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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4화 (14/229)

14화. 3rd. 행동 개시 (7)

며칠 뒤.

이성민의 돈이 입금된 걸 확인한 선해철은 뉴욕으로 넘어갔다.

“후우, 부녀지간 찢어놓는 것 같아서 걸리긴 한데···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게 나을 테니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그는 트라이엄프 캐피털 본사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걷던 그는 모니터 10여 대가 설치된 방에 들어가 그 방을 쓰는 여자와 커피를 마셨다.

이 방의 주인인 그 여자의 책상 위에는 클레어 로렌스(Clare Lawrence)라고 유려하게 새겨진 크리스털 명패가 놓여 있었다.

“어때, 클레어?”

“삼천칠백만 달러라··· 아담하네요, 후훗.”

서류를 내려놓은 클레어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며 싱긋 웃었지만 선해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아쉬울 게 없는 집안 출신인데 말이야.”

“집안이 꽤 유복하나보네요?”

“현금 많기로는 한국에서 첫손 꼽히는 집안 장손이니까. 나도 그 아이 할아버지 돈으로 대학 가고 유학 와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말 다했지.”

그 이상으로 선해철은 이대수와 아주 깊은 관계였지만 자신의 부사수로 시작해서 애인까지 되어 10여 년째 연을 맺고 있는 클레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클레어는 그런 선해철의 속도 모르고 눈을 반짝였다.

“그 분, 꽤 대단한 분인가 보네요?”

“대단한 분이지. 아무튼, 할 거지? 우리 회사 맘에 안 들어 했잖아? 다들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다고.”

“하나 더 있죠. 대주주들끼리 회사 놓고 으르렁거리는 거.”

클레어는 요즘 들어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보수적인 문화와 대주주 가문들 간의 암투에 숨이 막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선해철의 제안, 정확히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투자회사 설립계획서는 산소호흡기가 따로 없었다.

회사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던 클레어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합류, 하죠.”

“오케이. 그런데···.”

잠시 멈칫했던 선해철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헨리는 어떡할 거야?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허락이 필요할 텐데··· 괜찮겠어?”

“헨리와 10년은 훨씬 더 된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당연히 많이 서운해 하시겠죠.”

클레어가 정곡을 찌르자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긴 하지. 최대주주 가문의 수장인데도 자기 딸을 딸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데 내가 빼낸 걸 알면 많이 섭섭하겠지.”

두 사람이 말하는 헨리 로이스(Henry Royce)는 트라이엄프 캐피털 주식의 17퍼센트를 쥐고 있는 최대 주주 가문인 로이스 가문의 가주였다.

그런 헨리의 딸임에도 클레어를 선해철이 빼내려는 건 그녀가 숨이 막히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클레어는 선해철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당신이 날 생각해주니까 이런 기회를 준 거잖아요. 고마워요, 썬.”

클레어는 선해철과 헤어진 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10분 뒤에 뵀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30분 뒤에 미팅이 있으니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헨리. 10분 뒤에 뵐게요.”

짤막한 통화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헨리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헨리.”

문을 닫고 인사를 건넨 클레어는 책상 앞에 앉은, 금발머리에 모노클을 낀 헨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는 사자와 학이 대각선으로 두 마리씩 그려진 채 ‘Ich Bau Auf Gott’라는 표어가 적힌 문장이 수놓인 휘장이 걸려있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휘장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 휘장 때문에 책상 위에 자신의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아닌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클레어와 달리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는 밝은 미소를 띤 채 클레어에게 다가왔다.

“어서 와라, 클레어.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는데 얼굴 보는 게 이리 뜸해서야···.”

“죄송합니다, 헨리.”

두 팔을 벌려 포옹하려던 헨리는 자신과 달리 고개를 숙인 클레어를 보고는 팔을 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죄송하긴, 자리에 앉아라.”

“네.”

소파에 앉은 헨리는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홍차 두 잔. 골든팁스로.”

한 잔에 수십 달러가 훨씬 넘는 홍차 두 잔이 그의 말 한 마디에 탁자에 놓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마셔도 좋네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이번에 들인 건···.”

찻잔을 반쯤 비울 때까지 차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받던 두 사람 중에서 화제를 바꾼 건 헨리였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거냐, 클레어?”

“트라이엄프 캐피털, 그만 두겠습니다.”

텅.

헨리의 손에서 본차이나 찻잔이 떨어졌다. 찻잔에서 쏟아진 적갈색의 홍차가 바닥에 깔린 페르시안 카펫에 스며들었다.

“크, 클레어···?”

헨리의 모노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클레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헨리. 더 이상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제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할 일이 없다니! 앞으로 넌 이 방을···!”

“제 인생은 제 겁니다, 헨리.”

헨리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클레어를 뜯어말렸지만 자신이 말릴수록 더 굳어지는 클레어의 눈빛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열렬히 사랑해서 체온까지 나눴던 유일한 여자와 똑같지 않은가?

“더 말해봐야 소용없겠구나. 어디로 갈 거냐?”

“썬이 소개해준 회사예요. 걱정 마세요.”

“썬?”

헨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20년 가까이 이 회사에서 자신과 호흡을 맞춰온 둘도 없는 친구의 이름이 나오다니?

“네. 새로 세울 회사인데 대표 자리를 주겠다고 하네요.”

클레어의 대답을 듣고 헨리가 눈을 찌푸렸다. 언짢다기보다는 짐작되는 게 있어서였다.

“그만 두겠다고 한 친구들도 그 회사에 들어가는 거냐? 그 친구들도 다른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그건 모르겠지만 이 회사 내에서 우리의 리미트는 정해져있으니 그 편이 나을 수도 있겠죠.”

클레어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헨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표를 제출한 모두 자신이 키운 루키들이지만 사내정치와 미국 상류사회의 보수적인 현실을 고려하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기 힘든 이들이 아닌가?

침울해하는 헨리를 클레어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어요. 당신을 밖에서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내 걱정 말거라, 클레어. 너희들 도움이 필요할 만큼 힘들진 않으니까. 오히려 내가 도와줄 수도 있겠지.”

“······.”

클레어를 바라보는 헨리의 얼굴에서는 어느 새 어두운 기운이 사라졌다. 마냥 자신을 보기 싫어서 떠나는 줄 알았는데 말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니 그걸로 만족했다.

“언제든 맘 바뀌면 다시 돌아오너라. 너와 그 친구들 책상은 비워놓으마.”

배려해주는 말과 달리 클레어를 바라보는 헨리의 눈빛이 안타까움으로 물들고 있었다.

***

선해철에게 해외 투자회사 설립 건을 맡겨둔 나는 박태진과 함께 대한이동통신 주식에 매달리고 있었다.

오늘까지 내 명의로 4만 주, 장하연의 명의로 8천 주를 담았다. 평단가는 주당 9만 2천 원대. 이 속도대로면 민영화가 발표될 12월까지 목표 물량을 채우고 주식담보대출과 신용매수, 미수거래로 원금의 세 배 이상 불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안주할 수 없어서 서류를 보며 내일의 주식 매수 시나리오를 점검하던 중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삼촌이다, 성민아. 지금 막 한국 돌아왔다.]

퍼스트 클래스라도 10여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면 힘이 부칠 텐데 바로 내게 와주다니?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를 부려먹는 것 같아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선해철과 함께 집에 들어온 나는 라면을 끓였다. 속을 풀어줄 국물이 땡긴다는 선해철의 하소연에 청양고추와 대파를 송송 썰어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낸 건 덤이었다.

그릇에 담을 필요도 없다고 해서 냄비 째로 내주자 선해철은 그 뜨거운 라면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며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했다.

“밥도 다 먹었고··· 자.”

10분도 안 돼서 텅 빈 냄비를 내려놓은 선해철은 물을 마신 뒤 가방에서 꺼낸 서류봉투를 내게 건넸다.

“뭐예요?”

“회사 구성 멤버들. 확인해 봐.”

봉투에서 서류를 꺼낸 나는 내 회사에 합류하기로 한 사람들의 신상정보를 확인했다.

“이만하면 됐네요. 그런데···.”

서류를 내려놓은 나는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제가 부탁했지만 막 빼내도 돼요? 나중에 보복당할 것 같은데.”

“걱정 마라. 그 친구들 빠진다고 안 돌아갈 트라이엄프가 아니야. 정 불안하면 나중에 보은해도 되는 거고.”

“보은이요?”

“저번에 얘기했잖아. 나한테 보은하지 말고 우리 회사에 보은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급수 높아지면, 하하.”

트라이엄프 캐피털에 보은하라는 선해철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나쁘진 않을 테니 빨리 내 급수를 올려야겠다.

***

얼마 뒤.

“네, 대표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트라이엄프 캐피털이요?”

사무실에서 결재서류를 보던 고승주는 해동종합금융의 조영찬 대표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도 방금 보고 받았네. 해철이가 거기 있는 건 아는데 3백억이 애들 코 묻은 돈은 아니잖나? 성민이가 이번에 한 건 했어도 회장님 아시면 경칠까봐 자네한테 먼저 말했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확인해보고 연락드릴 테니 회장님께는 보고를 늦춰주십시오.”

해동그룹의 실세이기도 하지만 고승주는 사태를 먼저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아버지처럼 따르는 이대수와 친조카 이상으로 아끼는 이성민의 관계가 또다시 벌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알았네.]

조영찬과의 통화를 마친 고승주는 새 전화번호를 누른 뒤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네, 트라임프 캐피털 한국 법인···.]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기에 고승주는 선해철의 인사를 끊었다.

“나다, 해철아.”

[아이고,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전에 조 대표님 연락받았다. 성민이 해동종금 계좌에서 너희 회사로 3백억이 들어갔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냐?”

[성민이 돈 털어먹을까 의심하는 건 아니죠?]

선해철의 딱딱한 질문에 고승주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갑자기 목돈이 빠져나가서 그래. 자그마치 3백억이다. 나나 조 대표님도 이유를 알아야 회장님께 말씀드릴 게 생기지 않겠냐?”

[성민이 그놈, 졸업한 뒤에 미국서 금융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오자 고승주의 눈이 커졌다.

“금융? 미국?”

[예. 종이장사 배우기에 한국은 딱딱하잖습니까? 성민이가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알아봐달라며 수업료라고 건네준 겁니다, 하하.]

껄껄 웃는 선해철의 목소리에 고승주의 표정이 풀렸다. 선해철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잘 알아서였다.

가장 큰 걱정을 푼 고승주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투자할 회사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습니다. 조카 같은 녀석이 일 배울 곳이라도 원금은 까먹을 수 없으니 신중히 골라야지 않겠습니까? 엄한 놈들한테 슈킹 당하는 거 볼 수도 없고요.]

“···알았다. 회사 정하는 대로 알려줘. 대표님하고 회장님께는 잘 말씀드리마.”

[예,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통화를 마친 고승주는 조영찬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실을 알려줬다.

“···그러니 걱정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대표님.”

[다행이구먼. 해철이 그놈이 옆에서 봐주면 돈 날릴 일은 없겠지.]

조영찬 또한 선해철이 이대수가 직접 고른 인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20대 대학생 시절의 그에게 돈 다루는 법을 가르쳐줬던 사제지간이기에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럼, 회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수고하게.]

전화를 끊은 고승주는 다시 이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승주입니다, 회장님.”

[무슨 일이냐, 승주야?]

“오늘 아침에 조 대표님 전화를 받았는데···.”

방금 확인한 내용을 보고하자 이대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놈 참 대차구먼. 수업료 한 번 두둑이 냈어.]

“그러긴 합니다만 지금껏 얌전하던 아이가 뛰어다니니 정신이 없습니다, 하하.”

[정신없을 게 뭐가 있나? 해철이가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돈 까먹을 걱정은 없지 않겠나?]

“그렇지요, 하하.”

이대수의 말에 고승주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선해철은 해동그룹에 발 하나쯤 담가둔 사람이 아닌가? 아주 깊숙이.

[성민이 그대로 놔두고 지켜봐. 돈을 지키기만 할지, 불릴 수 있는지 보고 싶구만, 으허허.]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고승주는 이성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나다, 성민아. 학교에서 잠깐 볼까?”

***

학생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탁자에 앉은 나는 맞은편에 앉은 고승주의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백부님?”

“별일 없으면 사내식당에서 직원들하고 먹으니까 괜찮아. 안 그러냐, 태진아?”

“그래도 사람들 이목이 있는데···.”

“됐다니까 그러네. 나도 이 학교 졸업장 땄어.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뭐.”

이 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우리 둘의 직속선배이기에 고승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껄껄 웃으며 식판에 담겨진 바지락 미역국을 떠먹었다.

“간밤에 다른 그룹 비서실장들하고 거하게 마셨는데 시원하구나, 하하.”

그 순간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나와 고승주, 박태진을 보며 웅성거렸다.

“저 아저씨들 누구지?”

“비서실장? 어디?”

덕분에 나와 박태진은 태연하게 밥을 먹는 고승주와 달리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밥맛도 모르게 밥을 먹고 식당을 나온 우리는 학교 바깥에 있는 조용한 카페로 가서 주문한 커피를 마셨다.

“오늘 아침에 조 대표님 전화 받았다. 얼마 전에 트라이엄프 캐피털에 3백억 쐈다면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소문이 빨랐다. 해동종금에 예치된 돈을 쏘자마자 소식이 들어가다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고승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국내 투자도 투자지만 월가에서 실전 트레이닝을 받고 싶어서요. 돈도 불리고요.”

“그 녀석 참. 까먹지나 말거라, 하하.”

고승주는 껄껄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나도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커피를 마셨지만 내가 미국에 보낸 3백억 원은 백 배, 천 배, 아니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

그 돈을 바탕으로 해동그룹을 키우고 신성그룹을 집어삼키면 고승주는 날 어떻게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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