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49th. 결혼도 일인 사람들 (2)
이성민이 스탠바이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양가의 혼주 두 명은 하객들을 맞지 않고 조용한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안사돈이 내색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쓰더군.”
“안사람한테는 미안할 뿐입니다. 그 사람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하연이를 데려왔으니까요.”
이대수와 장호건 모두 황나연이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들까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황나연은 싫은 티를 안 내고 하객들을 받아주고 있었다.
“자네 자식들은 안 왔더군.”
“다들 출장 보내뒀습니다. 아이들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더군요.”
장호건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이대수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황나연이야 나이도 어느 정도 차서 자제할 수 있겠지만 혈기 넘치는 장호건의 자식들은 통제가 안 될 테니 안 오는 게 훨씬 나았다.
“우리 장손며느리 키우느라 고생했네, 사돈.”
“사돈어른도 제 사위 키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대수와 장호건은 비로소 서로의 고생에 대해 위로를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오늘 결혼의 주인공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방황했던 장손을 감싸주느라, 밖에서 데려온 큰딸을 지켜주느라 고생한 걸 알기에 두 남자가 부모로서 상대방에게 건네는 위로는 빈말이 아니었다.
“아이들 신혼여행, 용케도 허락해줬더군.”
“마음 같아서는 전세기라도 잡아주고 세계 일주를 시켜주고 싶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요.”
이대수의 말에 장호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두 남녀는 오늘 식이 끝나면 이대수에게는 장남 내외, 장호건에게는 친구 내외인 고인들의 납골당에 가서 인사를 올린 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다.
재벌가답지 않게 웬 제주도냐고 하겠지만 지금은 외환위기 시국이다.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면 상류층의 낭비라고 손가락질 당할 일이기에 장호건도, 이대수도 두 남녀의 청을 선선히 수락해줬다.
“아이들 결혼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두 아이가 하나부터 열까지 잘 챙겼으니 말이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히 말하게, 사돈.”
재벌들의 결혼식은 또 다른 비즈니스 장소다.
경사스러운 날에도 회사 일을 챙겨야 하는 고달픈 인생들이지만 어쩌겠나? 자신들이 일궈나갈 회사와 임직원들의 운명이 자신들에게 걸려있는 것을.
이대수가 멍석을 깔아주자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돈어른. 조만간 4대 회계법인의 실사를 통해 신성생명의 주가를 산정할 겁니다.”
“얼마나 뽑아낼 건가?”
“주당 70만 원까지 끌어올릴 겁니다. 그 뒤에 제 명의로 된 신성생명 주식을 출연해서 신성자동차 부채를 털어낼 거고요.”
장호건의 계획에 이대수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회계법인 대표들에 은행장들 주머니가 터졌겠군, 흐흐.”
신성생명이 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 있는 회사라지만 주당 70만 원이면 시가총액만 해도 신성전자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그 주가를 뽑아내고 그 주식을 빚 대신 내놓겠다고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렸을지 이대수가 모를 리 없었다.
음침하게 웃던 이대수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물었다.
“은행권 놈들 구워삶아서 자네 주식으로 빚 털어내면 신성자동차를 우리가 인수해달라는 거겠지?”
이대수의 대답에 장호건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를 놓쳐서 자신이 아끼던 자동차 사업을 토해내게 생겼으니 얼마나 안타깝겠나?
“예. 8천억 원만 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장호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신성그룹의 역사에 이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까? 허나 지금은 버릴 건 버리고 살릴 건 살려야 할 때였다.
이대수 또한 장호건의 자동차 사랑을 알았기에, 이제는 장손의 장인이 됐기에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협상 마치는 대로 언질 해주게.”
“예, 사돈어른.”
***
양가의 가장 위에 있는 혼주들이 이야기를 마치고 방을 나올 무렵.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닐세. 조실부모한 조카 혼주 서주느라 자네가 애쓰는구먼, 허허.”
정장을 갖춰 입은 이명진과 한복을 입은 정유민은 잠시 자리를 비운 이대수를 대신해서 이성민의 혼주를 서주느라 명진호를 응대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회장님. 먼저 간 형님과 형수님 대신에 저희 내외가 서게 돼서 두 분께 미안할 뿐입니다.”
“자네도 자네지만 이 사장이 참 탐나는 사람이었지, 허허.”
“예. 성민이를 먼저 간 형님 대신으로 여기고 함께 잘 해보려고 합니다, 하하.”
잠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이명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명진호에게 말했다.
“앞으로 자동차 시장에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살살해주십시오, 하하.”
표면상으로는 자신과 금석호가 이끄는 것처럼 보여도 오늘 식을 올리는 장조카도 함께 이끌어갈 자동차 사업이다.
자식들처럼 아끼는 장조카가 좀 더 순탄히 자리 잡도록 도와주고 싶었기에 이명진이 부탁했지만 돌아온 건 명진호의 핀잔이었다.
“예끼, 이 사람아! 자네 집안 돈으로 해동자동차 키우면 우리 장남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 아닌가? 자네가 한 말,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일세, 으허허.”
농 반 진 반으로 이명진과 명진호가 사업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이대수가 다가왔다.
“아이고, 형님. 오셨습니까? 허허.”
“이 사람아, 자네 차남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더러 자동차에서 봐달라고 하더구먼.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말이야.”
명진호의 쓴웃음을 보며 이대수가 미소를 띠었다.
“해동자동차가 정상화됐어도 태현 생산량의 반밖에 안 됩니다, 형님. 우리 차남이 부탁할만한데 무슨 엄살을 피우십니까? 으허허.”
껄껄 웃는 이대수도 이명진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집안 장손이 꽃길을 걷길 바라고 배려한 게 아닌가?
스탠더드 캐피털이 장손의 금고인 것을 알아도 그리 말했을 차남이었기에 이대수는 흐뭇한 눈길로 이명진 내외를 바라봤다.
“해동그룹 곳간에 철철 넘치는 돈으로 공장 짓고 자동차 뽑으면 우리가 버티겠나? 그럴 게 아니라 다른 놈들 정리하고 해동과 태현이 국내 시장 반으로 나눠 먹세, 흐흐.”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시기가 맞고 기회가 맞아야지요, 허허.”
“눙치지 말게, 이 사람아. 흐흐.”
이대수와 명진호가 껄껄 웃으며 담소 나누듯 얘기했지만 재벌가의 결혼식은 보통 결혼식과 달리 온갖 거래가 오가는 장소다. 주변을 살펴보던 이대수가 명진호에게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서 조용히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어떠십니까?”
이대수의 제안에 명진호가 주변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구먼. 팔순을 넘겨서인지 인자는 오래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아니 그런가?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허허.”
되도 않는 엄살을 피우며 귀빈실로 들어간 이대수와 명진호는 종업원이 내준 차를 마셨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격세지감이더군. 자네가 이렇게 날아오를 줄은 몰랐어.”
“늘그막에 빛을 보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자식들 밥 굶을 걱정은 지웠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허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두 노인은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차 한 모금씩을 더 축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을 곳은 태현과 해동뿐일 걸세. 한 놈은 탈락했고, 다른 한 놈은 오늘내일, 나머지 한 놈은 대통령한테 밉보이지 않았나?”
명진호의 말에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룡그룹은 부실덩어리였던 미룡자동차를 대주자동차에 넘기고도 장손의 통 큰 투자를 받고서야 그룹 해체를 간신히 면했다.
신성그룹은 방금 전 장호건에게서 들은 이야기대로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신성자동차로 분리한 뒤, 주가를 부풀릴 신성생명 주식을 이용한 부채탕감 협상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대주자동차를 앞세워 미룡자동차를 삼킨 대주그룹은 금모으기 운동 때 일로 그룹 전체가 대통령에게 밉보여 자구책 마련에 정신이 없다.
결국,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을 곳은 명진호의 말대로 해동과 태현밖에 없었다.
“형님 말씀이 맞긴 합니다. 태현은 기존 역량이 있고 우리는 자금력에서 밀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강오중 그 친구가 만만치 않다는 건 형님도 아실 겁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떴던 명진호가 이대수에게 물었다.
“그놈이 비자금을 쓸 수도 있단 말인가?”
“확실하진 않지만 경우의 수에는 넣어둬야 할 겁니다. 형님도, 성민이 장인이 된 장 회장도 아도자동차 인수 때 썼던 방법 아닙니까?”
“흠···.”
턱을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리던 명진호가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비웠다.
“알겠네.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세.”
자동차업계의 합종연횡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인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의 장손이 5년간의 지고지순한 연애 끝에 연인을 향해 꽃가마 타고 장가가는 날이다.
남의 집안 잔칫날에 혼주를 잡아두고 무거운 이야기를 길게 늘여 뺄 수는 없는 법. 명진호는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형님. 시간은 넉넉합니다, 허허.”
이대수 또한 그때서야 편안한 표정으로 명진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동차업계 재편은 장손 내외가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의논해도 될 일이라 여기는 이대수였다.
***
시간이 되어 결혼식이 시작됐다. 같은 원형 테이블에 앉은 박태진과 유현정, 선해철과 클레어 두 커플은 주례 앞에 서 있는 이성민, 장하연 부부를 바라봤다.
“저놈 기저귀 갈아준 게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 참 빨리 흘러가네, 후후.”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제가 삼청동 들어갔을 때 형, 형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다녔는데 가장이 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하하.”
이성민은 선해철에게는 귀여운 조카요, 박태진에게는 막내 동생 같은 녀석이다. 그 꼬맹이가 짧은 세월동안 시궁창까지 떨어졌다가 훨훨 날아올라온 과정까지 곁에서 지켜봐왔기에 오늘 결혼식을 보는 두 사람은 흐뭇하기만 했다.
“조니가 가장이 되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썬. 처음 봤을 땐 철부지 같았는데···.”
유현정의 앞인지라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클레어 또한 이성민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픽사 투자 건으로 자신과 날을 세웠던 20대 초반의 꼬마가 이제는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갑부가 된 것도 모자라서 청춘사업까지 성공하지 않았나?
“그런데 썬, 조니 기저귀 갈아준 거 사실이에요?”
“왜?”
“우리 애들 기저귀도 나랑 같이 갈아줄 거죠?”
클레어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던진 질문에 선해철이 미소를 띠었다.
“그 솜씨 어디 도망 안 갔으니까 걱정 마, 흐흐.”
“아주버님 보니까 부럽네요. 오빠, 우리도 식 올리면 노력하자. 알았지?”
“어?”
자신의 질문에 벙찐 박태진을 유현정이 새초롬한 눈길로 바라봤다.
“나도 빨리 애 갖고 싶거든. 클레어 씨처럼 쌍둥이 낳으면 좋겠어.”
“노력해볼게, 현정아.”
마른침을 삼킨 박태진의 얼굴을 보며 선해철이 씩 웃었다.
“태진이 너, 열심히 노력해야겠어? 쌍둥이 갖는 거, 보통 일 아닐 텐데, 흐흐?”
***
정신없이 결혼식을 마친 우리는 부모님의 납골당에 가서 인사를 올린 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네, 할아버지. 잘 도착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일 치르느라 고생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어.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제주도 고려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짐을 푼 나는 할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친 뒤, 장호건에게도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올리고서야 침대로 돌아왔다.
“휴우, 어떻게 결혼식 치렀는지도 모르겠어.”
짐을 풀고 침대에 걸터앉은 장하연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나 또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곁에 걸터앉았다.
“녹화 테이프로 나오면 그거 보자.”
장하연만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었다. 나 또한 결혼식 그 순간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주례로 모신 대학 시절 은사님 앞에서 장하연의 손을 장호건이 건네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필름이라도 끊긴 것처럼 백지장 같았다.
침대에 앉아있던 나는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웠고, 장하연도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나는 내 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있는 장하연을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결혼하니까 어때?”
“좋지. 이제야 누나가 내 여자라는 걸 사람들한테 알렸는데.”
빙긋 웃는 내게 장하연이 뽀뽀를 해줬다.
“나도 좋아. 네가 내 남자가 됐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거든, 후훗.”
“앞으로는 서로 자기라고 부르자. 정식으로 부부도 됐고 신혼이니까. 알았지?”
“좋아, 자기야.”
대답과 함께 미소를 드러낸 채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던 장하연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쉴 만큼 쉬었으니 일하러 가야지. 우리, 신혼여행 겸해서 출장 온 거잖아.”
장하연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겸한 출장을 온 것이었다.
외환위기라서 대중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어 국내 여행을 택한 것도 있었지만 제주 고려호텔과 골프장 외에도 기존의 해동물산 레저사업부 산하 리조트와 골프장을 챙기려고 온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오늘은 그냥 쉬라고 하셨어. 오늘 하루만 쉬고 일하자, 누나.”
“안 돼. 해동그룹 장손며느리가 놀아서야 되겠니?”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여자의 일 사랑을 누가 말리겠냐마는 ‘공식 신혼 1일차’인데 벌써부터 일에 파묻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도 하루는 쉬어줘야지. 게다가 우리,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아··· 그러네.”
우리 둘 다 결혼식 때 긴장 타서 속이 울렁거릴까봐 아침식사로 사과 반쪽씩만 나눠 먹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허기가 잔뜩 밀려왔는지 장하연이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러니까 우리, 하루만 쉬면서 재충전하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장하연이 날 보며 피식 웃었지만 우리 같은 재벌들도 다 먹고 살자고 일하며 사는 거다. 모처럼 제주도에 왔으니 이 동네 별미를 먹자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