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58th. 감당할 수 있으니 (3)
“이영백 전 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면을 불허해주십시오.”
뜻밖의 요구여서일까, 김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영백?”
대통령뿐만 아니라 세 사람도 의아해하는 가운데 나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그 인간에게 씌워진 샐러리맨의 신화는 모두 거짓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에 대한 욕망만으로 채워진 쓰레기 중의 쓰레기입니다.”
이영백.
태현건설 회장까지 올라가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포장됐지만 전생에는 청와대 주인이 되어 이 나라를 이용해 제 배때지 채우는 데 혈안이 됐던 아주 흠잡을 데 없는 쓰레기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해먹은 게 자원개발 사업인데 그런 이영백의 전력을 생각하면 내가 도맡을 해외 자원개발 사업을 어떻게든 파먹고 싶어 할 터.
‘그 꼬라지는 절대 못 보지. 내 밥그릇인데!’
나는 내가 짠 백년대계를 이영백에게 휘둘리는 꼴을 절대 참을 수 없었다. 해외 자원개발 사업은 내 재산을 불리는 것 외에도 해동그룹의 캐시카우를 만드는 일이며 이 나라가 원부자재 수입에 쓰는 외화를 회수해오는 일이 아닌가?
이영백의 사면이 불발되면 정치자금법 위반에 따른 피선거권 박탈은 킵 고잉. 놈이 서울시장이 되는 것도, 대선가도를 달려 청와대에 도착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내 밥그릇 건드리는 놈은 다 밟아놔야 해. 물리적으로는 안 되니 정치생명이라도 죽여 놔야겠지.’
그런 놈들이 한둘이겠냐마는 전부 덤벼도 상관없다. 내가 가진 카드는 놈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많으며 훨씬 세지 않은가?
취기를 빌어 다소 격한 발언을 한 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닐세. 취중진담이라고 우리 이 이사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서 좋구먼, 허허. 그래, 이영백이 왜 안 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보게.”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태현건설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라크 공사 미수금은 전부 이영백이 회장이었을 때 무리하게 저가수주를 해서 생긴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명진호 명예회장이나 명선우 회장이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 몇 년 전에 여기 선 대표가 짰다는 엔고투기로 겨우 수습하지 않았나?”
거기까지는 알고 있겠지. 그럼 이건 알고 있을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영백은 자기가 주인인 회사의 지분을 형제들 명의로 돌려놨습니다.”
“사실인가?”
눈썹이 치켜 올라간 김 대통령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계 내에서도 쉬쉬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인 정황증거들은 저희가 확보해서 터뜨릴 테니 대통령님께서는 그 악당에게 법의 심판만 내려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대통령의 얼굴에서 우려가 드러났지만 아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에 나는 자신이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서재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닝티를 마시던 할아버지는 어제 있었던 일을 내게서 모두 듣고 찻잔을 내려놨다.
“이영백이를 날리겠다고?”
“네. 맘 같아서는 그놈 명줄을 끊어버리고 싶지만 법치국가에서 살인은 불가능하잖습니까? 최소한 그놈의 정치생명을 끊어놓지 않으면 해동그룹에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겁니다.”
“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영백은 서울시장이 되고 이미지 세탁을 통해 청와대에 입성, 나라살림뿐만 아니라 내 살림까지 쭉쭉 빨아먹을 왕거머리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침음성을 멈추고 전화기를 들었다.
“이대수일세, 김 상사. 육 대위, 박 소령, 서 준장···.”
전부 명동에서 한 따까리씩 한다는 사채업자들의 이름들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사람들이 전부 우리 집안 사채업자들?’
동공이 커진 나를 보며 피식 웃던 할아버지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인천창고로 오라고 해. 우리 장손 얼굴 보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였잖나? 흐흐. 아, 점심 먹지 말고 와. 회나 한 젓가락씩 들면서 얘기하지. 사업 얘기도 할 겸.”
전화를 끊은 할아버지는 또 다른 전화를 걸었다.
“나다, 승주야. 명동 녀석들한테 우리 장손 보여주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야겠다. 그래. 점심은 모처럼 회나 먹자꾸나, 으허허.”
전화를 마친 할아버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만에 바닷바람 좀 쐬러 가자꾸나, 성민아.”
지금껏 늘 재벌그룹 총수로서의 모습만 보여줬던 할아버지. 이번에는 사채시장을 지배하는 황제의 모습까지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
조용히 해동물산 인천창고로 간 나와 할아버지는 그곳의 지하 밀실에서 고승주, 그리고 처음 보는 양복쟁이 남자 십여 명의 인사를 받았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90도로 인사를 올린 남자들에게 할아버지는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놈이 내 장손일세. 우리 해동을 재계 1위로 끌어올리고 자네들이 IMF 때 돈 벌게 해준 수훈갑이지, 흐흐. 어여들 앉어.”
“예, 회장님.”
할아버지를 가운데에 두고 나와 고승주가 앉았고, 다른 사채업자들도 앉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할아버지와 고승주는 사채업자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는 사채꾼 꼬마들한테도 양복 입히고 점잖게 돈 받게 하고··· 재작년부터 시작한 대부업과 채권추심은 규모를 더 키우게. 명동 식구들 총자산의 7할까지 쏟아 넣는다는 생각으로.”
할아버지가 내린 지침에 고승주가 입을 열었다.
“대부업은 금리 변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채권추심은 확실히 수익이 날 사업입니다, 회장님. 해동그룹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채무를 상환 받으면 될 테니까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고승주의 의견에 ‘김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 본부장 말대로 채권추심은 돈이 될 겁니다, 회장님. 은행이나 일본 놈들이야 회수가 어렵겠지만 우리야 채무자들을 해동그룹에서 일시키면 회수할 수 있잖습니까? 하하.”
“볕 드는 땅에서 회장님 위세가 하늘을 찌르니 저희가 덕을 보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인 사채업자들에게 할아버지는 껄껄 웃어보였다.
“허허, 웬걸. 해동이 작았을 때는 자네들이 뒷바라지를 해주지 않았나? 인자는 받은 만큼 도와야지.”
‘나도 생각했던 그림이긴 했지, 후후.’
할아버지가 이 자리에서 사채업자들과 함께 그리는 그림은 우리 집안의 볕 드는 땅과 그늘진 땅의 이상적인 조화였다.
우리 집안의 그늘진 땅도 돌보는 일이지만 몸 쓰는 일이라도 일자리가 없는 채무자들이 빚도 털어내고 장기간의 소득수단을 마련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빙긋 미소를 짓던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떠올렸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면 채권추심 사업은 더 큰 규모로 키워야 해. 다들 잘하고 있네, 후후.’
빙긋 웃던 내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넌 이 할애비가 이 친구들과 꾸미려는 판을 어찌 생각하느냐?”
“저도 회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현재 제도권 금융에서 신용카드 시장이 커지는 점을 생각하면 불량채권 규모도 커질 테니까요.”
이 자리에서 내 의사를 묻는다는 건 나를 후계자로 데뷔시키겠다는 뜻이다. 적당한 선에서 안목을 보여주고자 내놓은 내 대답에 할아버지와 고승주, 그리고 사채업자들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혹시··· 이 양반들도 직감하고 있는 건가? 카드대란.’
***
생각을 숨긴 채 식사와 사업 회의를 계속하던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자네들, 이영백이 알지?”
플라스틱 소주잔을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던 사채업자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영백이면··· 그 수전노 말씀이십니까?”
“그 인간 소문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점심시간 끝 무렵에 가서는 수육 1인분만 시키면서 큰 방을 쓰는 놈 아닙니까?”
“허허, 자네들도 그놈이 지랄 같은 걸 아니 말 다했구먼.”
이영백에 대한 소문이 명동에서도 안 좋은 모양이었다. 나처럼 실소를 흘리던 할아버지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장손이 어제 푸른 기와집 들어가서 거기 주인장하고 술을 마셨는데··· 그 양반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길래 이영백이 모가지를 따야 한다고 했다네.”
오늘 따라 할아버지가 낯설게 보였다. 늘 영국 신사 같은 양반이 조폭처럼 말을 하다니?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걸까?
“목을 따야 한다면··· 이 앞에다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라는 말씀이십니까?”
해동물산 인천창고 앞은 바로 부두로 연결되어 있다. 손가락으로 부두 쪽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의중을 살피는 사채업자에게 다른 사채업자가 피식 웃어보였다.
“에이! 그러면 나중에 불어터져서 둥둥 뜨잖나? 배때지에 사시미 담그고 돌린 다음에 소각로에서 태워버려야지. 잿가루는 어디 산 정상에서 뿌려버리고.”
“너무 번잡해. 그냥 머리통부터 분쇄기에 넣고 갈아서 닭 모이로 뿌려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증거도 안 남고 사료 값도 아끼지 않겠나? 흐흐.”
하나같이 살벌한 방법을 주고받으며 웃는 사채업자들을 보며 할아버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 사람들아, 말이 그렇지 그놈 죽이면 야당 놈들이 가만있겠나? 우리 장손도 죽이는 게 깔끔하다 생각했지만 일 치르기 싫어서 정치생명만 절단 내고 싶어 한다네. 그러니.”
소주 한 잔을 채워서 한 입에 비운 할아버지의 눈에 냉기가 서렸다.
“그놈이 숨겨둔 돈, 땅, 주식 할 것 없이 전부 찾아와. 죽이거나 병신 만드는 거만 아니면 되니 수단방법 가리지 마.”
조금은 번잡한 방법이라 그런지 사채업자들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여러분들도 이제는 볕 드는 곳에서 사장님, 회장님이라 불릴 날이 올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시면 회장님 뜻을 따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껄껄 웃는 나와 달리 사채업자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부업체나 채권추심회사만 꾸려도 사장님, 회장님 소리 듣겠지만 내가 말하는 볕 드는 땅은 그 이상이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축은행으로도 나아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시중은행은 아니라도 은행을 가져야 진짜 사장님, 회장님 대접받지 않겠습니까? 목표를 크게 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때서야 사채업자들의 입꼬리가 귀를 향하기 시작했다. 나와 할아버지, 고승주는 서로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
얼마 뒤.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은 나는 삼청동 서재로 들어가서 명동 사람들이 모아준 자료를 확인했다.
“명동 사람들이 빠르긴 빠르네요.”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숨을 내쉰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우리 해동의 국내 정보력 절반은 그 친구들한테서 나와, 인석아. 이영백이가 꼬불쳐둔 재산 찾는 것쯤이야 금방 해치우고도 남는다, 흐흐.”
역시나 명동 사채조직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날 모인 사채업자들만 해도 명동 사채시장의 절반 이상을 쥐락펴락하니 그늘진 땅에서도 할아버지의 위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앞으로 이 할애비가 유유자적 살려면 하나씩 물려줘야하지 않겠느냐? 흐흐.”
역시.
할아버지는 사채시장의 후계자 또한 나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고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앞으로 그 친구들은 너하고 고 본부장이 맡아서 관리하도록 해. 네가 스탠더드의 주인이라는 것 빼고는 네 실력을 알고 있으니 믿고 따를 게야.”
“네.”
후련해하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린 나는 여의도의 스탠더드 캐피털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게 이영백이 재산 내역이라고?”
“네. 예금, 부동산, 주식 할 것 없이 전부 여기에 담겨 있어요. 이거 터뜨리면 이영백은 두 번 다시 정계복귀 못합니다, 흐흐.”
음침하게 웃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피식 웃었다.
“징한 놈. 그렇게 이영백을 죽이고 싶냐?”
“나쁜 놈이잖아요. 이유가 더 필요하나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이영백은 악당 중의 악당이다. 국민들 세금에 우리 같은 재벌들 재산까지 뜯어다가 제 뱃속에 노골적으로 집어 처넣은 놈이 아닌가?
‘우리도 공적자금으로 국민들 세금을 퍼먹긴 했지만 더 투자하면 투자했지 주식을 팔 생각은 없으니까.’
우리가 인수하면서 공적자금을 퍼먹은 해동자동차나 대주중공업은 앞으로도 우리 집안이 들고 갈 회사다. 나름의 합리화를 마친 나는 손뼉을 두어 번 정도 치고 입을 열었다.
“증거도 확보됐으니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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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특보입니다. 이영백 전 의원의 차명재산이 밝혀졌습니다. 본 방송국에 들어온 투서에 따르면 이 전 의원이 형제들 명의로 된 자동차 부품 회사 ‘테스’ 외에도 주변 지인들 명의로 숨겨둔 예금과 부동산 규모는···.]
청와대에서 TV를 보던 김 대통령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이영백이 착복한 액수나 그걸 밝혀낸 이 이사나 대단한 사람들 같습니다.”
대답하는 비서실장의 얼굴에서 자괴감이 느껴졌다. 공권력이 할 수 없는 일을 민간인이 해내지 않았나?
“죄송해할 것 없네. 우린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야하지만 이 이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친구가 우릴 도와주니 천만다행이군.”
자신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서실장을 보며 대통령이 물었다.
“이리 됐으니 검찰에서도 덮어주지는 못하겠지?”
“덮어주고 싶어도 덮어주질 못할 겁니다. 드러난 축재 규모만 500억인데 어떤 놈이 덮을 수 있겠습니까?”
비서실장의 짓궂은 미소를 보며 대통령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해동그룹에 번번이 신세를 지는 것 같군. 뭔가 보답을 해줬으면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김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명 회장이 언제 북으로 간다고 했나?”
“모레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편으로 이 이사뿐만 아니라 고려호텔에 머물고 있는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헨리 로이스 의장, 체이스맨해튼의 케일러 아이젠버그 행장과 로널드 윌슨 부행장도 함께 올라갈 거라고 합니다.”
“흠···.”
비서실장의 보고에 침음성을 흘리던 대통령이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놨다.
“그 사람들이 다녀오고 나서 얘기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