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43rd. 재회
삼청동에 도착한 나와 장하연은 서재 책상 앞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고려호텔 인수에 따른 거래들부터 알렸다.
“어떠십니까, 할아버지?”
“병호 형님이 더 오래 살았으면 그 양반 마지막 비서실장은 정 대표가 됐을 거다. 정 대표한테 편한 마음으로 오라고 전하거라, 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박태곤 상무는 어떠세요? 2년 전에 도쿄에 갔다고 들었는데.”
내가 도쿄에 간 건 장하연에게 알려줄 수 없는 일. 할아버지는 기억을 짜내듯 가늘게 눈을 뜬 채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재작년에 태진이가 도쿄 출장 다녀와서 들려주기로는 견실하고 정직한 친구라고 들었다. 셈도 밝다고 하니 조 대표한테 일러두마.”
할아버지라면 조영찬과 박태곤을 매칭시키실 줄 알았다. 견실, 정직, 숫자감각 모두 어떤 업종보다 금융에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그럼··· 저희 결혼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반대할 이유가 있겠느냐? 우리 며늘아기가 이리 마음에 드는데 사적인 감정은 이제 그만 날려야지, 으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그 어떤 대인배도 못 따라갈 것 같았다. 내친 김에 나는 할아버지의 넓은 아량을 바라며 중요한 걸 물었다.
“저희, 결혼식은 나중에 올리고 혼인신고부터 해도 괜찮을까요?”
“살림부터 차리겠다고?”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장하연의 눈이 커졌다.
나는 얼른 장하연의 손을 꼭 잡아줬다. 이 집안에서는 내가 그녀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성의원에서 그녀가 나를 지켜줬던 것처럼.
“너희들이 생각 없이 일을 치르진 않았을 터. 이유를 말해봐라.”
“마음 같아서는 남 부럽지 않게 치르고 싶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몇 달 뒤로 미루는 게 좋을까 합니다, 할아버지.”
“흐음··· 우리 며늘아기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구나.”
침음성을 흘리던 할아버지의 질문에 장하연이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님. 혼인신고만 해도 저희가 부부라는 사실을 인정받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분위기가 괜찮아졌을 때 식을 치렀으면 합니다.”
[우리, 식은 몇 달 뒤에 올리자. 아버지한테 한 말도 있지만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인데 우리만 즐거운 일 치르면 우릴 바라보는 눈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차를 타고 오는 길에 들었던 이야기에 나는 미소가 그려졌다. 집안과 그룹의 이미지를 위해 혼인신고부터 하고 나중에 식을 올리겠다는 여자는 대한민국 재벌가 중에서 장하연이 유일할 것이다.
한참동안 우리 둘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신에 너희 둘이 살림을 합치는 건 태진이 녀석 장가보낸 뒤로 하자꾸나. 괜찮겠느냐?”
여부가 있겠나. 박태진도 유현정과 결혼하려면 집도 알아봐야 하고 혼수도 장만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5년 동안 청춘사업 하느라 고생들 했다. 돌아가서 푹 쉬어, 허허.”
할아버지의 격려를 끝으로 우리 둘은 삼청동 본가를 나왔다. 시간도 벌었으니 결혼식은 역대급으로 치러줘야지.
***
이성민과 장하연이 이대수를 만나서 혼사에 대해 보고하고 있을 때, 이수한은 이대수에게 보낼 박태곤을 마주보고 있었다.
“시, 실장님···.”
“미안하게 됐네, 박 상무.”
괴로워하는 표정의 이수한에게 박태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조선시대 노비도 아니고 재벌가 후계자들의 혼수품이 되다니!
자신의 SH자산개발 발령이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의 신성물산 지분 매입과 얽혀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허탈했다.
“정말 미안하네. 자넬 여기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박태곤에게 사과를 건네던 이수한이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꼬아놓은 꼴이 아닌가? 책임져주지도 못할 주제에.
그런 이수한에게 박태곤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실장님. 실장님 덕분에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박태곤은 이수한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이수한의 눈에 안 들었다면 평생을 경리부에서 장부에 파묻혀 살다 퇴직할 운명이 아니었나.
“그리 생각해주니 미안하고 고맙네. 장 상무나 이 이사, 해동그룹 이 회장님도 자네는 반드시 인정할 걸세. 인수인계 마치면 당분간 푹 쉬게. 가 봐.”
“감사합니다, 실장님.”
박태곤은 이수한에게 인사를 올리고 옥외 흡연장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후우우-.”
처량하게 담배연기를 내뿜던 박태곤이 벨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빼들었다.
“신성그룹 박태곤 상무입니다.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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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박태곤에게 전화를 건 나는 그의 목소리 톤이 낮은 것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입니다. 일요일 저녁에 뵙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연락은 받았습니다. 해동그룹 장손께서 제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박태곤의 딱딱한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느껴졌지만 충분히 이해했다. 노비도 아니고 주인집 자식들 혼사에 혼수품처럼 팔려오는 신세가 되지 않았나?
하지만.
점쟁이도 아니고 미래를 알려줄 수 없으니 신성그룹에게 버림받을 박태곤을 지금 데려올 방법은 나와 장하연의 혼사뿐이었다. 너무나도 강직하고 지조 있는 박태곤이니 말이다.
가볍게 숨을 내쉰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통화를 계속했다.
“서운한 건 직접 만나서 풀어야죠. 식사라도 하면서 쌓인 거 풀었으면 합니다.”
주소를 알려주고 통화를 끝낸 내게 선해철이 물었다.
“박태곤 그 사람, 너희 집에 불러서 뭐하려고?”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죠. 가면이 어딨더라···.”
서랍을 뒤적거린 나는 2년 전 엔고투기 때 일본에서 썼던 가면을 찾아 꺼냈다. 물티슈를 뽑아서 가면을 닦는 나를 보고 선해철과 박태진의 눈이 커졌다.
“너, 설마?”
“이, 이사님?”
“이 가면, 오늘에야 쓰겠네요. 흐흐.”
낮게 웃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너, 스탠더드 캐피털이 네 회사라는 것까지 알려줄 거냐?”
“지금은 그냥 스탠더드 캐피털 이사라는 것만 알려줘야죠. 오너라는 건 아주 나중에 알려주고요.”
내 대답을 듣고 선해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박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이 엔고투기 때의 ‘존 데이비슨’이었다는 거, 박태곤 상무도 믿을 겁니다. 홍콩 투자 건으로 이사님께서 올린 수익의 경위만 잘 포장하시면요.”
“저도 그 생각했는데, 흐흐.”
박태진의 아이디어가 바로 내 생각이었다. 서로를 보며 씩 웃는 우릴 보며 선해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얘들을 이렇게 배려놨는지···.”
***
하이마트 영등포점에서 장을 본 나와 박태진, 선해철은 저녁식사 준비를 마치고서야 앞치마를 풀어서 냉장고 옆에 걸어 놨다.
“이 정도면 구색은 갖췄죠?”
“이 정도라니요, 이사님. 잔칫상인 줄 알겠습니다, 하하.”
“이 정도면 배 터지게 먹이겠다, 흐흐.”
식탁 위에 차려진 소갈비찜과 구절판, 애호박전 등 푸짐하게 차려놓은 한 상을 보니 배가 다 불렀다.
흐뭇해하던 우리 셋 중 선해철이 손가락으로 음식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왜 또 한 거냐?”
나는 선해철의 손끝이 가리키는 닭똥집볶음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친구 되고 싶은 사람한테 주는 특별요리니까요. 클레어한테도 내줬잖아요.”
전생에 박태곤 덕분에 맛들인 닭똥집볶음이다. 이번 생에 내 손으로 박태곤을 대접하는 첫 상에 저 음식이 빠지면 섭하지 않겠나?
거실로 가서 식전차를 마시던 우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시죠?”
[박태곤입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버튼을 눌러서 대문을 열어줬다. 몇 분 뒤, 박태곤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죠, 박태곤 상무님.”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준비했습니다. 식사에 곁들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박태곤이 내민 봉투를 받아서 보니 샤토 리오나 와인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후훗.”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의아해하는 박태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박 상무님. 술은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오늘 저나 박 이사님, 그리고 선 대표님이 차린 상에는 안 어울리는 술이라서요, 하하.”
한식 일색으로 차려놨는데 와인이 웬 말인가? 나는 박태곤을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박 상무님.”
“저도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박태곤 상무님.”
우리 둘을 본 선해철과 박태진이 일어나서 박태곤과 인사를 나눴고, 우리 넷은 식당으로 향했다.
“이래서 와인이 안 어울렸군요.”
식탁에 깔린 한식 한 상을 보고 박태곤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음식을 살펴보던 그의 눈이 닭똥집볶음에서 멈췄다.
“저건···?”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하는 특별요리입니다. 본사의 로렌스 대표님께도 드렸는데 좋아하시더군요. 그렇죠, 삼촌?”
못 미더운 눈길을 보내는 박태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묻자 선해철이 씩 웃었다.
“그랬지? 요새 뉴욕 가면 저거 해달라고 그렇게 난리를 쳐서 힘들어죽겠다, 흐흐.”
놀란 박태곤을 보며 나는 미소를 띠었다.
“재벌이라고 매일 고상 떨면서 칼질 하는 건 아닙니다, 박 상무님. 시장하실 텐데 자리에 앉으시죠.”
박태곤을 자리에 앉힌 나는 냉동실에 넣어뒀던 진로 소주 한 병을 꺼내서 뚜껑을 땄다. 그 모습을 보고 박태곤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재벌들도 소주를 마시는군요.”
“알싸하고 달달한 게 맛이 제법 나니까요.”
미소를 띤 나는 선해철, 박태곤, 박태진에게 술을 따라준 뒤, 선해철이 따라준 소주를 받고 건배를 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며 술잔을 몇 번 비우니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 출장 땐 참 아슬아슬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박 상무?”
가볍게 탁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은 선해철의 질문에 박태곤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그때 존 데이비슨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저나 대표님, 그리고 박 이사도 이 자리에서 보지 못했을 겁니다.”
입으로는 미소를 띠면서도 박태곤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잔을 비운 박태곤이 선해철에게 물었다.
“아직도 쉬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 나이에 그 능력이면 어디서든 탐낼 인재일 텐데···.”
“그 친구, 지금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박 상무.”
선해철의 대답에 박태곤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네. 아주 훨훨 날고 있죠, 하하.”
껄껄 웃는 선해철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나와 박태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회사에서 우리더러 사기꾼 다 됐다고 한 양반이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사기를 치다니.
“삼촌, 저 잠깐만 손 좀 씻고 와도 되죠?”
“오, 그래. 얼른 다녀와.”
식당을 나선 나는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내 모습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후후.”
나지막이 웃음을 흘리며 엔고투기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회사에서 가져온 가면을 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
이성민이 올라간 사이, 박태곤은 선해철과 ‘존 데이비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박 상무한테 내가 뭐 하러 거짓말합니까? 그 친구, 우리 회사에서 일하면서 벌어다 준 돈이 어마어마합니다, 하하.”
선해철은 껄껄 웃으며 소주를 비웠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스탠더드 캐피털에 이성민이 이런저런 사업으로 벌어다 준 돈이 벌써 수조 원인데.
선해철을 마주보며 황당해하던 박태곤은 선해철 뒤에 나타난 낯익은 가면을 보고 눈이 커졌다.
“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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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신?”
박태곤은 눈이 커진 것도 모자라서 입까지 떡 벌렸다. 나는 태연하게 내 자리에 앉아서 가면의 턱 부분을 떼고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박태곤 상무님. 마지막 날 점심 때 고베에서 먹었던 장어덮밥이 맛있었는데··· 같이 가서 먹고 싶네요, 하하.”
“허, 허허···.”
고베대지진 전날의 기억까지 들려주며 웃자 박태곤은 떡 벌어진 입에서 헛웃음만 자아냈다. 이만하면 충격요법은 충분하니 답답한 가면은 벗어야지.
가면을 벗자 나를 바라보던 박태곤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이, 이 이사님이··· 존 데이비슨?”
“네. 제가 그때 그 존 데이비슨이었습니다. 그땐 ‘리’가 빠졌었죠, 하하.”
“저, 정말로 그 존 데이비슨이 맞습니까?”
“그럼요. 당시에도 이 가면 쓰고 ‘스톤에이지’ 외치면서 건배했었는데. 당시에 박 상무님하고 박태진 이사가 다른 그룹 분들한테 ‘스톤에이지’가 뭔지 설명해줬잖습니까? 흐흐.”
그 뒤로도 나는 박태곤에게 엔고투기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줄줄 읊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박태곤이 물었다.
“왜 정체를 숨긴 겁니까, 이 이사님? 회장님께서 이 이사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아시잖습니까?”
“알고 있죠. 장인어른께서 절 얼마나 아끼는지요. 하지만.”
말을 끊은 나는 자작으로 채운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렇다고 제가 신성그룹에 위협이 돼도 봐주실지 모르겠네요.”
“위협이라뇨?”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위입니다. 장인어른께서 저와 제 와이프 결혼 허락해주면서 선전포고도 하셨다는 거, 이수한 실장님이 알려줬을 텐데요?”
쓴웃음을 머금고 묻는 내게 박태곤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흠칫한 기색까지 보이는 게 이수한을 통해 장호건이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까지 들은 모양이었다.
“처남들이나 처제에겐 고작 수백억 원으로 수십조 신성그룹을 물려주려고 하시면서 내 와이프한테는 1조나 받고 고려호텔을 내주신 분입니다. 그만한 값을 받을 만큼 고려호텔이 커지긴 했지만 처제나 처남들 중에 누가 제 와이프만큼 신성에 공을 세웠습니까?”
조금은 화난 체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나는 술을 비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인어른도, 이 실장님도 절 은연중에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증여세를 냈어도 홍콩 투자 건으로 정산 받은 돈은 아직도 1조 8천억쯤 남았으니까요.”
“이, 일조 팔천억 원이요?”
1조 8천억이란 되는 돈은 어느그룹이든 경제적 빙하기인 이 시점에 따듯한 봄날이 될 것이다. 그 돈이 내 개인재산이라는 사실에 입이 떡 벌어진 박태곤에게 선해철이 말했다.
“스탠더드가 해동증권의 홍콩 투자에 1억 불을 맡긴 건 전부 우리 이 이사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박 상무. 이 이사 나이에 일본을 털어먹은 사람은 월가에 한 명도 없으니 한 몫 두둑하게 챙길 건을 내준 거였죠, 하하.”
선해철의 뻔뻔한 거짓말에도 박태진은 피식 웃었고, 박태곤은 선해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내가 보여준 능력이면 스탠더드가 나를 탐낼 이유는 충분할 테니 오죽하겠냐마는···.
술 한 잔씩을 더 비운 뒤, 박태곤이 내게 술을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당신이란 사람 자체를 믿기 때문입니다, 박태곤 상무님.”
박태곤에게서 소주병을 건네받은 나는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 시절엔 온갖 아르바이트로 동생들 학비에 도시락까지 싸주면서 재학 중엔 회계사 자격증까지 따셨잖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박태곤이 말을 더듬으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이미 박태진과 선해철 때문에 그의 약력을 조사했었다. 두 사람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나는 계속해서 박태곤의 약력을 읊어나갔다.
“졸업 후엔 경리장교로 복무하면서 낭비를 줄이려 노력했죠. 신성그룹에서도 그랬고요. 그런 박태곤 상무님이면 고객들의 돈도 최선을 다해 지켜줄 거라 믿기에 영입한 겁니다.”
그런 견실함과 정직함 때문일까, 전생의 박태곤은 신성그룹 비서실 재직 당시에 그 특유의 리스크 관리 능력으로 신성카드를 카드대란에서 건져냈다.
다시 말해 박태곤은 신성그룹의 이케르 카시야스나 잔루이지 부폰이었고, 그런 박태곤을 데려오기 위해서 나는 장하연이 1조 원을 주고 고려호텔을 인수할 때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는 나만 알고 있는 일이지만 박태곤을 버릴 신성그룹을 시궁창에 처박고 박태곤과 함께 해동그룹 금융부문을 국내 최고 그 이상으로 키우고 싶었으니까.
얼떨떨해하는 박태곤에게 나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터뜨렸다.
“박태곤 상무님이 우리 그룹에 오시는 날, 해동그룹 금융부문 전체의 최고 리스크 관리 책임자를 맡길 겁니다. 직급은 당분간 부사장이지만 금융부문이 커지면 승진도 약속하죠.”
할아버지나 조영찬 모두 박태곤의 승진에 동의했기에 이런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 앞으로 커나갈 해동그룹에 가장 필요한 게 사람이 아닌가?
해동증권의 민주형, 주승빈도 내년이면 전무, 상무로 승진하고 다른 이들도 승진할 예정이니 반대의 명분도 없었다.
“이, 이사님?”
그 초고속 승진의 대상이 된 게 안 믿겼나, 박태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나는 그에게 말할 게 많았다.
“좋든 싫든 신성그룹은 1조 원 때문에 고려호텔과 박태곤 상무님을 넘긴 겁니다. 그 반대로 우리 해동그룹은 박태곤 상무님을 영입하겠다고 고려호텔을 구실 삼아 1조 원을 이적료로 지급한 거고요.”
박태곤은 나를 미친놈 보듯 보고 있었지만 진심이었다.
고려호텔 인수도, 고려호텔에 딸린 SH자산개발 지분 50퍼센트도 결국엔 박태곤을 영입하려고 깔아둔 포석이었으니까.
“상무님과 함께 해동그룹을 누구나 출세할 수 있고, 출세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본인이 회사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한 이유를 말하며 부탁하자 나와 마주하던 박태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 또한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시 말이 없던 박태곤이 바로잡은 눈빛으로 보내며 내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성민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