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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64화 (63/229)

64화. 20th. 말하지 않아도... (3)

조영찬의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에 내 과거가 부끄러웠다.

‘병신 같은 놈, 이런 어른들이 버티고 있었는데···.’

도망가지 말고 맞서 싸워야 했는데··· 보이는 것만 보고 성급한 판단을 내렸던 내 지난날이 또다시 내 속을 후벼팠다. 그나마 그 끝이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할 기회였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드릴 뿐이었다 그래도···.

‘오너가 어버버할 수는 없지. 나도 갈려나갈 만큼 갈려나갔다, 이거야.’

고개를 푸드득 흔든 나는 조영찬에게 다른 계획을 밝혔다.

“CMA 외에도 기존에 투자한 채권과 어음도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해봐라. 들어보고 판단하마.”

“종이 한 장만 써도 괜찮습니까?”

“얼마든지. 저기 있으니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거라.”

조영찬의 책상에 가서 빈 A4용지를 적어온 나는 펜으로 아홉 칸을 만든 뒤, Sell과 Holding을 가로축, 해외와 국내를 세로축에 적었다. 그 다음, 나머지 칸에 해당 항목들을 적어서 조영찬에게 건네줬다.

“해외는 러시아, 국내는 장호건 회장 쪽 신성 계열사에 태현, 금강, 세경, 우리 그룹 거래처 정도만 빼고 전부 정리하라는 거냐?”

조영찬은 뭔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러시아 관련 채권이 걸리긴 하겠지만 어쩌겠나. 나중에 다 써먹을 곳이 있으니. 나는 내 계획을 숨기고 조영찬에게 말했다.

“네. 지금 정리 못하면 나중에 더 큰 비난을 받으면서 정리해야 합니다. 정리가 끝나면 채권 투자나 어음할인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운용했으면 합니다, 대표님.”

조영찬은 뚫어져라 종이를 보더니 다른 손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성민아, 저거 좀 가져와라.”

그가 가리킨 건 철로 된 조그만 휴지통이었다.

“네, 대표님.”

군소리 없이 휴지통을 가져와서 옆에 두자 조영찬이 박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 차장, 라이터 있지?”

“예, 대표님.”

조영찬은 박태진에게서 건네받은 지포라이터로 종이에 불을 붙여서 휴지통에 넣었다.

“극비자료는 이렇게 없애는 거다. 머릿속에만 넣어두고 깨끗이 없애는 게 좋아.”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전생의 일이지만 나도 가끔씩 파기해야 할 문서 중 아예 흔적까지 없애야 할 자료는 불을 붙이고 양철 휴지통에 넣어 없애곤 했다. 놀라기는커녕 미소를 띤 나를 보고 잠시 흠칫했던 조영찬이 내게 말했다.

“대신에 일반 서민들이나 중소기업에 꿔 준 돈은 정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지금껏 회사 현황 자료를 공부해왔기에 짚이는 게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영찬은 내가 짐작한 이유를 확인시켜줬다.

“우리가 예금 받은 거, 그 사람들한테 그만큼 대출해줘서 가능한 거였어. 그룹 거래처들도 마찬가지고.”

“아도그룹도 마찬가지겠죠?”

조심스럽게 묻자 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3천억쯤 되는데 해동중공업과 해동제강 매출에서 아도그룹이 차지하는 게 제법 돼서 떠안은 거다.”

역시나였다. 아도그룹 대출은 어쩔 수 없이 떠안은 악성 채권이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조영찬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한다면 기존 대출은 전부 채권으로 바꿀 수 있으니 걱정 말거라.”

“알겠습니다, 대표님. 해동물산 22억 불 넣기 전에 처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나는 다른 부탁을 넣었다.

“그리고··· 주식 잘하는 사람들 좀 내부에서 추려주십시오.”

“어디에 쓰려고?”

“증권사 세우려고요. 자본금은 제 돈 500억 원을 쓸 건데 마흔 살 미만으로 20여 명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탠더드 캐피털만으로는 부족해. 국내에서 내가 편히 쓸 수 있는 자금을 만들려면 그룹 계열사 중 내가 확실히 지배하는 금융회사가 필요해.'

나는 얼른 종이를 가져와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정리했다. 종이를 넘겨받은 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홍콩 지점은 늦어도 내년 말까지는 낼 수 있을 거다. 선물옵션거래 자격 취득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고맙긴 뭘. 물산도, 중공업도 별개로 보면 소그룹인데 우리도 그룹으로 나아가야 살림이 늘지. 그런데···.”

조영찬은 잠시 콧수염 끝을 매만지고는 흐리던 말끝을 뚜렷이 했다.

“이번에 뽑힐 친구들, 지옥과 천당을 오가겠구나, 흐흐.”

조영찬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펼쳐져 있었다.

***

이성민이 나간 뒤, 조영찬은 곧바로 기획실에 지시를 내려서 부탁받은 일을 처리했다.

“흠흠···.”

그리고 그는 지금 해동종금 본점 대회의실 상석에 앉아서 양쪽으로 쫙 앉아있는 스무 명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봤다. 잔뜩 날을 세운 눈으로 벨 듯이 훑어보는 통에 직원들은 마른침만 연신 삼키고 있었다.

“자네들.”

“네, 대표님!”

어찌나 긴장했는지 군기가 바짝 든 막내사원의 커다란 대답에 나머지 열아홉도 덩달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고막을 강타하는 소리에 조영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이고, 귀청이야. 이등병도 아닌데 편하게들 해.”

“예, 대표님.”

방금 전보다는 작아졌지만 오십보백보의 대답소리를 듣고 조영찬이 피식 웃었다.

“민주형 차장, 올해 서른여덟이라고?”

“네, 대표님.”

콧수염을 만지며 서류를 보던 조영찬의 호명에 각진 얼굴의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성전자에 투자했다고?”

“예. 신성전자가 모든 리소스를 반도체에 집중하는 걸 보고 투자했습니다. 빠져나오기 전까지 반도체 시장이 활황이기도 해서 수익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스포츠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만큼 힘이 느껴지는 민주형의 목소리를 듣고 조영찬이 미소를 띠었다.

“자네, 일하는 스타일이 꽤 동물적이던데 투자도 판박이구먼, 허허.”

조영찬이 껄껄 웃는 가운데 민주형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좋은 뜻일까, 나쁜 뜻일까?

“주승빈 과장은 올해 서른다섯이고?”

“예, 대표님.”

단정하게 정돈된 긴 머리에 새하얀 얼굴만큼이나 주승빈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작년에 SG텔레콤 주식으로 제법 벌었다면서?”

“예. 민영화가 되면 통신비 인상 부담이 풀리고 비용이 절감될 거라 기대하고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10월에 PBR이나 PER이 과도하게 상승해서 정리했습니다.”

주승빈의 차분한 대답에 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크 관리 부서에서 일했다더니 가락은 못 속이는군.”

그 뒤로도 조영찬은 나머지 열여덟 명의 이름을 부르며 각자 주식 투자로 돈을 번 건에 대해 묻고는 그들의 성향을 파악했다. 기묘하게도 민주형처럼 공격적인 스타일과 주승빈처럼 수비적인 스타일이 각각 열 명씩이었다.

“자네들을 보니 모순이구먼.”

“예?”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창과 방패 같단 말일세. 다들 대답하느라 고생했네.”

놀란 직원들을 다독이던 조영찬이 서류를 덮었다.

“자네들, 오늘부로 사표 써.”

“대표님?”

직원들 중 조영찬을 찾는 민주형과 주승빈, 그 외에 입을 다물고 있는 열여덟 명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주식이나 선물옵션 관련 자격증이 있고 영어실력도 어느 정도 갖췄으며 주식투자로 돈 좀 만져본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왔는데 사직권고라니!

직원들의 얼굴에는 당신이 모순이라고 조영찬에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아보였다.

스무 명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할 무렵, 조영찬의 입술이 벌어졌다.

“대신.”

그 두 글자가 뭐라고 스무 명의 눈이 간절하게 변했다. 차라리 파출수납을 평균보다 배로 뛰라고 말하길 원했다. 사직권고보다는 백 배, 천 배는 나을 테니까.

하지만, 조영찬의 이어지는 지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이라고 뉴욕에 투자회사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서 내년까지 공부하고 돌아와. 그게 조건일세.”

“스탠더드··· 캐피털이요?”

“거기 사장이 내 밑에서 돈 다루는 거 배운 녀석 부사수였던 사람이네. 급여는 그쪽에서 지급한다고 했으니 가는 대로 열심히 배우고 오게. 회사 사람들에겐 비밀이네.”

모두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영찬이 전화기를 들었다.

“들어와.”

짤막한 통화가 끝나자 문이 열리며 박태진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입사동기였던 민주형이 자신을 보며 입을 벌렸는데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조영찬 곁으로 걸어갔다.

“설명하게.”

“네, 대표님. 지금부터 여기 계신 분들은 해동증권의 기간인원들로서 내년까지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실전 연수를 받게 됩니다.”

박태진의 발표에 회의실이 한순간 술렁였다.

“해동증권? 실전 연수?”

“뭐야? 우리 안 잘리는 거였어?”

직원들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고 슬쩍 미소를 짓던 조영찬이 헛기침을 했다.

“해동증권 설립은 해동종금 내부에서도 극비로 추진할 프로젝트네. 자네들이 돌아올 때까지 법인을 설립해두고 홍콩 지점에서 선물옵션 거래를 할 수 있게 준비할 걸세. 그러니 열심히 배우고 오게. 박 차장, 계속해.”

“예, 대표님.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동증권 설립은 이 자리에 있는 당사자들 외에는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비밀유지 각서를 나눠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박태진은 왼쪽에 있는 민주형에게 갔다. 민주형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는 걸 눈에 담은 채 박태진을 바라봤지만 박태진은 옅은 미소만 띤 채 열 장의 각서를 민주형에게 건네주고 주승빈 쪽으로 향했다.

주승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태진에게서 나머지 열 장을 받고 아홉 장을 옆으로 넘긴 뒤, 각서의 내용을 살펴봤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던 중 주승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영찬을 바라봤다.

“스톡옵션 1퍼센트?”

“내년까지 객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올 텐데 주식은 나눠줘야 하지 않겠냐고 신임 오너가 말하더군. 뭐, 회사 돈 안 끌어들이고 본인 사비로 설립할 회사이니 뭐라 하겠냐마는··· 하하.”

조영찬의 대답을 듣고는 나머지 인원들도 각자 1퍼센트씩 스톡옵션을 준다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떡 벌렸다.

“좋아하긴 이르네. 나머지 내용도 쭉 읽어보게.”

스무 명의 남자들은 조영찬의 말을 듣고 각서의 나머지 내용을 읽었다.

“실격 시··· 영구퇴사?”

“노력 없는 곳에 대가도 없는 법이지. 그게 싫으면 지금 일에 대한 비밀보장 각서만 쓰고 그만두게. 퇴직금으로 10억 원을 주도록 하지.”

조영찬의 싸늘한 제안에 모두들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이 키워나갈 회사의 '1인당 스톡옵션 1퍼센트'를 선택할지, 일시불로 10억 원을 선택할지 양자택일 하라는 소리가 아닌가?

모두가 고민하는 가운데 조영찬이 말했다.

“신임 오너는 SG텔레콤이 대한이동통신이었을 때 그 주식으로 1년여 만에 세후 1,200억 원을 벌었네. 물론, 종자돈이 크기도 했지만 레버리지도 잘 써먹어서 수익을 높였으니 투자 감각도 나나 회장님만큼 뛰어나지.”

그 순간, 민주형의 눈이 번쩍거렸다. 손에 펜을 쥔 그는 그대로 서명을 하고 조영찬에게 걸어왔다.

“하겠습니다, 대표님.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전쟁터 끌려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말하나? 열심히 하고 오게.”

껄껄 웃는 조영찬과 달리 두 손으로 서류를 내민 민주형의 표정은 진짜로 전쟁터에 가려는 병사의 그것과 같았다.

“뉴욕이면 금융인들의 전쟁터이니 마음을 굳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좋네. 자네가 거기서 연수받을 사람들 최선임일세.”

그 순간, 주승빈도 질 수 없다는 듯 서명을 한 각서를 가지고 조영찬에게 왔다.

“저도 가겠습니다, 대표님. 가서 더 앞선 금융기법을 배워오겠습니다.”

“알았네. 자네가 차선임이야. 더 지원할 사람 없나?”

조영찬의 양 옆에 선 민주형과 주승빈을 보고 열여덟 명이 펜을 손에 쥐었다. 해동종금 내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창과 방패인 두 사람이 배팅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두들 망설임을 지운 것 같았다.

그렇게 서류를 받은 조영찬은 민주형과 주승빈의 각서 위에 자신이 파악한 대로 그들의 각서를 포갰다.

“다들 준비됐으면 비자 발급 되는대로 사표 제출하고 뉴욕으로 가게. 다시 말하겠지만 부모, 자식, 형제, 마누라 모두에게 비밀로 붙여둬.”

“예!”

다시 한 번 스무 명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지만 조영찬은 투지가 느껴지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

해동종금이 새로운 선장이 가리키는 새로운 사업을 향해 돛을 펼치고 있을 때, 성의원의 주인은 그 새로운 선장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인가?”

“예, 회장님. 오늘 오후 2시 59분에 공시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흐음···.”

책상 앞에 앉아있던 장호건은 이수한에게서 들은 보고를 곱씹으려는 듯 가늘게 눈을 뜬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해동물산이 해동그룹 지주회사가 됐군.”

“예. 지금껏 해동종금은 말이 계열사지 지분구조 상으로는 관계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해동그룹의 계열사입니다.”

이수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명진이 이끄는 중공업 계열사들과 달리 해동물산은 해동종금 주식을 단 한 주도 들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 공시를 통해 이대수가 자신의 해동종금 주식 중 전체 주식의 30퍼센트를 해동물산에 매각하면서 해동그룹의 확실한 계열사가 되었다.

“그러면서 성민이한테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준 건···.”

“금산분리 문제와 지주회사 강제전환 요건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최대주주도 아니고 자회사 총자산 비중도 50퍼센트 밑이니 전환을 강제할 명분도 없고요. 물론, 실질적인 경영은 이대수 회장님이 챙길 겁니다.”

해동그룹 이 씨 가문 사람들이 알면 배꼽이 빠지게 웃을 소리였지만 장호건은 이수한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총자산 1조 5천억, 그 중 자본금만 3천억이나 되는 그룹의 은행을 핏덩이 같은 손자에게 훌러덩 내주겠는가? 삼청동 짠돌이 영감이?

“아끼는 장손이라면서 총알받이로 내세우다니··· 지독한 양반.”

장호건은 말끝을 흐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게나마 꼬박꼬박 배당금을 주던 계열사 주식을 지금껏 10원 한 장도 배당금을 안 뿌려온 계열사 주식으로 바꿔서 떠안긴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동종금으로 소속을 옮겨주지도 않았으니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장호건은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나다, 하연아. 오늘 아버지가 성민이 얘기를 들었는데···.”

장호건은 장하연에게 자신이 들은 얘기를 전해줬다.

“그래. 그러니 오늘 성민이 만나서 잘 다독여줘. 반도체 공장 대출은 제때 갚을 거라는 말도 전하고.”

먼저 간 친구의 아들이고 딸의 반려가 되길 바라는 녀석이기에 장호건은 두 사람이 잘 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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