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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화 (1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화

4. 감정사의 고양이(2)

세 개의 푸른 보석은 크기나 모양, 영롱한 빛까지 모두 똑같아 보였다. 그나저나 왜 내가 이것들 중 한 알을 골라내야 하는 거지?

재인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앞에 앉은 아실리의 기대에 찬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어쨌든 이 고양이가 쓰러져 있던 날 구한 듯하니 야바위든 뭐든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뭐.

-아무거나 고르지 말고 잘 봐. 어쩌면 네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대충 하나 고르려고 손을 내밀던 재인은 아실리의 말에 찔끔해서 손을 거둬들이고 진지하게 보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 보석 중 한 알의 푸른빛이 점점 강해지다가 조금씩 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건가? 이건가 보다.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금빛을 발하는 보석이 재인의 눈을 끌어당겼다. 재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 보석을 쥐었다.

“아!”

차가울 것처럼 보였던 보석은 따뜻했고 재인이 보석을 손에 쥐자마자 물처럼 재인의 손바닥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란 재인이 손을 털었지만 보석은 착 달라붙은 채 서서히 그의 손안으로 스며들었다.

* * *

“오, 반갑네, 젊은 친구!”

보석이 재인의 몸 안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손바닥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을 때, 따뜻하고 깊은 목소리가 재인을 반겼다.

벽난로 위 노인의 초상화가 입을 열어 재인에게 말을 걸더니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늙으니 몸이 말을 안 듣는구먼. 게다가 너무 오래 움직이질 않아서 뼈마디가 다 굳었지 뭔가.”

노인은 어깨를 비틀면서 액자 밖으로 빠져나와 기다란 로브 자락을 무릎 아래까지 걷어 올리더니 벽난로 위에서 영차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니, 할아버지, 조심하세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움직이는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던 재인은 얼른 다가가서 노인을 부축했다.

나이가 몇인지도 모를 노인이 벽난로 위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오, 상냥한 젊은이구먼.”

노인은 웃으면서 재인의 어깨를 두드렸고 재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노인의 팔을 부축했던 손을 얼른 놓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또 꿈을 꾸는 건가?

“꿈이라면 꿈일 수도 있지. 자, 나는 세시온 다미에르라는 사람일세. 우리 아실리는 벌써 만나 봤겠지?”

아실리는 아까 제이든을 바라보던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실리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굳어 있었다.

등불 아래 조그만 금가루처럼 떠 있는 공기 중의 먼지도, 벽난로 옆에 서 있는 괘종시계의 초침이나 진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 아실리에게 다가가 애정을 듬뿍 담은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재인을 향했다.

“허! 자네 여기 사람이 아니로군,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만난 사람이 차원을 넘어온 이세계인이라니, 정말 놀랍군.”

길게 기른 은발과 은빛 수염, 긴 로브, 노인은 마치 반지를 찾으러 다니는 모 영화에 나오는 노마법사를 연상하게 하는 외양이었다. 그보다는 좀 젊어 보였지만.

“아실리의 가족이라는 마법사님이신가요? 아니, 감정사였던가요?”

“그렇다네.”

세시온 다미에르는 은빛 눈썹 아래에서 생생하게 빛나는 파란 눈으로 재인을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어째서 그림 속에 계셨어요?”

“아, 아실리가 말하지 않았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이웃에 마실이라도 갔다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난 이미 죽었다네. 삼십 년쯤 됐으려나?”

“…….”

“자네가 지금 보고 있는 나는 실체가 아니야. 그 보석에 담아둔 영체 같은 거지. 그 보석을 알아보고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지금의 내가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네. 물론 그전에 이 집을 알아봐야 하지만.”

노인은 재인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말했다.

“전에 한 번 이 집을 발견하고 두 개의 문 중 올바른 문을 통과해 거실에 들어오는 것까지 성공한 사람이 있었지. 정말 뛰어난 감정사의 재능을 가진 이였어. 하지만 보석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날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네. 이제야 드디어 보석을 흡수한 사람이 나왔는데 이계인이라니, 나도 좀 당황스럽군.”

“그…… 저보다 먼저 왔었다는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아, 우리 아실리가 기억을 지우고 돌려보냈지.”

재인은 고양이 인형처럼 굳어 있는 아실리를 힐끔 보았다.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는 고양이였어. 마법사의 고양이는 마법도 쓰는구나.

“저, 그럼 저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혹시 저를 돌려보내 주실 수도 있을지?”

재인이 묻자 다미에르는 잠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웃거렸다.

“글쎄, 애당초 이 집과 보석을 남겨둔 이유는 혹시 인연이 닿는 후인이 찾아올 경우를 대비한 안배인데, 이계인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 자네의 기억을 지울 수는 있지만 집으로 돌려보내는 방법까지는…… 이 안배를 마련해 준 후원자에게 물어봐야겠는데 잠깐 손 좀 줘보겠나?”

재인의 손을 잡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다미에르가 마침내 눈을 떴다.

“음, 다른 차원의 누군가가 자네를 이쪽으로 보낸 듯한데, 돌아가려면 자네 고향에서 온 매개체를 찾아야 하는 모양이야. 옛 유물인가 본데?”

재인은 자신이 의식을 잃을 때 박물관이 풍경 속으로 흔들리듯 사라지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걸 말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주 드물지만 오래전 옛날에도 한두 번씩 차원을 건너온 물건들이 있었거든. 자네 고향에서 건너온 그 유물들 중에 자네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매개체가 있네. 어느 것인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고.”

재인은 막막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찾아서 집에 돌아간단 말인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다미에르가 말을 툭 던졌다.

“자네, 감정사가 되어보지 않겠나?”

“예?”

“아까도 말했지만 이 집과 보석은 원래 내 후인이 될 감정사를 찾기 위한 안배라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후인을 두지 못했고 끝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안배가 마련된 거지. 자네는 이계인이라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자네만 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또 나타날지 모르겠군.”

“…….”

“자네가 집에 돌아갈 매개체를 찾기 위해서도 감정사가 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래야 많은 유물을 접할 수 있으니 말야.”

노인은 열성적으로 말을 계속했다.

“자네를 우리 차원으로 보낸 누군가가 자네에게 그 능력을 선물한 것 같은데, 두 개의 문과 세 개의 보석 중 진짜를 알아본 걸 보면 자네는 이미 물건의 진위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거야. 시험으로 말하자면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거지. 감정사가 되기 위해 자네가 해야 할 일은 풀이만 공부하면 되는 셈이지.”

“…….”

“겸사겸사 내가 끝내지 못한 일도 마무리 지어주면 좋고.”

“그게 뭔데요?”

“나는 살아 있을 때 내 위대한 후원자에게 열두 개의 유물을 찾는 임무를 받았었네. 여덟 개를 찾았는데 아직 네 개가 남았지. 자네가 그 네 개를 마저 찾아주면 좋겠군.”

재인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집에 가려면 어차피 한국에서 온 유물을 찾아야 하고, 유물을 찾기 위해서는 감정사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감정사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나 화가 지망생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박물관에 들락거렸기 때문에 감정사가 낯설지는 않았다.

“자네가 내 뒤를 이어 감정사가 되겠다고 하면 내가 좀 도와주지. 여기서 생활하는 게 힘들지 않도록 우리 세계에 대한 기본 정보도 입력시켜 주고 신분도 만들어주겠네. 자금도 확보해 주고.”

노인은 파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생전에 모아놓은 재산이 제법 된다네.”

“재산보다는…….”

재인은 퍼뜩 머리를 쳐들고 물었다.

“이 차원에 대한 정보를 저한테 입력시켜 줄 수 있을 정도라면 감정사의 능력이나 정보도 한 번에 저한테 이전시켜 주실 순 없나요?”

“아니, 아니, 그건 안 된다네.”

노인은 웃었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야. 감정을 위한 공부는 자네 스스로 해야 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그렇지, 자네의 학습 속도가 일반적인 사람보다 두세 배 빨리 진행될 수 있을 정도는 도와줄 수 있겠네.”

“예…….”

그렇다면 대체 언제 집에 갈 수 있단 말인가? 우선 감정사가 되는 공부부터 해야 한다니! 재인은 머리를 떨구었다.

재인이 시무룩해진 것을 본 노인이 달래듯 말했다.

“우선은 내 서재의 책들로만 공부해도 3급까지는 금방 통과할 걸세. 내가 감정한 사례집도 있고 역사서나 카이엔 문화에 대한 책도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으니까.”

서재라면 거실 벽에 있던 책장 말인가? 백여 권 남짓해 보이던데.

“아니, 아니야, 거기 말고 이층에 서재와 침실이 있다네. 이층 서재에 감정 공부용 책과 자료가 따로 있지.”

손을 저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아실리 쪽을 바라보았다.

“혼자 공부해도 충분할 만큼 자료가 잘 갖춰져 있지만, 어쩐지 아실리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니 아실리가 도와준다면 훨씬 빨리 준비가 될 걸세.”

“…….”

“지난번에 왔던 이는 감정사로서의 재능은 자네와 비슷할 정도로 출중했지만 아실리와 말이 통하지는 않았다네.”

그는 부드럽게 아실리의 머리를 만졌다.

“우리 아실리가 고양이라고 가볍게 보지 말게나. 아실리는 나와 근 백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했다네. 내가 처음 감정 공부를 시작했던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세상에서 유일한 0급 감정사로 생을 다할 때까지 내 옆에 있었어. 사람 말을 못 할 뿐 웬만한 2급 감정사 몫은 할 걸세.”

“아실리가 그렇게 오래 사는 건 마법 때문인가요?”

“그런 셈이지.”

노인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머리를 숙였다.

“사실 나 때문이야. 아실리가 처음 고양이로서의 수명을 다했을 때 나는 아실리를 차마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나를 축복해 준 후원자에게 빌었지. 내 수명을 깎아서라도 아실리의 수명을 늘려 달라고.”

“…….”

“그 이후 아실리는 수명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고양이 이상의 존재가 되었는데, 내가 떠난 후 이 애가 이렇게 남게 될 줄은 몰랐어. 다른 좋은 주인을 찾아갔으면 했는데 아실리는 이 집을 떠나지 않았어.”

그는 애틋한 눈빛으로 아실리를 보면서 말했다.

“아실리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또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자네가 아실리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니 아실리와 함께 지내주면 정말 좋겠는데.”

“…….”

“네 개의 유물을 더 모으면 자네의 임무는 끝나네. 그 후는 자유야. 선택은 자네의 몫이니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이 정해지면 초상화에 대고 말하게. 그리고 이건 선물일세.”

노인은 양손으로 재인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더니 사라졌다.

동시에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인의 관자놀이에서 갑자기 정보가 밀려들어 왔다. 카이엔 대륙에 대한 기본 상식이었다.

아실리가 꿈에서 깬 듯 머리를 움직이면서 앞발로 코를 문질렀다. 재인은 벽난로 위의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세시온 다미에르. 역사상 최고의 감정사이자 마법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랑하는 고양이와 이계에서 온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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