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6화 (16/653)

신 무인시대(2)

바야흐로 새로운 무인의 시대다.

고려는 전보다 더 강력한 무신 집권을 통해 통치당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의 압도적인 리더십 하에 통치되느냐 라고 물어보면 글쎄.

고려 정계는 이미 어두컴컴하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보위도감에서는 한창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현 삼별초의 군제 개혁을 시도한 중손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보위별감에 오른 중손이 있었지만 야별초 지휘권을 아직도 부여잡고 있는 노영희가 있겠고.

자신의 직속 부대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 이신손.

아직 사태를 관망하고 있으나 여차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사병을 은근하게 원하는 유존혁

최근 들어 몇 가지 일로 야별초와 사이가 나빠진 신의군을 통솔하고 있는 김통정까지.

중손은 이 모두를 하나의 경별초(京別抄)에 담아 패권을 유지하고 싶어 했으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보위도감에 모인 장군들은 하나같이 냉랭한 표정들이었다.

“이 곳에 모인 여러 영웅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승냥이 같은 것들이 있구려.”

노영희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이들과는 다른 객들이 있었는데, 상장군 지계방(池桂芳), 대장군 강위보(姜渭輔) 대장군 송숙(宋肅)등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초기의 관품이 별초의 지휘관에 비교하여 오히려 높았지만, 별초 소속이 아니었고, 같이 난 때 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보위도감의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 노영희나 이신손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중손이 저들을 후대하는 의미는 보위도감의 권력 강화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겠나.

위보와 숙의 얼굴은 딱히 변화하지 않았다.

계급이 비슷한 계방의 얼굴이 구겨졌을 뿐이다.

“의기(義旗)를 높여 개경의 반적들에게 맞서 싸울 깜냥도, 공도 없는 자들을 이곳에 부른 이유가 무엇이오? 배 지유?”

“군무와 국가의 치국에 있어 나이 든 선배들의 지혜는 필요한 사항입니다. 노 지유.”

“확실히 해야 할 거요. 저들은 이곳에 있지만 어떠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것을. 오직 별초만이 별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소.”

노영희는 마지막으로 송숙과 통정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홍문계(洪文系), 송송례(宋松禮)가 왕정의 명을 받아 신의군에 소속된 아들 송분(宋玢)을 통해 삼별초가 모시던 교정별감 임유무를 죽인 일이 불과 이 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바리라.

그 분위기를 읽은 김통정의 얼굴이 싸늘히 식었다.

중손이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삼별초가 모두 다 균질한 단체는 아니었다.

수십 년간의 전란으로 자주 지휘관과 구성원이 확충되고 바뀌었으며, 본디 야별초로만 존재했던 단체에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신의군이 합세했다.

거대한 공통의 적, 몽골이 있어 망정이지, 평화의 시기였다면 불협화음이 아마 칼 맞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바뀌었으리라.

지휘관들도 문제였다.

해양후(海陽侯, 김준)은혜를 입었던 노영희는 표리부동함이 그 무기인지, 임연이 김준이 죽었을 때도 은근슬쩍 임연(林衍)과 임유무(林惟茂)의 편으로 갈아탔다.

그러면서도 왕정이 임유무를 숙청할 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순응했다.

그래놓고 마치 자신은 몽골에 대항하는 구국의 영웅인 척 하는 꼴이 참 보기 꼴사납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할 재주와 용기도 없는 주제에.

거사 당시 가장 계급이 높았던 노영희 대신 칼을 빼들었던 사람이 바로 중손이었으니까.

그러나 중손은 과거 자신이 령의 위치에 있을 때 야별초지유였던 상관이라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보위별감에 오른 지금에서도 아직 좌우별초에 입김이 굉장히 강한 노괴(老怪)이다.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다 싶으면 득달같이 훼방을 놓는 것이 참 여러모로 대단해 보였다.

따르는 병졸 입장에선 자신의 이익을 챙겨주는 상관이 탐욕스러워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날이 저물자 제자리걸음만을 하던 회의가 파하고 상민과 통정이 일어나려 할 때, 중손이 입을 열었다.

“김상민 중랑장은 나를 보고 가시게.”

영문을 몰라하는 상민이 통정을 쳐다보자 그가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고갯짓을 했다.

무장들이 찰갑을 맞부딪치며 우르르 나가는 것을 혼자 남아 보니 관심병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적막하다.

단 둘밖에 남지 않았다.

턱을 괴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던 중손이 침묵이 부담스러워 질만 할 때 입을 열었다.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계획이야.”

“그러시옵니까?”

중손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통정에게 듣기로는 그대가 문과 무에 모두 능하다 들었네만.”

“보잘 것 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그의 의례적인 겸손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상민의 말을 듣지도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건양 동쪽에 문신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지.

그곳에 가 조정에 합류할 사람들을 구하게.“

“...소장으로 되겠습니까?”

아직까지도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는 순 꼴통들 밖에 없지 않나요?

상민의 의문 섞인 눈초리를 보던 중손이 끌끌대었다.

“맞네. 충에 꽉 막혀 우리에게 합류할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죽을 정도의 절개를 가지신 인간들이지.”

강화도에서 백관들이 도망갈 때 몇 명은 삼별초에게 합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직학사(直學士) 정문감(鄭文鑑), 승선(承宣)에 제수되었으나 거부하고 물에 뛰어든 사람처럼.

중손은 탁상을 쾅 내리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나 그렇다는 말은, 아직까지 살아 숨 쉬는 놈들은 그만큼의 절개와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는 소리도 되지 않겠나?”

너무 극단적인 비약 아니십니까?

상민은 당최 알 수 없는 동시대 이 인간들의 의식의 흐름에 적응하기 도무지 어려웠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을 뿐.

- 스릉

중손은 거치대에 올려진 도를 쥐고 한번 뽑아 휘둘렀다.

그리고는 그 날을 한번 쓰다듬은 후 도집에 수납했다.

“가서 설득하라. 설득에 응하지 않는 자는 참하라.

쓸모없는 놈들은 식량만을 축내는 비루한 돼지에 불과하다.“

내밀어진 도.

화려한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도는 자신이 차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명품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왜 이런 좆같은 일은 나에게 다 시키는 건지.

직속 최고 사령관의 명을 거절할 깜냥은 없었다.

이를 어찌한다.

스무스하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깡패와 꼰대.

이 두 독특한 사회계층은 건양의 사회지리적 지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었다.

흥평궁 정문 주작문(朱雀門)에서 출발하여 건양을 양분하는 도로인 주작대로(朱雀大路)를 기준으로 해 보자.

21세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이유로 입에 담기에 영 껄끄러워진 주작은 이 시대에선 적어도 남쪽과 관련된 명칭이 많았다.

남대문을 주작문으로 부른다던지.

여하튼 건양 서쪽에는 별초들이 모여 살았다.

동쪽, 황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도 상민과 같은 별초들이 꽤 살긴 했지만 남동쪽에는 문신들만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

우리와 같은 역적패당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고고한 심보와, 건양을 남북으로 가르는 흥양대로(興陽大路) 밑에 사는 상것들하고도 섞이기 싫어하는 마음.

신 고려가 이곳에 세워지고 나서 그 날 선 분위기가 약간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흉악했다.

엉성하게 지은 초가들은 이 시대의 보편적 주거환경이다.

이들이 백정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과는 둘째로 길 가는 사람에게 이 초가가 저쪽의 초가와 다른 것이 있더냐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른 것이 없다고 그럴 것이다

추레한 그 초가집들의 거리에 들어섰다.

노동력이 부족해 낮게 쌓은 담장너머 사방에서 적의 섞인 시선이 찔러 들어온다.

어찌나 따갑던지, 평소 꽤 철면피라고 자부하던 그도 주변을 은근히 둘러볼 정도.

일부러 혼자 왔는데.

뭐 상관은 없다.

그는 예전에도 지금도 약골은 아니었으니.

옷을 널고 있던 아낙이 아이를 대리고 초가 안으로 들어가고, 한 늙은 문신이 쾅 하고 장지문을 닫았다.

젊은 문신은 기세 좋게 킁 하더니만 잠시 머뭇거리고는 상민에게 뱉을 깜냥은 없는지 얌전하게 담벼락에 뱉었다.

뱉었으면 너 반 죽었다 진짜.

적대적 기운이 맴도는 탓에 상민의 기분도 슬슬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 마을의 한 가운데 중손이 하사한 도를 도집째로 바닥에 콱 찍었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쉬고 크게 말했다.

“그대들 중 새로운 조정에 출사하여 충성을 다할 자가 있는가?

우렁찬 그의 말에 몇 명의 문신들이 다가왔다.

때가 꾸질꾸질 낀 비단옷.

적의 섞인 눈동자는 분명히 부정의 의미를 띄고 있었다.

그 중년의 문신이 빈정거렸다.

“조정? 이곳에 조정이 있었소?”

“종묘와 사직에 반기를 든 반적들이 감히 조정을 운운하다니... 허, 참.”

심지어 품계가 그리 높은 자들도 아니다.

대부분 자신보다 품계도 낮았다.

고관대작들은 대부분 왕정을 따라 개경으로 간 상황.

대체 무슨 심보로 이리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지?

그는 앞서 한 고함보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정에 출사하여 열심히 일을 한다면 공이 있는 자는 후대 받을 것이다.”

한 청년이 분개하며 말했다.

“우리는 인두겁을 뒤집어 쓴 소가 아니오!”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왕족을 허수아비로 세우면 우리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줄 알았소? 또한 강화에서 벌인 참혹한 일이 아직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 지지 않는 것인데!”

‘하 이 새끼들이...’

“그럼 여기 방 빼던가.”

“.....?”

상민의 말에 그들이 멍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까 들었던 중손의 말이 얼추 이해되는 시점이다.

“이 안온한 성벽을 넘어 가족과 야지로 나아갈 자는 손을 들어라. 내 친히 그리 해 주겠다.”

이 인간들 중 아무도 손을 드는 자가 없었다.

“모름지기 저 길거리의 똥개도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의 은혜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 법이다. 그대들보다야 확실히 낫군.”

“......?”

“먹고 있는 그 밥, 입고 있는 그 옷, 자고 있는 그 초가. 다 그대들이 해서 먹고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인가?”

이글이글 불타는 문신들이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실체적 위협이라곤 전혀 없는 그런 원망 섞인 눈초리에 동정심과 미안함이 반응하기에는 지금 상민의 짜증이 더 컸다.

“직접 쟁기를 들고 나가 논밭을 일구면 말을 안 해, 그대들이 온종일 하는 것이라곤 이곳에 모여 죽은 자들의 불알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지.

그 알량한 특권의식 집어 치워라. 식량을 다 끊어야 굶어 죽지 않을 것이더냐?

하물며 정벌한 말도 통하지 않는 야인 노비들도 시킨 일은 어찌어찌 하는 마당에!

기근때 그들 대신 네놈들이 굶어 죽었어야 했다!

그대들은 하루 하루 똥만 싸는 똥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느냐?“

문신들이 발끈했다.

"...무슨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최후통첩이다.

발끈한 문신의 말꼬리를 잘라내는 듯 상민은 도집에서 도를 뽑았다.

매끈한 도신에 햇빛이 반사되자 경전의 내용을 말하며 따지려던 자들이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 법보다는 칼이란다.

누구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이 도는 별감께 하사받은 도다. 네 놈들이 그대로 밥만 축내고 살아가려 한다면 모두 도륙을 내 버리라는 명을 받았지.”

문신들의 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이 말을 이었다.

“본관은 그리 잔혹한 성정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답 없는 그대들의 수급을 취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유께서는 그리 관대한 성정도 아니셔서 본관을 질책하고 경질해 대신 다른 자들 불러 집행하실지도 모르겠군.”

- 쐐액

상민은 도를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흉흉한 도의 소리에 누군가 발을 떨고 있다.

“삼일, 삼일의 시간을 주겠다. 그 때 다시 돌아와 그대들의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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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돌아 나오니 등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돌담 벽 모퉁이를 돌고 기척을 숨긴 채 기다리니 빼꼼, 어린 소년의 얼굴이 담벼락에서 나왔다.

당장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대롱거리며 한손에 들리는 것이 육체적으로 큰 위협을 끼칠 자는 아니었다.

“네 놈은 누구냐?”

“켁켁.”

손을 탁 놓고도 한참 쿨럭거린 소년은 빨개진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소생이 감히 장군의 뒤를 밟았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 나이대가 죽음에 대해 뭘 알겠냐.

딱 봐도 그냥 중딩 정도의 나이인데.

애가 상당히 저자세다.

“누구냐 물었다.”

“소생은 임경전(林敬傳)이라 하옵니다.”

“네 이름 말고.”

이름 알아서 뭐하게. 느그 아버지 뭐 하시냐고.

“소생의 부친은 국자감(國子監)의 주부(主簿)였습니다.”

“그래서 본관을 저기에서 노려보던 자들 중 하나였다 이 소리군?”

말이 곱게 나오진 않았다.

“소생은 제 부친과는 다릅니다.”

“그러셔?”

소년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진중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이 되게 웃겼는데, 아버지 양복을 몰래 입은 꼬마 애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얘야, 어울리지도 않는 폼을 잡는 게 더 웃기단다.

“소생은 예전 논밭을 거닐다가 마침 장군의 업무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을 집행하심에 있어 공명정대하시고 이치에도 막힘이 없으셨고, 애민의 감정까지 세세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또한, 앞일을 내다보아 곡식의 소출을 늘리시고 핍박당하는 자들을 구하시니 어찌 그 그릇을 소생이 감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낯부끄러운 소리였다.

그래도 화는 쪼오금 가라앉았다.

“그런 공치사를 한다 하더라도 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이 상황에 내가 뭘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닐 터이고.”

상민의 그런 말에 어린 소년은 은은하게 웃었다.

“소생이 미력한 몸이지만 웃어른들을 어찌 잘 설득하여 보겠습니다.”

“그대가 설득한다고 달라질 건 없는 듯한데.”

“어른들은 항상 다시 붓을 잡고 출사를 하길 원하고 있었나이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속된 말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다시 관직에 나아가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배부른 소리를 듣고 있구나.”

“장군의 문재가 뛰어나심은 오늘 다른 분들도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내일 나아가 저들에게 새로운 고려와 새로운 황상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신다면 분명 흔들리는 자는 여럿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은 대체 왜 저리 쳐 박혀 있었단 말인가? 내 이전에도 몇 번이나 시도했던 것으로 알고 있네만.”

“옛 동료들의 죽음과 먼저 강화로 떠난 동료 백관들의 처자를 범하고 아내로 삼은 일은 저들의 속 안에 상처로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이제 스스로의 처지가 몹시 빈궁해져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풀릴 때가 된 셈입니다. 또한 창칼로 겁박하는 것에 비굴하게 따르는 것은 엄중하게 따지고 애절하게 호소함에 마음이 동해 스스로 나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옵니다.”

“난 애절하게 빌 생각 전혀 없다.”

“그것은 제가 할 몫이니 장군께서는 염려 놓으소서.”

자신도 불우한 형편 덕에 꽤 조숙한 편이었으나, 지금 이 눈앞의 소년정도의 나이 때에는 되게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새삼 달리 보였다.

이 시대 사람들 평균 키가 작아서 생각보다 더 어리게 보이는 것 아닐까?

사실 고등학생인 거지.

어찌되었든 자신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대는 왜 나를 돕는 것이냐.”

경전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흉계를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른들의 처지가 안쓰럽고 또한 한심하여 이리 한 것뿐입니다.”

“한심하다라...”

“또한 소생은 중랑장께서 그 자리에 계속 머물지 않으실 것을 알기에 이리 인연을 맺어 두고 싶었습니다.”

상민은 이제 눈앞의 소년에게 흥미가 인 만큼이나 우려심도 생겼다.

“네가 똑똑한 것은 알겠다만, 진흙탕에 발을 담구어 보는 것은 네 신상에 좋지 못하다.”

소년은 씩 웃어보였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치기어린 미소에, 비범함이 마치 물에 떨어진 물감처럼 지워졌다.

“소인은 오직 장군의 앞에서만 생각을 드러낸 것이니, 오직 장군께서 저를 살피신다면 위험할 일이 없겠지요.”

님만 입 조심하면 별 일 없어요, 그런 뉘앙스의 말에도 딱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경전와 헤어져 처소로 가려 채비하자 경전이 그리 말했다.

“장군, 장군께서 저를 찾으실 때가 오실 겁니다.”

상민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 대답하려 하자, 소년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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