분에 이곳 사람들에게선 중세사람 특유의 악취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물며 뱃사람들도 선원 일을 마치고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이 홍등가가 아니라 목욕장이라 하니.
역사책인가 어디서 본 구절, 고려인들은 전통적으로 씻기를 좋아했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남미 바닷가 특유의 아름다운 해양성 기후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절반 정도 ‘비문명인’이었던 동고려인이 와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시끌벅적한 상인들.
이곳에는 여러 상단 외에도 자신이 유치한 대장간과 조선소가 들어왔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곳으로 다가가 관찰했다.
이제는 신비로움과 알 수 없는 경외심을 부르는 이 가면이 도시의 통령직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조아릴 때, 총관 안승회가 자신을 대신하여 앞장서 말했다.
“새로운 배는 만들고 있는가?”
조선소의 관리인은 그 말에 목수들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큰 작업장,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상당히 큰 범선이 용골을 드러낸 채 만들어지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리저리 과도기를 겪는 중인 고려의 조선산업은 늘어가는 무역량 덕분에 민간의 여유 자산이 몰려들며 차츰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로망을 충족시켜 줄 거대한 함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옆에 있는 항구를 바라보니 고려 해군과 청해 해군이 운용하는 여명급 함선이 몇 척 보였다.
고려의 수군은 해문에 해군청이라는 것이 신설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군으로 바뀌었고 바다로 향할 포부를 드러내었다.
여명급 함선을 건조할 개인 세력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
물론 신민들은 아직 작은 상선들과 원양어선들만을 소유한 모양이지만.
‘캐러밸 정도?’
이곳엔 고려의 전통적 초마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배의 외견도 바뀌었다.
배의 자체 구조를 제외하면 대표적으로 돛.
옛날의 굴곡이 많은 삼베 돛이 아닌 커다란 면포 돛으로 바뀌었고 그 무게가 상당히 감소했다.
내구도와 관리의 편함도 상승했지.
“예, 하지만 동예에서 오는 목재가 아직은 그 수량이 적기에. 주문하신 배가 자꾸만 진척이 늦어집니다.”
“알겠다. 내 그것은 조율해 볼 테니 항상 작업의 우선순위는 통령께서 타실 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거라.”
“그것은 당연한 일입죠.”
승회는 사람들을 꽤나 잘 다루는 편이다.
인편을 통해 동예에 사람을 보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동예는 목화 말고도 여러 열대성 천연자원들을 수출하고 있었다.
질 좋은 원목들은 그것들 중 하나였고.
“적강목(赤㓻木, Mahogany)으로 만든 배라.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뒤에서 태자 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재가 질이 단단하고 부드러우며 물에 대한 저항력이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조선소가 원체 시끄러워 상민은 말을 놓았다.
“그렇지만 고가이고 수가 별로 없지.”
해권이 그 소리를 듣다가 궁금한 듯 되물었다.
“나무는 농작물을 기르듯 기를 수 없습니까?”
“흐음….”
조림사업을 이야기하는 것이렷다.
경제적 이윤만을 이야기하자면 조림사업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기란 불가능했다.
적강목을 심고 그것이 자라 배와 가구의 목재로 쓰이기까지 대체 몇 년 동안이나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하는가.
하지만 경제만으로 보기엔 상당히 중요한 다른 요소들도 분명 있었지.
홍수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존재.
그것 말고도 더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들 중 하나였다.
‘꽤나 심각한 문제일지 모른다.’
자신과 고려는 남미로 떨어졌다.
그리고 빠르게 개척하여 영토를 넓혔지.
자연스럽게 자연환경은 파괴가 될 것이었다.
문명은 당연하게도 죽은 식물의 시신을 양분 삼아 발전하는 까닭이니까.
그리고 남미, 이 고려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우림이 있는 대지였다.
자신과 이 고려의 행동으로 인해 이 허파에 비수가 찔리면 어찌 되는 것인가.
당장 저 눈앞의 범선만 해도 나무 천여 그루가 넘게 들어간다 들었는데?
상민은 이 난제 앞에서 한참 동안 고심했다.
‘벌목으로 훼손된 숲에 대한 조림사업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고.’
도시에 녹지와 가로수를 배치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고.
그래 아직은, 아직은 자연이 크게 위태롭지는 않을 것이었다.
플라스틱과 기타 석유제품들이 나온 것은 아니었고.
인간이 손으로 벌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수백 년 뒤엔?
상민은 그 주제를 가슴 깊이 새겼다.
하루 이틀로 고민할 주제는 아니었기에.
그러나 분명 평소에도 계속 고민하며 하나씩 상황과 동시대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해 나가야 했다.
근데 이놈, 태자 공부를 하러 자신에게 온 건데, 엄한 뱃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지어 현 황제 해진은 제국의 안정된 후사를 위해 잠재적 방해물인 자신의 친아들을 원해도에 떨어뜨려 놓은 상태.
믿을 후계자는 오로지 손자뿐이었다.
사춘기의 방향성을 다시 올바른 곳에 돌리기 위해선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조선소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손자를 끌고 상민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 * *
교육 시설.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교육 시설은 상당히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보다도 더 진보적이며 실용적이었다.
상민은 국학(國學)인 국자감이 아닌 고려 최초의 사립대학(大學)을 만들어 교육시켰다.
이곳에는 회계학과 경제학이 다른 과목에 비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고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어찌 보면 국자감과 한림원에 쓴 불비불문이라는 자신의 신한은 후대에 갈수록 퇴색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황제의 코앞에서 자유로운 학문이 꽃핀다?
성군의 경우엔 가능하겠지만 조금 머리가 돈, 혹은 모자란 군주가 나올 수 있었고 아무리 태조의 명이라 해도 전제군주제는 손쉽게 학문을 탄압할 수 있겠지.
물론 그는 그것을 두고만 보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도성과 꽤 멀리 떨어진 덕분에 그러한 여건이 충분하니 민간의 학문이 크게 융성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문물이 발명되고 있었으니.
상민은 대학의 교정을 걸어 자신이 처음부터 오고 싶어 했던 곳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