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59th. 새 판 짜기 (3)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멍하니 있던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나였다.
“회사채를 발행하고 주식을 옮겼다고요?”
“예! 신성물산과 신성전자, 신성건설과 신성중공업, 제일제분과 신세기리테일 모두 회사채를 발행하고 주요 계열사 지분을 사들였습니다!”
신성물산과 신성전자는 장호건, 신성건설과 신성중공업은 장호민, 제일제분과 신세기리테일은 장호경이 직접 지배하는 회사로 각자의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모기업들이다.
또한 각자의 계열사들 중 매출, 순이익, 유동성자산 등에서 나머지 계열사들을 끌고 나가는 동시에 푸시를 가장 크게 받는 곳이다.
그러니.
그 여섯 회사로 모든 주식을 집중시킨다는 건 지주회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으로의 분할에 앞서 말이다.
“의, 의장님, 이거 왠지···.”
“나중에 얘기하죠, 박 부사장님. 신성생명은 어떻게 됐어요? 빨리요!”
신성생명은 장호건, 장호민, 장호경 세 남매의 지분이 섞여있는 곳이다. 그쪽의 움직임까지 확인해야 지금의 지분 이동이 단순히 각자의 성을 굳히려는 짓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 나를 보고 직원이 재빨리 보고를 계속했다.
“그쪽은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머뭇거리던 직원을 나와 함께 바라보던 선해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됐어. 가 봐.”
“예, 사장님!”
재깍 고개를 숙였다 든 직원은 방을 뛰쳐나갔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던 중 선해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주회사 만들겠다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각자의 성벽을 높일지 성을 합칠지는 모르겠지만 지주회사를 만들겠다는 게 아니면 지금 이 시간에 주식을 옮겼을 리 없어요.”
“흠···.”
내 손가락 끝이 가린 벽걸이 시계가 4시를 넘긴 것을 확인하고 선해철이 침음성을 흘렸다.
상승이든 하락이든 주가에 줄 충격 때문에 대부분의 재벌, 대기업들은 대규모의 주식거래를 장이 마감된 3시를 넘기고서야 시간외거래로 처리한다.
그것도 세 남매가 두 개씩 지배하는 회사들로 모든 계열사 주식을 수직으로 짜 맞췄다는 건 지주회사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조용히 있던 박태진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 뒤에야 결과가 나오겠군요. 신성그룹은 해동물산과 다르니.”
“그러겠죠. 그쪽은 모기업 자체 사업 자산이 자회사 지분보다 크지도 않고 장인어른이나 장호민, 장호경이 직접 보유한 지분도 적으니까요.”
표정이 풀리지 않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말했다.
“그러겠지. 해동물산이야 주식의 80퍼센트 이상이 성민이 네 몫인데다 회장님들부터 네 마누라, 태진이, 회장님 주식 받은 임직원들 모두 네 편이잖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형님. 해동그룹 주요사업들 전부 해동물산의 내부 사업부거나 완전자회사입니다. 나머지 계열사 주식을 전부 합쳐도 해동물산 총자산의 3할 남짓이고 종금, 증권, 전자는 의장님이 최대주주인데다 GK그룹과 합작한 GK디스플레이 주식마저 의장님이 들고 있잖습니까?”
두 사람 말대로 해동물산은 내가 완벽하게 지배하는 회사이고 상사, 자원개발, 섬유소재, 소매유통, 물류, 해운, 전자상거래-전산시스템을 아우르는 해동물산은 지주회사법의 적용대상을 받지 않고도 지주회사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말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자사주의 마법’이죠.”
세 사람은 각자가 두 개씩 들고 있는 회사들을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으로 쪼갠 뒤, 투자부문 회사 두 개를 합치고 사업부문 회사 두 곳의 주식을 투자부문 회사에 현물로 출자해서 신주를 왕창 늘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섯 회사의 자사주는 계열사 주식과 함께 투자부문 회사로 이전, 사업부문 회사의 주식으로 변해 의결권이 살아나는 ‘자사주의 마법’까지 일어난다.
그 의결권은 투자부문을 통합해 지주회사의 최대주주가 될 장 씨 가문이 차지한다. 여기에 그들의 우호지분까지 더해지면 처가 놈들을 박살내는 건 요원해진다.
‘방경선이 내각 들어가기 전에 재벌들이 자사주 장난 못 치게 하려고 국회에서 난리쳤었는데··· 젠장.’
그 방경선 국회의원은 이제야 언론인 출신 초선 비례대표 딱지를 떼고 재선의 고지를 넘은 루키에 불과하다. 입맛을 다시던 나는 숨을 고르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잠깐?”
놓친 게 있었다. 나는 곧바로 방을 뛰쳐나가 트레이딩 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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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진과 선해철이 뒤따라오거나 말거나 트레이딩 룸에 도착한 나는 직원들에게 물었다.
“회사채 발행 내역이랑 주식 변동 내역 줘 봐요! 어서!”
“예? ···예!”
다그치듯 지시를 내리고 숨을 헐떡이던 나는 직원들이 뽑아준 회사채 발행 내역과 주식 변동 내역을 전부 살펴봤다. 주식을 살펴보던 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더러 통째로 잡아먹어달라는 건가?’
“흐흐흐흐흐흐···· 하하하하하하!”
내 입에서 흘러나오던 실소가 광소(狂笑)로 바뀌자 박태진, 선해철, 컴퓨터 앞에서 일어난 직원들은 나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시선은 의식도 하지 않고 웃어대던 나는 하도 웃어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고 직원에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지금부터 신성과 신세기 모든 계열사들 주식 동향 체크하세요.”
“네··· 의장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직원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서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선해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괜찮아? 어떻게 홰까닥 한 거 아니지?”
“진정하십시오, 의장님. 고문님이나 회장님들 앞에서 의장님 처가를 박살내겠다고 약속하신 걸 못 지키게 됐지만···.”
장호건, 장호민, 장호경 세 사람이 각자의 지주회사 체제를 만들면 내가 서재에서 어른들에게 했던 약속은 물거품이 된다. 두 사람은 진심이 느껴질 만큼 나를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봤지만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이거부터 보세요, 흐흐.”
내가 내민 회사채 발행 내역서와 주식 변동 내역서를 보던 선해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탄성을 터뜨렸다.
“어?”
“왜 그러십니까, 형님?”
“신성 쪽 주식 변동이 이상한데? 회사채 발행도 이상해.”
“무슨 말씀입니까?”
“너도 한 번 봐봐.”
선해철에게서 서류를 넘겨받은 박태진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이 커졌다.
“이건···?”
“전자와 물산은 장호민 계열사, 중공업과 건설은 장호건 계열사 지분을 그대로 들고 있어. 네가 봤을 땐 어떠냐?”
“이상하군요. 두 사람 사이나 지주회사법을 생각하면 깔끔하게 갈라서려고 지분을 정리했을 텐데···.”
재작년에 국회에서 통과된 지주회사법에 따르면 상장 자회사는 20퍼센트, 손자회사는 40퍼센트 이상 보유해야 한다.
그렇지만 장호건이든 장호민이든 전자와 물산, 중공업과 건설을 앞세워 상대방에 보유한 계열사 지분은 고작해야 10퍼센트 남짓인데도 정리되지 않았다.
말끝을 흐린 박태진을 보며 선해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정리하려는 게 아닐까? 지주사 전환 유예기간도 있잖아?”
“아뇨. 장인어른과 처숙부 사이를 생각하면 형 말이 맞아요. 각자의 성벽을 높이려고 했다면 지분교환이든 뭐든 깔끔하게 갈라서려고 했을 겁니다.”
장호건과 장호민, 장호경이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신성에서 개처럼 굴렀던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다. 확답을 내놓은 내게 선해철이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두 사람이 지주회사를 합칠 거라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장호경도 합류할 가능성이 높고요.”
“장호경까지?”
“오늘 함께 지분을 움직였으니 아무도 모르는 거래가 있었을 겁니다. 신세기그룹 금융계열사들이 금융지주회사로 묶이는 경우가 걸리긴 한데 신성생명과 합치는 거야 아이작에게 알려서 막아도 되는 거고···.”
말끝을 흐리던 나는 박태진이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회사채 발행 내역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세 사람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입니다. 무엇보다 회사채 물량의 대부분이 신성전자에 집중됐어요. 삼촌 생각은 어때요?”
내가 던진 질문에 선해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이상했어. 우리가 GK그룹이나 미룡그룹에 자금 수혈해줄 때 했던 거랑 판박이더라고. 꼭 스탠더드 캐피털과 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손을 쓴 것 같단 말이지.”
선해철이 가늘게 눈을 뜬 사이, 박태진이 그 뒤를 이었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의장님이 그런 투자를 한 건 신성그룹 합병을 대비한 사전작업이었잖습니까?”
스탠더드 캐피털과 해동종금이 초장기 저금리 채권 중심으로 대규모의 투자를 거듭한 건 두 사람에게 밝히지 않은 미래의 초저금리 시대에 대비하는 것도 있지만 신성그룹 합병에 대해 국민들부터 정치꾼, 공무원들이 군소리를 못하게 하려는 기초 작업이었다.
“그런데 신성그룹 회사채 판매는 누군가가 뒤에 숨어서 의장님과 우리 그룹의 계획에 잿가루를 뿌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신성전자에 회사채가 집중됐다는 건 반도체 치킨게임에 앞선 실탄 장전 아닙니까?”
“동감이에요. 신성그룹 회사채를 받아낸 투자자들이 누군지 조사해봐야 견적이 나오겠지만 신성그룹 회사채 판매는 나한테 엿을 먹이려고 꾸민 일 같네요.”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재결합할 범 신성그룹의 주력은 신성전자다. 범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 GK그룹이 발을 걸치지 않은 식품 사업을 제외하면 반도체 빼고는 전부 밀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쩐이든 사업 아이템이든 내가 지배하는 해동전자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여기에 내 동맹자들까지 끌어들이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그 전에.
신성그룹에 어떤 놈이 돈을 대줬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어떤 놈이 우리와 각을 세우는지.
***
방금 전의 한 방으로 이성민을 추적자로 만든 장호건은 전화 한 통을 주고받고 있었다.
“좋은 조건으로 투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별 거 아닙니다, 미스터 장. 나도 스탠더드 캐피털이라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인간이거든요, 후후.]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장호건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누이와 동생에게 통합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재결합을 제안한 뒤, 물주를 확보하려고 스탠더드 캐피털에 원한을 가진 물주를 은밀히 찾던 중 얻어걸린 월척 아닌가?
“IT버블 붕괴로 당신이 스탠더드에 진 원한은 우리가 제대로 갚아드리죠, 후후.”
[꼭 성공하셔야 할 겁니다, 미스터 장. 원한도 원한이지만 내 위신을 다시 세우려면 미스터 장이 반드시 성공해야 할 테니까요. 성공하지 못하면 그 뒤는··· 아시겠죠?]
자신과 통화하는 남자가 음침한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장호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량의 회사채를 초장기 저금리로 발행하는 대가는 혹독한 것이 아닌가? 잘못하면 모든 걸 잃을 수 있을 만큼.
그렇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장호건의 미간은 금세 풀어졌다.
“물론입니다. 앞으로 10년 내에 우리 신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할 테니 추가 자금 지원도 확실히 해주십시오, 하하.”
회사채를 발행한 건 단순히 지배구조만 바꾸기 위함이 아니었다. 반도체 치킨게임에 필요한 실탄을 최대한 마련해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나?
[좋습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미스터 장.]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고, 장호건은 수화기를 놓은 뒤 소파에 앉았다.
“어떨 것 같나?”
장호건이 던진 질문에 소파에 앉아서 통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수한이 입을 열었다.
“지금 통화하신 미국 물주가 자금만 계속 밀어준다면 반도체 치킨게임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반도체 경쟁력도 앞서고 있지만 핸드폰과 컴퓨터, TV 판매량에서 GK전자를 앞서고 있으니 치킨게임에 필요한 자금 조달은 걱정 없습니다.”
신성전자는 주력이 반도체지만 핸드폰과 컴퓨터, TV에서도 강세를 보이는 종합전자회사다. 세 개 사업의 수익으로 치킨게임에 나설 반도체 사업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이수한의 대답에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그깟 백색가전보다야 핸드폰이나 컴퓨터가 훨씬 더 마진이 높으니 말이야. 장 전무는 어떻게 생각하나?”
상석의 장호건을 가운데에 두고 이수한과 마주앉아있던 장용재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 말씀도 맞지만 DDR램 공정은 우리가 훨씬 유리합니다, 아버지. 여권을 갈아치우더라도 고객들을 최대한 늘려보겠습니다.”
가슴까지 탕탕 두들기며 호언장담에 장호건이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거다. 지금부터 전쟁이 시작됐으니 최대한 공을 세우도록 해.”
지금 개막된 전쟁은 장호건이 자신의 모든 자식들에게 내린 시험이었다. 전쟁을 가장한 시험을 통과한 자식만이 신성그룹을 잇게 될 것이라는 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
신성그룹과 신세기그룹이 통합 지주회사 체제를 만드는 동안 우리는 아이작에게 부탁해서 신세기금융지주와 신성생명의 합병을 막는 한편,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서 그들의 대규모 회사채를 소화한 곳이 어디인지 조사했다.
물론.
그룹 차원과 별개로 정보를 얻기 위해 나는 아주 보기 싫은 놈과 친히 만났다.
“오랜만이야, 처남.”
“매부도 오랜만이네. 해동그룹 의장이 된 기분이 어때?”
카페에서 테이블 하나를 마주보고 앉은 나는 장용재의 비웃음 섞인 질문에도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별 거 없지. 의장 달기 전부터 컨설턴트 노릇하면서 그룹 안팎에서 여러 회장님들이랑 그룹 사업 챙겨왔으니까. 처남하고 다르게 말이야, 흐흐.”
대답에 이은 내 웃음소리에 장용재의 코가 씰룩거렸다.
내가 해동그룹과 GK그룹, 태현그룹 명선우 계열의 전략 컨설턴트로서 재계 어른들과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챙기고 있을 때 이 자식은 신성그룹 내에서 상무나 전무 놀이하는 꼴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장용재이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다.
나는 놈의 속을 박박 긁어놓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