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화
4. 감정사의 고양이(1)
재인이 주춤주춤 일어나 앉자 그의 이마에서 앞발을 내린 고양이는 조금 물러나서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머리가 좀 아팠지만 전처럼 깨질 듯한 두통은 아니었다. 재인은 축축한 이마를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나한테 말을 걸었던 거 같은데? 머리에 물수건도 놓아준 것 같고.
“야아옹.”
고양이가 궁금한 듯이 울면서 초록색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온 애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재인은 놀란 눈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사람의 말소리처럼 그의 머릿속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 자꾸 두리번거린담. 여기에 저랑 나랑 둘밖에 없는데.
조그맣게 미야옹 종알거리는 고양이를 보면서 재인은 생각했다. 이거 꿈인가? 아무래도 고양이의 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내가 꿈에서 덜 깼나? 손등을 꼬집어 보니까 아프다. 꿈이 아닌 건가?
-왜 저러지? 손등은 왜 꼬집는 거람?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낼 때마다 말소리가 전해져 온다. 재인은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고양이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야옹아, 혹시 네가 나한테 말한 거니?”
고양이가 깜짝 놀란 듯이 팔짝 뛰더니 등을 동그랗게 구부리면서 옆으로 두어 걸음 몸을 움직였다.
“냐아앙!”
-너, 내 말이 들려?
설마 했는데 정말 고양이의 말이 들렸다. 재인과 고양이는 둘 다 놀라서 잠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 이거 진짠가 보네! 기가 막혀서 머리를 북북 긁은 재인이 먼저 물었다.
“아까 누가 나한테 괜찮으냐고 물었는데 그거 너였니?”
-응, 그렇지만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닌데.
진짜 고양이가 말을 하는 거였네.
재인은 당혹스러운 채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은 해송박물관의 뒤뜰이었는데 지금은 낯선 동굴 속에 있었다. 입구 바로 옆에 누워 있었던지 열린 동굴 입구 바깥쪽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보였다.
아까부터 어디선가 들려오던 물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돌아보니 바로 옆 천장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면서 아래의 바위 위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거기서 또 작은 물길이 나서 동굴 안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무척 말랐다.
재인은 무심코 손을 모아서 웅덩이의 물을 떠 입에 가져갔다.
“냐아옹!”
-아, 잠깐만.
고양이가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맑은 물이긴 한데 지금은 그 웅덩이 물 먹지 말고 떨어지는 물 받아서 마셔.
“?”
재인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고양이의 말대로 손에 뜬 물을 버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으면서 물었다.
“왜?”
고양이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젖은 앞발을 들어 보였다.
-너 깨우려고 내가 발을 담갔거든.
아, 그래서 내 이마가 이렇게 축축했구나. 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새로 받은 물을 마셨다.
겨우 두어 모금 되는 양이지만 얼음처럼 차고 시원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 살 것 같다. 몽롱한 상태였던 정신도 점점 제자리를 찾았다.
재인은 앞에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은회색의 부드러운 털, 짙은 회색의 줄무늬, 초록색 눈과 벽돌색의 오뚝한 코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나, 눈이 보인다.
흐릿한 덩어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색상까지도. 어떻게 된 걸까? 내 시력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그런데, 넌 누구니?
청년과 고양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양이가 꼬리를 몸 앞쪽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 먼저 말하라는 것 같아서 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긴 어디야?”
-카이엔 대륙 중부, 아스토시엔 산의 두 번째 봉우리, 숨겨진 계곡. 그리고 내 이름은 아실리, 아실리 다미에르라고 해.
고양이는 품위 있게 대답하면서 머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재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양이의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봤다.
소설이나 만화에서 말하는 고양이를 못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똑똑하고 품위 있는 고양이는 처음 보겠네. 보통 말하는 고양이라치면 뭐 난 고양이다옹, 넌 누구냥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닌가?
고양이가 자기 차례라는 듯이 냐옹거렸다.
-넌 누구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보통 사람은 여기 못 들어오는데.
“나는…… 권재인이라고 해. 서울에서 왔어.”
고양이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권재인…… 특이한 이름이네. 서울? 거긴 또 어디지? 카이엔 대륙에 그런 이름의 마을이 있었나?
“아 그게 어디냐면…….”
청년과 고양이는 마주 앉아서 더듬더듬 서로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눈 끝에 아실리가 단정했다.
-그러니까 넌 차원을 넘어온 거구나.
재인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옛날에 세시온이…… 내 주인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어. 멀리 동방 대륙의 귀족 가문 이야긴데, 조상이 차원을 넘어온 사람이라는 전설이 있었대.
고양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재인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옷이 좀 낯설긴 하지만 그냥 봐서는 여기 사람이랑 특별히 다른 걸 모르겠는데. 전설로만 알았는데 진짜 차원을 넘어온 사람이 있구나.
“그러니까 여기는 카이엔이라는 대륙이고, 마법이 있는 세상이고, 너는 말하는 고양이고…….”
-아냐, 아냐.
고양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 말을 하는 동물은 없어. 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은 네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응.
고양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말했다.
“내 가족이고 친구였던 세시온은 너처럼 자유롭게 나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 세시온 이후로 내 말을 알아듣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숲의 엘프는 이야기가 가능한 엘프가 있었지만.”
아, 엘프도 있는 세상이구나. 재인은 헛웃음을 웃었다. 나 진짜 판타지 세상으로 차원 이동을 했나 보네.
“여기 다른 사람은 없니? 야옹이 너 혼자는 아니지?”
당연히 사람과 함께 사는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물었는데 고양이는 의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계곡엔 아무도 없어. 애당초 여기는 낯선 사람이 못 들어오는 곳인데 네가 어떻게 여기로 이동했는지 모르겠네.
고양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쨌든 네가 여기 누워 있었던 걸 보면 인연이 있는 거겠지. 일단 일어나 봐.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우리 집에 가서 자자. 내일 사람들 사는 마을에 데려다줄게.
“고마워, 야옹아. 너 참 친절하구나.”
고양이가 너무나 사람 같아서 재인은 마치 사람에게 하듯 감사 인사를 하며 일어났는데 재인의 앞장을 서서 동굴 밖을 향하던 고양이가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아실리야. 야옹이 대신 아실리라고 불러줄래?
“그래, 고마워, 아실리.”
고양이는 갑자기 멈춰 서면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아실리? 괜찮아?”
아실리는 깊게 숨을 내쉬더니 앞발 발등으로 눈을 두어 번 비볐다.
-아냐, 괜찮아, 그냥,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랬어.
약간 목이 멘 듯한 아실리의 목소리를 들으니 재인은 왠지 마음이 아렸다.
아실리의 뒤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선 후 숲 쪽으로 잠시 걸어가자 아담한 이층 통나무집이 하나 보였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산장 같은 모양이었다.
집이 있는 걸 보니 사람도 있을 텐데 왜 아실리는 여기 사람이 없다고 했을까? 재인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잠자코 아실리를 따라갔다.
건물 앞 정면에 입구로 보이는 문이 나란히 두 개 있는 게 특이했다. 폭이 넓은 정면 계단을 올라가면서 재인은 아실리에게 물었다.
“왜 이쪽 문만 빛이 나지?”
아실리는 발을 멈추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재인을 올려다보았다.
-너, 그 문이 보여?
“그럼 안 보여? 이쪽만 파랗게 빛이 나는데?”
재인은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오른쪽 문을 가리켰다.
아실리는 머리를 숙이고 혼자 흥분한 듯 뭔가 중얼거리더니 재인이 가리킨 오른쪽 문 앞에 섰다. 열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 세계에도 자동문이 있나?
아실리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아늑하고 소박한 분위기로 꾸며진 거실이 나왔다.
자그마한 소파와 탁자, 의자 두어 개. 그리고 벽 쪽으로 책이 가득 꽂힌 책장. 그 앞에 나무 책상이 하나 있고 책상용 의자가 두 개, 맞은편 벽에는 벽난로와 전신 거울, 괘종시계가 있는 방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은발 노인의 초상화였는데 매우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고양이가 있는 집답게 스크래처가 있었는데 나무로 우아하게 조각한 틀 안에 골판지 스크래처가 들어 있는 모양이 이채로웠다.
-뭐 마실래? 물이랑 우유 있어.
“어…… 그냥 물 마실게.”
재인은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으로 아실리를 따라서 주방으로 갔다. 주방의 나무 식탁 위에 투명한 물병과 우유 주전자가 있었다. 냉장고도 없이 그냥 놓여 있는데 이거 마셔도 되나?
-마셔도 돼. 내 주인이 영구 마법을 걸어 놓은 거라서 상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아.
“마법을 걸어 놨다고? 네 주인이 마법사야?”
아실리는 머리를 들고 자부심이 엿보이는 태도로 말했다.
-세시온은 감정사야. 세계 최고의 감정사. 그렇지만 마법에도 굉장히 조예가 있었어.
아실리는 벽 쪽에 놓인 사료와 간식 그릇을 향해 머리짓을 했다.
-봐, 내 사료야. 간식도 있고 물도 있지. 먹어도 줄지 않아.
재인은 물병을 들어 옆에 있는 도자기 잔에 물을 따랐다. 병을 다시 식탁에 내려놓으니 역시 물은 전혀 줄어든 표가 나지 않았다. 이런 마법 음료를 함부로 마셔도 되려나?
-물 마시고 잠깐 이쪽으로 올래?
재인이 물잔을 든 채 아실리를 따라 거실로 나가자 아실리는 그를 소파에 앉게 했다.
-아까 오른쪽 문이 파랗게 빛난다고 했지?
“응.”
탁자 아래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물어서 꺼낸 아실리가 재인에게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꺼내 볼래?
주머니 안에는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푸른 보석 세 알이 들어 있었다.
아실리는 세 알의 보석을 앞발로 탁자 위에 도르르 굴리면서 섞어놓더니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았다.
-자, 하나만 골라 봐. 어느 게 진짜 같아?
“뭐?”
아니, 이 고양이가, 이 시점에서 나한테 웬 야바위를?