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55th. 세기말 이후를 위한 준비 - 중국 편 (1)
1999년 2월 초순.
나는 서울대병원의 VVIP 병실에서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채 병상에 비스듬하게 누운 장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생했어, 누나. 고마워.”
“알긴 아네, 후훗.”
장하연은 해산일(解産日)을 보름쯤 앞뒀을 때 할아버지와 나와의 삼자대면 끝에 출산 휴가를 내고 서울대병원 VVIP 병동에 입원했다. 신성그룹의 신성의료원이 있다지만 장호건을 제외한 장 씨 종자들을 믿을 수 없기에 내린 조치였다.
싱긋 웃던 장하연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임신 중에도 근력운동을 꾸준히 할 만큼 체력관리에 열심이었다고 해도 삼십대에 들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우리 마느님을 힘들게 한 ‘동동이’의 뺨을 쿡 찔렀다.
“요놈, 얼마나 크려고 엄마 힘들게 한 거야? 빨리 나왔어야지, 흐흐.”
우리 첫 아이인 ‘동동이’는 아들이었는데 태명을 대신할 이름은 이현빈(李炫彬)이었다.
할아버지, 장하연과 함께 의논해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의 첫 5세인만큼 밝게 빛나길 바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연예인 예명이긴 해도 좋은 뜻인 걸 어떡해?’
아직 데뷔하지 않은 연예인의 예명을 먼저 쓴다고 짱돌 던질 사람도 없었고, 할아버지와 장하연 모두 크게 만족했다. 머리는 나와 장하연 때문에 보증이 됐으니 외모만 그 연예인처럼 자라면 바랄 게 없다.
“이젠 내가 현빈이 돌보고 있을게. 쉬고 있어, 누나.”
장하연에게서 현빈이를 받아 품에 안은 나는 헤벌쭉 웃었다.
‘내 아이라니···.’
보면 볼수록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귀엽게 생긴 아이가 우리 두 사람의 첫 아이라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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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나와 장하연은 현빈이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병실이었다.
“축하드려요, 형.”
“축하해요, 언니.”
우리의 축하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병상에 누워 아이를 보듬고 있던 유현정과 그 옆의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안고 있던 박태진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고맙습니다, 대표님.”
우리는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돌려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현빈아, 앞으로 네 친구들이야. 자주 보게 될 테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품에 안은 현빈이를 보며 말한 나는 벙긋 미소를 지었고, 현빈이도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앞으로도 현빈이와 박태진, 유현정의 아이들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나와 박태진처럼.
***
나와 박태진이 두 마느님들과 아이들의 충실한 집사 노릇을 하는 사이에도 스탠더드와 해동그룹은 앞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가 5월을 맞은 나와 박태진, 금석호의 중국 출장이었다. 우리는 편하게 얘기하려고 외국계 항공사의 비행기 편을 골랐다.
“아쉽네요. 현빈이하고 재민이, 재석이 돌봐주던 게 방금 전이었는데.”
기내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던 나는 허탈함을 감추질 못했고, 박태진도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아, 여기서 재민이와 재석이는 박태진의 아들들이었다.
“어쩔 수 없죠. 가장이 된 이상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들 먹여살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암, 그래야지. 남자라면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1순위라네. 세대가 바뀌어도 남자가 바깥에서 번듯하지 못하면 마누라, 자식들 어깨도 움츠러드니 말이야, 허허.”
껄껄 웃는 금석호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지금 우리가 스탠더드에 쌓아둔 돈이면 돈 많은 셔터맨 노릇하면서 아이들 돌보고 살 수도 있는데··· 그래도 회장님 말씀이 맞으니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흐흐.”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박태진도 스탠더드에 쌓이고 있는 돈이 한국 돈으로 1조 원을 넘었다.
허나 돈이 전부는 아니지 않나. 소크라테스는 아니더라도 배부른 돼지새끼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상하이에 도착하면 잠시 헤어져야겠구먼. 리슈푸 그 친구, 스탠더드가 투자해줄 테니 해동자동차와 합작하자고 하니까 몸이 바짝 달아올랐어, 흐흐.”
금석호가 상하이에서 만날 사람은 지리자동차의 회장인 리슈푸였다. 두 사람 모두 자동차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자동차에 열광하는 사람들이기에 지리자동차와의 협상은 가이드라인만 넘겨주고 금석호에게 맡겼다.
“나머지 좌석에 탄 사람들이 잘 도와드릴 겁니다. 저희도 이번 행사가 처음인지라 최정예들로만 꾸렸습니다, 하하.”
지금 이 비행기의 모든 비즈니스 석, 그리고 이코노미 석에는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과 해동자동차의 에이스들이 말단부터 최고 임원들까지 골고루 타고 있었다. 그들 모두 우리의 출장을 성공적으로 만들고자 차출한 최정예부대였다.
내 웃음에 이어서 박태진도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상하이에 미리 도착한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이사회 멤버 일부를 비롯한 임직원들이 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중국에 첫 발자국을 찍는 일이라 각별히 신경 썼다고 합니다, 하하.”
이번 상하이 출장은 스탠더드 캐피털과 해동자동차의 중국 사업 출정식이었다. 중국 증시와 벤처기업 투자부터 지리자동차 투자 및 현지 합작법인 설립이 걸린 일이 아닌가?
어느 새 상하이 영공에 진입한 우리는 훙차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좋은 투자 많이 하시고 호텔에서 보세, 허허.”
“회장님도 좋은 결과 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하하.”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벤츠 S클래스 7세대 방탄리무진 두 대와 대형 리무진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스탠더드와 해동자동차 각자의 일정을 시작했다.
“준비해 온 리무진이 맘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조니.”
리무진 뒷좌석 앞에 앉아있던 스탠더드 본사 이사회의 이사가 한국어로 건넨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왜죠? 충분히 맘에 드는데.”
“이 리무진, 조니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클레어와 썬의 지시 때문에 벤츠 본사에 100만 달러를 주고 주문한 겁니다. 미스터 금이 탄 것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탄 벤츠 리무진이 두 사람의 선물일 줄이야··· 지구 반대편에 있는데도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삼촌과 숙모도 없을 것이다.
“두 분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하하. 두 분은 잘 지내고 계시죠?”
“네. 요즘에는 집무실에 마이클과 라이언의 침대를 두고 출근하십니다, 하하.”
마이클과 라이언은 선해철과 클레어의 쌍둥이 아들들이었다. 클레어와 선해철의 생활을 듣던 나는 내가 놓친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전 세계의 스탠더드 캐피털 여성 임직원들은 육아휴직 최대 2년까지 주고 육아수당도 넉넉히 챙겨주세요. 어린이집 만들어서 아이들도 돌봐주고 남성 임직원들도 휴가를 쓰게 해주고요.”
“알겠습니다, 조니.”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이사를 보며 미소를 짓던 나는 박태진에게도 물었다.
“해동그룹도 신경 써야 할 문제 같아요.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박태진은 내 질문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단절여성 문제는 개인과 기업, 국가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개개인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게 증발되고 회사는 회사대로 투자해서 키운 인재를 잃어버리니까요. 국가 또한 그런 인재가 경제활동을 못하니 손해입니다.”
“맞는 말이에요. 땅도 좁고 석유 한 방울, 철광석 한 줌 안 나는 나라에서 사람까지 놀리면 손해죠. 돌아가는 대로 정리해서 할아버지께 올려보죠.”
해동그룹의 출산-육아장려정책에 대해 짤막하게 의견을 주고받은 나는 마주보고 있는 이사와 함께 스탠더드 캐피털의 상황을 점검했다.
“대출은 잘되고 있군요.”
“주가가 계속 오르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마존닷컴은 제프 윌크를 영입하고 우리 측 신규투자까지 받고는 온라인서점을 벗어나 오픈마켓 플랫폼으로 크고 있습니다. 주가 상승률도 높고요.”
제프 윌크를 원래 역사보다 1년 먼저 아마존닷컴에 꽂아주고 30억 달러를 투자해준 효과는 매우 바람직하게 나오고 있었다. 서류에 나온 추세를 보면 연말까지 주당 120달러도 우습게 넘을 것 같았다.
그 말은 곧 스탠더드가 JP모건에서 받을 수 있는 대출도 훨씬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새로 확보한 20퍼센트의 아마존 주식은 담보로 제공하지 않았지만 주가가 빨리 오르는 만큼 더 많은 돈을 JP모건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펴보던 나는 이번 상하이에서의 이벤트에 관한 자료를 살펴봤다.
“흠···.”
대충 훑어보듯 서류에 담긴 기업들의 정보를 보던 나는 내가 원하는 기업들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두 회사의 종이만 빼서 이사에게 건넸다.
“이 두 회사는 이름이 특이하네요. 직접 만나봐야겠어요.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세요.”
서류를 받은 이사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두 회사의 사장을 내가 머물 호텔 객실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은 내가 직접 만날 가치가 차고 넘치는 사람들 아닌가?
***
상하이의 한 컨벤션 센터는 입구부터 도로까지 사람의 줄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키 163cm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중국인 남자 한 명도 있었다.
‘투자를 받아야 할 텐데···.’
이 남자는 지난 4월 4일에 자신이 일하던 공공기관의 부조리에 질려서 18명의 동료들과 함께 항저우의 자기 아파트에다 기업 간 전자상거래 회사를 차린 새내기 벤처사업가였다.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만했지만 몇 달 안 가면 현금이 바닥날 거다. 월급도 밀릴 판국이니···.’
그래서 이 남자는 인생을 건 도박을 결심하고 상하이에 온 것이었다. 자신이 여행가이드로서 수행했던 제리 양의 야후에 투자한 스탠더드라면 자신의 사업을 알아봐 줄 거라 믿고서.
빨리 들어가고 싶어 발만 동동 구르던 그에게 한 백인 남성이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서류철의 사진을 보던 백인 남성이 그에게 물었다.
“Can you speak English?”
질문은 받은 중국인 남성의 눈이 커졌다. 대학 시절에 영어를 전공했고 크레이지 잉글리시로 영어를 익힌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Yes, I can!”
자신 있게 대답한 중국인 남성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빙긋 웃은 백인남성은 잠깐 동안 영어로 대화를 나눴고, 그 남자는 얼른 자리에서 이탈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뭐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20대 후반의 안경잡이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법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광둥 성 선전에서 대학 동기들과 종자돈을 모아 채팅 프로그램 업체를 세웠는데 더 큰 성장을 위해 투자를 받겠다고 상하이까지 온 것이었다.
이 안경잡이 청년은 아까 그 쬐끄만 남성과 대화를 주고받던 백인남성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걸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에게 오는 걸까? 나에게 온다면 왜 온 걸까? 아버지가 공산당 당원이어서 안 되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로 날 이용해서···.’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자신을 이용해서 중국공산당에 줄을 대기에는 아버지의 위치가 그다지 높은 위치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편하게 있는 게 좋겠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포기하면 편하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앞만 바라보던 그에게 백인남자가 다가왔다.
“Can you speak English?”
남자의 물음에 안경잡이 청년은 멋쩍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Yes, a little bit··· haha···.”
“That’s okay. Will you join me? If you join me, you never regret.”
안경잡이 청년을 배려해준 걸까, ‘함께 가면 후회는 없을 거다.’라며 쉬운 영어로 대답하고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던 백인남성이 목 끈 끝에 달린 플라스틱 카드를 들어보였다.
“Standard Capital··· headquarter executive?”
“Yes. follow me.”
자신과 마주선 남자가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임원이라는 걸 알게 된 안경잡이 청년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Yes!”
그 청년은 대답과 함께 스탠더드 캐피털 임원과 어딘가로 사라졌다.
***
두 시간 뒤.
호텔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함께 식사를 마친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이사에게 물었다.
“두 사람, 식사는 잘 대접해줬죠?”
“예. 이 호텔 중식당에서 최고급 코스 요리를 대접하게 했습니다. 마오타이는 작은 잔으로 석 잔씩만 제공했고요.”
식후주로 마시던 코냑을 입에서 뗀 이사의 대답에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했어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긴장은 풀게 해줘야죠.”
두 사람은 충분히 대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전생의 나는 감히 쳐다도 못 봤을 중국 대륙의 IT 거인들 아닌가?
“그나저나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자들은 어떡하실 겁니까?”
“사업 아이템을 우선순위에 놓고 8억 달러까지 투자하세요. 정치색은 최대한 배제하고요.”
“그래도 중국은 꽌시 때문에···.”
중국공산당을 챙겨야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스탠더드 본사 이사에게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지금 엮이면 골치 아픕니다.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 어느 한 곳도 나머지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권력이 이양될 때 손써도 늦지 않습니다.”
세 발 달린 솥 같은 현재의 중국 정치를 고려하면 어느 한 계파에게도 미움을 안 사도록 사업 본연에 충실한 투자를 하는 게 낫다. 편이야 차차 만들어도 되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 이번 투자 제안 설명회는 지금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는 두 사람과 만나는 것을 숨기려고 친 연막이었다.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 그럼 나머지 2억 달러는···.”
“구글 때와 비슷합니다. 사업 아이템이 맘에 들면 각각 5천만 달러씩 투자하고 1억 달러까지 추가 투자도 약속할 겁니다.”
박태진의 입이 벌어졌다. 우리가 중국 벤처기업들에게 투자할 돈의 1할씩을 두 기업에 투자하겠다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를 보며 빙긋 웃고 스탠더드 본사 이사에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식사가 거의 끝났을 테니 올라오라고 하세요. 알리바바의 마윈, 텐센트의 마화텅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