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48th. 영역 확대 (3)
미룡그룹 저동 사옥으로 돌아간 서준석과 서동석은 이성민의 바람이라도 안 것처럼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미룡그룹 전 계열사의 합동 이사회 소집을 요청합니다.]
그룹의 의사결정권자들을 전부 모은 탓에 대회의실은 발 디딜 틈 없이 전 계열사 등기이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방금 전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와 투자 유치 협상을 하고 왔습니다. 그쪽의 요구사항부터 말씀드리자면···.”
서준석이 이성민과 선해철의 제안을 밝히자 장내는 흥분의 열기로 가득했다. 생각해도 말이 안 될 만큼 후한 조건이 아닌가?
“사, 사실입니까, 부회장님?”
“서준석 부회장님 말씀은 사실입니다. 옆에 있는 나도 똑똑히 들었으니까요.”
서동석의 지원사격에 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룹의 적장자를 내쳐야 그룹을 살릴 수 있다니···.
“그래서, 나더러 회장에서 물러나라는 거냐?”
회장석에 앉은 서원석이 서준석을 죽일 듯이 쏘아봤지만 사람 좋은 서준석은 서원석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두 형들을 보다 못한 서동석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서원석 회장님과 우리 그룹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점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2만 미룡그룹 가족들의 생계를 지키려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동석의 말대로 스탠더드 캐피털의 제안은 거부하는 놈이 미친놈이었다.
납품처인 미룡자동차를 대주그룹에 넘긴 이상 도려내야 할 중공업 사업이고 해동그룹의 온화한 문화라면 고용을 승계해줄 것이다. 나아가 해동그룹, 스탠더드 캐피털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모두가 눈치를 보던 중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미룡양회의 대표이사 강 사장이 손을 들었다.
“서준석 부회장님과 서동석 부회장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또한 본 이사는 서준석 부회장님을 미룡그룹의 신임 회장으로, 서동석 부회장님을 금융부문 부회장 겸 그룹 수석부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이 자리에서 제안하는 바입니다.”
“강 사장!”
최측근이라 여겼던 사람의 배신 때문일까, 서원석이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강 사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원석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룹을 살리기 위해선 회장님께서 용퇴하셔야 합니다.”
“이, 이···!”
이를 가는 서원석을 향해 고개를 숙인 강 사장도 이를 악물었다.
‘사과박스 사건은 서원석이 저질렀는데 조사는 내가 받아야 했어. 그룹을 살리려면 뇌물을 싫어하는 서준석 부회장님이 회장이 되고 서동석 부회장님이 옆에서 밀어줘야 해.’
재작년의 ‘미룡양회 사과박스 뇌물 사건’ 때문에 고초를 겪은 강 사장은 그룹의 쇄신을 위해 서준석이 키를 잡고 서동석이 보조해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강 사장이 손을 내리자 미룡그룹의 캐시카우인 미룡정유의 대표이사 박 사장이 손을 들었다.
“미룡양회 강 사장님의 제안에 재청(再請)합니다.”
‘미룡정유가 망가진 건 서원석의 자동차 사랑 때문이었다. 버는 족족 자동차에 꼬라박고도 빚만 남지 않았나? 다시 일어서려면 견실한 서준석 부회장님이 대권을 잡아야 해.’
박 사장 또한 회사가 먼저였기에 재청을 밝히며 손을 내렸다. 서준석의 옆에 앉은 서동석도 두 사장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본 안건에 재청이 나왔습니다. 삼청(三請)이 나오면 본 안건의 통과를 결의하겠습니다.”
서동석의 진행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준석의 최측근인 미룡건설 정 사장이 손을 들었다.
“삼청합니다.”
‘부회장님의 동남아 인맥이면 공사 수주는 어렵지 않아. 정유는 경기가 풀리면 괜찮아질 테니 부회장님과 내가 해외공사로 양회의 매출을 끌어주면 그룹은 금방 살아날 거다.’
서준석과 함께 동남아의 푹푹 찌는 공사현장에서 고락을 함께 하며 회사를 일으킨 정 사장 또한 자신이 모셔온 서준석이 그룹을 다시 일으켜주길 간절히 바라긴 마찬가지였다.
미룡그룹의 주력 3사 대표이사가 서준석의 회장 취임 요청을 마쳤고, 서동석이 다시 이사회를 진행했다.
“삼청이 나왔으므로 그룹 이사진 여러분들의 의견을 확인하겠습니다. 서준석 부회장님의 신임 그룹 회장 취임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전원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원 기립.
이 자리에서 찬반 여부로 살생부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칼을 빼든 서동석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강 사장과 박 사장, 정 사장도 서동석의 뒤를 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사장단들과 이사진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오직 서준석과 서원석뿐이었다.
“부회장님이 아니면 미룡그룹은 이대로 좌초될 겁니다. 회장을 맡아주십시오.”
“난 그룹을 살리기 위해 형님과 그룹이 절연해야 한다고 했지 그룹 회장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룹을 망친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무슨 낯으로 회장 자리에 앉겠습니까?”
서준석의 거절에 정 사장이 말했다.
“부회장님의 과오는 회장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스탠더드가 투자해주면 미룡건설 미분양 문제도 해결되는데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미분양 문제, 내가 아니라 스탠더드 캐피털이 해결해주겠다고 한 겁니다. 난 그룹 회장의 자격이 없습니다.”
서준석에게 서원석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주는 형이었다. 그런 형을 자신의 손으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회장 자리에 앉는 건 서준석에게 부담 그 자체였다.
“부회장님께서 회장님을 초대 회장님처럼 모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룹과 임직원들의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부회장님!”
“부탁드립니다, 부회장님!”
미룡건설 사장의 외침에 다른 이사진들이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큰소리로 서준석에게 부르짖었다.
서원석은 자신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쿠데타를 참지 못했다.
“회장은 나야! 나라고!”
“죄송하지만 큰형님은 더 이상 회장 자격이 없습니다.”
“뭐?”
서원석을 황당하게 만든 장본인은 삼형제 중 막내인 서동석이었다.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정치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까지 어겼잖습니까? 그룹이 일어서려면 회사에만 집중할 작은형님이 회장을 맡아야 합니다.”
“야, 서동석!”
서원석이 집어던진 물컵을 몸에 맞아 옷이 젖었지만 서동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성민 그 친구, 작은형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나를 볼 때와 달랐습디다.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었어요.”
“그래서 뭐!”
“한국법인의 선해철 대표,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님이 아들처럼 키웠고, 그 분 장손인 이성민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이성민이 작은형님을 믿고 있는데 형님이 계속 버티면 투자를 하겠습니까?”
서동석은 지금 서원석을 보며 대꾸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서준석은 잘 알고 있었다.
막내 사촌동생뻘이나 될 법한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포장마차에서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여온 친구의 눈빛이 아니었던가?
“작은형님이 회장 자리를 안 맡으면 그룹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작은형님이 회장 자리를 맡으셔야 합니다.”
서동석이 재차 권했고, 잠시의 침묵 끝에 서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형님.”
“너, 너···.”
서원석이 말까지 더듬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도 허리까지 숙였던 서준석이 몸을 바로세웠다.
“본 부회장은 모든 이사진들의 청을 수락하겠습니다. 단, 그룹이 안정될 때까지 급여 일체를 받지 않고 등기이사도 맡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의 이사님들을 비롯한 임원 분들도 급여의 절반을 삭감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찬성하십니까?”
서준석의 백의종군 요청에 서동석과 모든 이사진들이 크게 외쳤다.
“예, 회장님!”
단 한 사람, 서원석만이 망연자실한 눈길로 회의장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서준석 미룡그룹 부회장, 미룡그룹 신임 회장에 취임! 회생을 향한 여정의 끝은?]
[서준석 회장, 그룹 안정 전까지 전 임원들과 함께 백의종군 선언!]
[무혈 쿠데타에 쓰러진 서원석 회장! 미룡그룹 특수관계인에서 제외. 개인주주로만 남기로.]
[스탠더드 캐피털, 미룡그룹에 3조 4천억 원 수혈. 대한민국 경제의 사냥꾼이 될 것인가, 구세주가 될 것인가?]
주요 일간지들의 1면 기사들을 살펴보던 이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오, 형님.”
더 많은 가족을 살리고자 피를 나눈 형제를 몰아낸 ‘미룡그룹 동생들의 난’.
그 일의 발단이 자신의 장손이었기에 이대수는 고인이 된 서형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양놈들보다야 내 새끼가 낫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기에 자신의 장손이 대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돈만 쫓는 게 아니라 돈 이상의 가치도 얻겠다고 한 발 물러설 줄도 아는 대범한 놈이 아닌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신문을 정리하던 이대수에게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어른,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미룡그룹 서준석 회장입니다.]
“뫼시게.”
이대수의 외침에 서재의 문이 열리며 서준석이 들어왔다.
“강녕하셨습니까, 회장님. 그간 인사 올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닐세, 서 회장. 자네 형이 말아먹은 살림 추스르느라 나 같은 늙은이 찾을 겨를이 있었겠나? 다시 보게 돼서 반가우이.”
이대수는 서형곤이 죽은 지 20여 년만에야 그의 차남 서준석을 봤지만 늘 보던 사람처럼 반겨주며 소파로 옮겨 앉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 늙은이를 찾아온 연유가 뭔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님 말씀이 아니었으면 우리 미룡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말을 마친 서준석은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맨 바닥에 엎드려가며 절을 올렸다.
“그룹 회장씩이나 돼서 쉽게 몸 낮추는 거 아닐세. 어여 자리에 앉게.”
말과 달리 푸근한 이대수의 눈길을 받으며 서준석이 자리에 앉았다.
“투자 유치는 잘 됐는가?”
“오늘 아침에 계약을 체결했는데 며칠 뒤에 1차분으로 1조 2천억 원이 들어올 겁니다. 나머지 자금은 3월에 들어올 예정이고요. 스탠더드 덕분에 진통을 줄이면서 그룹을 재건하게 됐습니다.”
서준석의 밝은 표정을 보며 이대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구먼. 선친께서 일구신 회사 잘 일으켜 세우시게.”
“예, 회장님. 그런데··· 회장님께서 괜찮으실지 모를 청이 있습니다.”
“편히 말하게. 자네하고 내가 안면도 없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해동건설과 미룡건설의 사업 제휴를 부탁드립니다.”
서준석이 조심스럽게 꺼낸 요청에 이대수의 눈매가 부리부리하게 변했다.
“이유가 뭔가? 사업 얘기가 나왔으니 한 점 숨김없이 말해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회장님.”
자신을 뚫을 것 같은 이대수의 눈길에 서준석이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저희 미룡건설은 고급 건축에 강점이 있지만 국내 기반과 자본이 빈약합니다. 이 부분을 명진이 형님의 해동건설이 메워주게 해주시면 저희의 시공 노하우 일체를 공유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듣기에 따라서는 오만할 수도 있지만 이대수는 해동건설의 고급 건축 실적이 안 좋은 점이 늘 불만이었다.
그러던 차에 서준석이 이성민을 찾았다는 걸 듣고는 스탠더드 캐피털을 통해 미룡건설과 해동건설의 사업제휴를 도모하고 싶었다. 그 깐깐한 리콴유 총리를 비롯한 싱가포르 정재계가 인정할 만큼 고급 건축에 도가 튼 미룡건설 아닌가?
그럼에도 이성민과 스탠더드 캐피털의 입장을 생각해서 참고 눌러놨었는데 서준석이 알아서 찾아왔으니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허허, 우리 차남이 있었으면 자네 손잡고 방방 뛰었을 걸세. 내 잘 일러둘 테니 직접 만나서 잘 풀어보시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대수 또한 바라던 바였기에 고개를 숙인 서준석을 보며 껄껄 웃기만 했다.
***
미룡그룹에 대한 스탠더드 캐피털의 통 큰 투자 소식은 김 당선인에게도 흘러들어갔다.
“사실인가?”
“예. 스탠더드 캐피털 덕분에 미룡그룹의 회생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취임식이 끝나면 청와대 경제수석이 될 참모의 보고에 김 당선인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공적자금 쓸 곳이 줄어들어 다행이군.”
경제에 일가견이 있는 김 당선선인은 스탠더드 캐피털의 투자가 경제 재건에 큰 보탬이 됐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이 10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취임식 전까지 안 들어올 돈이기에 스탠더드 캐피털의 투자는 100억 달러만큼이나 값진 투자였다.
“그 회사 대표가 누구인가?”
“미국 본사 대표는 클레어 로렌스인데 한국법인 대표인 선해철과 부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보다 특이한 인물이 한국법인에 있습니다.”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 당선인의 귀가 쫑긋했다.
“특이한 인물?”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의 장손 이성민 군입니다. 그 친구가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이사라고 합니다.”
“이 회장 장손이?”
“예. 선해철 대표는 이 회장이 고교 시절부터···.”
참모에게서 선해철과 해동그룹과의 관계를 듣고 김 당선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이 군이 그 회사에서 일할 만하겠군.”
“예. 잠시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서울대 문과 수석입학에 해동백화점과 하이마트 컨설팅을 성공시켰습니다. 또래 재벌 후계자들에 비하면 실력은 검증된 셈이지요.”
참모의 대답에 턱을 매만지던 김 당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결심이 선 것 같았다.
“대통령 취임 당일 스케줄, 어떻게 되나? 헨리와의 미팅 말일세.”
“취임식 당일 오후에 헨리 로이스 의장과의 100억 달러 투자 조인식과 그에 이은 일대일 환담이 잡혀있습니다.”
“알겠네. 잘하면 이 회장에게 작게나마 줄 선물이 생길 것 같군.”
김 당선인의 알 듯 말 듯한 대답에 참모는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