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4th. 한겨울의 허리케인 (2)
그 날부터 우리는 발품을 팔아가며 월가를 돌며 있는 담보 없는 담보를 내밀며 선이자를 떼고 빌린 5억 달러를 스무 개의 페이퍼컴퍼니로 옮겼다.
그 달러를 멕시코 페소로 바꾼 뒤, 멕시코 기업들이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 표시 신용장이나 현지 금융사들이 발행한 달러표시 단기어음 등을 멕시코 페소로 사들이고, 그렇게 사들인 어음을 담보로 멕시코 페소를 빌려서 달러 지급 어음을 사들이길 반복했다.
처음에는 박태진이나 클레어를 비롯한 스탠더드 캐피털 직원들, 심지어 선해철마저 규모가 크다며 뜯어말렸지만 먼저 나서는 놈이 다 먹는 판을 마다할 수가 있나.
그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해서 12월 첫 번째 주말을 넘긴 지금까지 멕시코 금융시장에서 25억 달러 어치의 달러 지급 어음을 사들이고서야 뉴욕으로 돌아왔다.
목표수익은 최소 5억 달러.
어음 매입에 쓰느라 빌린 돈은 멕시코 페소이니 연준 금리가 인상되고 그에 이어서 멕시코 금융시장에 들어간 월가 자본이 철수하기만 기다리면 됐다.
“살다 살다 이런 미친 짓은 처음이다. 난 그냥 외환선물 시장에서 적당히 먹으려고 했는데···.”
월가 근처의 한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선해철은 잔을 비우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몸풀기라는 걸 알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술병을 들고 그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주고 말했다.
“삼촌, 죽었다 깨어나도 멕시코는 못 버텨요. 지난 15일에 연준 금리도 0.75퍼센트나 올랐잖아요. 페이퍼컴퍼니로 A급 무역어음만 사서 멕시코 정부도 모를 걸요?”
“그러긴 한데··· 휴우.”
“조니 말이 맞아요, 썬. 월가에서도 멕시코가 파산할 거란 말이 나오고 있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거예요.”
나와 클레어가 선해철을 다독였지만 박태진은 굳은 얼굴로 위스키를 비웠다.
“하지만 미스 로렌스, 멕시코가 파산하면 미국에도 득 될 게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이죠, 태진 씨?”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를 주도한 미국입니다. 월가 자본이 멕시코를 디폴트에 빠뜨리면 미국의 위신이···.”
박태진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클레어가 든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케 세라 세라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걱정 말아요, 태진 씨. 월가는 워싱턴 D.C의 상전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무 일이 커져서 예측이 안 됩니다, 미스 로렌스.”
박태진은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기색을 비치며 위스키를 채운 잔을 단숨에 비웠다. 꿀꿀한 분위기도 바꿀 겸 입이나 털어야지.
“클레어, 멕시코가 파산할 것 같으면 미국도 금리 인상을 멈추겠죠?”
“그러겠지? 미국의 소비를 뒷받침할 공장이 완전히 망가지는 건 막아야 하니까.”
그 말을 들으니 남 일 같지가 않았다.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래가 멕시코와 다를 바 없으니까.
딱 잘 사는 멕시코였다. 내가 아는 동아시아의 미래는.
우울함이 얼굴에 드리워지자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조니? 어디 안 좋은 거야?”
“좀 그래서요. 멕시코가 가져가야 할 달러를 우리가 가로챈 거잖아요.”
내 욕심 때문에 멕시코가 가져가야 할 달러를 헐값에 후려쳤으니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일말의 양심이 아렸지만 클레어는 날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어리구나, 조니.”
“······.”
나도 왜 이러나 싶었다.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더니 부끄러움이라는 게 자라나는 건가.
말없이 위스키만 마시던 중 클레어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어쩔 수 없어. 이 세상에서 약한 건 죄야.”
이 여자의 혈관에 흐르는 피의 온도가 절대온도보다 더 싸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다르게 보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약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 지키거든.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클레어의 얼굴에 잠시나마 슬픔이란 놈이 발자국을 남겼다 사라졌다. 전에 말한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인가?
그녀는 나를 보며 끊었던 말을 이어갔다.
“내 주변도 못 지키면서 모르는 사람들까지 생각하는 건 만용이야.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들만 생각해. 친소존비, 알지?”
“네.”
글자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하나. 자신과 친하고 먼만큼 존대하고 업신여기는 게 사람인 걸 생각하면 클레어가 말한 순서가 맞았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지극히 이기적이면서도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돈푼과 팔찌 하나만 건네주고 잠시나마 연인과 헤어진 내가 생판 모르는 이들을 위하는 체하는 게 우스웠다.
날 보며 씁쓸하게 웃던 클레어는 입에 대려던 잔을 내려놨다. 뭔가 물어볼 게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딴 데로 샜는데 그건 왜 물어봤어?”
“어떤 거요?”
“멕시코가 핀치에 몰리면 연준이 금리인상을 멈추지 않겠냐는 거.”
“그렇게 되면 미국 달러의 매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헤지펀드들의 다른 선택지는 뭐가 될지 궁금하네요.”
클레어는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감이 잘 안 오네? 이걸 마셔서 둔해진 것 같기도 하고.”
멋쩍게 웃으며 술잔을 찰랑찰랑 흔드는 걸 보니 그녀도 아직은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멕시코보다 더 큰 판이 다가오는 것을.
***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서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는 문을 열며 들어오는 클레어를 맞았다.
“컨디션은 어때요?”
“보시다시피. 핫 소스 넣고 치킨수프 먹어서 괜찮아.”
“저도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으로 해장했어요.”
클레어, 정말 대단했다. 어제 우리 넷이서 마신 술만 위스키 여섯 병이었는데 오피스 룩과 풀 메이크업으로 완전무장하고 온 걸 보면 보통 강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보며 웃음으로 감탄을 숨기던 중 옆에 있는 선해철을 힐끗 쳐다봤다. 어제의 숙취 때문인지 회사에 나오자마자 물만 찾고 있었다.
“삼촌은 영 안 좋은 것 같네요. 오늘 아침도 겨우겨우 일어났는데.”
탁!
“나 아직 쌩쌩하거든? 물 마시는 걸로 몰아붙이면 곤란해?”
빈 컵을 내려놓으며 선해철이 발끈했지만 박태진은 옆에서 그를 보며 코웃음소리를 냈다.
“쌩쌩하시긴요, 형님. 도련님이 안 깨워줬으면 일어나지도 못하셨을 거면서. 도련님이 끓인 라면은 국물까지 뺏어 드셨잖습니까?”
“너까지 왜 이래? 쪽 팔리게. 보호자라고 편 들기냐?”
“전 도련님의 수행비서니까요, 흐흐.”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고 나오려던 웃음이 클레어 때문에 쑥 내려갔다.
“태진 씨! 썬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조니도 너무해! 아버지 친구한테 그래도 돼?”
얼굴까지 붉히며 나와 박태진에게 따지는 그녀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고개를 갸웃하며 번갈아보자 선해철과 클레어는 어느 새 표정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하거나 딴 곳을 쳐다봤다. 두 사람 관계가 꽤 돈독한 줄은 알았지만 그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캐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탐정놀이는 멈춰야 했다. 틀어놓은 TV에서 나온 뉴스 때문이었다.
[현지 시각 오전 9시에 멕시코 중앙은행과 재무부에서는 달러당 3.4페소였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선언했습니다. 이번 조치는 멕시코에서의 외자 이탈을 막으려는 것으로···.]
숙취가 싹 가셨다. 멕시코의 변동환율제 선언은 오는 12월 20일에나 일어날 예정인데 보름 더 빨리 터질 줄이야···.
뒷목덜미가 싸늘해졌다.
지금부터 변동환율이 시작되면 목표 수익의 최소 두 배는 먹을 수 있다. 그 기쁨보다도 내 행보의 크기가 커질수록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게 피부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다음 도박판을 앞두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와중에도 뉴스를 보고 있던 세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터졌다! 터졌어!”
“오 마이 갓! 조니!”
“축하합니다, 도련님!”
세 사람이 환호하는 것 못지않게 문밖에서도 ‘Jesus christ!’, ‘Holy fuck!’, ‘goddy god!’ 따위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수익만 놓고 보면 축하받을만하고 축하할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달러당 페소 환율이 폭등하면 우리가 빌린 페소화를 갚는 데 필요한 달러가 줄어들면서 수익이 늘어난다.
바깥 공기가 여전히 달아올라 있을 때 이 방의 기류는 서서히 차분해지고 있었다.
“이만하면 자금은 충분히 마련됐다. 세콰이어 캐피털도 우리한테는 못 당할 거다, 흐흐.”
“믿기지가 않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이 바닥이 그래요, 태진 씨. 월가에서 괜히 환투기에 매달리는 게 아니랍니다? 후훗!”
선해철과 박태진, 클레어 모두 크게 만족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로비로 나가서 얘기해요. 다른 사람들 생각도 들어봐요.”
그들과 함께 로비로 나가자 방방 뛰던 직원들은 모두들 우릴 향해 박수를 보내줬다.
“축하합니다, 조니!”
“못해도 5억, 아니 10억 달러도 넘을 겁니다!”
“다들 애썼어요. 믿어줘서 고마워요.”
곁에 몰려든 직원들과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준 뒤, 두 손을 들어 위아래로 흔들며 모두를 진정시켰다.
“우리의 배팅은 분명히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입니다. 엑시트 플랜을 짜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 합니다.”
나라고 안 기쁜 게 아니다. 너무 기뻐서 다이아몬드 스탭을 밟고 싶었다.
허나, 리더는, 경영자는 더 높은 곳, 더 먼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나의 꿈, 우리의 꿈은 더 높고, 더 멀리 있으니 이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변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입을 뗐다.
“그래도···.”
레이스에서 우승한 레이서와 피트 크루를 위해 샴페인 한 병 터뜨리지 않으면 오너로서 실격인 것도 사실이다.
쿵!
말끝을 흐리던 나는 탁자를 내려쳤다.
“컴퓨터 전부 꺼요! 오늘 하루 다 제끼고 파티 합시다!”
“와아아!”
모두들 방방 뛰며 환호했다. 10억 달러가 들어올 텐데 하루 정도는 쉬어줘야지!
***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온 우리는 센트럴파크 앞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 갔다.
전화로 예약한 로열스위트룸에 들어간 나는 얼음을 채운 욕조에 양 손을 집어넣었다. 얼음으로 감싸진 수십 병의 돔 페리뇽 샴페인 중 손에 잡히는 놈들의 목을 하나씩 쥐고 거실로 왔다.
“모두들 고생했어요! 믿어줘서 고마워요!”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한 나는 병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손에 쥔 병을 흔들었다. 충분히 흔들었다 싶어서 한 손에 쥔 샴페인 글라스 받침으로 병의 이음새를 따라 병 입구를 쳤다.
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샴페인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회사 식구들과 해보고 싶었던 사브라주를 이번 생에 하게 될 줄이야!
“와아아!”
“휘이익!”
모두들 함성을 지르거나 손가락을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회사의 운명을 걸고 배팅한 도박이 지금 터진 샴페인처럼 잭팟을 터뜨렸으니 얼마나 기쁠까? 트라이엄프에서 찬밥신세였던 이들이니 오늘의 감동을 참기 힘들 것이다.
샴페인을 넘치도록 채우자 선해철이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건배사 하시죠, 오너님! 흐흐!”
“네, 삼촌!”
씩 웃은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잔을 높이 들었다.
“지금부터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진정한 시작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월가의 표준이 될 겁니다! 더 웨이!”
“스탠더드!”
쨍!
내 선창에 맞춰 구호를 외친 멤버들은 잔을 부딪치고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입가로 흘러내리든 말든 쭉쭉 샴페인을 비우고 잔을 뒤집어 머리 위에서 털자 모두들 낄낄 웃었다.
“동양의 주도입니까, 조니?”
“오늘 같은 날은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비워야죠, 하하! 쟁여놓은 술 비울 때까진 다들 못 나갑니다?”
우리는 샴페인을 마시며 탁자 위에 놓인 비스킷에 캐비어를 발라먹거나 토마토 모짜렐라 카프레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먹었다. 컴퓨터 앞에서 커피나 핫도그쪼가리로 끼니를 때우던 평소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오전의 파티였다.
다들 얼큰히 취해서 침대나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자고 있을 무렵, 선해철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카야, 잠깐 얘기할까?”
“네, 삼촌.”
발코니로 나간 우리는 난간에 기댄 채 센트럴 파크를 바라봤다. 한겨울의 냉기가 스며들었지만 술기운을 식혀주는 게 썩 나쁘진 않았다.
“너, 저 센트럴파크가 왜 생겼는지 알아?”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 150년 전 이야기라지만 뉴욕에서 가장 비싼 땅인 맨해튼 한복판에 100만 평이나 되는 땅을 공원으로 만든 게 누구 생각일까? 한국이었다면 온갖 건물을 집어넣었을 텐데.
선해철은 들고 나온 샴페인을 홀짝이고 센트럴 파크를 보며 말했다.
“맨해튼 개발 맡은 건축가한테 누가 그랬다더라. 저 자리에 공원이 없으면 5년 뒤에 똑같은 규모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거라고.”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차가운 마천루와 회색빛 건물들로 가득한 자본주의의 정글, 맨해튼.
그런 맨해튼에 저런 공원 하나 없다면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들 모두 몸이든 마음이든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선해철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오늘 판단은 잘한 거야. 저 친구들도 긴장하고 있었을 텐데 한 번 더 몰아붙였으면 얼마 못 버티고 떠났을 거다.”
“고마워요, 삼촌.”
그 말 한 마디가 뭐라고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이제야 헨리 로이스 그 남자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뭔지 깨달음을 얻어서일까? 아니면, 선해철의 칭찬 때문일까?
기분 좋게 웃으며 샴페인을 홀짝이던 중 선해철이 운을 뗐다.
“회장님 숙제, 어떡할 거냐?”
“엔화 배팅이요?”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네 실력은 충분히 입증됐어.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우리는 돈을 땄어도 이 동네하고 워싱턴 D.C는 전부 뒤집어졌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 멕시코에는 미국 자본이 많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래. 내 직감이긴 한데··· 연준 금리인상도 머지않아 멈출 것 같다. 멕시코에서 1달러라도 더 건지려면 더 이상은 어려울 거야.”
무덤덤하게 말하는 선해철 때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전생에도 연방준비이사회는 선해철이 짚은 문제를 우려해서 금리인상을 멈췄다. 직감이라도 앞날을 내다본 그가 새롭게 보이고 있었다.
“멕시코 환투기까지 해냈으니 네 의견을 따르마. 앞으로도 잘해보자, 하하.”
소탈하게 웃는 그를 보니 기운이 났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앞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