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48th. 영역 확대 (4)
미룡그룹에 대한 스탠더드 캐피털의 3조 4천억 원 투자 계약이 알려진 뒤로 나와 선해철, 박태진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투자해달라는 곳이 많아도 문제네요.”
“그러게 말이다. 어째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일이 더 늘어나는 것 같어.”
나와 선해철은 책상에 쌓인 투자 요청 제안서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룡그룹에 투자를 한지 한 달이 조금 넘는 사이에 우리 사무실에 들어온 투자 요청 제안서만 100여 부였다.
그 중 투자 여부를 결정한 곳만 마흔 곳이 넘고 투자액수와 조건을 조율하는 곳이 십여 곳이었는데 상속세 납세자 순위권을 기록할 ‘오! 라면’의 ‘오성식품’, 교부문고로 유명한 ‘교부생명’도 있었다.
한참동안 서류를 검토하던 우리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스탠더드 캐피털 이성민 이사입니다.”
[아, 이 군입니까? 나, 김OO이오, 허허.]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너털웃음의 주인공 때문에 깜짝 놀랐다.
“대통령님?”
[아, 아직은 당선인입니다. 며칠 뒤 취임식을 마쳐야 대통령이오, 허허.]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겪는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게 될 줄이야.
‘대통령이야?’
‘대통령님입니까?’
눈을 크게 뜬 채 입 모양으로 묻는 선해철과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예··· 그런데 어찌 제게 전화를 하셨는지···?”
[내 이 군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를 했어요. 언짢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허허.]
대통령이 내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내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라는 걸 알아챈 건가?
엉키려는 실타래를 멈춘 나는 얼른 고개를 푸드득 흔들었다.
“아닙니다, 대통령님.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래요. 며칠 뒤에 취임식을 마치면 곧바로 트라이엄프의 헨리 로이스 의장과 만나서 100억 달러 투자 조인식을 치를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대통령님.”
[전부 이 군의 조부님 덕이지요. 여하튼, 조인식을 마치면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산업에 힘을 쏟아야 할지 미스터 로이스의 고견을 구하려고 합니다.]
김 대통령은 예전에도 손정의나 빌 게이츠 등과의 일대일 환담을 나누며 그들에게서 미래 산업 트렌드에 대한 조언을 들었었다. 이번 생에는 그 첫 타자가 100억 달러를 투자해줄 헨리가 된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이 군이 미스터 로이스의 통역을 맡아줬으면 합니다. 할 수 있겠소?]
“예?”
소름이 쫙 끼쳤다. 헨리와 나의 관계를 알고 주문하는 건가? 아니면··· 당신이 재벌들을 이렇게 부린다는 걸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가?
[안 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대통령님. 전문 통역사 분들도 많으실 텐데 제가 통역을 맡아도 될는지···.”
통역을 맡아야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걸 돌려서 물은 내게 당선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 대선에서 이 군의 조부님 덕을 크게 봤소. 미스터 로이스와의 관계도 이 군의 조부님 덕분에 맺을 수 있었고 말이오.]
대통령의 말을 들으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당신의 당선을 위해 내가 밑바탕을 깔아뒀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나는 웃음을 꾹꾹 누르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난 이 군도 그 미스터 로이스와 구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군이 미스터 로이스와 구면이 아니면 그 자리를 통해 인맥을 다져두라는 겁니다, 허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올 뻔했다. 대통령은 나와 헨리의 관계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귀중한 기회를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소. 취임식 날 봅시다, 허허.]
“예, 대통령님.”
통화음이 끊어진 걸 확인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놨다.
“푸하하하!”
허리까지 굽히며 낄낄 웃던 내게 선해철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겨서 그래? 통역은 무슨 소리야?”
“그렇습니다, 이사님. 대통령님께서 왜 이사님께 통역을 하라고 하신 겁니까?”
박태진까지 답답해죽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보탰지만 나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게, 그게··· 푸흐흐흐!”
한참동안 웃던 나는 간신히 웃음기를 가라앉히고서야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께서 취임식 당일 오후에···.”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알려주자 선해철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소개시켜주지 않아도 될 텐데!”
“하하하하! 일이 재밌게 만들어졌습니다!”
선해철과 박태진도 큰소리로 한참동안 웃어댔다.
얼마나 웃기겠나? 대통령은 날 생각해준다고 마련해준 자리인데 나와 헨리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이가 아닌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우던 웃음이 가라앉을 무렵, 선해철이 말했다.
“그래도 잘됐네. 이번에 공식적으로 너와 헨리가 안면 터두면 트라이엄프와 해동의 제휴도 자연스러울 거 아냐?”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사님. 미스터 로이스와 이사님의 관계를 수면 위에서 포장하기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빙긋 미소를 띠었다.
“제 생각도 같아요. 이번 일로 헨리와 공식석상에서 안면을 트는 모양새가 나오면 헨리와 만나는 게 자연스러워질 테니까요. 신성 쪽에서 우리와 트라이엄프의 관계를 의심할 일도 없어질 테고요.”
“너, 대통령한테 절이라도 해야겠어. 흐흐.”
선해철 말대로 청와대 방향으로 절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신성그룹의 눈과 귀를 가릴 절호의 기회였다.
***
며칠 뒤.
1998년 2월 25일 오늘은 제 15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는 국내외에서 참석한 귀빈들이 자리를 장식해주고 있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경제·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품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설은 ‘이번 외환위기의 책임은 재벌들과 전 정권, 현재의 야당에 있다. 우린 국민들과 함께 너희들이 싸놓은 오물더미를 치워나가겠다.’는 말을 아주 점잖게 풀어놓은 것이었다. TV를 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 좀 씁쓸하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 해동그룹이야 원래부터 재무구조 챙겨왔지만 다른 놈들은 주제도 모르고 문어발 놀이 했잖아.”
“그렇습니다, 이사님. 우리 그룹이야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인정할 만큼 건실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십니다, 하하.”
선해철과 박태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동그룹이야 튼튼한 재무구조 덕분에 문어발을 해도 욕할 곳이 없지 않은가?
“그러려니 해야겠네요. 시간 되면 청와대 다녀올게요.”
TV를 끄고 일에 집중하던 나는 약속시간에 맞춰 직접 차를 몰고 청와대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입니다. 대통령님 지시로 오늘 투자 조인식에 통역으로 참석하게 됐습니다.”
청와대 정문을 지키는 경찰은 운전석에 앉은 내게서 공문과 주민등록증을 받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해도 좋으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공문과 주민등록증을 돌려준 경찰은 반대편에 있던 경찰과 함께 정문을 열어줬다.
“수고하십시오.”
차를 몰고 들어간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었다.
“이성민입니다, 실장님. 지금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일정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왔군요.]
“국가에 중요한 일이니 만전을 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사람을 보내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몇 분 정도 시동을 끄지 않고 기다린 내게 양복을 입은 직원이 도착했다.
“이성민씨입니까?”
“네. 제가 이성민입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나를 보며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는 없습니까?”
“직접 몰고 왔습니다. 제 나이 서른도 안 됐는데 운전기사는 너무 이르죠, 하하.”
허니문이 시작된 갓 태어난 권력이다. 서른도 안 된 놈이 운전수를 끌고 오면 온갖 뒷말이 나오고 트집잡힐 구실이 되기에 장하연에게 허락받고 손수 차를 몰고 온 것이었다.
직원도 대충 눈치를 챘는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청와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들어간 나는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대통령님.”
“고맙소, 이 군. 어서 오시오”
인사를 받아준 대통령은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이 군이 지금껏 해동그룹 안팎에서 여러 성과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젊은 지금부터 걸출한 성과를 냈으니 앞으로는 얼마나 더 클지 기대됩니다, 허허.”
나는 두 손으로 대통령의 손을 잡았고, 대통령은 나머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살다 살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게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요. 잠시 뒤에 미스터 로이스가 도착할 테니 그때 맞춰서 이동합시다.”
인사를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아서 직원들이 가져다 준 다과로 긴장을 풀었다. 오늘의 투자 조인식은 전국에 생중계되니 한 점의 실수도 없어야 했다.
***
잠시 후.
투자 조인식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대통령 일행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입니다, 헨리.”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헨리와 악수를 나눈 대통령은 뒤에 있던 나를 보며 손짓을 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옆에 선 나를 헨리에게 소개시켜줬다.
“이 친구가 오늘 헨리의 통역을 맡을 친구입니다. 이 군.”
“예,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로이스.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의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나는 헨리에게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깍듯이 예의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헨리 또한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 헌데··· 스탠더드 캐피털이면 미국에 본사가 있는 그 회사입니까?”
“예. 가업을 잇기 전에 경험을 쌓고 싶어서 입사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나와 헨리는 우리가 지금껏 주고받았던 각자의 개인사를 초면인 이들끼리 나누는 얘기처럼 대화했다.
“얘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몇 분 정도의 대화였지만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대통령이지 내가 아니었다. 예의상 사과를 건넨 헨리에게 대통령은 너그러운 미소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니오, 헨리. 이 군 정도 인재면 헨리도 알아봤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허허. 그럼 이제 조인식을 시작합시다.”
“그러시죠, 하하.”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투자 조인식이 시작되었다.
탁자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만년필로 계약서에 서명을 한 뒤, 청와대 직원들이 바꿔준 계약서에 다시 한 번 서명을 했다.
“이로써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100억 달러 투자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음을 국민 여러분들께 공표하는 바입니다.”
사회자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조인식장 곳곳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달러가 없어 휘청거리는 이 나라에 10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왔으니 얼마나 기쁠까?
무엇보다 이 100억 달러 투자는 1년에 트라이엄프가 챙길 이자가 6억 달러에 불과했다. 돈의 씨가 마른 한국의 금리를 따라갔다면 1년에 20억 달러가 훨씬 넘는 이자수익을 챙길 수 있는데도 헨리는 돈 대신 이름값을 선택한 것이었다.
‘헨리한테 돈 벌 거리 좀 챙겨줘야겠네. 8월쯤에 러시아 모라토리엄 터지고 LTCM(롱 텀 캐피털 매니지먼트)이 망할 테니 그 전에 미국 가서 얘기해줘야겠어.’
조인식을 지켜보며 향후 사업방향을 구상하던 내게 청와대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이성민 씨?”
“아, 네.”
“10분 뒤에 대통령님과 로이스 의장의 환담이 진행될 겁니다. 방송으로 나갈 텐데 준비는 되셨습니까?”
내려다보듯 대하는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나? 호가호위라고 허니문이 시작된 대통령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미소를 띠는 것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통역 과정에서의 실수는 없을 테니 염려 놓아도 되십니다, 하하.”
국내파이긴 해도 영국 왕족이나 귀족들이 쓰는 용인발음으로 무장한 나다. 보란 듯이 대답한 나는 못마땅한 표정의 직원과 함께 환담 장소로 이동했다.
***
소파에 앉은 김 대통령과 헨리는 다른 통역사와 내가 각자의 뒷자리에 앉고서야 환담을 시작했다.
“어려운 때에 도움을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헨리.”
“아닙니다, 대통령님.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투자한 거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미래의 외교부 장관이 될 대통령의 통역사와 나는 양쪽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부지런히 통역을 했다.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김 대통령이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거대투자회사의 대표이신 미스터 로이스의 고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대통령의 질문을 통역해준 내 말을 듣고 헨리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그 전에··· 통역을 맡고 있는 미스터 리의 의견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에 대통령과 통역, 그리고 방송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 있던 청와대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과 달리 헨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 한 모금을 축였다.
“미스터 리는 지역법인이지만 미국에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일원으로서 충분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또한 우리 트라이엄프에서 매력적인 투자처로 눈여겨보고 있는 해동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이기도 하죠. 그러니 이 나라의 경제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 중 한 명인 미스터 리의 의견부터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하하.”
껄껄 웃는 헨리와 달리 청와대 직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전국에서 TV를 보고 있을 시청자들에게 이 정권이 어떻게 어필될지가 결정될 테니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십시다. 기탄없이 말해보시오, 이 군.”
“예, 대통령님.”
침음성을 흘리던 대통령의 주문에 대답한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손.’
나는 현해탄 건너편에 있을 손정의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