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20th. 말하지 않아도... (4)
그날 저녁.
나는 장하연의 전화를 받고 이태원의 한 바에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채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할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했으니 따라야지.”
나는 장하연의 말을 듣고 터져 나올 뻔했던 웃음을 마티니 한 모금의 묵직함과 함께 도로 집어삼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오늘 따라 마티니가 땡겨서 시켰는데 가벼운 술을 마셨다면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장호건이 관심이 왜 이리 짙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쪽 비서실도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건 알고 있지만 장하연을 보내서 위로해줄 정도라니, 거 참.
어찌됐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해동종금 최대주주가 된 걸 두고 장하연이 나를 걱정해줬으면 천하의 신성그룹도 우리 그룹 내부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깜깜이라는 게 아닌가.
요즘 들어 집안, 그리고 그룹 사람들과 손발이 맞아떨어지고 있는데 장인어른도 손발을 맞춰주고 있었다. 고마운 양반, 나도 한 번 맞춰볼까?
잔을 내려놓은 나는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아쉽긴 해. 최대주주라고 해봐야 경영권은 사실상 할아버지가 쥐고 있고 세금은 세금대로 냈으니.”
담담하게 말했지만 세금 이야기에 속이 쓰렸다.
'천억이면 신성전자 주식 2퍼센트는 살 돈인데···.'
이번 주식교환 때문에 국세청에 내가 낸 세금만 대략 천억 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룹 주식 상속만큼은 깨끗이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철칙 때문이었다. 당연히 할아버지부터 이명진, 나 모두 예외 없이 세금을 내야 했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계열사 주식을 해동물산에 팔면서 받은 돈을 나와 이명진에게 빌려줘서 그 돈으로 세금을 냈지만 언젠가는 갚아야 할 돈이다. 이 사실을 아는지는 몰라도 장하연은 날 안쓰럽게 바라봤다.
“세금, 너무 세게 낸 거 아냐?”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배당금 받아서 메울 수밖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돈 갚을 생각을 하니 영 좋지가 않았다.
스탠더드 캐피털 자금은 함부로 들여올 수 없다. 국세청의 역추적이야 트라이엄프 캐피털을 통해 처리하면 피할 수 있지만 앞으로의 미국 증시를 생각하면 안 하느니만 못했다.
최대한 미국에 있는 돈을 안 쓰면서 이번에 생긴 빚을 털어낼 생각을 짜내느라 입꼬리를 뒤틀고 있었는데 내 모습이 웃겼는지 장하연이 피식 웃었다.
“우리 꼬맹이, 많이 쓰리구나?”
“그래도 나중에 가면 얼마나 많이 내겠어. 일찌감치 하나라도 건져놨으니 다행이지.”
할아버지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른 재벌들이 우리 집안 삼대에게 돈지랄 한다고 욕할지 몰라도 앞으로의 해동종금은 절대로 세금 천억 원으로 얻을 회사가 아니니까.
그 생각 때문에 기분이 표정이 풀린 걸 보고 장하연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부럽네. 종금은 언젠가 네 회사 될 거 아냐?”
“그건 아냐, 누나. 주식만 있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는 못해. 중요한 건 할아버지나 숙부님, 대표님하고 의논해야 해. 어지간하면 세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말이야.”
나를 축하해주는 그녀에게 손사래를 쳤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도 사업은 사업이다. 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그저 주식만 물려받았지 실권은 없는 척해야 한다.
조금은 시무룩한 체한 나는 망치질을 한 번 더 보탰다.
“그리고 나, 아직도 해동물산 사원이야. 누나는 연 초에 상무 명패 받았잖아. 나도 빨리 명패 받아야 하는데.”
재벌이라고 무조건 총수가 되는 게 아니다. 수박 겉핥기라도 과장 내지 부장부터 시작해서 임원 직급을 거쳐야 그룹 경영에 개입하거나 차기 총수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나야 때가 되면 수박 겉핥기조차 안 하고도 그룹 경영에 합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고, 해동물산 회장실을 차지할 방법이 있지만 일부러 장하연을 향해 부러운 티를 냈다.
그러자 장하연은 가늘게 뜬 눈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일부러 나 띄워주는 거지?”
“내가 물려받은 해동종금, 부모님 덕분에 물려받은 거잖아. 누나 상무 명패는 누나 힘으로 얻은 거고. 저번에 그림 판 것만 해도 호텔 종업원 수십 명 연봉은 될 텐데. 안 그래?”
재벌총수의 딸인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부장 직급으로 시작한 걸 빼면 장하연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야간 숙직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도 예술품 투자나 호텔 리뉴얼 등으로 고려호텔에 돈을 벌어다 주지 않았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나, 장하연이 살풋 웃었다.
“아휴, 우리 꼬맹이. 많이 철 들었네? 후훗.”
이 아가씨, 내가 자기한테 차일까봐 노력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 차라리 내가 어린 척하는 게 낫겠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었다.
“누나, 아저씨 자동차 사업이랑 의류 사업은 잘되고 있어?”
“글쎄··· 의류야 비중이 적으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자동차는 부산 공장 공사가 쉽지 않은 것 같아. 용재도 상무 달고 처음 하는 일이고 아버지도 미는 거긴 한데···.”
장하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칵테일을 마셨다. 예상대로 장호건-장용재 부자가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거하게 삽질을 해주고 있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괜시리 나 때문에 기분이 다운된 것 같아보여서 말을 돌렸다.
“신성전자 전환사채는 어떻게 됐어?”
“애들 다 울상이야. 이번에 벌어온 돈은 벌자마자 대출 갚느라 써버렸지, 일본 쪽 환율변동 때문에 실적은 안 좋아지지··· 휴우.”
말로는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를 걱정하고 있지만 장하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거렸다. 약정된 전환가격보다 신성전자 주가가 밑돌고 있으니 세 연놈들 속이 타들어갈 얼마나 타들어갈까?
나는 장하연에게 조금은 뻐기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누구 덕인지는 몰라도 누나 돈 굳었네?”
“우리 펀드매니저님, 참 잘했어요. 우쭈쭈쭈~.”
장하연이 날 향해 입술을 살짝 내밀며 놀리는 소리를 냈지만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보며 칵테일을 마셨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클레어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레어. 저녁식사는 했어요?”
[이따가 먹으려고. 아버지하고 만나서 JFK 공항 갈 거야.]
“공항이요?”
[어머니 마중 나가기로 했거든. 처음 하는 가족식사라 그런지 좀 떨리네, 후훗.]
클레어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넘쳐났다. 어쩔 수 없이 찢어져야 했던 가족들이 뭉쳤으니 얼마나 기쁠까?
“축하해요, 클레어.”
[조니 다 네 덕분이야. 너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잖아? 고마워.]
“고맙긴요. 서로 좋자고 한 일인데.”
“그래서 말인데··· 삼촌 통해서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고 있어요?”
[노스 리미티드 주식은 페이퍼 컴퍼니 만들어서 모으고 있어. 대출 받아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대출이요?”
[현금은 항상 확보해둬야지. S&P 500 쪽에 넣어뒀는데 지수 상승률이 좋아. 필요할 때 처분하면 될 것 같아.]
클레어가 이리 말할 정도면 슬슬 대출을 껴도 될 것 같다. 일본에서 번 돈에 증시에서 투자한 것까지 합하면 총자산이 60억 불을 넘어가고 있으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
“그렇게 하세요. 트라이엄프도 잘 하고 있죠?”
[물론. 아버지도 이 회장님 비자금으로 최대한 조용히 모아두고 있어. 내년 6월까지 주가 관리하면서 전부 확보할 거야. 작업 끝나면 양쪽에서 1차로 30퍼센트씩 넘길게.]
진행상황을 들으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트라이엄프는 이제 우리 집안의 확실한 동맹이다. 적절한 커미션을 떼어줘야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만 주가를 찍어 누르면서 주식을 전부 모아두고 채권을 받으면서 1차 매각을 끝내면 우리 집안이든 로이스 가문이든 윈윈이 될 것이다.
슬며시 미소를 띠던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
“이번에 집안 내부에서 지분정리를 했는데···.”
해동종금을 맡게 된 이야기부터 내부 구조조정, 해동증권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니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들, 우리 회사에서 연수시키고 싶다고?]
“네. 금융은 뉴욕에서 배워야죠.”
조영찬이 뽑은 스무 명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전쟁터에서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걸어갈 사람들이다. 중간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인생에 내가 끼어들었으니 주식도 나눠주고 공을 들여 트레이닝 시킬 것이다.
대답을 마치자 귓가에 클레어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긴 해. 연수비는 네 돈으로 댈 거지?]
“물론. 명분은 삼촌을 내세웠어요. 삼촌, 대학 다닐 때 해동종금 대표님 밑에서 돈 굴리는 거 배웠거든요. 괜찮죠?”
[Sure. 스탠더드 캐피털 대표는 나니까 그걸로 연결고리를 삼았다는 거지?]
“네.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연락했네요. 미안해요, 클레어.”
스탠더드 캐피털을 한국에서의 전쟁에 끌어들이기 애매해서 저지른 일이지만 두 사람이 사귀는 걸 알면서도 연인을 팔아먹었으니 염치가 없었다.
더군다나 클레어는 헨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언젠가는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아닌가? 미안해하는 내게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오너가 경영자한테 그 정도 부탁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래도 클레어는 삼촌 애인이기도 하고 나한테도 친구잖아요.”
[그건 사적인 관계야. 그 사람들, 썬하고 내가 사수, 부사수 관계라는 거만 알 거 아냐?]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클레어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난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조니가 고용한 전문경영인이야. 오너답게 지시해. Get it?]
“Got it. 고마워요, 클레어.”
[알았어. 수ㄱ··· 아!]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중 클레어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무슨 일이에요?”
[구찌에서 연락이 왔어.]
“구찌요?”
[우리 제안서 검토했는데 뉴욕에서 보자고 했어. 투자 협상을 하자는 것 같아.]
한 달이 넘게 연락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반가운 소식이었다. 구찌 정도의 브랜드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 지나친 액수만 아니면 얼마든 투자할 뜻이 있었다.
너무나도 반가워서 절로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됐네요, 하하.”
[그런데 그쪽애서 널 보고 싶다고 했는데··· 어때?]
“응? 스케치는 클레어 주문대로 했잖아요?”
[그러긴 한데 스케치가 나오게 만든 주인공을 보고 싶다네? 보면서 얘기하면 영감을 얻을 것 같다나 뭐라나?]
‘미팅이라···.’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생에 톰 포드 추종자였던 장수연에게서 들은 얘기대로면 이 무렵의 톰 포드에겐 동성 애인이 있으니 예술가로서의 호기심 때문에 보자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클레어. 구찌를 잡을 기회를 놓칠 순 없죠, 하하.”
[오케이. 미팅 장소는 내가 섭외해 둘 테니까 날짜 잡으면 연락해줘, 조니.]
그 뒤로도 투자 사업 현황 점검과 더불어 미국에 갈 때 할아버지가 챙겨준 녹차를 갖다 주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클레어와의 통화를 마쳤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도 손발이 맞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
곧바로 출국 일정을 잡은 나는 장하연과 만나서 술을 마셨다.
“미국··· 간다고?”
“응. 너무 오래 비워둬서 눈치 보이네. 할아버지도 그 편이 좋을 거라고 하셨어.”
장하연은 칵테일 잔을 내려놓더니 서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휴우, 옆에 확 붙잡아 둘 수도 없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여느 재벌가의 딸이었다면 벌써 이곳저곳에서 중매쟁이들이 리스트 북을 들고 와서 혼처를 고르고 있을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내 감정 때문에 지금 당장 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후년 말이 되기 전에 장호건의 사위가 되면 대박 칠 일을 쪽박으로 만들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미뤄둬야 했다.
어떡해야 장하연의 마음을 확실히 잡아둘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녀의 턱을 받치고 있는 왼손, 정확히는 그 손목에 차인 불가리 팔찌가 눈에 띄었다.
그걸 본 나는 얼른 옆에 뒀던 가방을 열어봤다. 원래는 프러포즈할 때 쓰려고 늘 가방 속에 넣어두고 다녔는데 지금 써야 할 것 같았다.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자 장하연이 물었다.
“그거, 뭐야?”
“기다려 봐.”
‘BVLGARI’라는 글자가 금색으로 쓰인 상자 뚜껑을 연 나는 안에 들어있는 팔찌를 내 오른손에 찼다.
“야, 남자가 무슨 팔찌야?”
“손 줘 봐.”
장하연의 왼손을 바에 올려놓은 뒤, 내 오른손을 그녀의 옆에 딱 붙였다.
“이 팔찌, 수갑이라고 생각해.”
“수갑?”
장하연은 내 말을 듣고 팔찌를 봤고, 나도 내 손과 장하연의 손에 채워진 팔찌를 내려다봤다. 똑같은 뱅글 디자인 팔찌가 나란히 붙어있으니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처럼 경찰과 범죄자가 같은 수갑을 한 쪽씩 찬 것 같았다.
“설마···?”
눈빛이 흔들리는 장하연을 보며 나는 미소를 띠었다.
“누나한테만 잡혀 있을게. 마지막까지.”
장하연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저 미소를 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미국 출장은 마음 놓고 다녀와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