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50th. 피할 수 없는 빅딜 (4)
이성민과 박태진, 선해철과의 미팅이 있고 얼마 뒤.
고승주는 한 일식집의 방에서 상 앞에 앉아있었다. 친조카 같은 해동그룹 후계자를 말리면서까지 혼자 만나야 하는 사람 때문이었다.
[고객님, 동석하실 분 도착했습니다.]
“잠시만요.”
재빨리 재킷 안주머니에서 딸깍 소리를 내며 손을 넣었다 뺀 고승주가 입을 열었다.
“모시도록 해요.”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해동물산 떠나고 본 적이 없으니 20년도 훨씬 넘었군. 앉지.”
방에 들어온 유성학은 고승주와 악수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고 어느 새 상을 가득 채운 음식과 술을 들기 시작했다. 어느 새 상 옆에는 뚜껑이 열린 진로 여섯 병과 그렇지 않은 네 병이 세워져있었다.
“자네를 데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군. 해동그룹 살림이 확 폈으니.”
“아닙니다, 선배님. 남들 뒤치다꺼리하는 고물상 노릇이 전부입니다.”
“내 앞에서 눙치지 마, 고승주. 아도자동차에 신성제철, 대산석유화학단지까지 먹었으면서 고물상이라니?”
퉁명스럽게 대꾸한 유성학에게 고승주는 부인도 시인도 안 한 채 젓가락으로 회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런 고승주를 보던 유성학이 피식 웃었다.
“나와 넌 반대였지. 내가 불이면 너는 물··· 그런데도 내 지랄 맞은 성격 받아준 부사수는 너 하나뿐이었어, 흐흐.”
“선배님이 제 사수여서 많이 힘들었죠. 미국 의류업체에 우리 원단 납품하겠다고 사무실에 야전침상 깔고 먹고 자면서 바이어들한테 전화 돌리고, 윗분들한테 들이받고, 경쟁업체 사람들과는 멱살잡이까지 할 뻔했잖습니까? 흐흐.”
같은 필드에서 함께 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웃는 고승주와 달리 유성학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옛말이야. 요새는 일을 하려고 해도 예전처럼 밀어붙이질 못하겠어, 하하하.”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리던 유성학이 젓가락을 놓고는 한 잔 가득 채운 소주를 단숨에 비웠다.
“그래, 나하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냐?”
“대주그룹 사정은 어떻습니까?”
“뭘 원해서 그래?”
눈을 치켜뜬 유성학과 달리 고승주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대주그룹의 내부 사정이요.”
“···술부터 한 잔 줘.”
뜸을 들이던 유성학이 잔을 든 손을 내밀었고, 고승주는 소주병을 공손하게 쥐고 잔을 채워줬다. 넘칠 듯 말 듯 채워진 술잔을 보고 유성학이 피식 웃었다.
“빨리 취하게 해서 정보 캐내려고?”
“저, 그런 하수 아닙니다, 선배님. 쭉 들이키시고 훌훌 털어내시라고 드린 겁니다.”
“그렇다고 치자고, 흐흐.”
실실 웃던 유성학이 입가에 가져간 잔을 단숨에 털어 비웠다.
“크으··· 힘들지. 많이 힘들지. 부채도 많고, 물건도 잘 안 팔리고··· 흐흐.”
“물건이 안 팔린다뇨? 매출이 그렇게 높은데?”
“모르면서 묻나? 해동물산 해외 네트워크에 배재훈 부회장님과 네 성격이면 서울부터 런던, 바르샤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안 가리고 전부 다 쑤셔봤을 텐데?”
눙치며 물었다가 유성학에게 정곡을 찔린 고승주는 거꾸로 세워진 빈 맥주 글라스 두 개를 바르게 놓은 뒤 소주병을 새로 따서 잔에 가득 채웠다.
“이거 마시고 서로 속 터놓고 얘기하죠.”
“좋지.”
쨍 소리를 가볍게 내며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글라스에 가득 담긴 소주를 거침없이 비웠다.
“하아-, 선배님 말씀대로 런던부터 서울까지 전부 뒤졌습니다. 대주물산 해외법인을 통한 대주자동차 허위 매출 자료도 제법 확보됐고요.”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쉰 고승주의 대답에 유성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답군. 그 집요함과 꼼꼼함··· 그게 맘에 들어서 대주에 올 때 함께 데려오고 싶었는데, 흐흐.”
“어쩔 수 없지요. 회장님께서 절 아들처럼 키워주셨는데 배신할 수는 없잖습니까, 흐흐.”
취기가 제법 오른 두 사람은 그 옛날 젊었던 시절의 술자리에서처럼 서로를 보며 낄낄 웃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는 못했다.
“대한신용유통도 알아봤습니다. 그쪽에서 대주그룹 출신 임원들이 세운 건설회사에만 일감을 준 이유가 있더군요. 런던 쪽도 파보고 있으니 조만간 끝을 볼 것 같습니다.”
“호오, 거기까지 쑤셔봤으면 볼 장 다 본 거 아닌가? 검찰이든, 청와대든 투서 날리면 끝날 텐데 왜 날 보자고 했나?”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는 유성학과 달리 고승주는 고개를 저었다.
“끝장을 내도 뒷수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내세워 대주그룹 계열사들을 먹겠다?”
유성학의 거친 대꾸에 고승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성학은 고승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길을 거두고 빈 잔에 채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자발적인 배신자는 될 수 없어. 너, 아니 해동그룹이 자료를 확보하고 회장님을 멈춰 세운다면 뒷수습에는 협조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유성학은 휘적휘적 방을 나갔다. 고승주에게 최소한의 호의이자 불가능에 가까운 무거운 숙제를 남겨둔 채로.
***
해동종금 본사로 출근한 나와 박태진은 조영찬과 함께 대주그룹의 CP와 회사채 발행 현황을 점검했다.
“40억 달러 유치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1조 원이나 늘리다니···.”
CP든 회사채든 이름만 다를 뿐 결국엔 빚문서다. 40억 달러 비자금을 끌어들이자마자 빚돈을 잔뜩 끌어들인 대주그룹의 꼬라지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만 흘렸다.
“대주증권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증권사까지 끌어들여서 물량을 풀었더군. 강 회장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신사 같은 조영찬이 이렇게까지 거칠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돈놀이를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들에게 부실 상품을 팔아치운 강오중 때문이겠지.
“쓰러뜨릴 수밖에 없겠군요.”
“더 놔두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부회장님.”
암세포는 자라면 안 되는 생명이니 조기에 잡아야 한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우리의 의견에 조영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재훈이 형님이 런던 쪽에서 빨리 정보를 가져와야 할 텐데···.”
지금 이 시간에도 해동물산 런던법인 담당자들은 대주그룹 런던법인 담당자들과 접촉해서 정보를 캐내고 있다. 그럼에도 런던 BFC의 정보는 쉽게 나오지 않고 있어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침음성을 흘리는 조영찬, 굳은 표정의 박태진과 함께 커피를 마시던 나는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뭔가 생각난 거라도 있나?”
“아뇨. 어제 본부장님과 정보교환을 하던 중에 직접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고 본부장이?”
조영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건가?
“네. 직접 나서겠다고 해서 같이 하겠다고 했는데 저는 나중에 나서야 한다고 거절당했습니다.”
“흠··· 유성학이를 만난 건가···.”
침음성을 흘리던 조영찬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박태진도 눈을 껌뻑거리는 게 모르는 사람 같았다.
“유성학이요?”
“그 친구, 예전에···.”
조영찬이 유성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던 중 문이 열렸다.
“본부장님?”
“자네가 여긴 웬 일인가?”
나와 조영찬은 문을 열고 들어온 고승주를 맞았다. 고승주와 함께 자리에 앉은 우리는 새로 세팅된 차를 마셨다.
“자네, 어제 유성학이 만난 것 같던데 어떻게 됐나?”
“부회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차를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은 고승주가 눈을 껌뻑거렸고, 조영찬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금 이 이사 얘기 듣고 짐작한 걸세. 대주그룹 본사에서 자네가 혼자서 만날 놈, 유성학이밖에 더 있나?”
“···그러셨군요.”
고승주가 쓴웃음을 짓는 걸 보고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아냐. 어제 네가 참아줬으니 믿고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다. 누군지 알려주지도 않고 고집을 피운 내 잘못도 있으니 됐어, 하하.”
손을 내저은 고승주의 다독임에 나는 고개를 들고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유성학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대주그룹 비서실 기획본부장일세. 예전에는 해동물산 섬유부 과장이었지.”
“우리 회사 출신이라고요?”
고승주 대신에 나온 조영찬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해동그룹만큼 임직원들 잘 챙겨주는 회사도 없는데 왜 이직을 했단 말인가?
못 믿겠다는 표정의 내게 조영찬이 코로 침음성을 길게 내쉬고서야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해동은 지금껏 재무건전성을 지키고 기술을 개발하는 데만 집중했네. 당연히 사세 확장은 꿈도 꾸지 못했지. 유성학 그 친구는 그런 해동이 답답하다고 대주로 옮겨갔고.”
유성학 이 사람,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캐릭터가 특이했다. 평범하게 월급 받고 일하는 샐러리맨이 아니라 꿈도, 목표도 확실한 개척자의 피가 흐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 분이 있었군요.”
“내 사수였던 양반인데 대단한 분이다. 70년대 중반 때 미국 의류업체에 원단 납품으로 500만 달러를 수출했어. 능력도 좋지만 자부심도, 자존심도 강해서 나 혼자 만난 거다.”
“아···.”
고승주의 대답을 듣고서야 왜 혼자서 만나려고 했는지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대주그룹의 핵심 간부까지 올라간 사람이니 조직을 배신해야 하는 딜레마가 얼마나 무겁겠나? 그 자리에 내가 나갔다면 유성학에게 과부하가 걸려서 판이 망가질 수도 있었다.
내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리는 사이 조영찬이 입을 열었다.
“유성학이, 괜찮은 친구였지. 불같은 성질만 눌렀다면 해동그룹 비서실장 자리는 고 본부장이 아니라 그 친구가 꿰찼을 걸세.”
조영찬의 말에 나도, 박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던 70년대에 원단 수출로 500만 불을 찍었고, 대주그룹 비서실 기획본부장까지 올라갔으면 더 말해 뭐하리.
우리를 보며 쓴웃음을 짓던 조영찬이 고승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친구, 어때 보이던가, 강 실장?”
“우리가 자료를 확보하고 강 회장을 넘어뜨리면 뒷수습에는 협조하겠다고 하더군요.”
질문을 한 조영찬이나 대답하는 고승주 모두 얼굴이 밝지 못했다.
“그러겠지. 그 친구 성격에 자기 주군을 저버리는 짓은 못할 테니.”
“그래도 유 선배만큼 인망도 실력도 좋은 사람, 대주에서 보기 드뭅니다. 우리가 대주그룹을 무너뜨리고 나면 유 선배를 앞세워 내부 동요를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인수합병 과정의 진통은 줄어들 겁니다.”
적장 중 능력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앞세우는 건 패배한 적들을 포용할 때 쓰는 교과서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주그룹을 무너뜨리려면 비자금 정보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고 말하려던 내 입을 고승주가 손을 들어 막았다.
“오기 전에 배 부회장님과 만났는데 런던법인에서 현지시각으로 한 시간 전에 정보를 확보하게 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나와 조영찬은 입이 떡 벌어졌다. 정보를 확보하게 됐다니?
“사실입니까, 본부장님?”
“그래. 대주그룹 런던법인 사람들이 전부 우리 손을 잡은 게 아니어서 비자금, 아니 런던 BFC 자료를 빼내는 데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라고 했어. 원본이 아닌 사본이지만 자료가 전부 확보되는 대로 국내에 들여올 거다.”
런던 BFC 자료를 확보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주일 정도는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도 유성학이라는 분이 말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본부장님. 그렇게 되면 대주그룹을 무너뜨리고 나서 다시 회생시키는 과정이 힘들어집니다.”
기업을 움직이는 건 사람이다. 그 콧대 높은 대주그룹 임직원들의 사보타주를 막고 협조를 이끌어내려면 유성학을 확실히 옭아매야 했다.
걱정을 드러낸 우리와 달리 고승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양복 재킷 안에 손을 넣고는 뭔가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놨다. 그걸 본 우리는 크게 뜬 눈으로 고승주를 바라봤다.
“역시 자네답구먼, 허허.”
“유 선배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요, 하하.”
고승주가 탁자 위에 놓인 녹음기 버튼을 눌렀고, 내용을 들은 우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승자의 기쁨을 누렸다.
***
“유성학 이놈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는 강오중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지금껏 봐온 모습과 달리 자신과 다른 뜻을 비친 유성학의 최근 모습에 의심이 생겨서 심부름꾼을 붙여뒀는데 고승주와 같은 일식집에 들어갔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던 강오중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삭이고 수화기를 들었다.
“황 실장, 호텔로 오게.”
10여 분 뒤, 집무실로 올라온 황병식을 맞은 강오중은 책상에서 일어나 회의용 테이블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이거부터 보게.”
강오중이 넘겨준 사진을 본 황병식이 의아해했다.
“유 본부장 아닙니까?”
“그놈, 우릴 배신한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황병식이 흠칫했다.
“큰일이군요.”
“그래. 내 생각엔 그놈을 이용해야겠어.”
이어지는 강오중의 지시를 들은 황병식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회장님?”
“이렇게 된 이상 해동 놈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네. 배신자를 이용하라, 병법의 기본 아닌가?”
강오중의 질문에 황병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추가 자금 조달은 더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척하면 척이군. 수고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던 황병식을 강오중이 불렀다.
“이번 회사채와 CP 발행 물량 말인데··· 생각보다 적더군.”
황병식이 그대로 돌아서서 강오중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아냈다.
“현재 시중의 유동자금을 고려하면 한꺼번에 대량으로 발행하는 건 우리 CP와 회사채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추가발행을 준비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강오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갑자기 확 끌어들이면 시장에서도 의심할 테고 정부에서도 또 난리를 칠 테니 숨 고르기를 하는 게 좋겠지. 가 봐.”
“예.”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온 황병식은 평소와 달리 차를 타지 않고 길을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나 황병식이야. 그래? 그렇게 해. 쓸데없는 소리. 너희들이나 잘해.”
혼잡한 사람들 틈새에서 통화를 마친 황병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처리돼야 할 텐데···.”
대주그룹 본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황병식.
그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함이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