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44th. 도장깨기 part.1 (1)
취중진담이라고 술기운이 올라오자 박태곤은 나에게 그간 쌓인 감정을 토로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를 겁니다, 이사님. 같은 땅에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연락 한 번 안 하셨습니까?”
“아하하하···.”
도쿄에서 헤어지고부터 근 3년간 연락 한 번 안 하고 지낸 내 잘못도 컸기에 나는 그저 겸연쩍은 웃음만 흘리며 박태곤에게 술을 채워줬다.
“그런데··· 정말로 1조 8천억 찍으신 거 맞습니까?”
“왜죠?”
“스탠더드 캐피털이 이사님께 그런 기회를 줬다는 게 솔직히··· 하하.”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던 박태곤을 보며 미소를 띤 나는 방에 가서 해동종금 통장을 가져왔다.
“어때요?”
통장 표지를 열어서 보여주자 시간이 지날수록 박태곤의 동공이 커졌다. 돈의 액수보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게 그런 기회를 줬다는 게 믿기지 않았겠지.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라는 건 모르고 있으니.
***
다음 날 아침.
전날 새벽 3시까지 십여 병이 넘는 소주와 양주, 와인을 비우고 잠든 우리는 아침 9시쯤에야 부스스한 꼴로 일어났다. 우리 넷 모두 세면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해장국집에 가서 뼈다귀 해장국을 정신없이 비웠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뚝배기를 두 손으로 잡고 국물까지 몽땅 비운 나는 그릇받침에 뚝배기를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박 상무 주량이 보통이 아니던데··· 군대에서 배운 겁니까?”
물을 마신 선해철이 티슈로 입을 닦고 묻자 박태곤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체질도 체질이지만 군대에서 단련됐죠. 윗분들 뵙고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고 설득하다보니 술이 빠질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제 와이프가 헛개나무 열매 달여 주느라 고생했죠.”
그 꽉 막힌 군바리들을 상대로 얼마나 노력했을지 박태곤의 처연한 미소만 봐도 훤히 보였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박태곤에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그룹에 오시면 술로 고생하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명절 때마다 임원들한테 홍삼 세트도 나가니까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럼, 내년에 뵙겠습니다.”
식당을 나와 박태곤과 헤어진 내게 박태진이 말했다.
“박태곤 상무가 이사님이 그 존 데이비슨이었다는 걸 확실히 믿는 것 같군요.”
“그러게요. 안 믿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박태곤이 내 말을 안 믿을까 걱정했었다. 선해철이 똑같은 가면을 구해서 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보니 묘해서 고개를 갸웃하던 내게 박태진이 미소를 보냈다.
“아마도 이사님이 지금껏 백화점이나 할인점 사업에서 보여준 실력들이 신뢰를 얻은 것 같습니다. 홍콩 건도 그렇고요.”
“그런 것 같아요, 후후.”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라는 건 밝히지 않았지만 지난밤에 술을 마실 때 해동종금에 찍힌 내 통장잔고를 보여준 게 굉장히 컸을 것이다.
“스카우트도 성사됐으니 보고부터 올려야겠네요, 흐흐.”
씩 웃은 나는 핸드폰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카우트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으니 보고는 당연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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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네놈이 그리 귀하게 여길 정도면 이 할애비나 조 대표도 잘 지켜봐야겠구나, 허허. 알았다. 이만 끊으마.”
인재 영입에 성공했다는 이성민과의 통화를 끊고 이대수가 미소를 띠었다.
“정창호에 박태곤이라···.”
이성민, 장하연을 돌려보낸 뒤, 이대수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둘 다 훌륭한 인재라는 것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들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인재가 부족한 해동그룹에 그런 인재들이 들어왔음에 이대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안이든 그룹이든 새 식구들이 늘어났으니 살림도 늘려야겠군. 우리 큰 강아지도 가르쳐야겠고.”
이대수는 나지막이 뇌까리며 전화를 걸었다.
“나다, 승주야. 내년부터 비서실은 총괄전략본부로 개편해라. 그리고···.”
그룹 차원의 조율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대수가 숨을 가다듬었다.
[다른 지시는 없으십니까, 회장님?]
“승주 넌 내년부터 부회장이다.”
[···예?]
깜짝 놀란 고승주와 달리 이대수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룹이 이만큼 컸는데 언제까지 사장 명패 쓸 거냐?”
[그래도 세 분 대표님들도 사장이신데···.]
아무리 자신이 그룹의 실세라도 연공서열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비치자 이대수가 피식 웃었다.
“배 대표, 태 대표, 조 대표도 부회장으로 올릴 거다. 조 대표는 종금과 증권 대표이사를 겸하니 금융부문 부회장으로 올려야겠지. 세 사람 밑에 있는 기획실도 전략실로 높이고.”
지난 3년을 거치면서 그룹이 커진 통에 조직 정비는 필수였다. 말이 좋아 조직 정비지 사실상의 확대이니 이대수로서는 그룹의 정점에 있는 이들부터 급을 올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금석호 회장님은 어떻게 할까요?]
“놔둬. 10년은 회장 명패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겠지. 그래도 금 회장 손발들은 전부 바꿔야 할 게다. 재무, 인사, 제품 개발, 생산은 우리 사람들 보내놔.”
금석호에게 자리보전을 약속했다고 해도 손발까지 그대로 놔두면 자신과 장손이 쏟은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한 번 손 댄 이상 1등을 해보고 싶었기에 이대수는 고승주에게 인사이동을 주문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빠른 시일 내에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다, 지금 바로 배 대표, 태 대표, 조 대표, 명진이한테 말해서 성민이 테스트할 거 준비하라고 해. 각자 준비하는 사업 현안 관련해서.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이대수가 다른 지시를 내렸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성민이한테 우리 그룹 전략 컨설턴트 자리 내주도록 해.”
[전략 컨설턴트면···?]
“수십 년간 이어온 관례를 깰 수는 없으니 다른 관례를 만들어야지 어쩌겠나? 성민이 고놈만 내 손주가 아닌데.”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묻는 이대수에게 고승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시겠군요. 성민이야 컨설턴트로 위아래를 모두 겪었지만 성문이나 성우, 성아는 그럴 수도 없을 테니···. 알겠습니다, 회장님.]
“수고하게.”
지시를 끝낸 이대수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성민이 이놈이 분명 싹수가 좋은 건 확실한데···.”
박태진의 보고에 따르면 이성민은 지금껏 금융시장에서 돈 굴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게 아니라 사업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걸 죄다 공부하고 있다고?]
[예, 회장님. 기존의 그룹 내부 사업 현황부터 국내외 경쟁업체 현황 자료까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인수합병으로 늘어난 제철, 자동차, 제약, 석유화학, 해운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박태진의 보고를 떠올리던 이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 못해서 한 맺혀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것도 아니고 원···.”
말끝을 흐리면서도 이대수의 표정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부모가 없어서 흐트러지기 좋은데도 이성민의 일과는 운동과 일, 사업, 공부로만 짜여있었다. 장하연과의 연애야 평생의 반려를 만든 일인데다 그 연애로 그룹의 살림까지 알차게 키웠으니 이보다 더 바람직한 장손도 없었다.
그래서.
이성민에게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주고 그룹 수뇌부의 급을 높인 것이었다. 그만치 공부했으면 그룹 내부 사업 현안에도 밝을 테고 그룹 부회장들과 직통으로 경영 안건을 주고받는 전략 컨설턴트면 다른 임직원들도 이성민을 함부로 여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
“좋은 쇠가 있는데 어찌 담금질을 안 하리. 열심히 달구고 힘껏 두들겨서 날카롭게 벼려주마, 으허허.”
혼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이대수가 껄껄 웃었다.
***
박태진, 선해철과 함께 집에 돌아와서 차를 마시던 나는 갑자기 등골이 싸늘해져서 몸을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사님?”
“이상하네요. 누가 내 욕을 하나···.”
신성그룹과 태현그룹에서 내 흉을 보고 있나? 두 집 모두 스탠더드 캐피털한테 아도자동차 인수 건으로 호되게 맞았으니 어련하겠냐마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TV로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늘 아침 9시 정각에 김○○ 대통령 당선인과 헨리 로이스 트라이엄프 캐피털 이사회 의장은 김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서 100억 달러의 한국 국채를 반드시 매입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대한 해외 금융기관들의 신용도에 긍정적인···.]
TV를 보던 나는 선해철을 마주보며 미소를 띠었다.
“헨리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고맙긴. 아직도 두 달은 더 있어야 투자할 텐데.”
선해철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트라이엄프 캐피털 같은 세계구급 쩐주가 1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한 것은 한국 경제에 청신호나 마찬가지다.
초대형 미국계 투자회사가 거액을 투자하기로 약속한 만큼 국제적인 신용이 높아질 건 당연하다. 해외금융기관들의 대출 만기 연장은 내 기억보다 더 빨리 이뤄질 것이다.
내 옆에 있던 박태진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올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해도 손에 꼽힐 겁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지만 우리와 그룹은 상상도 못할 수익을 거뒀고 저나나 이사님도 가정을 꾸리게 됐잖습니까, 하하.”
선해철이 박태진과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맞아. 우리만 대박 나서 미안할 정도야. 너희들도 결혼하게 된 거 축하한다, 흐흐.”
“고맙습니다, 형님.”
“고마워요, 삼촌.”
나와 박태진은 선해철의 축하에 감사인사를 올렸다. 이 사무실의 핵심 멤버 세 명 모두 번듯한 가정을 꾸리게 되지 않았나?
“태진이 너는 어디에 집 사고 싶냐? 결혼선물 거하게 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박태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선해철이 씩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돈이라면 걱정 마. 장호민한테 뜯어낸 거 그룹에 넘겨서 내가 받은 성과급만 수천억인데 뭔들 못 사주리. 강남에 빌딩 사달라고 할 건 아니잖냐, 흐흐.”
넉살좋게 웃는 선해철을 보고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 옆에 있는 집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집만 사주시면 바랄 것도 없습니다, 형님.”
“형?”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입니다, 이사님. 기왕 사는 집이면 이웃집에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사님만한 대련 파트너도 없고, 수시로 만나서 의논할 일도 많으니 그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하하.”
껄껄 웃는 박태진을 보니 고맙기만 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려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고마움을 담아서 바라보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환한 미소를 띠었다.
“좋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너희들 도와주겠냐? 점심 먹고 나서 그 집 주인장 봐야겠다. 얼마가 들어가던 내가 네 집 장만해준다, 하하.”
선해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 삼촌, 쓸 땐 쓸 줄 아는 쾌남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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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뒤.
“아이고, 요즘 같은 시기에 100억씩이나 쳐주시면 당연히 넘겨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하하. 집은 다음 달 안에 비워주시죠.”
식사를 마치고 옆집에 간 우리 셋은 곧바로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옆집 주인장은 100억 원이나 되는 숫자에 눈이 돌아갔지만 우리에겐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돈이기에 가볍게 내밀 수 있었다. 이제는 돈보다 행복이 더 중요한 우리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는 무슨.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냐, 하하.”
집에 돌아오자 박태진이 선해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해철은 미소를 띠며 박태진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고마워요, 삼촌. 살짝 나른한데 커피 어떠세요?”
“커피 좋지. 케냐 AA 있으면 그거 한 잔 내려줘라.”
나른할 때는 강렬하고 묵직한 산미의 케냐AA만한 게 없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에서 드립커피를 만들어왔다.
한 잔씩 두 사람 앞자리에 커피를 내려준 나는 자리에 앉아서 모처럼 내린 커피를 마시려고 입에 댔다. 그런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입도 안 댔는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성민입니다. 네, 백부님. 네? 아뇨, 싫은 건 아닌데··· 네. 알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쉰 나를 선해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승주 형님 같은데 표정이 왜 그러냐?”
“다음 주부터 절 그룹 전략 컨설턴트로 고용하고 싶다네요. 다음 주부터 대표님들이나 숙부님들 만나서 그룹 사업 살펴보라고 하셨어요. 2층 좀 다녀올게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써먹겠군.”
나는 침대 밑에 있는 트렁크 가방을 꺼내서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이 안에는 우리 그룹의 수십 년 미래가 집약된 문서들이 들어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쥐어짜내고 이번 생에 그룹 안팎에서 모은 자료들, 그리고 내 시간을 갈아 넣은 노력의 산물이었다. 나는 그 트렁크를 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웬 트렁크냐?”
“지금까지 공부한 거 써먹어야 할 것 같아서요.”
눈을 껌뻑거리는 선해철과 달리 박태진은 담담한 미소만 띠었다. 저 양반, 할아버지한테 내가 준비하는 거 말했나?
***
몇 시간 뒤.
나와 함께 트렁크에 들어있던 각 계열사별 사업계획서들을 살펴보던 선해철이 탁 소리를 내며 탁자에 서류를 내려놨다.
“그래서 클레어한테 지금껏 그런 자료들을 보내달라고 한 거였어? 외환위기 터지면 판 벌이려고?”
“외환위기 넘기면 추진할 생각이긴 했는데 환율이 이렇게까지 뛸 줄은 몰랐어요. 달러당 천 삼, 사백 원 정도에서 끝날 줄 알았거든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나를 보는 선해철의 눈빛은 이세계에서 넘어온 괴물이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우친 대현자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
“거 참···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지만 신기하단 말이지.”
입맛을 다시는 선해철을 바라보던 나는 속으로 헛웃음만 흘렸다.
‘어쩌겠습니까, 삼촌. 이렇게까지 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은데.’
자업자득이었지만 전생에 신성그룹에서 밑도 끝도 없이 갈려나가면서 내가 차린 밥상을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가 번번이 가로챈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그 원한과 내 전생의 기억들, 이번 생을 시작하면서 보내온 지난 5년을 농축시킨 분노와 한의 엑기스가 지금 검토한 사업계획서들이었다.
아무튼.
다음 주 월요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다들 얼마나 준비해서 나를 맞아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